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골 3:2
여호와께서 다스리시나니 땅은 즐거워하며 허다한 섬은 기뻐할지어다
시 97:1
땅에 살면서 위의 것을 생각한다는 것이 마치 뜬구름을 잡는 일처럼 막연하고 어려울 것 같으나,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골 3:2).” 뒤이어 나오는 말씀에서 그럴 수 있는 이유와 능력을 깨닫게 된다.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3).” 이 땅을 사는 데 있어 나는 죽었고 나는 감추어졌다? 고로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라는,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 이와 같은 고백이면 그 어떤 것도 우리를 붙들어둘 수 없을 테니. 산다는 게 다들 참 번잡스럽고 고단하기 이를 데 없으나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들이 가깝기 전에…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영은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기억하라(전 12:1, 7).” 성경에서의 기억은 우리 마음에서 중요한 것을 의미한다. 기억은 하나님의 본성으로 우리를 향한 용서와 구원과 의로운 삶을 이루게 한다. “이 지식이 내게 너무 기이하니 높아서 내가 능히 미치지 못하나이다(시 139:6).” 그리하여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심히 기묘하심이라 주께서 하시는 일이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14).”
실제 우리 뇌의 어딘가에 기억이 저장되는지, 심장과 폐와 더불어 가장 복잡한 신체기관의 하나로 꼽히는 뇌는 다른 것과 달리 대체가 불가능하다. 뇌는 총 130억 개 이상의 신경세포로 구성되었는데 각기 신경세포 하나마다 5천개의 또 다른 신경들과 연결되어 있고 어떤 것은 5만개의 신경세포와 연결되어 있어, 이는 은하계의 별들보다 많은 숫자라고 한다. 우리의 모든 신체기관은 뇌에 정보를 제공하고 뇌는 이를 수집하여 이를 저장하는데, 가령 통증을 느끼는 감각만도 4백만 개라고 한다. 만지고 누르고 주무르며 느끼는데 사용되는 세포가 50만개이고, 온도를 감지하는 것도 20만개의 기관이 관장한다고 한다. 이에 눈, 코, 혀 등까지 합치면 그 숫자는 상상을 초월한다. 고작 1.4킬로그램 무게인 뇌의 역할이다. 그러니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심히 기묘하심이라.” 하는 시인의 고백이 헛된가? “주께서 하시는 일이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 이를 알 수 있는 게 우리 영혼의 일이었다(14).
청년의 때, 아직 사리분별이 되고 판단이 가능하다고 여길 때에 창조를 기억하라는 것! 우리 사람은 하나님보다 조금 못한 존재로 지음을 받은,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살아가는 존재였다. 이를 망각할 때 그 놀라운 감각기관에는 온갖 서러움과 원망과 저주만 가득하게 차는 것이었으니, “아직도 너희가 중심에 악을 행하며 땅에서 너희 손으로 폭력을 달아 주는도다(시 58:2).” 설교원고를 작성하기 위해 본문을 살피다 우리에게 두신 이 놀라운 사실 앞에 기겁을 했다. 감추고 싶은 기억과 드러내어 말하고 싶은 기억을 동시에 가지고 사는 데 따른, 성령께서는 우리의 내면 깊숙이에 있는 탄식과 절규를 들으신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롬 8:26-27).” 마음을 살피신다 함은 우리의 기억을 두루 돌아보신다는 것인데, 말할 수 없는 기억으로 우리의 탄식을 어찌 모르실까?
일련의 상황을 마주하다보면 저마다 말할 수 없는 것들로 신음하는 것을 본다. 여태 누구보다 잘 알고 살았다고 자부했는데, 새삼 듣게 되는 누구의 말이나 그로 인하여 내 안에 깊숙이 들어가 있던 어떤 기억에 대하여, 성령께서만이 우리의 내적치유를 지도하실 수 있다. 서로의 친분으로가 아니었다. 사람의 친밀함은 겉과 겉의 일이어서 그 속의 내밀한 기억들까지 알 수는 없다. 이에 오늘 본문은 “여호와를 사랑하는 너희여 악을 미워하라 그가 그의 성도의 영혼을 보전하사 악인의 손에서 건지시느니라(시 97:10).” 악은 무엇인가? 하나님과 나의 단절, 사람과 사람 사이에 세워지는 벽의 근원이지 않겠나? 각자의 성에 살면서 첨탑에 갇힌 공주의 절규처럼 우리의 외로움은 단지 각자의 몫으로 그치는 게 아니다. 주를 사랑함으로 이 악을 미워할 줄도 안다. 내 안에 말할 수 없는 기억을 밀어내야 한다. 주 앞에 토설해야 한다. 믿는 자들로 서로에게 고백해야 한다. 이는 기도를 위함이다. 성령으로 일하시게 하심이다. 그리하여 성도의 영혼을 보전하시고 악으로부터 보호하신다.
하여 오늘 말씀은 성립이 된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골 3:1).” 곧 나의 영혼이 전에는 죽었더니 이제는 살았다. 민감하게 반응하며 주의 도우심을 바란다. 누구의 아픔으로 주의 이름을 부른다. 주께 아뢴다. 주를 바란다. 이것이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2).” 하시는 말씀의 근간이다. 이 땅에 사는 우리가 무슨 수로 땅의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나? 믿는 자로 산다고 하나 아프면 고달픈 것이고 없으면 궁벽하여 기가 죽는 일인데, 우리 스스로 무슨 용빼는 재주가 있는 것도 아니고! 기독교는 결코 득도의 종교가 아니다. 해탈하여 더는 속세의 연을 끊는 삶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죽었고 죽음으로 살았다.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3).”
나로 죽었다 함은 더는 어떤 기억이 나를 억압하지 못한다. 그 어떤 수치와 낭패도 나의 영혼을 좌지우지할 수 없다. 그것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소리가 아니라, 우리가 무슨 생불도 아니고! 그것으로 주의 이름을 부르며 성령의 주도하심을 붙드는 것이다. 누구의 일로 나는 주께 바라다 내 안에도 그와 같은 슬픔이 또는 서러움이 내재되어 있었음을 알게 된다. 고로 “여호와께서 다스리시나니 땅은 즐거워하며 허다한 섬은 기뻐할지어다(시 97:1).” 정현종 시인의 표현처럼 ‘사람과 사람 사이에 섬이 있다.’ 우리 모두는 일개 섬으로 떠돌면서 또한 동시에 모든 땅의 근원이다. 고로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골 3:2).” 하시는 말씀을 이에 비춰보면 “여호와를 사랑하는 너희여 악을 미워하라 그가 그의 성도의 영혼을 보전하사 악인의 손에서 건지시느니라(시 97:10).” 곧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골 3:4).” 우리로 악에서 건지신다 함은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5).” 나의 기억에 온갖 찌꺼기가 뒤섞여 있다. 이는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다. 전에는 아무렇지 않고 오히려 즐기며 더욱 바라던 것이었다.
한데 이제 이를 미워하고 두려워할 줄 아는 것은 “이것들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6).” 나의 기억은 어디에 집약되었거나 분산되어 있다. 이처럼 말씀으로 무장하고 묵상할 때는 더는 상관없는 것들로 나를 지배하지 못할 것 같은데 돌아서기 무섭게 손의 감각이 또는 혀의 느낌으로 귀가 알아듣고 눈이 이를 알아본다. 그러니 늘 보면 환장할 노릇이다. ‘위에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고 하는데, 한다고 하면 할수록 땅의 것은 달콤하고 내밀하여 내 안의 온갖 기억을 자극한다. 툭, 별 것도 아닌 일에 열등감이 올라오고 헉, 하고 지나치지 못한 서러움이 숨을 막히게 하듯 슬픔이 또는 염려가 나로 하여금 나도 모르게 방어기제를 작동하게 한다. 그것이 무언가? 숨는 것이다. 아니라고 부정하며 괜찮다고 하면서 스스로 부끄러움을 감추는 일이다. “그들이 그 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창 3:8).”
그러려니 하루하루가 얼마나 고단하고 난감할까? “너희도 전에 그 가운데 살 때에는 그 가운데서 행하였으나 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 버리라 곧 분함과 노여움과 악의와 비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골 3:7-8).” 오늘 말씀은 이를 일깨워 주 앞에 세운다.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말라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9-10).” 그리하여 성경은 대책을 마련하셨다. “그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약 5:16).” 그런데 현대사회는 이를 권하지 않는다. 교회는 이를 조심스러워한다. 서로 적당한 선을 유지한다. 우리의 친밀함이란 언제부턴가 친절함으로 바뀌었다. 친절한 타인으로 서로 그저 허허, 웃는다. 쯧쯧, 혀를 치며 안타까워할 따름이다. 다른 대안을 고려하지 않는다. 오히려 가까이함을 경계한다. 공연히 말썽을 바라지 않는다. 주의 뜻은 졸지에 비활동성 조언으로 ‘그러면 좋겠으나’ 하는 정도에서 어디 눈에 잘 띄는 액자에 걸어둔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우리로 정신 똑바로 차리라고 언성을 높이는 것 같다. “거기에는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할례파나 무할례파나 야만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 차별이 있을 수 없나니 오직 그리스도는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시니라(골 3:11).” 누가 어떻고 무슨 일이 어떻고 하는 데 따른 앞서 선을 긋고 차별을 두는 일에 대하여, ‘그리스도는 만유의 주시다.’ 단정하여 일깨운다. 감히 누구더러 ‘아픈 아이’로 규정하여 그러려니 저를 평가 절하하겠나? 슬그머니 거리를 두고, 공연히 무시하고, 내버려두고, 깔보고, 업신여기기까지 하는 우리의 고약한 경계심에 대하여 ‘너나 잘해!’ 하고 야단을 치시는 것 같다.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12-14).” 나야말로 어떠했는가 말이다! 누구보다 고약하고 더럽고 한심하기 이를 데 없던 나였음을.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너희는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15).”
말씀 앞에 가만히 숨을 죽이고 오래 머문다. 스쳐가는 누구와 누구들을 생각하다 나를 생각한다. 어떤 기억이 또는 슬픈 감정이 욱, 하고 일어나는 것을 느낀다. 할 때에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17).” 오직 감사로만이 살 길이다. 그렇게 “오직 너는 스스로 삼가며 네 마음을 힘써 지키라 그리하여 네가 눈으로 본 그 일을 잊어버리지 말라 네가 생존하는 날 동안에 그 일들이 네 마음에서 떠나지 않도록 조심하라 너는 그 일들을 네 아들들과 네 손자들에게 알게 하라(신 4:9).” 우리의 사명은 돼도 않는 엄청난 일을 벌이는 것이 아니었다. 오직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골 3:23).” 이는 “여호와께서 다스리시나니 땅은 즐거워하며 허다한 섬은 기뻐할지어다(시 97:1).” 나의 그 어떤 엄청난 일이나 성과도 한낱 바람에 날리는 겨의 무게도 아닐 것을. 고로 “여호와를 사랑하는 너희여 악을 미워하라 그가 그의 성도의 영혼을 보전하사 악인의 손에서 건지시느니라(10).”
그렇게 “여호와여 주는 온 땅 위에 지존하시고 모든 신들보다 위에 계시니이다(9).” 곧 “의인을 위하여 빛을 뿌리고 마음이 정직한 자를 위하여 기쁨을 뿌리시는도다 의인이여 너희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기뻐하며 그의 거룩한 이름에 감사할지어다(11-1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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