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전봉석 2021. 7. 11. 05:16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 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려지셨느니라

딤전 3:16

 

내가 입으로 여호와께 크게 감사하며 많은 사람 중에서 찬송하리니 그가 궁핍한 자의 오른쪽에 서사 그의 영혼을 심판하려 하는 자들에게서 구원하실 것임이로다

시 109:30-31

 

 

우리는 부분적으로 안다. 서로를 다 알 수 없다. 그럼에도 주의 이름으로 서로 권하고 문안하고 함께함이 옳으니,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 13:12).” 이는 주의 뜻을 아는 일도 같아서, 누가 다녀갔고 나는 저를 마주할 때면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는데 어쩌나 불안부터 앞선다. 늘 그러한 마음으로 속상하고 답답하기만 하였다. 어제도 새로 출입구가 바뀌고 이를 찾지 못해 같은 층을 여러 바퀴 돌고는 연락을 하여 문 밖으로 나갔더니 다리가 풀려서 그렇다며 바닥에 내동댕이쳐지듯 자빠졌다. 저의 손에 들려있던 방울토마토는 흩어져서 복도를 굴렀다. 나는 민망해하는 저를 두고 방울토마토를 주웠고, 저는 다리가 풀려서 그렇다며 변명처럼 같은 말만 하였다. 그런 저를 일으키고 천천히 걸려서 안으로 들어오는데, 자꾸 안쓰럽고 속상하여 내 마음이 되레 서러웠다.

 

겉으로 벌어지는 이와 같은 일로만은 하나님의 뜻을 알 길이 없다. 서로가 서로를 어찌 알 수 있을까? 그 속사정이야 자신들이 각자 품고 살아야 하는 것이겠으나 우리가 주께 아뢰지 않으면 무엇으로 위로를 얻을 수 있겠나? 나는 저에게 그러한 것을 알려주고 싶었고 저는 자신의 처지와 상황으로 인해 뭔가 확실하게 안정된 것을 구하려는 것뿐이었다. 이를 어찌 나무라고 뭐라 할 수 있겠나. 그러나 “너희가 우리를 부분적으로 알았으나 우리 주 예수의 날에는 너희가 우리의 자랑이 되고 우리가 너희의 자랑이 되는 그것이라(고후 1:14).” 속상하고 안타까워서도 나는 해야 할 말을 전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바라고 추구하고 준비해야 하는 게 무엇인지. 미래를 준비하고 노후를 염려하는 그 이상의 중요함에 대하여, 말은 하면서 더 말의 난제로 어려워지는 것 같았다. 가령 지금도 충분히 외롭고 힘들고 지친 삶인데….

 

가끔은 왜 하나님이 성경을 말씀으로 주셨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언어란 해석하기 나름이고 말이란 듣기 나름이어서 아, 다르고 어, 다르다는 말이 괜한 속설은 아니다. 같은 말도 누구에게는 위로가 되나 누구에게는 공허한 소리여서 공중으로 흩어지면 찾을 길 없고, 의미가 전달된다는 것은 참으로 기묘한 일이라. 나는 그런 뜻으로 말한 게 아닌데 저는 저런 말로 듣기 일쑤인 게 언어이다. 언어는 오해의 소지가 많다. 그만큼 풍부하고 상상을 동원하여 무궁한 나래를 펼칠 수도 있으나 그 뜻이 올바로 전달된다는 것은 서로의 손가락 끝을 마주하는 일처럼 조심스러울 따름인데. 어떤 수학적인 공식, 또는 개념으로 더는 설명이 필요 없고 가설이 소용없는 것이었으면 어땠을까? 그런데 성경은 규정하기를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 1:1).” 하셨고, 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14).”

 

도대체 이 공식을 어찌 해석해야 하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마 5:18).” 나는 누구에게 주의 말씀을 전할 때면 내 안에 회의하는 마음도 동시에 든다. 저에게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은 위로와 가까운 친우와 자신의 미래를 책임져줄 어떤 확신일 텐데, “천지는 없어질지언정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24:25).” 말씀으로 승부를 본다는 일은 단절을 각오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저 안타까움으로 또는 위로와 격려로 복음을 전락시킬 수는 없다. 좋은 소식 복음을 나쁜 소식으로 전할 위험이 너무 크다. 아, 그래서 이르시는 말씀인가?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 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려지셨느니라(딤전 3:16).”

 

우리가 주로 영접하고 사는, 말씀으로 오신 이가 우리 가운데 거하심으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로 충만하게 하심인데… 나는 또 감정이 먼저 앞섰는가? 저가 돌아가고 내내 마음이 어려워 전화라도 해볼까 하는 마음으로 씨름하다 지쳤다. 누구를 마음 쓰는 일이란 하면 할수록 이게 내가 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안타까움도 어떤 동정도 자칫 그 의미를 받아들이는 데 있어 또는 전달하는 데 있어 오해의 소지가 많다. 괜한 말을 했나? 싶은 마음이 강하게 들고 그럼에도 나는 말씀으로밖에는 너에게 줄 것이 없다는 소리에, 나는 정직하였나? 자신할 수 없어 괴로웠다. 그저 감정적으로는 속상하고 안 됐고 미안하고 안쓰러워 차라리 외면하고 안 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그럼에도 나 같은 사람이 이와 같은 귀한 사명을 감당하게 하신 것이라면… 같이 아파하라는 소릴 텐데 나는 자꾸 헉, 하고 먼저 숨이 막힐 따름이다. “하나님이 죄인의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의 말은 들으시는 줄을 우리가 아나이다(요 9:31).”

 

나는 저에게도 글을 쓰라고 권하는 것은 뭔가 대단한 글쓰기를 권하는 게 아니다. 자신을 돌아보는 돋보기를 하나 손에 쥐는 일이다. 자신의 이야기를 바로 알지 못하면, 하나님이 저에게 주신 장애, 그 어렸을 적의 서러움, 보육원에서의 말할 수 없는 고독, 사회에 나와서의 필사적인 싸움, 나름은 살고자 하는 의지에 대해 바로 알 수 없다. 자신을 바로 알지 못하는 만큼 하나님에 대한 오해도 깊다. 부모로부터의 사랑에 대한 경험이 없으니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 아버지’를 운운할 때에 추상적일 따름이다. 주께서 우리에게 더는 종이 아니라 친구라 하실 때에 자신의 진정한 친구에 대한 감정이나 느낌이 모호하여 어찌 받아야 할지 난감하다. 결국 나의 글쓰기에 대한 피력은 저의 이야기, 우리 자신의 이야기를 돌아보고 들여다볼 수 있는 현미경과 같을 뿐이지 그게 다는 아니다. 누구는 음악으로, 그림으로 그 어떤 형태로도 가능하다. 어쨌든 자신의 이야기에서 하나님의 이야기를 읽어야 한다.

 

내가 읽는 것을 저에게 들려주고 싶고, 내가 들은 것을 저에게 보여주고 싶은 것으로, 복음은 전하여질 때 비로소 말의 소용은 가치가 있다. 오해의 소지가 많고 그 뜻을 전달하는데 부분적일 수밖에 없는 한계가 늘 있으나 “내가 입으로 여호와께 크게 감사하며 많은 사람 중에서 찬송하리니 그가 궁핍한 자의 오른쪽에 서사 그의 영혼을 심판하려 하는 자들에게서 구원하실 것임이로다(시 109:30-31).” 이를 확신함은 나의 이야기에서 주가 더하셨던 주의 사랑을 나는 이제 알기 때문이다. 나는 저에게 ‘나도 안다.’ 하고 같은 마음으로 그 지금의 상황을 반추하였는데 ‘우리 같은 사람들’은 무의식적으로 사람을 의식한다. 사람의 관심과 사랑에 목마르다. 그래서 남들이 가지지 못한 무엇을 얻으려고 외로운 사투를 벌이며 산다. 그런 우리를 성경은 종이라 명명하시고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요 15:15).” 아, 이 가슴 떨리는 사랑의 고백을 나는 이제 듣는다.

 

나에게 들리는 것을 너에게 보여줄 수 있다면…. 저와 함께 있으면서 또는 돌아가고 오만가지 상념으로 시달리면서도 알 수 없는 마음으로 씨름해야 했으나, 해야 한다는 마음과 하기 싫다는 마음이 왜 하필 나 같은 걸 여기에 두시고 이 일을 맡기셨을까? 하는 엉뚱한 부담감으로도 힘에 겨웠다. 그러니 어찌 할꼬?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그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받으리라 그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약 5:15-16).” 나는 누구에게 기도를 부탁하고 싶었는데 아내도 딸애도 나의 말을 그저 안타까운 마음으로만 듣고 저를 불쌍히 여기는 것으로 전부였다. 마침 공부하려 내려왔던 아들이 마주치고 뭐라 인사를 제대로 나누지도 못하고, 하필 그때도 저 친구는 휘청 ‘다리가 풀려서’ 뒤로 자빠질 뻔하는 것을 간신히 붙들었는데 그것이 또 부끄러웠던지…. 이 풀 수 없는 안순환을 안고 살아야 하는 숙명에 대하여 나는 자꾸 울먹거리게 된다.

 

나는 우울한 마음에 일찍 돌아누워 잠이 들었고 새벽에 더 일찍 눈을 뜨고 말씀 앞에 앉았다.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도우시며 주의 인자하심을 따라 나를 구원하소서 이것이 주의 손이 하신 일인 줄을 그들이 알게 하소서 주 여호와께서 이를 행하셨나이다(시 109:27-27).” 아니시면 나는 무엇으로 이를 더 행할까? 저가 돌아가고 나 하나 복잡한 심경으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울적하고 침울한 마음으로 나를 방치하는 꼴이었으니, 저는 또 돌아가서 어땠을까? 창피와 부끄러움과 모멸감과 감출 수 없는 서러움을 혼자서 어찌 견뎌내고 있을까? 나는 생각하기를 멈추고 주께 우리의 서러움을 아뢰었다. 주가 아니시면 이 어려운 마음으로 무엇을 감당하며 살 수 있겠나? 코로나 확진자가 하루 수천 명이 넘어서서 4단계의 방역조치가 발령되고 저마다 곡소리 나는 와중에도 산으로 들로 주말을 즐기러 떠나고, 교회만 경계하지 마트니 일상의 이런저런 곳으로 나다니는 것은 여전하였으니.

 

누가 주일에 온다하다 확진자가 너무 많은데 어쩔까 하여 나는 풉, 하고 웃으며 그냥 오라 하였다. 그런 녀석이 카페에 가 앉아 글을 쓰고 있었다. 우리는 종종 얼마나 모순된 삶을 살면서도 자신의 주장과 생각을 굽히지 못하고는 하는지. 온라인으로 예배를 드린다고 하나 그 예배가 온전한지 어쩐지 진지하게 묻지도 않고, 스스로는 그저 괜찮다 여기는 것으로 마음이 기우는 일이었으니. 나의 말은 저들에게 단도직입적으로 정의하자면 죽을 준비를 하라는 것이다. 병들 준비와 혼자 외로움을 견뎌야 하는 순간을 대비하라는 소리다. 누구에게 글을 쓰라 권하는 것은 그럴 수 있을 때, 하루라도 일찍 자신을 돌아보아 우리에게 향하신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얼마나 귀하고 크고 놀라운지를 알자는 것이다. 그것으로 우리의 최악의 상황을 대비해야 한다. “만일 내가 지체하면 너로 하여금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지를 알게 하려 함이니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니라(딤전 3:15).”

 

이를 의역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 주의 오심이 더딘 까닭은 한 영혼이라도 더 기다리시는 것으로, 그게 나를 위한 것이었다. 우리로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서 살 자들로 온전히 그 준비를 하게 하려 하심인데. 그러니 부디 “다수를 따라 악을 행하지 말며 송사에 다수를 따라 부당한 증언을 하지 말며 가난한 자의 송사라고 해서 편벽되이 두둔하지 말지니라(출 23:2-3).” 다수, 남들이 다 그러고 산다고 해서 그리 행하여서는 안 된다. 저의 항변도 그와 같은 것이었으나 나는 힘주어 말하길, 우리가 받고 사는 은혜가 얼마나 크고 많고 감사한가를 알자. 마치 내가 일구어 이룬 만큼 누리는 것뿐이라고 오해한다면 이는 안개와 같아서 허무할 따름이니. 부디 우리의 ‘상한 감정’을 치유해야 한다. 아니면 고착되어 그리 하나님도 오해하고 산다. 사느라 사는 동안 고달프기만 하다. 하나님은 야박하고 은혜는 너무 비싼 값을 청구하는 듯하다. 저의 병적인 노력은 그것에 기안한 것이었다. 그게 아니라고 말해주다 내가 기진하였다.

 

그러니 나는 다만 기도할 뿐이라. “나는 사랑하나 그들은 도리어 나를 대적하니 나는 기도할 뿐이라(시 109:4).” 달리 무엇을 할까? 서로는 자신의 선택으로 산다. 어제의 선택으로 오늘을 꾸역꾸역 살아내면서 기어이 오늘의 선택으로 내일을 또 맞이하려 드는 것이다. 나는 선택하기를 포기하고 주를 바란다.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었으면 하고 바란다. 이것이 현실적인 도피로서든, 무책임한 결과로서든, 나는 더 이상 나를 정죄하고 자책하지 않는다. 나의 나 됨은 주의 은혜라. 하면 더 무엇을 바랄까?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여 나의 중심이 상함이니이다(22).” 오직 주만 바람이여.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도우시며 주의 인자하심을 따라 나를 구원하소서(26).” 부디 나의 이와 같은 말씀으로의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그것으로 내 곁으로 두시는 한 영혼 한 영혼을 마주할 있게 새 힘도 더하시기를. “이것이 주의 손이 하신 일인 줄을 그들이 알게 하소서 주 여호와께서 이를 행하셨나이다(27).”

 

그리하여 “내가 입으로 여호와께 크게 감사하며 많은 사람 중에서 찬송하리니 그가 궁핍한 자의 오른쪽에 서사 그의 영혼을 심판하려 하는 자들에게서 구원하실 것임이로다(30-31).”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