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

전봉석 2021. 7. 9. 05:33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딤전 1:14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할지로다 그가 사모하는 영혼에게 만족을 주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

시 107:8-9

 

 

우리가 처한 고통의 정도가 은혜의 정도다. 환난의 무게가 은총의 무게이다.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롬 5:20-21).” 곧 자신의 죄 됨을 알면 알수록 더욱 은혜가 넘친다. 이에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딤전 1:14).” 오늘의 말씀에 나는 아멘, 한다. 누구로 인해 속상해하다, 그래서 저에게 뭐라 나무라고 애타는 심정으로 그게 아니라고 호소하다, 전날에 누군가 날 위해 느꼈을 안타까움을 생각하였다.

 

하루 전에 사모는 글을 쓰기에 앞서 기도를 하면서 ‘목사님께 더하신 은혜가 사실은 부럽습니다.’ 하는 고백을 하였다. 나는 저의 말이 계속 귓가에 남아 나의 어떤 점에서 주의 은혜를 느낀 것인가 하고 생각하였다. 나야말로 ‘불우했던 유년’을 지냈다. 소위 말하는 왕따에 집단 괴롭힘은 말할 것도 없고 늘 빙충맞은 아이로 선생들의 눈총을 받기 일쑤였다. 전학을 할 때면 학교마다 나를 특수학교로 보내라 종용하였고, 어머니는 고집을 부리며 빌었고, 그것으로 눈치를 보면서 미안함과 억울함과 원망이 나의 감정을 지배하곤 하였다. 곧 나에게는 하나님에 대한 남다른 원망과 서러움이 있었던 것이다. 지금은 그럼 어떤가? 나는 종종 푸념처럼 하는 말이지만 하루라도 몸도 마음도 개운한 날이 있었으면 좋겠다. 여기가 아프거나 저기가 아프고, 이것으로 힘들거나 저것으로 힘들어 혼자 긴 한숨을 내쉬기를 하루에도 몇 번.

 

그런 나를 보면서 저는 무엇으로 남다른 주의 은혜를 부러워하기까지 했을까? 골이 깊은 곳에 수심이 깊다. 깊은 수심은 개울물과 달리 잔잔한 법이다. 늘 불안이 엄습하고 누구 일로도 훅, 하고 치대는 감정으로 금세 숨이 거칠어지고 답답증을 느껴… 어제는 여느 날보다 진정제와 안정제를 몇 개 더 먹었는지 모르겠다. 이 친구도 나이 마흔을 훌쩍 넘겨 곧 쉰을 바라보는 터에 뭐라 나무라도 내가 속상해서 말이다. 충분히 그럴 수 있고, 그러는 게 어쩌면 당연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연거푸 같은 일로 씨름하듯 했던 말 또 하고 했던 고민 또 늘어놓고 하는 통에 지겹기도 하였던가보다. 그러다 지금 어디 훈련소 선생한테 혼났다면서 내가 여태 했던 말과 다를 게 없는데 저의 말에 더 귀를 기울였는가 싶어. 하긴 저쪽은 훈련과정이 끝나면 직업을 소개하고 추천하는 권한도 있으니 그럴 법도 하지만, 순간 서운하고 화가 났던 모양이다. 갑자기 꼴도 보기 싫고 그러든가 말든가 더는 신경도 쓰지 말고 내버려둘 심사였다. 뭐라 꾸짖고 언성을 높이고는 저녁 내내 그게 또 마음이 안 좋아서 연거푸 약을 때려먹었던 것이다.

 

가정예배를 드리고 돌아누워 시무룩해 있는데 나름 긴 문자가 들어왔고 오는 토요일에 와서 다시 잘 배우겠다며 먼저 사과를 하는 것이다. 고마워, 하고 답장을 하는데 눈물이 퍽, 쏟아졌다. 안 됐고 미안하고 속상하고 싫고 답답한 마음이 순식간에 나를 부끄럽게 하는 것 같았다. 아, 왜 하나님은 나 같이 자격도 인격도 안 되는 사람에게 이와 같은 마음을 맡기신 것일까? 어떤 서러움이 복받쳐 TV를 보면서 우는 건지, 내 안의 어떤 감정으로 우는 건지, 나는 연신 눈물을 훔치다 잠이 들었다. 희한하지? 내가 대체 왜 남의 일에 이처럼 마음이 애달아해야 하는 것일까? 오늘 말씀은 그 답이 된다.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할지로다 그가 사모하는 영혼에게 만족을 주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시 107:8-9).”

 

나야말로 어떤 사람이었나? 그렇게 열등감으로 똘똘 뭉쳐진 옹고집에 자기주장만 내세우며 내멋대로 굴던 위인이 아니던가? 누가 뭐라 하면 적으로 돌리고, 나는 누구와도 ‘친절한 타인’으로 그저 겉과 겉을 마주하며 좋은 게 좋은 것인 모양으로 살아오지 않았던가? 그 마음 안에는 하나님에 대한 깊은 불신과 원망이 있었다. 주를 바라면 바랄수록 주를 싫어하고 멀리하고자 하는 마음도 동시에 작용했었다. 이는 엄연히 두려움이 내재돼 있었기 때문이다. 누구로부터 멀어질까 두렵고, 애써 일궈온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일이 어그러질까 두렵고, 누구를 연모하고 사랑하는 감정으로 내밀한 마음의 위로를 잃을까 두려웠던 것이다. 그렇게 나는 늘 애써야 했다. 지금도 그런 습성이 남아 있기는 한데, 그래서 나는 종종 과도하게 준다. 이거 너 줄까? 하고 당장 내게 필요한 것인데도 상대의 환심을 산다. 어제도 약통으로 일부러 두 개를 사서 하나는 휴대하고 하나는 가방에 넣고 다니던 것 중에 하나를 덥석, 이거 너 써! 하고 아이에게 주었다.

 

도대체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굳이 톨스토이의 말을 빌어서 물을 것도 없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요일 4:18).” 결국은 사랑이다. 하지만 사랑은 추상적이다. 실제가 아니다. 이는 표현되고 나타나야 한다. 마음이 가고 시간을 들여 저에게 무엇이 돼야 한다. 사랑보다 지겨운 게 또 있었던가? 나에게 사랑은 늘 쟁취였다. 친구들과 어울리는 데도 저들보다 애써야 했다. 때론 내 속을 감추고 나의 형편을 드러내서는 안 되었다. 십중팔구 친한 마음에 속엣 얘길 하면 이런저런 입바른 위로가 있은 후에는 거리감이 생겨났다. 아니면 값싼 동정으로 나를 대하기 일쑤였다. 그러느니 나는 늘 ‘괜찮은 척’ 해야 했다. 나보다 형편이 나은 친구 앞에서도 내가 먼저 돈을 내고 무엇을 사서 건네고, 환심을 사야 했다.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마음으로 고착되어 내가 아는 하나님은 그 사랑을 느끼고 고마움을 바라기 위해서는 늘 수고해야 했다. 열심을 다해야 혹시 사랑을 해주실까 하고, 나 같은 게 뭐라고! 하는 열등감과 자격지심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데도 발동하곤 했던 것이다. 그러다 그게 나의 지독한 오해였고 끔찍한 죄의 모습이었으며 씻을 수 없는 부끄러움이 된 것은 얼마 되지 않는다. 더는 주의 사랑을 얻으려 무엇을, 율법을 중시하고 규례와 법도에 얽매이지 않는다. 애써 무얼 해야 한다는 강박으로부터 놓여났다. 이는 내 안의 증오심을 그것까지도 주께 내어놓기 시작하면서부터다. 나의 나 된, 이 모양 이 꼴로도 주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다는,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 4:16).” 어디서 이런 뻔뻔함이 부끄럽지 않고 도리어 축복인 것을 알 수 있었을까? 저의 죽으심으로다. 성령으로다. 내 안에 두시는 누구에 대한 마음이 나를 흔들고 나로 힘들게 하면서부터이다.

 

실제 나는 누구 일로 고민하는 사람이 아니다. 가까운 친구? 그런 믿음은 없었다. 늘 내가 애썼으니까, 저의 친절과 친밀함은 내가 값을 지불한 노력의 결과였다. 그러니 무슨 일로 틀어졌거나 사이가 멀어질 때 나는 누구보다 냉정할 수 있었고, 지금도 먼저 연락을 하거나 사과를 하는 위인이 아니다. 내가 저한테 어떻게 했는데! 하는 손익계산이 내 마음을 쥐고 있기 때문이다. 어쩔 땐 그렇게 죽고 못 살던 친구와의 사이가 소원해지면서, 이상하게 홀가분한 기분이 들 때도 있다. 솔직히 나는 지금 ‘코로나 정국’이 싫지 않다. 그로 인한 거리두기로 서로 입을 틀어먹고 일부러라도 만나지 않고 살아도 되는 현실이 아주 편하다. 한데 ‘이상하게 마음이 쓰이는 사람’이 생겨난 것이다. 내가 저 때문에 살 수가 없다. 저로 인해 가슴이 벌렁거리고 속상해서 울고 참지 못해 약물을 복용해야 할 정도로 안정이 어렵다. 대체 왜 이 같잖은 관계 때문에 내가 이처럼 속상해하고, 모멸과 무시를 당하고도 왜 또 연락을 먼저 하곤 하게 되는지… 죽고 못 살 것 같던 친구들과도 벌써 몇 년째 못 보고 산다. 연락도 잘 안 한다. 어찌 지내는가, 궁금해 하지도 않는다. 그러면서 왜 이이가 내 안을 가득 채우고 들어오는 것일까?

 

어제는 누구에게 언성을 높여 야단을 치듯 어르고 달래며, 한편으론 그만 두고 싶다는 생각으로 골이 잔뜩 났었는데 토요일에 온다는 저의 말에 왜 나는 나도 모르게 고맙다는 소릴 하고, 그 소리에 눈물이 와락, 쏟아진 것일까? 오늘 바울이 믿음의 아들 디모데를 향한 마음이 그런 심정이었을까?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은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딤전 1:19).” 저가 이런저런 일로 주를 멀리할까봐서. 당장의 그 일보다 주를 더욱 바라고 의지했으면 하는 마음으로. 이런 게 어디 인위적으로 내가 갖는다고 가져지는 마음이겠나? 시편은 이를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할지로다(시 107:31).” 내게 어찌 행하셨던가? 나 같은 것, 죽어 마땅한 나를 얼마나 사랑하셨는가 하는 것을 내 인생은 살면서 사는 동안에 알지 않았던가? 모두가 싫증내고 떠나고 배신할 때도, 돌아보면 주는 늘 내 곁에 계셨었으니. “궁핍한 자는 그의 고통으로부터 건져 주시고 그의 가족을 양 떼 같이 지켜 주시나니 정직한 자는 보고 기뻐하며 모든 사악한 자는 자기 입을 봉하리로다(41-42).”

 

내게 더하신 은혜가 크다. 어쩌면 이틀 전에 왔던 사모는 이를 부러워하며 주께 바랐던가보다. 내가 하나님께 분노를 동시에 느끼고 살 때에도 하나님은 나의 원망과 서러움을 다 받아주셨다. 나를 버리지 않으셨고 외면하지 않으셨다. 내가 그때 어찌 살았는가를 이 글에 옮긴다면, 누구라도 역겨움으로 더는 나를 보지 않을 텐데… 나도 나를 끔찍하게 여기던 그때에도 하나님은 변치 않는 사랑으로 날 위해 함께 하셨다. 누구 일로 속상해하다, 그래서 더는 저를 보기 싫어하다 든 생각이 더는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주가 주시는 마음이라. 저가 온다는 게 뭐가 좋겠나? 일상적인 대화도 어렵고 장애로 인해 몸도 가누기 어려운 처지의 저인데… 토요일에 가서 배울게요, 하는 말에 나는 퍽, 하고 울었다. 주님의 마음일까?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51:17).” 하여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삼상 15:22)” 하고 말씀하신 것일까?

 

우리가 주를 기쁘시게 함은 뭔가 대단한 업적으로 남들보다 나은 모습의 어떤 결과가 아니라, 상한 심령이었다. 쥐뿔도 할 줄 아는 게 없으면서도 순종하는 마음으로 누구의 오고 감을 거절하지 않는 일에 대하여, 주님의 마음으로다. 주의 사랑으로다. 아니면 나는 저를 사랑하지 않는다. 할 수도 없다. 내가 저를 생각하지 않는다. 그럴 마음의 여유도 없다. 한데 “지혜 있는 자들은 이러한 일들을 지켜 보고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깨달으리로다(시 107:43).” 그렇게 우리 주님이 무엇을 바라고 기다리시는가를… 조금씩 알겠다. 나는 할 수 없어서 안정제를 한 알 더 입에 물고도 저를 맞이하는 일, 주님의 마음으로… “주리고 목이 말라 그들의 영혼이 그들 안에서 피곤하였도다(5).” 하니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할지로다(8).” 아, “그가 사모하는 영혼에게 만족을 주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9).”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