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들아 너희는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라
살후 3:13
내가 주의 택하신 자가 형통함을 보고 주의 나라의 기쁨을 나누어 가지게 하사 주의 유산을 자랑하게 하소서
시 106:5
공연히 들춰 긁어 부스럼만 만드는 게 아닌가, 하는 두려움도 있다. ‘사모’의 기도에서 상대적으로 나에게 더하시는 은혜가 부러웠던가보다. 나는 가만히 저의 심령을 가늠해보았다. 누구도 남의 이야기를 다 알 수 없다. 어떤 일도 함부로 규정지을 수 없다. 본래 “웃을 때에도 마음에 슬픔이 있고 즐거움의 끝에도 근심이 있느니라(잠 14:13).” 이는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 감내하고 수고해야 하는 몫이다. 누가 누구보다 낫다고 할 수 없는 게 슬픔이다.
그래도 감사한 것은 저의 글쓰기에서 자신의 아픈 기억을 더듬고 들추어 주 앞에 풀어놓는 것이다. 나는 우리의 글이 주 앞에 놓일 때 이는 아뢰는 기도가 되어 위로를 더한다고 확신한다. 이를 다만 자신이 안고 있을 때면 쾌쾌한 감정은 코를 찌른다. 어릴 적 아픈 기억은 수치심으로 자신을 에우고 방어기제로 작용한다. “여호와여 주께서 이를 보셨사오니 잠잠하지 마옵소서 주여 나를 멀리하지 마옵소서(시 35:22).” 우리의 글쓰기는 그러한 기도였다. 슬픔은 주 앞에서 위로가 된다. 나의 노여움은 변하여 찬양이 되게 하신다.
나는 저에게 나의 꿈과 기도를 말하였다. 고대 심리학을 전공하고 주의 소명으로 신대원을 하고 주의 사역을 감당하는 이였다. 한데 그 영혼이 눌린 상태라. 우리의 만남은 다만 수도꼭지를 돌리는 일처럼 주의 은혜의 생수가 흘러넘치게 하려 하심이다. 자신의 이야기를 글로 풀어내게 하는 것은, 말은 감정이 지배하고 글은 이성이 지배한다. 나의 이야기가 단지 나의 이야기로 있으면 건드릴 때마다 아프다. 하지만 이를 틀어놓아 흘러나오게 하면 목마른 이에게 생수 한 그릇이 된다.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요 7:38).” 우리 개개인의 ‘그 배’에는 온갖 수치심과 모멸감과 남이 알까 두려운 거짓 위선들로 가득하였다. 곧 나의 뱃속 깊은 곳에는 온갖 남의 이야기가 별미처럼 한 상 가득하다. “남의 말하기를 좋아하는 자의 말은 별식과 같아서 뱃속 깊은 데로 내려가느니라(잠 18:8).”
그러니 뭐라 한들, “너희가 남의 말을 꾸짖을 생각을 하나 실망한 자의 말은 바람에 날아가느니라(욥 6:26).” 그래봐야 소용없던 남의 말은 나의 이야기였다. 우리 이야기에는 하나님의 이야기가 있다. 우리는 날마다 하란을 떠나는 아브라함이다. 갈 바를 알지 못하면서 길을 나선다. 나는 사모의 이력을 가만히 살피며 부디 ‘그 배에서’ 주의 생수가 흘러나올 것을 꿈꾸었다. 주께서 그리하시기를 소망하였다. 그러려고 이 미천한 자와 마주하게 하심을 확신하였다. 내가 저보다 나은 게 무엇이겠나? 학력으로나 지식으로 저를 향하신 주의 계획은 원대하심을 확신하였다. 저의 고착된 슬픔, 억눌린 피해망상을 주 앞에 풀어놓아야 한다. 그러할 때 막힌 담이 허물어지듯 ‘그 배에서’ 주의 놀라운 생수가 흘러나와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그러했듯이 저들의 억울함이 또한 노여움이 변하여 찬송이 되게 하셨다.
결국 우리의 무기는 기도다. 목사가 되고 가장 자주 말하거나 듣거나 하게 되는 말이 ‘기도할게요.’ 하는 것인데, 기도는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롬 12:12-13).” 그와 같은 힘을 더한다. 나야말로 내 코가 석 자다. 내 앞가림도 못한다. 나는 누구의 슬픔을 듣다 헉, 하고 숨이 막혀 가만히 안정제를 입에 물었다. 병원에서는 감정이입을 하지 말라는데, 같이 슬퍼하지 않는데 무슨 기도가 나오겠나? 입바른 소리로는 기도가 되지 못한다. 어처구니없게도 나는 저이 때문에 운다. 때로는 울다 나의 울음이 어이가 없어서 운다. 내 주제를 모르고 그러는가, 싶어서 말이다. 한데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찬송할지니라(약 5:13).” 이는 우리 생의 가장 뚜렷한 자세다. 지혜자도 말하길,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 보아라 이 두 가지를 하나님이 병행하게 하사 사람이 그의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전 7:14).”
다만 말씀으로 의뢰하고 오늘의 하란을 떠나 길을 나서는 것이다. 주께서 가라 하시는 땅이 어딜지, 사모와 어느 아이와 또 누구와의 새로운 만남이 어떤 경로로 이어질지 나는 알지 못한다. 다만 주를 의뢰함이니, “형제들아 너희는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라(살후 3:13).” 하시는 오늘 아침의 말씀을 지침으로 삼는다. 이는 엄연한 증거가 되어 “내가 주의 택하신 자가 형통함을 보고 주의 나라의 기쁨을 나누어 가지게 하사 주의 유산을 자랑하게 하소서(시 106:5).” 이로써 내게 두시는 소망이었다. 그래서 성도들은 환난에도 기뻐할 수 있었구나!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 5:3-4).”
이는 곁을 함께 하시는 이로 하여금 깨닫게 하신다. 저에게 나의 보는 것을 들려준다. 내가 듣는 것을 보게 한다. 이는 “평강의 주께서 친히 때마다 일마다 너희에게 평강을 주시고 주께서 너희 모든 사람과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살후 3:16).” 우리 서로의 기도다. 기도해주세요, 기도할게요, 하는 소리가 성도의 인사처럼 오고 갈 때 주의 성령은 분주하게 움직이신다. 우리로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 6:9).” 그러므로 나는 누구보다 좀 나은 게 있어서 같이 하자고 손을 내미는 게 아니었다. 오히려 저보다 못하다. 내 처지가 면구스럽기도 하다. 누구보다 환자다. 저를 맞이하면서 진정제를 먹고 저의 어려움에 안정제를 더 먹기도 하면서… 그럼에도 마다하지 않는 것은 주가 행하시는 일이라. 이로써 선을 이루려하심인데 나로 누구를 위한 게 아니라 저로 나를 위한 것임을 이제는 잘 안다.
나는 저의 말로 주께 아뢴다. 그 말 못할 사연을 같이 읽고 서러움에도 같이 주의 이름을 부른다. 그럴 때면 동일한 은혜로 주가 함께 하심을 느낀다. 가령 이제는 누가 논술문의를 하고 학원으로 상담전화를 하면, 어디가 아픈가요? 아이 상태는 어떤가요? 교회를 다니시나요? 주의 살아계심을 아시나요? 하고 되묻는다. 저는 의아해하고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하기 일쑤다. 그럼에도 나는 굴하지 않고 ‘상한 영혼’을 확인한다. 이를 인정하면 같이 길을 가는 것이고, 이상히 여겨 ‘내가 알아서 알게요.’ 하는 식이면 더는 권하지 않는다. 나와의 동행은 내 뜻으로가 아니다. 나는 이제 확신한다. 목사 아내로, 좋은 학력의 소지자로, 본인도 전도사로 주의 일을 감당하면서 이혼을 바라고 자기 생활을 비관하는 이에게 나는 무엇으로 위로를 더할까?
나는 줄 게 없으나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행 3:6-8).” 주가 하시는 일에 나를 맡긴다. 권함은 내게 있으나 그 뜻을 이루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라. 나는 저이에게 같이 가자, 손을 내민다. 사모는 이를 잡았고 자기 이야기를 주 앞에 서술하다 울먹거렸고 아픈 기억으로 씨름하다 돌아가고는 하지만… 오직 주의 관심은 하나님의 영광으로다. 그러는 중에도 주께 감사하는 힘이 크다.
한 아이에게 더하시는 주의 마음도 나는 따라잡을 수 없으나 주를 의뢰한다. 아이의 글은 어둡고 눅눅하다. 몸에 밴 냄새처럼 저는 슬픔을 몸에 익은 외투로 삼는다. 이를 어찌 걷어낼까? 불쑥 이는 자살충동과 변덕처럼 언제 또 둔갑할지 모르는 고질적인 비관을 나는 어찌 감당할까? 저는 여러 정신과를 전전긍긍하였다. 새로 다니는 병원에서는 한 줌씩 약을 주어서 먹고 있다. 또 누구는 자주 ‘어두운 생각’이 마음을 덮치는 것 같다며 호소한다. 어디 좋은 정신과가 없는가 하고 묻는데, 토요일에 오게 하였다. 나도 환자다. 내가 무얼 할 수 있어서 저들을 오게 하겠나? “하나님이 죄인의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의 말은 들으시는 줄을 우리가 아나이다(요 9:31).” 우리에게는 남모르는 비밀병기가 있다. 주께 아룀이다. 저들로 오게 하시는 이도 주님이시다. 하면 와서 뭘 할지, 알게 하시는 이도 주님이시다. 내가 하는 게 아니었다. 나는 다만 ‘만만한 사람’으로 나의 나 됨을 감추지 않고 자리를 지킬 뿐이다.
하면 우리의 쇠약함은 어떤 이유일까? 오늘 말씀에서 그 단서를 찾았다. “광야에서 욕심을 크게 내며 사막에서 하나님을 시험하였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는 그들이 요구한 것을 그들에게 주셨을지라도 그들의 영혼은 쇠약하게 하셨도다(시 106:14-15).” 여기는 광야다. 머물 곳이 아니다. 한데 욕심을 낸다. 아닌 척, 괜찮은 척, 남들처럼 사는 것을 생의 위로로 여긴다. 그러니 주께서 저들의 요구를 들어는 주신다. 한데 그들의 영혼은 날로 쇠약할 따름이다. 왜? “그들이 그 기쁨의 땅을 멸시하며 그 말씀을 믿지 아니하고 그들의 장막에서 원망하며 여호와의 음성을 듣지 아니하였도다(24-25).” 들어보면 십중팔구 어김없다. 다들 구구한 사연을 늘어놓지만 그게 그 소리다. 주가 약속하신 땅을 바라지 않는다. 그 말씀을 믿지 않는다. 주어진 장막을 원망한다. 주의 음성을 듣지 않음이다. 그러니 어쩌겠나? 살아야지, 살아서 사는 동안 살면서 기를 쓰고 감내해야지 별 수 있겠나?
가장 무서운 소리는 살아봐야 안다는 것이다. 이런! 오늘 시편은 그런 우리에게 일러 “그러나 여호와께서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실 때에 그들의 고통을 돌보시며 그들을 위하여 그의 언약을 기억하시고 그 크신 인자하심을 따라 뜻을 돌이키사 그들을 사로잡은 모든 자에게서 긍휼히 여김을 받게 하셨도다(44-46).” 처한 저의 어려움을 글로 쓴다. 말로 설명하다 운다. 눈물을 글썽거리며 서러움에 언성이 높이지고 꺼이꺼이 울고 싶다. 이는 토설이다. 주 앞에 아뢰는 일이다. “그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약 5:16).” 나는 이 이야기의 결말을 알지 못한다. 하지만 분명히 확신하는 것은 우리 이야기의 저자는 선하시다. 어떠하든지 저는 선을 이루신다. 우리 이야기의 끝은 여기에서가 아니다. 우리는 결코 끝나지 않은 이야기를 이어갈 것이다.
할 때 내 안이 부당한 슬픔과 맞서고 쾌쾌 묵은 감정과 다퉈야 한다. 나 몰라라 하고 내버려두면 썩어 문드러져 우리 영혼까지 잠식한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마 5:10).” 우리를 괴롭게 하는 것은 모두 의를 위한 박해다.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는가?’ 숱한 풀무질과 쇠방망이질에 곤죽이 되고 문드러져지는 것 같으나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욥 23:10).” 고로 “여호와 우리 하나님이여 우리를 구원하사 여러 나라로부터 모으시고 우리가 주의 거룩하신 이름을 감사하며 주의 영예를 찬양하게 하소서(시 106:47).” 그리하여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영원부터 영원까지 찬양할지어다 모든 백성들아 아멘 할지어다 할렐루야(48).” 아멘.
'[묵상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0) | 2021.07.10 |
---|---|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 (0) | 2021.07.09 |
모든 선한 일과 말에 굳건하게 하시기를 (0) | 2021.07.07 |
우리가 친히 자랑하노라 (0) | 2021.07.06 |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 (0) | 2021.07.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