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또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히 1:1-2
내가 날이 밝기 전에 부르짖으며 주의 말씀을 바랐사오며 주의 말씀을 조용히 읊조리려고 내가 새벽녘에 눈을 떴나이다
시 119:147-148
현재를 감사하지 못하는 것은 과거를 용서하지 못한 까닭이고, 현재에 감사하지 못하면 자신이 변화되기보다 현재를 바꾸려고 한다. 자신이 나아지려 하기보다 남의 변화를 바라느라 소진된다. 알면서도 자신을 방치하는 이유다. 누구와 통화하다 저의 평생에 늘 죽겠다, 죽겠다 하는 소리 외에는 할 말이 없다는 것에 놀라웠다. 너는 어떤가? 하고 물었을 때 나는 만족한다고 하는데 저는 믿지 않았다. <대지>를 쓴 펄벅은 자폐아를 기르며 <자라지 않는 아이>를 썼다. ‘죽는 게 차라리 나은 게 아닐까?’ 하고 아픈 아이를 보며 생각하다 딸아이를 통해 자신이 변화되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부터이다.
글 쓴 걸 들고 누가 왔다. 누구의 글을 그것도 아직 초안에 지나지 않은 상태의 글을 보여준다는 일은 겸허한 행동이다. ‘어때요?’ 하고 묻는 마음은 대단한 용기다. 저의 글에 얽힌 저의 이야기를 내가 어떻다고 말 할 수는 없다. 사람의 사연은 지문처럼 개별적이다. 다만 나는 저의 솔직한 서술과 직면 앞에서 경이로움을 느낀다. 이는 저의 용기 때문이다. 자신의 아픔을 드러내어 누군가에게 보여준다는 것, 이를 나누며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듣고자 하는 갈망에 감탄하는 것이다. 우리 안의 죄는 이를 막아선다. 숨기고 가리고 은폐한다. 하나님은 그런 우리의 이름을 부르며 찾으신다. 나는 저의 글에서 새삼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기셨다는 달란트를 생각하였다. 누구에겐 하나, 둘, 다섯 저마다 받은 것은 다르지만 그것은 마치 그림을 그릴 수 있는 물감 같다.
과거의 고통과 아픔은 자기 인생을 그려내는 물감 같다. 남다른 고통이 없는 사람은 없다. 이를 모른 채 또는 외면하고 살아갈 뿐 저마다의 말 못할 사연을 안고 시치미를 떼며 살아갈 뿐이다. 한데 누구는 그것으로 남은 인생을 다채로운 색깔로 그려낸다. 그려내듯 우리는 살아낸다. 하나님이 주신 삶을 살아드리는 게 주의 영광이 된다. 이를 말씀은 증명한다.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오늘도 동일하게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곧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우리가 저들보다 유리한 고지에 선 것은 말씀이 늘 곁에 있다. 곧 “이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또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그리고 주님이 우리 곁에 함께 하신다(히 1:1-2).
무더운 날씨에 폭염의 기승과 코로나 환진자들의 폭증이 가중되고 있는 이때에 누구는 굴하지 않고 왔다. 와서 자신의 이야기를 내보였다. 나는 저의 글을 보며 문맥을 정리하고 단락과 내용을 나눈다. 없어도 될 내용에 대하여는 다음 것에 사용하도록 하고 즉 주제를 분명히 하는 것을 돕는다. 그와 같이 우리는 주어진 현실이 어떠하든지 자신의 이야기를 살아야 한다. 앞서 누구와의 통화에서처럼 늘 똑같이 죽겠다, 죽겠다 하는 저의 말은 지겨울 따름이다. 하지만 저의 말도 결국은 자신을 내보이는 방법이 아니었겠나… 얼른 통화를 끊고 다 잊은 줄 알았던 오후 늦게야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우리가 감사와 배려를 배운다는 것은 묵묵히 주시는 이의 선하심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주시는 이도 하나님이시면 거둬 가시는 이도 하나님이시다’는 원리는 감사를 배양하는 기본 고백이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곳에서는 뭐라 한들, 저는 사는 데 지쳐갈 뿐이다. 자폐 아이를 낳고 키우다 사느니 죽는 게 낫지 않을까? 하고 절규하던 이가 아이의 어쩔 수 없음과 자신의 고단한 현실을 통해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았다면. 감사는 결국 오늘의 것이 아니었다. 배려는 결국 지금으로 국한되는 게 아니었다. 미래를 아는 자의 것이다. 지금의 이 현실이 전부가 아니라는 데서 얻어지는 것이다. 그럴 때 나는 누구의 글을 읽고 감히 말하기를 ‘우리는 결국 새로운 모습을 써야 하는 거야!’ 이것이 우리 생에 맡기신 사명인 것을 강조하였다. 어쨌든 나의 목적-주제는 하나다.
저에게 당부하기를 올 가을 추수감사주일날 학습세례를 받자, 그리고 내년 봄 부활주일에는 세례를 받자, 하고 권하였다. 세례교인이 된다는 것은 서약이다. 주 앞에서 나로 하여금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것을 사는 일이다. 오늘을 살지만 오늘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지금이 아무리 고단하고 사람을 지치게 한다 해도 그것으로 끝나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은 M. 스캇 펙의 말처럼 ‘우리는 끝나지 않은 길을 가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아직도 끝나지 않은 길을 걷는다. 지나온 날이 다가 아니다. 오늘이 끝이 아니다. 나는 누구의 달라진 모습을 응원하고 축복한다. 저는 알까? 우리는 본래 거류민이요, 나그네 같은 인생을 살았다. 더는 그런 존재가 아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오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벧전 2:11-12).”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지셨다. 그래서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감사하노라(골 1:3).” 나는 저의 변화를 축복하며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확신한다. 저는 아직 하나님을 긴가민가하나, 그러면서도 꿋꿋하게 나아오는 것과 자신의 이야기를 토로하는 것과 이를 두고 같이 기도하는 일에 대하여 나는 기뻐하고 감사한다. 다음 몇 줄은 저가 어제 자신의 글을 말하기에 앞서 같이 성경을 읽고 쓴 내용이다. 저에게 묻지도 않고 밝히는 것은 그래도 될 것 같은 은혜 때문이다.
“잠언 22장 6절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잠언 22장 15절
아이의 마음에는 미련한 것이 얽혔으나 징계하는 채찍이 이를 멀리 쫓아내리라
좋든 싫든 교회에 나오고, (과거에도 내킬 때 나온 적은 있다만) 선생님과 기도를 드리고, 적게나마 성경을 읽는다. 같이 글을 쓰기 위해 선생님이 내건 요구조건이라지만 예전의 나라면 거절하지 않았을까. 불편한 자들이 속칭 예수쟁이라 부르는 저 이들을 아니꼽게 보던 시절이 없지 않았다. 목사가 된 선생님이 불편한 적도 있다.
어쨌든 나오게 되었다. 나오고 나니 기도를 드리고, 소망한다. 가고 있는 길이 맞는지 알려주셨으면 싶고, 올바른 길로 인도하시길 원한다. 이기적이게도 나의 상황이 좋지 않다보니 나의 욕심을 기도로 드리는 것 같다. 항상 신은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편이었다. 신의 전지전능이 보이면 그에 비해 미개한 인간이 신을 믿지 않을 경우가 있을까. 그렇기에 신은 존재를 숨긴 것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한다. 나는 여전히 모르겠다. 그러나 다니려 한다. 이 또한 옳은 길이었으면 한다.”
피식 웃으며 저의 글을 읽고 여기에는 뭐라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주가 하시는 일이시다. 말씀이 이루실 것을 안다. 내가 그 증거다. 나를 말씀으로 변화시키느니 차라리 돌을 들어 증거하심이 나을 거라 여길 정도로 나는 완고한 사람이었다. 한데 이제는 “내가 날이 밝기 전에 부르짖으며 주의 말씀을 바랐사오며 주의 말씀을 조용히 읊조리려고 내가 새벽녘에 눈을 떴나이다(시 119:147-148).” 자다가도 시간을 보고 일어날 시간을 계산한다. 나의 하루는 이 시간을 확보하고 잃지 않기 위해 남은 시간을 정돈한다. 누구를 만나거나 어디를 가야 하는 어쩔 수 없는 상황에도 나는 기꺼이 이 시간을 우선해서 다른 시간을 짠다. 왜?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 다니이다(103).” 누가 알겠나? 나의 경이로움은 나의 변화로 인한 것이다. 그렇게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105).” 하는 말씀이 나의 고백이 되었다.
그것으로 확신하는 것이다. 더는 나를, 오늘을, 현재를 바꾸려고 애쓰지 않는다. 마뜩찮은 가족들의 태도에도 나는 이제 뭐라 하기보다 주께 아뢴다. 어디가 아프고 또 어쩔 수 없는 몸을 두고도 이를 우선하여 쩔쩔매며 끌려가지 않고 주를 바란다. 앞서도 밝혔듯이 과거의 나를 용서하고 사랑하면서부터 현재의 나는 나의 변화를 중심에 둔다. 누구는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겠다고 정치에 뛰어들고 누구는 자기가 아니면 가족들도 자신도 모두 뭔 일이 날 것처럼 책임을 떠안고 가중된 무게의 삶을 자처한다. 통화를 하다 누구는 변하지 않는 자기 곁의 누구를 두고 한참이나 비난을 퍼주었다. 그러다 푸념처럼 ‘다, 내 잘못이지 뭐!’ 하고 한숨을 쉰다. 알면서도 그런다는 소린데, 나는 저에게 더 깨지고 망가지시라, 하고 말하였다. 저주가 아닌 축복이었다.
성경은 뭐라 하실까?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빌 3:20-21).” 각자 알아서 살 일이지만, 그래서 나는 누가 자신의 아직 덜 완성한 글을 가져와 읽어보라 할 때, 저의 겸허함에 숙연해진다. 내가 뭐라고 나더러 먼저 읽어보라 하는 게 아니라, 이를 나눌 준비가 되었다는 데서 경이롭기까지 하다. 저마다 꿍치고 살지 누가 자신을 드러내려하겠나? 자고로 세상은 이를 미덕이라 가르치며 서로를 적당한 거리에서 ‘친절한 타인’으로나 대할 뿐이지 누가 같이 울고 같이 통회하고 자복하겠나? 우리는 이 땅의 사람이 아니다. 우리의 시민권은 여기에 있지 않다. 이 한 구절의 말씀이면 뭐든 좀 정리가 되지 않나?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벧후 3:13-14).” 그래, 그렇게 우리는 할 수 있는 만큼 힘쓸 따름이다. 누가 나를 마치 뭐나 된 듯 오해하고 듣겠는데, 나야말로 누구보다 연약하고 어리석고 미련하다. 늘 같은 일의 반복인데도 뭘 어찌 해야 할지 몰라 또다시 우왕좌왕하기 일쑤다. 하루라도 편한 날이 있었으면 좋겠다. 어디가 괜찮은가 하면 또 어디가 아프다. 여기가 좀 나은가 싶은데 저기로 인해 힘들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하루 이틀만 좀 개운한 몸과 마음이었으면 좋겠다. 그러니 옆에서 아내가 무릎 수술한 곳이 아프다며 부었는가 물을 때 나는 눌러보고 만져보다, 병원에 가보고 관리 잘하라고 이르는데 좋게 말이 안 나온다. 공격적인 나는 ‘나도 힘들어!’ 하고 무안을 준다. 변화된 나는 그래놓고 미안해서 ‘라파402’를 그 무릎에 얹어주고 열을 가한다.
하루에도 수차례 나의 이율배반적인 모습이 나로 환멸하게 한다. 그래서도 주의 은혜로밖에 살 수가 없다. “주의 말씀을 열면 빛이 비치어 우둔한 사람들을 깨닫게 하나이다(시 119:130).” 나의 우둔함이 나로 하여금 말씀으로밖에 달리 길이 없다는 데로 이끈다. 나의 실패와 지난날 용서하기 싫은 기억들이 주께로 나아가게 한다. 그렇게 “환난과 우환이 내게 미쳤으나 주의 계명은 나의 즐거움이니이다(143).” 이와 같은 역설의 삶이 우리 성도의 삶이 아닐까? 나는 누구의 변화를 믿지 않는다. 저에게 기대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저를 사랑하시고 돌보시는 주의 선하심을 안다. 나를 어찌 다루시고 포기하지 않으셨는지를 증거로 삼아 저를 위한다. 기어이 우리로 하여금 주의 이름 앞에 무릎 꿇게 하심이니,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 2:10-11).” 그러니 이제 어쩔 것인가?
나는 누구와의 통화에서 저에게 무안을 주려 한 소리가 아니라 더 깨지시라, 아예 망가지시라, 하고 말한 것은 그 지점에서부터 주의 이름을 부르며 잃어버린 신앙을 회복할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렇게 이제 “내가 주의 법도들을 택하였사오니 주의 손이 항상 나의 도움이 되게 하소서(시 119:173).”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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