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

전봉석 2021. 7. 24. 06:06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

히 2:18

 

내가 환난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내게 응답하셨도다 여호와여 거짓된 입술과 속이는 혀에서 내 생명을 건져 주소서

시 120:1-2

 

 

자기 노력으로 하나님께 받아들여지기를 바라는 모습을 의외로 자주 보게 된다. 때론 저의 열심이 저를 삼킨 것 같이 말이다. 보면 늘 신앙이 일이라, 안식을 누리기보다 노력형 신자 같다. 애써 수고하여 열심을 다하는데 저의 말을 듣다보면 너무 힘든 거라. 저에게 하나님은 폭군 같고 막무가내로 요구하시는 무시무시한 존재다. 저의 안에 기쁨이 없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믿음보다는 행위를, 신뢰보다는 공적을, 거저 받은 것보다는 노력을, 예배보다는 사역을 더 중요시하면서 정작 하나님과의 관계보다 자신의 성취를 늘 돌아보곤 하는 것 같다. 마치 과중한 업무에 시달리는 사람처럼 가정은 뒷전이고 함께 하는 가족들은 등한히 한다. 아이들은 엄마가 그립고 신랑은 아내의 빈자리를 겉돈다.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요 2:17).” 간혹 말씀을 받되 이를 묵상하지 못하면 그 의미가 무겁게 짓누른다. 한데 또한 이르시기를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롬 10:2).” 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3).” 힘쓴 게 허사인 것은 저의 열심이 저로 하여금 그릇 가게 한 것이 된다.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의 열심과 광명의 천사로 우리를 헷갈리게 하는 사탄의 열심이 서로 맞선다. 둘 다 열심을 다 해 주를 섬기는 것 같으나 하나는 어떤 불안으로 열심히 달리는 것이고 하나는 그 은혜의 상급을 갈망함으로 열심을 다하는 것이어서,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4).” 본질적으로는 완전히 서로 다른 것이다.

 

누구와의 대화에서 ‘그 와중에 교회 일까지?’ 하고 반문하는 나의 질문에 저는 되레 의아해하며 그게 목사가 할 소린가? 하는 뜨악한 표정이었다. 가뜩이나 아이 일로 친정과 시댁 일로 몸이 열 개여도 다하지 못할 상황인데… 나는 뭐라 말하지 못하고 듣기만 하였다. 그런데 저의 말 속에 이상한 게 한둘이 아니다. 그렇게 열심이면서 만족함이 없다. 감사도 없고 기쁨도 없다. 오로지 의무와 규율과 무자비한 요구만 넘쳐나는 인생 같다. 그러니 자신을 말하는 데 있어서는 열에 아홉이 자기비하의 말뿐이다. 내가 못나서 그렇지 뭐, 아직 내가 부족해서 그렇지 뭐, 내가 문제지 뭐 하는 식으로 자신은 여전히 용서받지 못했다. 마치 저를 보면 피할 수 없는 함정에 빠진 것 같다. 손을 뻗어 뭐든 돕고 싶은데 저의 고질적인 모순은 고집이다. 자기가 알아서 한다는 것이다. 이를 마치 고행처럼 여긴다.

 

오늘 말씀은 그런 우리를 도우시는 하나님에 대하여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히 2:18).” 하면 주께 모두 내려놓고 쉼을 얻었으면 좋겠는데… 나는 종종 누구와의 대화에서 지친다. 저는 결국 저의 할 말만 한다. 뭐라 듣기만 하면 서운해 하고 뭐라 일러 말하려 하면 온갖 변명뿐이다. 그러니 나야말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신세 같다. 솔직히 누구의 사연을 듣고 같이 나누고 기도하는 일은 고단하다. 서로 '즐거운 편지'처럼 즐거운 대화도 있다. 서로의 이야기에서 온통 하나님의 영광을 찬미하는 것이다. 이러저러한 서로의 삶에 대해 뭐라 할 게 없다. 그러는 중에 주가 함께 하심을 고백하는 게 목적이기 때문이다. 기도도 누구를 위한 중보기도는 기운 빠진다. 해도해도 끝이 없는, 밑 빠진 독 같다. 그런데 도고는 저로 인해 내가 기쁨에 찬다. 우리의 이야기가 주께 영광을 올리는 것이다. 서로는 주의 선하심을 붙든다. 내가 뭘 어찌 하려 하는 마음에서 놓여나는 것이다. 그런데 의외로 '다양한 완벽주의자'가 신앙이 좋은 사람처럼 보인다.

 

한 번은 어느 목사의 눈물어린 고백을 들었다. 저의 교회 앞에는 오토바이 대리점이 있었다. 늘 교회와 마찰이 생기는 것은 그곳에 들락거리는 청년들이 대부분 불량한 거라. 마구 쏟아지는 욕지기와 담배연기와 개조한 오토바이의 시끄러운 소음이 한데 뒤엉켜 언제나 이 목사의 심기를 건드렸겠다. 처음엔 음료수를 내다주며 부탁도 하고 서로 사이좋게 지내려 나름 노력을 하다 목사의 심기도 여간 불편해진 게 아니다. 서로 그러하니 보란 듯 일부러 더 그러는 것처럼 교회 주차나 찬양소리 등으로 저쪽은 저쪽대로 불만이 터져 나오고 이쪽은 이쪽대로 못마땅하던 터에, 어느 날 오후께 술에 취한 대리점 주인이 교회 뒷자리에 들어와 앉았다. 이를 본 목사는 인상부터 찌푸려졌다. 몸에는 문신으로 위협적이고 평소 소행이 괘씸하여 마음이 부드럽게 열리지 못했다. 무슨 일로 오셨는가? 물었더니 저의 첫 마디는 하나님이 진짜 있느냐? 하는 거였고, 저의 입에서 나는 술 냄새로 목사는 저를 차갑게 대하며 술 깨고 다시 오라, 하고 돌려보냈다. 그러느라 실랑이가 좀 있었지만 청년은 그런대로 조용히 물러갔다.

 

다음 날 저의 대리점 앞에 경찰차들이 오고 수사관이 들락거리는데 알고 봤더니 대리점 사장인 청년이 밤새 자살을 한 것이다. 뒤늦게 이를 전해들은 목사는 슬픔이 엄습하였고 마치 자신으로 인해 한 영혼이 아까운 목숨을 끊은 것 같은 죄책감마저 들었다. 자신은 스스로에게 그럴 수밖에 없었던 상황에 대해 변명하듯 되새기고 또 되새겨도 자신이 그때 저의 말을 좀 들어줄 걸, 같이 있으면서 주의 복음을 전하였으면 어땠을까? 하는 후회와 자책이 저를 휘감고 슬픔으로 몰아가는 것이었다. 나도 사실은 저의 이야기가 내내 마음에 남았다. 그래서 의무감으로 누구의 말을 거절하지 못하고 들어내는 경우도 많다. 감정적으로야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어쩌겠나? 어쩔 수 없는 것에 대하여 나의 책임을 운운하는 일 자체가 예수를 끌어내리고 그 십자가 위에 자신을 못 박으려 하는 것과 같다. 그럴 수도 없지만 그래봐야 소용도 없는 일을 두고 하는 소리다. 

 

우리의 열심이 때로는 우리를 얼마나 과중한 책임의 무게로 짓누르는지 모른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조건 없는 사랑을 주셨는데 우리는 자꾸 은혜의 값을 갚아야 할 것 같이 열심으로 애쓴다. 보면 이 모든 게 자기만족에 의한 것이다. “천사들이 이르되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이르되 사람들이 내 주님을 옮겨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요 10:13).” 우리는 도저히 부활의 주를 우리 이해와 의지로 받아들일 수 없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하시니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 알고 이르되 주여 당신이 옮겼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15).” 저가 내 앞에 내가 저 앞에 거함을 우리는 상식으로 알 길이 없다. “이 말을 하고 뒤로 돌이켜 예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으나 예수이신 줄은 알지 못하더라(14).” 보고도 보지 못하고 듣고도 듣지 못하는 것에 대하여 우리의 열심이 이를 가로막는다.

 

하여 누구에게는 자신의 수고가 삯을 받은 자의 수고처럼 지겹다. 누구 입에서는 온통 교회와 담임목사에 대한 이런저런 불만이 한 가득이다. 기쁨이 없다. 감사를 잃은 지 오래다. 저의 말로는 큰 교회의 모순이라고 정의하는데, 시스템대로 굴러갈 뿐이고 그 안에 자신은 일개 부속에 불과한 존재다. 나름은 사역자이나 사명감이 없다. 언제든 미치지 못하면 자신을 쫓겨나고 후임이 들어올 것이다. 여러 번 그런 경험을 하였다. 그러니 저와의 대화는 대부분이 불만이다. 자신이 섬기는 교회와 ‘이상한 성도들’과 이를 묵인하는 목사의 고집과 그 사이에서 그저 직원으로 일하는 자신의 신세에서까지. 그럴 바엔 차라리 일반 일자리(?)를 찾아보지 왜 굳이 교회 일인지 모르겠다. 그런 말을 몇 번 해주기도 한 것 같다. 그러다 또 오랜만에 통화가 되면 전에 교회에서 있었던 일과 같은 불만이 연거푸 되돌이표 같이 무한 반복적으로 불만을 토로한다.

 

어쩔 땐 우리의 감정이 또는 우리의 이성이 우리로 우리의 신앙을 성장하지 못하게 하는 원인임을 알 수 있다. 해결방법은 ‘빈 손 들고 앞에 가 십자가를 붙드네’ 하는 심정으로밖에는 다른 게 없다. 누구는 노동과 수고의 대가인 삯으로 받고 누구는 주가 넘치게 더하시는 분깃으로 받는다. 이를 은혜로 받지 못할 때 더한 어려움으로 자신을 몰고 갈뿐이다.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며 의로우시며 우리 하나님은 긍휼이 많으시도다(시 116:5).”

 

언제부턴가 나는 벌이가 없다. 소위 돈벌이를 하는 게 없다. 내 앞으로 들어오는 연금 얼마가 전부인데 그것도 모두 교회에 드린다. 누가 보내오는 후원 헌금 얼마씩이 모여 교회 임대료와 사택 임대료를 충당한다. 나는 늘 아내 카드나 딸애 카드를 쓰며 눈총을 듣는다. 세무서에 종교인 수입 신고를 할 때 나는 고민하다 문의를 하였다. 사정을 말하니 저는 그래도 0원이라도 쓰시죠, 하고 일러주었다. 전에 같으면 한심하고 부끄러운 일이었을 텐데 그럼에도 내 마음이 편하고 온전한 것은 그 이유를 알 수가 없다. 더는 처자식을 책임지지 않아도 되어서일까? 전에 가졌던 나의 필요충분조건과 요구들이 모두 사라졌다? 그런 것 같지는 않다. 나도 누구보다 허영에 허세가 많고 변덕이 심한 사람이라, 갖고 싶은 것도 먹고 싶은 것도 많다. 이를 부인하거나 마치 초월한 사람처럼 그려질까 봐 조심스럽다. 며칠 전 선생의 전화로 저의 근황을 들을 때 늘 같은 소리처럼 돈돈거리는 데서 사업가니 어쩌겠나 싶었다.

 

요즘은 내려놓는 연습을 한다. 네가 아는 누구도 요즘 많이 힘든지 밤에는 어디 편의점 야간 일을 하는 모양이더라, 하는 소식에 뭐라 할 말은 없었다. 한참 자기 이야기 후에 너는 어떠냐? 하고 물을 때 이런저런 어려움으로 치면 누구와 견주어서 뒤질 것 같지는 않지만 없으니 없어서 좋고 아프면 아파서 좋다고 하였다. 안 좋으면 또 어쩔 것인가? 그러자 선생은 네가 나보다 스승이다 하는데 나는 그저 픽, 하고 웃었다. 오랜만에 서로의 안부를 물을 때 같은 말이 되뇌어 나온다는 것은 그만큼 불신앙의 삶에 절어 있다는 증거다. 안 믿는 자로 살거나 믿기는 믿되 자기 열심으로 소진되어 가는 영혼이거나… 나는 문득 저들 앞에 멀뚱히 서 계신 부활의 예수님을 상상하였다. 널 위해 내가 죽었고 널 위해 내가 살아났는데, 여전히 나를 알아볼 수 없는 너희에 대하여… 예수님의 머쓱하심은 비로소 “막달라 마리아가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 하고 또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르니라(요 20:18).”

 

어쩌면 우리는 늘 이럴게 한 박자 늦을까? 결국은 사느라 사는 데 따른 난제 앞에 난감해질 때야 비로소 환난 중에 처한  억하심정을 가지고 주가 주이신 것을 알아보니! 그럼에도 “내가 환난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내게 응답하셨도다." 아, 이 얼마나 감사와 영광의 고백인가? 그러므로 "여호와여 거짓된 입술과 속이는 혀에서 내 생명을 건져 주소서(시 120:1-2).” 하는 기도가 날마다 절로 나온다. 오늘부터 ‘성전으로 올라가는 노래’로 그 첫 장이기도 한 오늘의 시편은 회개로 시작한다. 결국은 자신의 죄를 죄로 아는 데서부터다. 이를 도식화하는 것은 다르다. 마음에 두는 것과 토설하여 아뢰는 일은 전혀 다르다. 억하심정란 게 그야말로 도대체 무슨 마음인지 알 수 없는 마음 속의 마음을 일컫는다. 자신의 입에서 왜 자꾸 교회의 이런저런 문제만 늘어놓게 되는지, 내 곁의 누구에 대한 불만뿐인지, 자신이 하고 있는 말을 자신도 모를 때 우리는 가만히 십자가를 붙들어야 한다. 빈 손 들고 앞에 가야 한다.

 

빈 손 들고 앞에 가

십자가를 붙드네

의가 없는 자라도

도와주심 바라고

생명 샘에 나가니

나를 씻어 주소서

(새찬송가 494장 3절)

 

누구의 죽음 앞에 쩔쩔 맬 수밖에 없는 우리의 연약함으로, 자기의 열심을 마치 무슨 훈장처럼 가슴에 새겨야 할 것 같은 나의 어리석음으로, 다만 주 앞에 엎드리는 것이다.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히 2:18).” 그때에 우리는 반드시 알게 된다. “내가 환난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내게 응답하셨도다(시 120:1).” 곧 “여호와여 거짓된 입술과 속이는 혀에서 내 생명을 건져 주소서(2).” 나의 속절없는 아룀이 나로 하여금 주를 더욱 바라게 하심으로… “나는 화평을 원할지라도 내가 말할 때에 그들은 싸우려 하는도다(7).” 그와 같은 현실에서 “하나님은 나를 돕는 이시며 주께서는 내 생명을 붙들어 주시는 이시니이다(시 54:4).”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말하되

주는 나를 돕는 이시니

내가 무서워하지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하노라

(히 13:6),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