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되리라

전봉석 2021. 7. 25. 05:09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신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고 있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되리라

히 3:14

 

여호와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하게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 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

시 121:7-8

 

 

무더위가 연일 맹위를 떨치는 날들이다. 집안에서도 종일 에어컨을 돌리지 않으면 살 수가 없을 정도이다. 그런 거 보면 에어컨이 신박한 것 같다. 그 안에 있으면 바깥과는 다른 세상이다. 더위를 많이 타는 아들 덕에 삼복더위에 자면서도 이불을 덥고 자야 할 정도이니, 이를 좋다 해야 할지. 가만히 보면 에어컨은 자기들만의 문화적 이기다. 여기서 저기를 구획한다. 그어진 선 밖으로 나가면 무더위는 한층 더한다. 숨이 더욱 막히는 것은 실외기로 인한 온도상승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니 나만 시원하고 볼 일이다. 세상이 어떻든지, 남이야 어쩌든지, 여기서 저기까지의 구획은 꼭꼭 닫은 문으로도 벽을 쌓는다. 들고 나는 세계가 확연히 다른 것이다. 이를 어찌 받아야 할까?

 

오늘 본문이 마음에 걸린다.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신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고 있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되리라(히 3:14).” 나는 말씀 전하는 자로 부르심을 받을 때 유난을 떨었다. 그게 그렇게 싫어서 멀리 도망치고 회피하며 살았다. 그럴 때마다 하나님의 강권하심은 포기하심이 없었다. 어릴 적, 세례를 받으며 어린것이 뭘 안다고 주의 부르심에 응하였다. 주의 사역자가 되겠다가 서원한 것이다. 그러던 게 이런저런 사연으로 미루게 되고 싫어졌다. 87학번으로 신학교를 갔어야 할 때에 문창과로 갔다. 글 쓰는 친구들과 어울리는 일은 즐거웠다. 저들의 객기어린 행동과 어설픈 주장에 매료되었다. 10년의 세월이 훌쩍 흘러 97학번을 신학교 학부로 편입을 했다. 이때의 기이한 일은 몇 번을 언급할 때마다 희한하기만 하다.

 

어느 글 쓰는 모임에서 알게 된 아주머니다. 그이가 몇 편의 내 글을 읽고 어떠한 마음으로 그랬는지, 볼 때마다 신학을 하시라 종용하는 것이다. 그때 나는 교회 개척과 건축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부모와 각 교회의 사역자로 고생하는 형제들의 모습을 보며 치를 떨고 있을 때였다. 저들의 어려움을 무책임과 무능함의 이유로 돌렸다. 나는 저이에게 그런 이야기도 했다. 그래서도 그럴 여력이 없다고 사양했다. 하지만 저이는 끝내 나의 학비를 모두 감당하면서까지 기어이 신학교에 편입을 하게 하여, 학부 4학기와 신대원 학사 과정 한 학기의 등록금을 지원하였다. 그러다 결국 또 이 길은 내 길이 아니라며 주저앉자 우리의 관계는 자연스럽게 소원해졌다. 그리고 다시 09학번으로 신대원으로 끌려오기까지 산전수전 겪은 일이 참 많다.

 

어느 장애인단체의 기획실장 일을 볼 때의 환멸과 모멸은 나의 영혼을 지치게 하였고, 연애를 꿈꾸며 글을 쓴답시고 어울리는 사람들과의 관계는 질척거리며 죄의 길도 아랑곳하지 않게 하였다. 이내 어떤 우울감이 급습하고 몇 번의 자살충동과 실제의 미수가 불발되면서 기어이 하나님은 나를 다시 끌어다 신대원에 처박으셨다. 그러기 위해 파산을 겪게 하심으로 나의 날개를 끊어놓으셨고, 우상과 같은 아들에 대한 희망을 꺾어 멀리 필리핀으로 떨어뜨려버리셨다. 그뿐인가? 싫든 좋든 의존하게 되는 나의 부모는 결국 교회 건축이 파국으로 치달아 모두 빚으로 청산하고 빈털터리가 되어 미국 어느 교회로 초빙 받아 멀리 떠나버리게 하셨다. 그야말로 산전수전, 산에서도 싸우고 물에서도 싸우다 이내 온갖 고생을 겪다 겪다 두 손 두 발 다 들고, 빈 손 들고 돌아온 셈이다.

 

이와 같은 글쓰기로는 모든 사연을 담을 수 없다. 그럼에도 나는 이를 회상함이 나로 시작할 때에 확신을 갖게 하셨던, 그 어쩔 수 없음을 돌이켜 상기하는 것이다. 이는 “여호와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하게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 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시 121:7-8).” 하는 말씀의 응함이다. 늘 자살충동에 시달리다 급 죽을 것 같은 두려움은 어찌 말로다 설명하기 어렵다. 앞의 죽음은 이생에서의 삶이 지긋지긋하여 그만 살았으면 하는 것이었다면 뒤의 죽음은 그러다 영원한 죽음의 형벌에 놓이게 될까 하는 두려움이었다. 기어이 주는 나를 주 앞에 세우셨고 말씀 전하는 자로 두셨다. ‘한 영혼을 소중히 여기는 목회자’가 되겠다고 목사고시 면접관 앞에서 다짐한 이후 나의 소명은 그것의 소중함을 지금도 되새기곤 한다.

 

주일 예배 시간에 알바가 잡혀 줌으로나마 예배드리는 것을 같이 하지 못할 것 같다며, 아이는 죄송한 마음으로 문자를 했다. 저의 이런저런 사정을 모르는 바 아닌데 뭐라 해야 할지… 그래서 월요일에 따로 와서 예배를 드리기로 하였다. 아이는 기꺼이 응하였고 나는 저의 순순한 태도가 기이할 정도로 기특하였다. 여기서 오늘 본문을 그리 읽는다.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히 3:1).” 우리는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다. ‘예수를 깊이 생각하자.’ 마음 한편으로는 귀찮기도 하고 월요일은 그냥 쉬고 싶기만 한 날인데, 내 마음에나 저의 마음에 두시는 마음이 정녕 우리들의 것이겠나?

 

말은 듣는 이의 것이고 글은 읽는 이의 것이다. 말도 글도 상대가 없으면 사어(死語)가 된다. 읽혀지지 않는 글은 슬프고 듣는 이 없는 말은 공허하다. 나는 나로 감당하게 하는 정도로 족하다. 엄연히 나는 말씀 전하는 자로 세우심을 받았다. 느닷없이 누가 연결이 된다. 어떤 일로 저의 사연을 듣거나 보게 하신다. 이를 두고 우리는 웃거나 울며 교류가 시작된다. 이때 남의 이야기에 대한 관심은 자기 이야기를 드러내는 사람의 몫이다. 자기 속을 드러내지 않는 빈말은 남의 이야기도 빈말로나 듣는다. 빈말이란 웃자고 하는 말처럼 듣고 말면 잊어버려도 무방한 말이다. 말의 가치가 없다. 역설적이게도 자기 이야기를 그리 취급하는 자의 습성이다.

 

말이 듣는 자의 것이라 하면 저에게 전하는 이의 몫은 거기까지다. 듣고도 듣지 못하는 것은 창을 닫고 커튼이나 칸막이로 이중삼중 볕을 막아야 하는 에어컨의 속성과 닮았다. 내 안의 나는 괜찮다. 아무리 덥다 하고 더위가 연일 기록적인 온도로 맹위를 떨친다 해도, 자기 안의 세계는 시원하고 좋은 별천지 같다. 종종 길을 걷다 가게에서 내어둔 실외기의 뜨거운 바람은 사람을 불쾌하게 하고 피해서 돌아가게 한다. 하지만 그 안의 사람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상대적으로 부채는 좀 다르다. 하루는 손을 휘저으며 연신 부채질을 하며 누가 앞서 걷고 있는데 그 뒤를 따르던 나에게도 저의 시원한 바람이 끼쳐왔다. 비록 그 바람은 금세 뜨거운 열기로 시들할 뿐이지만, 우리에게 두시는 사명이란 에어컨처럼 자기만 좋으면 그만인 게 아니라 부채처럼 손을 저어 흔듦으로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바람을 일으켜야 하는 일은 아닐까?

 

아무리 저가 한 명이고 또는 한 가정이고, 서로가 인친척이거나 잘 아는 사이라 해도 말씀을 전하는 자로서의 사명은 저의 예배에도 관여해야 하는 소명이 있다. 앞서 누구에게도 비슷한 제안을 하였다. 코로나 확산으로 인해 저의 교회는 유튜브로 예배 영상을 올려두고 언제든지 열어서 예배에 참여할 수 있게 하였다. 그런데 또 단점은 이게 실시간이 아니다보니 늘어지게 늦잠을 자고 오후께나 또는 자신의 시간이 허용될 때 열어본다는 것인데, 그 마음가짐이란 게…. 하여 이래저래 만나지는 못하지만 같이 실시간 온라인으로 예배를 드리겠나? 권하였다. 그런데 답은 없고 반응은 미진하여 더는 권하지 않았다. 나는 전하는 자로 세우심을 받았지 누구를 강제하고 억압하는 사람으로는 아니다. 하나님도 우리를 강제하지 않으신다.

 

강권하심과 강제하심은 다르다. 강제한다는 것은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강권하심이란 그럼에도 누군 이 길로 누구는 저 길로 선택을 달리할 수 있고, 이를 허용하신다. 그렇게 나의 인생은 얼추 십년 세월씩 껑충껑충 소모되고 소진되다 뒤늦게야 빈손 들고 주 앞에 서게 된 셈이다. 곧 “집마다 지은 이가 있으니 만물을 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라(히 3:4).” 그렇게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집을 맡은 아들로서 그와 같이 하셨으니 우리가 소망의 확신과 자랑을 끝까지 굳게 잡고 있으면 우리는 그의 집이라(6).” 이에 산 증인이시고 오늘 우리로도 그 증인 삼으신 게 된다. 더욱이 말씀 전하는 자로 세우심을 받는다는 일은 각별한 은사다. 물론 여러 직분이 있고 각각의 지체가 다 다르나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내주어 불법에 이른 것 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내주어 거룩함에 이르라(롬 6:19).”

 

이를 받아 그 말씀에 응하는 삶이란 다른 무엇보다 우선하는 일이 된다. “그러므로 성령이 이르신 바와 같이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광야에서 시험하던 날에 거역하던 것 같이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히 3:7-8).” 언제든 나는 내가 옳다고 여길 수 있다. 어쩔 수 없는 것이 산적한 일로 우선순위가 달라지고 옳고 그름의 판단을 유보하는 경우도 흔하다. 더위가 기승을 부릴수록 저마다 문을 꼭꼭 닫고 그 안에 있기를 원하듯이, “거기서 너희 열조가 나를 시험하여 증험하고 사십 년 동안 나의 행사를 보았느니라(9).” 살아오면서 이를 경험한 자로서는 스스로의 죄악 됨을 수시로 묵상한다. 하여 “형제들아 너희는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한 마음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조심할 것이요!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12-13).”

 

실은 애나 어른이나 싫은 소릴 싫어한다. 자기 뜻과 맞지 않으면 경계한다. 어디 문이 열리거나 실외기가 꺼지면 에어컨은 잠시도 더운 기운을 주체할 길 없다. 남들이 뭐라 하든, 남은 어떻든지, 자신이 이야기에 관여하지 않으면 남의 이야기에는 관심도 없다. 예수님은 그런 우리를 불러 앉히고 떡과 포도주를 떼시며 자신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라고 하신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요 6:53).”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가 우리에게 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다.’ 그러므로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54-55).” 이를 나의 이야기로 투영하여 누구에게 들려줘야 한다. 나의 이야기에서 하나님의 이야기가 읽혀질 수 있도록, 때론 그 일이 살을 떼고 피를 쏟는 일과 같이 고통스러운 것이겠으나.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에 대하여 죄를 짓는 것이니라(고전 11:27).” 이를 내 이야기로 가져오면 말씀을 전하는 자로 부르심을 받고 말씀을 전하는 일에 있어 이를 위하고 준비하고 나누어 누구에게 들려주고 읽혀지지 않는다면, 그 일을 소홀히 하거나 경이 여겨 가벼운 일로 치부한다면, “주의 몸을 분별하지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29).” 결국은 주의 몸을 분별하지 못하고 먹고 마시는 일과 같다. 내 앞에 한 영혼을 두셨다. 저가 나의 처이거나 아들딸일 수 있고, 아무리 해봐야 소용없을 것 같은 누구의 어떤 일을 두고 내가 왈가왈부할 게 못된다. 나는 다만 말씀을 전하는 자로 세우심을 받았지, 저를 위해 내가 십자가에 달려 죽는다 한들?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준다 한들? 나에게 맡기신 선은 말씀 전하는 자로서이다.

 

이에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신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고 있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되리라(히 3:14).” 엄연히 내가 시작한 일이 아니다.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빌 1:6).” 그러므로 나는 누가 들고 나는 일에 연연해하기보다 이번에는 이 한 영혼으로 족하다. 다음의 일은 내가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이라 분에 넘친다. 내게도 그러하셨고 수천 년 전 주인에게 쫓겨난 하갈에게도 말씀 전하는 자를 세우심으로, ‘네가 어디서 왔느냐?’, ‘네가 어디 있느냐?’, ‘네가 어디로 가느냐?’ 하고 물으셨다. “여호와의 사자가 광야의 샘물 곁 곧 술 길 샘 곁에서 그를 만나 이르되 사래의 여종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 그가 이르되 나는 내 여주인 사래를 피하여 도망하나이다(창 16:7-8).” 나는 물을 뿐이고 전할 따름이다. “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되 네 여주인에게로 돌아가서 그 수하에 복종하라(9).”

 

이생을 살며 우리는 수시로 도움을 구한다. 두리번거리며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시 121:1).” 여기저기 도움을 줄만한 높다란 산이 많다. 회개하고 주의 종이 된 뒤의 일이다. “내가 환난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내게 응답하셨도다(120:1).” 한동안 나는 내가 그리는 목회를 꿈꾸었다. 교회란 이런 거야! 하고 나름 가지고 있던 나의 주관과 바람이 있었다. 그런데 목사 안수를 받고 난 뒤 거짓말처럼 글방의 아이들은 빠져나갔다. 나는 그때 내가 아는 아이들이 모두 증발된 게 아닐까? 하고 의아했다. 이러려고 목사를 만드셨나? 이 길이 맞나? 당장 내 손으로 벌던 모든 수입이 끊어지고 근근이 월세를 감당하는 일조차 어려워졌다. 목사가 되었어도 세상은 여전하였다. 그뿐인가? 일부러 그러시는 게 분명하다 싶게 나로 꼼짝 못하게 붙들어 앉히셨다. 그러니 할 게 없어 말씀을 읽고, 설교원고를 쓰고, 오늘까지도 이처럼 묵상글을 쓴다.

 

쓰다 쓰다 별의 별 이야기를 다 쓴다 싶을 정도로 나의 이야기가 드러나면서 그제야 알았다. 내 이야기 외에 남의 이야기가 있었다는 것을 말이다. 큰아이 나이 수만큼 긴 세월을 아이들과 같이 글쓰기를 가르치면서 내가 언제 저 아이들의 이야기에 관심이나 있었던가? 그때라고 왜 죽고 싶은 아이가 없었겠으며 틱이니, 우울이니, 분노조절, 감정조절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아이들이 없었겠나? 그때에 저들은 내게 그저 밥벌이일 뿐이었고, 김훈의 수필처럼 ‘밥벌이의 지겨움’으로서밖에 별 의미가 없었다. 그러다보니 겉으로는 잘난 아이들이 모였고, 이런저런 좋은 성적과 좋은 대학에 들어가면서 글방은 마치 그 일대에서 ‘소문난 점집’처럼 주목받는 곳이 되었다. 늘 빈 수업 시간을 기다리며 대기하고 있는 팀들이 있었으니까! 지금은 믿기지 않지만 그때는 수업이 새벽 두 시에 끝나는 팀도 있었고, 토요일과 일요일 오후는 별도의 할증을 붙일 정도로 교육비도 차이가 있었다. 그런들, 나는 알지 못했다.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 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히 12:5).” 이후 나에게 닥친 이런저런 사연을 이제 나는 사랑한다. 그것으로 하나님은 나로 하여금 돌이켜 주의 말씀을 전하는 자로 세우셨으니,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7).” 이런저런 마음에 빚진 자로 산다. 나는 갚을 길 없어,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시 121:2).” 이를 되뇌며 주의 선하심을 날마다 되새기는 날이 복이 되었다. 이에 “여호와께서 너를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이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4).” 저는 결코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으신다. 그리하여,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이시라

여호와께서 네 오른쪽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낮의 해가 너를 상하게 하지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지 아니하리로다

 

여호와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하게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

 

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

(시 121:6-8),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