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므로 우리가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 또는 감사하자
히 12:28
밭 가는 자들이 내 등을 갈아 그 고랑을 길게 지었도다 여호와께서는 의로우사 악인들의 줄을 끊으셨도다
시 129:3-4
시편으로 말씀을 준비할 때면, 우리의 감정은 참 대단한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한때 나는 시인이 꿈이었다. 그런데 마음에 가진 말이 많아서였을까? 마음은 맑지 못했고, 하고 싶은 말은 많아서, 시어로 응축되지 못한 마음은 저 혼자 궁싯거리기 일쑤였다. 그때는 알지 못했다. 우리의 감정은 영혼의 부르짖음이고, 마음은 사무쳐 곧은 목소리를 내지 못한다. 시편 62편을 돌아오는 주일 설교원고로 묵상하다, 나는 다윗의 심정을 알 길이 없어 멈칫하였다. 61편에 이어 압살롬의 반역을 피해 요단 동편 마하나님에 숨어 지은 시편의 연장이다. 그 심정이 어떠했을까? 아들에게 쫓겨 목숨을 은신하고 있을 때에 저의 괴로움과 비통함이 하나님께 구원을 바란다. 나는 저의 심경을 헤아리려다 어려웠다.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오는도다(시 62:1).” 다른 그 무엇도 바랄 수 없는 심정, 예수께서 우리에게 바라셨던 ‘심령의 가난’은 이런 게 아니었을까? 그리고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이르시되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눅 6:20).” 이는 실제의 어려움이다. 가난은 모든 연약함을 응축한다. 이때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고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 때문에 불평하지 말지어다(시 37:7).” 아, 성경의 길라잡이가 새삼 놀라우시다. 어려움은 곧 불평으로 이어지게 돼 있다. 그런데 “너희가 돌이켜 조용히 있어야 구원을 얻을 것이요, 잠잠하고 신뢰하여야 힘을 얻을 것이거늘” 하시는 경고의 말씀이 들리는 듯하다(사 30:15).
그런데 누가 이를 원하겠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고, 이르기를 아니라 우리가 말 타고 도망하리라 하였으므로 너희가 도망할 것이요 또 이르기를 우리가 빠른 짐승을 타리라 하였으므로 너희를 쫓는 자들이 빠르리니, 한 사람이 꾸짖은즉 천 사람이 도망하겠고 다섯이 꾸짖은즉 너희가 다 도망하고 너희 남은 자는 겨우 산 꼭대기의 깃대 같겠고 산마루 위의 기치 같으리라 하셨느니라(사 30:15-17).” 말씀이 말씀으로 이어질 때의 감격과 충격은 동일하다. 조용히 있고 잠잠히 신뢰하여야 하는데, 그게 그렇게 어려운 까닭은 우리 안의 감정 때문이다. 곧 오늘 나의 부정적인 감정이 하나님의 선하심을 더욱 선하시게 한다. 나의 더럽고 추한 마음이 주의 의로우심과 깨끗하심으로 눈이 부시다. 그처럼 “사람이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애 3:26).”
이 또한 주가 주시는 마음이 그렇지 아니하면 어찌 감당이 안 된다. 내 안의 아우성은 소리 없는 함성 같다. 한데 바울은 자신의 이와 같은 연약함에서 그리스도의 능력이 나타난다고 하니,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 12:9).” 무의식적으로도 저마다 자신의 약함을 숨기고 또는 왜곡하여 다른 모습으로 위선하며 거짓된 마음과 일시적인 만족함으로 하루하루 살아가는 지경에 ‘내 은혜가 족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심지어는 그 속에서 그리스도의 능력이 온전하여지신다니! 이를 앎으로 오히려 자신의 ‘가난’ 어떤 어려운 낭패를 도리어 크게 기뻐하고 자란다?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싶은데 다윗의 진술은 가능함을 입증하고 있었다.
“오직 그만이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요새이시니 내가 크게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시 62:2).” 다른 무엇, 어떤 위로로도 주의 말씀으로만 귀를 기울이는 삶이란, “나 곧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구원자가 없느니라(사 43:11).” 마치 우리 안의 어떤 억울한 심경이 이와 같은 소리를 내밀하게 저장하고 있는 듯하다. 하나님을 바로 알려면 자신의 감정에 솔직해야 한다. 그 감정과 씨름해야 하고 이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게 아니다. 악의 권세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엡 6:12).” 나 혼자 어찌 해보려던 마음이 은폐였고 위선이었고 거듭되는 낭패였다. 어떤 불만과 좌절이 실제로 나를 지배하고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알려면 마주해야 하고 마주하려면 고통스럽다. 그러니 열에 아홉은 덮어버린다. 카펫 밑으로 쓸어버리고 덮는다. 다 치운 줄 알고 산다.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니까 남을 사랑할 줄 모르고, 자신을 용서하지 않음으로 남의 일에 관심이 없다. 그저 다들 사는 데 급급하여 먹고 사는 일에 정신이 팔려 있을 동안에 묵은 우리의 감정은 썩어 들어가 남은 생을 위협하고 영생의 삶을 말살하려 든다. 다윗은 이를, “넘어지는 담과 흔들리는 울타리 같이 사람을 죽이려고 너희가 일제히 공격하기를 언제까지 하려느냐(시 62:3).” 이를 나는 중의적인 표현으로 읽었다. 자신이 처한 위기에 대한 진술이면서 실제 그것이 무엇이든 공격당하는 것은 결국 내면에 주를 온전히 사랑함이었다. 그럴 때 우리의 유익은 기억이다. 하나님이 나의 생을 어찌도 농밀하게 다루시고 함께 하셨는지,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신 8:2).”
곧 오늘 히브리서의 말씀처럼 ‘징계가 없으면 도리어 사생자다. 아들이 아니다.’ 주는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신다. 곧 내 안의 묵은 감정이 고약한 냄새를 내기 시작하고 썩어서 다른 장기들을 위협할 때에야 자각하게 되는 악성 종양과 같다. 희한하지? 아프지 않으면 손이 안 간다.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벧전 1:6-7).” 성경은 일관되게 우리의 어려움이 가지는 긍정적인 면을 보이시는 것 같다.
먼저는 그것으로 악을 멀리하게 하기 때문이겠다. “그들이 그를 그의 높은 자리에서 떨어뜨리기만 꾀하고 거짓을 즐겨 하니 입으로는 축복이요 속으로는 저주로다 (셀라)(시 62:4).” 곧 내가 악함을 분별하기 시작하면서 내 안의 동일한 악의를 경멸할 수 있게 된다. 한데 그 유혹은 참으로 견디기 어려운 것이어서 섣불리 마다할 수 없어 속수무책일 때가 많다. “대저 음녀의 입술은 꿀을 떨어뜨리며 그의 입은 기름보다 미끄러우나 나중은 쑥 같이 쓰고 두 날 가진 칼 같이 날카로우며 그의 발은 사지로 내려가며 그의 걸음은 스올로 나아가나니 그는 생명의 평탄한 길을 찾지 못하며 자기 길이 든든하지 못하여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느니라(잠 5:3-6).” 그러니 생의 가장 무서운 결과는 갈 데까지 가 본 삶이 아닐까? 기어이 광야 40년을 돌아야 하고, 기어이 요단 앞에서 쭈뼛거리다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를 거절하는 어느 족속과 같이 “이는 너희 손이 피에, 너희 손가락이 죄악에 더러워졌으며 너희 입술은 거짓을 말하며 너희 혀는 악독을 냄이라(사 59:3).”
‘설마가 사람 잡는다’는 말처럼 무심한 진리도 없다. 그저 농담으로나 듣고 마는 자들처럼 스스로에게 속아 ‘별 것도 아닌 걸’ 하는 자신을 두고 회심의 미소를 지을 때, “백성들아 시시로 그를 의지하고 그의 앞에 마음을 토하라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셀라)(시 62:5).” 다윗은 이 놀라운 은혜를 깨달았고 알리며 같이 할 것을 종용하고 있는 것이다. “여호와여 구하오니 내가 진실과 전심으로 주 앞에 행하며 주께서 보시기에 선하게 행한 것을 기억하옵소서 하고 히스기야가 심히 통곡하더라(왕하 20:3).” 결국 죽음을 목전에 두고서야 이와 같은 통곡으로 자신을 돌아봐야 한다면 다시 주어진 19년의 저의 생이 과연 축복이기만 한 것일까? 사람으로 사는 날들을 너무 의지할 것 없다. 누구도 서로의 마음과 그 감정을 책임질 수 없다. 사랑하는 이일수록 때론 나의 영혼의 난제다. 도무지 어찌 해야 할지, 감당이 안 된다. “아, 슬프도다 사람은 입김이며 인생도 속임수이니 저울에 달면 그들은 입김보다 가벼우리로다(시 62:9).”
그래봐야 우리 생이 한 줌 무게도 아닌 것을 두고 우린 얼마나 아등바등 살아가고 있는 것인지. 그러할 때에 “귀인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그의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그 날에 그의 생각이 소멸하리로다(146:3-4).” 다 똑같다. 우리 모두는 이 땅에서 일시적인 존재들일 뿐이다. 그런 관계, 그런 정도가 전부인데도 나는 과연 무엇을 의지하고 위로함을 얻으며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사랑하는 아내? 장성하여 보람되게 자라난 자식들? 나의 믿을만한 친구들? 성경은 일관되게 경고하고 계신 것이다.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셈할 가치가 어디 있느냐(사 2:22).” 곧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고후 1:9).”
그러니 또 사람 믿을 게 없다면서 취하는 게 돈이다. 이는 “포악을 의지하지 말며 탈취한 것으로 허망하여지지 말며 재물이 늘어도 거기에 마음을 두지 말지어다(시 62:10).” 그야말로 ‘아사리판’이 따로 없는 정치판을 보면서 저들의 명분과 말씨름과 상대를 공격할 때의 비열함 앞에 치를 떤다. 동지는 무슨? 그러니 다들 돈을 좇는 것이고, 그러나 “재물은 진노하시는 날에 무익하나 공의는 죽음에서 건지느니라(잠 11:4).” 과연 우리가 바랄 공의는 무엇일까? 결국 “자기의 재물을 의지하는 자는 패망하려니와 의인은 푸른 잎사귀 같아서 번성하리라(11:28).” 주가 나를 의롭다 하심이었다. 믿음으로 말이다. 결국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딤전 6:17-18).”
내가 나의 감정, 마음에 귀를 기울이는 까닭은, “하나님이 한두 번 하신 말씀을 내가 들었나니 권능은 하나님께 속하였다 하셨도다 주여 인자함은 주께 속하오니 주께서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심이니이다(시 62:11-12).” 오직 주만이 나의 구주가 되심을. 다만 나는 주를 바라며 나의 속된 감정과 더러운 마음을 주 앞에 드러내기 위하여 말씀에 시선을 두고 마음에 귀를 기울인다. “내가 주께 범죄하지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119:11).” 이때에 오늘 말씀이 내 손을 이끄시며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히 12:3).”
때론 나 혼자 이러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일 때, 아니었다. 나와 같은 허다한 믿음의 무리들이 앞서 달리고 있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1-2).” 오늘의 말씀을 되새기며, 당장은 고역이라 힘에 겨울 수 있으나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11).” 그 열매에 대한 소망을 붙든다. “그러므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 길을 만들어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라(12-13).” 이를 위하여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14).”
이를 위해서도 내 안의 쓴 뿌리는 제거돼야 한다. “너희는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없도록 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여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럽게 되지 않게 하며(15).” 이를 그대로 방치하고, 괜찮은 듯 외면하고 사는 동안에는 오히려 하나님과의 관계도 소원하고 미지근할 뿐이다. 용기를 내어, “그러므로 우리가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 또는 감사하자(28).” 결국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라(29).” 이를 두려워하면서도 감사함으로 여기는 경외함이 나를 붙드신다. 비록 나의 기억들, 어떤 감정은… “그들이 내가 어릴 때부터 여러 번 나를 괴롭혔으나 나를 이기지 못하였도다(시 129:2).” 그렇지. 나는 오늘 시편에 동감한다. 이는 고역이어서 “밭 가는 자들이 내 등을 갈아 그 고랑을 길게 지었도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의로우사 악인들의 줄을 끊으셨도다(3, 4).”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오는도다(시 62:1).”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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