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전봉석 2021. 8. 5. 05:15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약 1:4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하지 아니하고 내 눈이 오만하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 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시 131:1

 

 

은혜는 모두의 것이 아니다. 상대적인 것도 아니다. 함께 있었다고 해서 같이 누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가령 나는 저로 인하여 주의 은혜에 감격하였고 더하신 마음으로 충만하였는데, 정작 저에게는 그 일이 ‘그럴 수 있는 일’로 치부될 수도 있다. 그저 그럴 수 있는 일, 예사로 여겨져 버리는 은혜는 지고 마는 하루 햇살처럼 허망할 따름이다. 오늘 시편은 이에 맞서듯 ‘그럴 수밖에 없는 일’로서의 은혜에 대하여,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하지 아니하고 내 눈이 오만하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 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아니하나이다(시 131:1).” 하고 주가 더하시는 평안을 붙든다. 스스로를 자신을 쳐서 자기를 복종시키겠다는 바울 사도의 다짐과도 일치한다.

 

우리가 그럴 수 있는 것은 “실로 내가 내 영혼으로 고요하고 평온하게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의 어머니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영혼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2).” 하고 이어지는 시인의 진술과 같다. ‘실로 내가 내 영혼으로 고요하고 평온하게 하기를’ 즉 이는 매우 의지적인 관여이고 참여이다. 은혜란 어쩌다 그리 되는 일의 결과가 아니라 우리 의지의 산물로 주시는 이의 품에 자신의 의지로 안기는 ‘젖 뗀 아이’의 결의다. 젖 뗀 아이는 나름 자기 판단에 따른 필사적인 마음이 있다. 누가 오라고 손을 뻗을 때 이를 뿌리치고 더욱 엄마의 품에 안길 수 있는,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마 18:4).” 곧 하나님 아버지가 아니면 안 되겠다고 하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그 곳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고(막 10:15).” 이때의 어린 아이는 자신의 의지로 더욱 필사적인 것이다.

 

이를 두고 누구는 아직 어려서 그렇다고 하면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 1:14-15).” 시쳇말로 해본 놈이 유혹에도 약하다. 담배를 펴 본 사람이 흡연욕구에 시달리고, 뇌물이나 부정한 것의 유익을 맛본 사람이 이를 뿌리치기 어려운 것과 같겠다. 젖 뗀 아이, 어린 아이는 순전함으로 다만 그것으로 족한 줄을 안다. ‘가난한 자, 심령이 가난한 자’는 그와 같이 ‘하나님만으로 충만한 만족’으로 천국을 채우셨다. 그런데 겨우 몇 해를 살았다고 자기감정과 느낌에 더 충실해야 한다고들 하는 것인지. 그런 거 보면 우리 안의 감정이란 우리가 살아온 날들을 축소하여 그려놓은 지도 같단 생각도 한다. 어떤 일에 괜한 서운함이 일고, 무엇으로 인해 나 혼자 들떠 온갖 기대를 하다 훅, 하고 꺼져버릴 때의 먹먹함에 대하여는 아무리 경험해도 익숙해지지가 않는다.

 

모처럼 마음잡고 뭔가 좀 해보려고 하는데, 나름은 한다고 하는데 일이 자꾸 꼬인다. 그러려고 그런 게 아닌데 오히려 이런저런 일로 가족들은 힘들어하고, 외면하고, 더욱 실망만 안겨주는 것 같으니… 누구의 이런저런 일을 듣다 안타까움에 저절로 같이 한숨을 쉬었다. 거기에는 적잖은 돈이 허공에서 사라지는 일이라, 그 여파는 당장 모두의 근심이 되어 노여움을 돋우는 일이 되었다. 잘해보려 한 것인데 그러니 어쩌면 좋을까… 내일 갈게요! 하는 풀 죽은 목소리에 그러하고 하고는 덩달아 마음이 좋지 않았다. 어떤 일, 그 모든 상황은 그리 단순하지가 못하다. 그때에 말씀이 주시는 교훈은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오는도다(시 62:1).” 이와 같은 진리를 어찌 말로다 설명해줄 수 있을까?

 

마침 설교원고를 작성 중에 전화를 받았고, 순간 머리를 스치는 한 가지 사실이 있었으니 ‘사고중지!’ 즉 생각하기를 멈추기. 다만 위기의 순간에 하나님만 바라기. 오늘 시편의 주제처럼 젖 뗀 아이가 고요와 평온을 얻으려 엄마의 품에 안기는 것처럼. 어느 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물으셨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생각하느냐?” 앞서 “사람이 나를 뭐라 하느냐?” 하시는 질문은 의도적인 것이었다. 그때에 사람들의 대답은 “이르되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마 16:14).” 하고 제자들이 대답했다. 예수님은 그게 궁금하셨던 게 아니다.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15).” 이때의 베드로의 기가 막힌 정답이 나온다.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16).” 이 얼마나 놀라운 고백인가?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17).” 곧 이를 알게 하신 이가 따로 있다. 저들, 다른 사람들은 이와 같은 사실을 알 수 없고 그 대답 또한 그럴 수밖에 없음을 동시에 함축하신 평가다. 이쯤 되면 제자들에게 앞으로 자신이 당하실 일과 그 일의 의미를 말해주어도 되겠다 생각하시고,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21).” 다들 그 충격이 어떠했겠나? ‘주는 그리스도시오’, 곧 왕이나 제사장과 같이 기름부음을 받은 자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하는 고백으로 ‘천국 열쇠’까지 받았는데…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19).” 이 어찌 말도 안 되는 일을 하시겠단 말인가!

 

그럴 때 생각이 많아지면서,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22).” 앞뒤가 안 맞고, 이치적으로도 맞지 않는 일로 이를 그냥 용납할 수는 없는… 그런 현상들이 우리가 사는 동안에 얼마나 비일비재로 일어나곤 하는지. 그러나 주님은 단호하셨다.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23).” 한 장에 너무 극적인 장면이 요동치고 있어 덩달아 속이 다 울렁거리는 듯하다. 저의 고백을 반석으로 두어 주의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하시고는,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18).” 졸지에 저는 음부의 권세로 불리며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하고 엄히 대하시는 것을 본다.

 

어떤 일, 어떻게 이런 일이… 싶을 정도로 사람을 혼란스럽게 하는 일을 맞닥뜨렸을 때에 우리는 잠깐! 생각하기를 멈추기. 그리고 ‘젖 뗀 아이가 엄마 품에 안기는 것 같이 오직 주만을 바라며 그의 선하심에 모든 일을 맡기기.’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고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 때문에 불평하지 말지어다(시 37:7).” 그런데 이게 어디 말씀처럼 쉬운가? 그게 어려운 것은 담배를 펴 본 사람처럼, 뇌물이나 어떤 부정한 유익을 취해본 사람은 그 유혹이 더 큰 것처럼 문제는 우리의 습성이다. 오랜 묵인으로 인해 타성에 젖어버린 낙심과 좌절이 먼저 엄습한다. 감정이란 길들이기 나름이라지만 성경은 그리 계시하지 않으신다. 우리는 본래 ‘이 땅의 흙으로 지음 받은 자’들이다. 그 땅은…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창 1:2).” 여기에서의 혼돈과 공허와 흑암은 우리가 상상하고 아는 그 정도의 혼탁이 아니다. 아주 무질서하고 전혀 아무 것도 없는 공허에 도저히 아무 것도 분간할 수 없는 흑암의 속성이 우리 감정의 속재료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2:7).”

 

그러니 하나님은 무슨 생각으로 그런 땅의 흙으로 우리 사람을 빚으신 것일까? 그 땅은 어찌 그리 처음부터 망가져 있었을까? 사람에 앞서 타락한 천사, 사탄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쫓겨났다. 저들은 땅으로 떨어져 세상 권세를 잡았다. 저들로 인하여 모든 게 오염될 오염원이 있었다. 이를 알면서도 하나님의 의도는 무엇일까? 같은 구절의 말씀 속에 답이 있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는 것은 사실이나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셨다. 곧 하나님의 통치다. 이와 같이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비록 그럴 수 있는 죄악의 요소가 가능하지만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었다. 이 또한 하나님으로 충만한 통치다. 누가 묻기를 왜 그럼 처음부터 아주 진공멸균상태의 원재료와 도저히 악의 가능성이 없는 속성의 형질로 사람을 지으시지 않으신 걸까?

 

우리가 인격적인 존재란 선택의 여지가 일방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곧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정물화가 아니다. 모든 생명을 하나님은 광석으로 찍어 모형으로 두신 게 아니다. 거기에는 생명이 없다. 하나님의 좋고 좋음과 하나님 나라의 좋고 좋고 또 좋음을 같이 누리려면 하나님과 같은 감정과 의지가 필요하다. 이에 따라 천사 사탄은 자신의 길을 선택한 것처럼 처음 사람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과의 언약을 두고 선택의 여지가 있는 자유함을 소유한 거였다.

 

곧 이 묵상글을 쓰는 데 있어서도 이따 누가 오면 같이 들려주고 가르칠 성경에 대하여 앞서 정리하게 되는 셈인데, 하필 저의 소식을 전해들을 때가 딱 그와 같은 내용의 설교원고를 정리하고 있을 때였고, 덕분에 나에게 열어 보이시는 말씀의 계시는 더 한 층 풍성하여진 셈이었으니… 나는 종종 이와 같이 우연 같은 필연적인 하나님의 지도하심 앞에 감복한다. 새로 무작정 다시 읽기 시작하는 댄 알렌더의 <감정, 영혼의 외침>에 대하여 그것이 시편을 중심으로 우리의 속성을 다루고 있었다는 걸 까마득히 잊고 있던 것으로, 그때마다 나만 소름이 돋나? “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내 이름을 묻느냐 내 이름은 기묘자라 하니라(삿 13:18).” 나는 이 원리를 알고부터 내가 무엇을 어찌 해보려고 하는 모든 계획, 비전 따위들을 그리 중히 여기지 않는다. 누구와 성경공부를 하고 안 하고, 어떤 이를 마주하고 안 하고 하는 일에 대해서도 내가 나서지 않게 되었다. 우연처럼 필연적으로 하나님은 일하신다. 그리 나를 여기까지 이끄셨다.

 

그러므로 내가 특별히 자주 묵상하곤 하는 말씀으로,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롬 12:3).” 속된 말로 내 주제를 운운하지도 않는다. 혼자 두심이 내 일이면 나는 그리 받는다. 누구 말처럼, 왜 너에게는 꼭 ‘이상한 사람들’만 오냐? 하고 물을 때 나는 저의 무지함에 대하여 탓하지 않는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요 9:41).” 저의 속에 어떤 마음으로 그리 말하는지에 대해서도 오래 생각하지 않는다.

 

누가 성경을 공부하는데 원어로 더 가까이 보고자 하는 일에 열심이란 말에 나는 뭐라 토를 달지 않았다. 다만 주의하시라, 이른 까닭은 대체 이 땅의 어떤 언어로다 주의 뜻을 완전히 이해하고 해석할 수 있을까? 영어로 하던 저의 공부가 라틴어로 넘어 당시의 아람어, 헬라어, 히브리어에까지 도전하겠다니 나는 다만 그 열심이 가상할 뿐 더는 뭐라 한들! 다만 주의하시라. 저가 아는 것으로 저가 삼킴을 당할까봐, 예수님은 사랑하시는 제자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하심인데….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삼상 15:22).” 차라리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시 51:17).” 이를 더해 말해주어도 자신은 맹인이 아니라 하니… 어쩔 수 없는 것에 대하여는 어쩔 수가 없다. 그야말로 갈 데까지 가 보는 수밖에. 그것이 똥인지 된장인지 찍어먹어 봐야 할밖에. 살아서 이내 사는 동안에 ‘험악한 세월’을 살아냄으로 깨달아야 할 수밖에.

 

그러할 때 다시금 나를 붙들어 앉히는 말씀이었으니,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약 1:4).” 해서 나는 노아의 무던함을 사랑한다. 느닷없이 말씀만을 좇아 하란을 떠난 아브라함의 단순함을 사랑한다. 하나님이 가라 하시니 지팡이 하나에 노구를 이끌고 애굽으로 들어간 모세의 무모함을 사랑한다. 하나님 앞에서 염치없이도 집요하였던 야곱의 간절함을 사랑한다.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도 천국 복음을 전하며 저들의 알아듣지 못함을 용서를 구하던 스데반 집사의 오지랖을 사랑한다. 그 외에도 숱한 믿음의 사람들의 말도 안 되는 상황에서의 ‘뜻을 정하였던’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단 1:8).” 저들에 대한 나의 사랑이 결코 헛되지 않을 것을 사랑한다. 사랑함으로 주의 사랑을 바람으로,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낮은 형제는 자기의 높음을 자랑하고 부한 자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할지니 이는 그가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감이라(약 1:6, 9-10).”

 

그리하여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하지 아니하고 내 눈이 오만하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 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아니하나이다(시 131:1).” 이는 “실로 내가 내 영혼으로 고요하고 평온하게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의 어머니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영혼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2).” 그러므로 “지금부터 영원까지 여호와를 바랄지어다(3).”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