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전봉석 2021. 8. 6. 05:17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약 2:14, 26

 

여호와께서 시온을 택하시고 자기 거처를 삼고자 하여 이르시기를 이는 내가 영원히 쉴 곳이라 내가 여기 거주할 것은 이를 원하였음이로다

시 132:13-14

 

 

잘해보려 하면 이상하게 일이 꼬인다. 엉뚱한 데 말썽이 인다. 감당하기 힘들 정도다. 어디 유원지 범퍼카가 된 기분이다. 이리저리 치이고 부딪치기만 하는 것 같다. ‘내가 그렇지 뭐’ 하는, ‘학습된 무기력’에 빠지기 십상이다. 누구는 교도소에 재수감 되어 남은 4개월의 형기를 마저 채워야 하고, 누구는 말로만 듣던 보아스피싱에 당해 천육백만 원을 날렸다. 이것 때문에 부모도 그만큼 빚을 지고 자신도 본래 갚아야 하는 몫이 있었니, 며칠 사이에 도합 사천팔백만 원의 부채가 생긴 셈이다.

 

마침 저에게 우리 감정의 ‘분화’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곧 우리의 생각지도 못한 위기로 인해 감정이 복잡하게 되는데, 이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선하신 의도’에 집중하는 것이다. 분화란 모든 감정이 각각의 개별적 특이한 구조와 성향을 갖는 것이다. 이것이 어떤 위기가 닥치면 서로 뒤엉겨, 감정은 오락가락하고 기분이 널뛰기를 하면서 서로 한데 섞여 버린다. 뭐가 뭔지 모르게 혼용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다급하고 절박할 때 잘못된 선택을 하게 되는 것이 각각의 감정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가령 그런 상황에서 ‘내가 그렇지 뭐!’ 하는 낮은 자존감으로 ‘학습된 무기력’에 휘둘릴 게 아니라, 어떠하든지 하나님은 선하시다는 것. 인생은 생각보다 단순하다는 것. 예를 들어 욥의 고백에서처럼,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예배하며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아니하니라(욥 1:20-22).”

 

저가 지금 어떤 상황인가? 당대에 의롭고 선한 부자였다. 자녀를 열이나 둔 다복한 가정의 가장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던 자였다. 그런 저가 졸지에 재산을 잃고 열 자녀를 잃는다(13-19). 마치 도미노처럼 일제히 무너지듯 삽시간에 벌어진 일이다. 아직 저의 사환이 말하고 있을 때에 연달아 일이 터진다. 저는 괴로움으로 자신의 옷을 찢고 울부짖으며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린다. 한데 놀라운 광경은 그 와중에 ‘예배하며’ 감정의 동요에 자신을 내맡기지 않으려는 것이다. 그러면서 고백하기를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기도뿐이다.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저가 결코 놓지 않은 중심이었다.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우리 인생의 기준, 그 기준은 어떠해도 변함이 없어야 한다. 좌우정렬! 하고 사람을 들들 볶는 것 같은 때에도 기준은 뚜렷하게, 그때에 기준 바로 곁에 설 수도 있으나 밀리고 밀려 저만치 기준과 멀어지는 경우가 생기기도 한다. 그때에도 우린 기준이 엄연함으로 그 간격을 유지할 수 있다. 때론 그 기준이 너무 멀어서 안 보일 때도 있다. 그럼에도 “여인 중에 어여쁜 자야 네가 알지 못하겠거든 양 떼의 발자취를 따라 목자들의 장막 곁에서 너의 염소 새끼를 먹일지니라(아 1:8).” 기준이 모호할 때, 그런 상황에서 도무지 하나님의 선하심을 알다가도 모를 것 같은 때에, 우리는 ‘양 떼의 발자취를 따라’ 가야 한다. 다급히 달려온 누구에게 나의 이야기를 잠깐 들려준 까닭은 그래서였다. 또한 저의 모친이 그런 와중에도 굳건하니 버티며 오히려 아들의 인생에서 전화위복이 되길 바라는 것을 상기시켰다.

 

이 길이 맞나? 싶을 때가 있다. 사느라 나름 산다고 열심히 사는데, 이건 어찌 된 게 손만 되면 말썽이라. 그야말로 범퍼카도 아니고 이리 받치고 저리 받치다보면, ‘뭘 해도 나는 안 되는가보다’ 하는 실의가 절망을, 절망이 좌절을, 좌절이 낙심을 끌어안고 놓지 않으려 한다. 가령 욥의 아내의 경우와 같다. 가산이 망하고 열 자녀들이 한 날 한 시에 죽었으니, 저의 괴로움은 또 오죽하였겠나? 남편 욥은 그 와중에도 여호와를 의지한다고 하지만 욥의 몸에 머리부터 발끝까지 종기가 나서, “욥이 재 가운데 앉아서 질그릇 조각을 가져다가 몸을 긁고 있”었다. 그 상황이 참으로 비참하기 이를 데 없다. 그때에 “그의 아내가 그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온전함을 굳게 지키느냐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 하고 저는 떠난다(2:8, 9).

 

그러니 누가 저의 심정을 모르겠나? 하지만 욥은 굳건하였다. “그가 이르되 그대의 말이 한 어리석은 여자의 말 같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화도 받지 아니하겠느냐?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범죄하지 아니하니라(10).” 여기서 욥의 아내가 이상한 게 아니라 욥이 이상한 것이다. 어떻게 그런 상황에서도 오직 주만을 의지할 수 있었을까? 살면서 이와 같은 어려움이 없기를 바라지만 설령 생겨난다면 모든 이유는 차치하고, 오직 주만을 바라는 것. “그들이 회오리바람처럼 이르러 나를 흩으려 하며 가만히 가난한 자 삼키기를 즐거워하나 오직 주께서 그들의 전사의 머리를 그들의 창으로 찌르셨나이다(합 3:14).” 이를 굳건히 믿음으로 견뎌내는 일, “나는 오직 주의 사랑을 의지하였사오니 나의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시 13:5).”

 

그 와중에도 잠깐 왔다가 다시 경찰서에 들렀다가 택배 알바라도 하러 간다는 그에게 잠깐 붙들고 앉혀 나는 간절함으로 주의 이름을 불렀다. 어떤 말로 위로가 될까? 내가 어찌 해줄 수 있는 게 없어 마음만 어려울 뿐이지만, 나는 내 곁의 누구누구에게 그 사실을 알리고 함께 기도를 부탁하기도 하였다. 모름지기 성도의 기도는 역사하는 힘이 큰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약 5:16).” 서로 쉬쉬하며 알리지 않고 모른 체 하는 것이 미덕이 아니다.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가는 동안 무엇으로 버티고 견디어 내겠나? 돈은 지금 겪은 일처럼 허망할 뿐이고, 사람과 사람 사이는 겪어보면 알듯이 좋을 때나 좋은 것이고, 가족이라 하면 이 또한 서로가 범퍼카처럼 들이받기 일쑤니…. 나는 저에게 대놓고 이와 같은 사실을 알리고 기도와 말씀뿐이라!

 

‘신대원’을 결정하고 모든 게 다 잘 풀릴 줄 알았다. 기어이 하나님이 나를 끌어다 꿇어앉혔으니 하나님 맘 대로 하시라, 하는 심정이었다. 그러면서도 내심 일이 잘 풀릴 줄 알았는데 털컥, 파산이 찾아오고, 더는 감당이 안 돼 아들 녀석은 필리핀 동생네로 보내놓고 오도 가도 못하게 생겼지, 그 와중에 ‘꼼짝 마라!’ 하시는 것인지 공황이 들이닥쳐 엎친 데 덮친, 설상가상으로 나는 포박당한 영혼이었다. 울면서 등교를 하고, 다 늙어서 언제 그만둘까… 하고 눈치만 살피고 있을 때였다. 그럴 때도 하나님은 함께 하셨다. 나중에야 안 일이지만, “광야에서도 너희가 당하였거니와 사람이 자기의 아들을 안는 것 같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걸어온 길에서 너희를 안으사 이 곳까지 이르게 하셨느니라(신 1:31).” 모세의 고백은 나의 것이 되었다.

 

신기한 건, 그때마다 같은 일이 되풀이 되듯 몰아세운다는 것이다. 목사 고시를 두 번째 떨어지고 실의에 빠졌을 때 나를 휘감은 감정은 ‘내가 하는 게 다 그렇지 뭐!’ 하는 혼용된, 학습된 무기력의 우울한 감정들이었다. 마침 울고 싶던 아이 뺨 때려 준 격으로 도로 옛 생활로 돌아갈 거였는데, 믿음의 확실함이란 내 것이 아니라 더해주시는 은혜였다.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벧전 1:6-7).” 그때마다 주의 영이 함께 하셨음을, 때로는 이 사람으로 때로는 저런 상황으로, 하나님의 창조역사는 오늘도 계속되어 우리의 삶을 조성하신다.

 

글방에서 교회로, 몇몇 아이들과 같이 예배를 드리기 시작할 때도 순식간에 글방의 아이들이 빠져나갔다. 한 아이엄마는 평소 오누이처럼 살갑게 위하고 잘하였는데, 내가 목사가 되었을 때 ‘선생과 종교인은 엄연히 다른 존재가 아닌가?’ 하고 아이 둘을 모두 그만 보내기도 하였다. 졸지에 글방으로는 수입이 끊겨버린 것이다. 그 뒤로 거짓말처럼 그 잘 되던 글방 아이들이 사라졌다! 그때 나의 가까운 친구 중 하나는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 나의 형편을 두고 교회도 밥벌이가 돼야 한다며 뭐라 하기 일쑤였고, 가장 의지하던 선생은 이내 등을 돌리듯 연락을 끊고 더는 상종을 하지 않을 듯 나를 외면하였다. 내가 목사가 된 것은 현실도피라는 결론에서였다. 저들이야 그렇다 쳐도 같이 시작했던 아이들마저 거짓말처럼 증발, 모두가 연락을 돌린 것처럼 글방을, 교회를, 나를 떠났다. 주일이면 바리바리 아이들과 점심으로 먹을 것을 싸들고 교회가 된 글방으로 나갔는데 아내와 둘이서만 예배드리는 날이 늘어가고, 그때마다 다 끝날 때쯤 ‘밥 먹으러’ 오는 아이 한둘이 있을까 말까….

 

그렇듯 가끔씩 묻는다. ‘그래도 계속 이 길을 갈래?’ 하는 것처럼. 그럼 내 안에서는 금세 ‘이 길이 맞나?’ 하는 회의가 실의를 끌어안고 온다. 회의와 실의가 낙심을 불러다 앉히고 의기소침과 좌절을 초대하듯 부른다. 감정들이 한데 뒤엉겨버리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 ‘하나님은 무책임하다.’ ‘하나님은 선하시지 않다.’ ‘이 모든 것은 허상이다.’ 하는 모의뿐이다. 이때의 ‘분화’는 중요하다. 각각의 감정을 감정대로 놓아두기. 서로 섞이지 않게, 그 와중에도 기쁨은 있고 격려와 위로와 소망도 있다. 그것들이 부정적인 마음과 뒤섞이지 않도록 해야 한다. 다윗의 절규는 그것이었다. “넘어지는 담과 흔들리는 울타리 같이 사람을 죽이려고 너희가 일제히 공격하기를 언제까지 하려느냐(시 62:3).”

 

자신을 한 발짝만 물러나서 바라보기. 그럴 때 나에게 엉겨 붙어 도무지 가늠하지 못할 것처럼 혼란스럽게 하던 것이 실은 그것이야 말로 별 거 아니었다는 것을, 부디 한 발짝만 물러서서 주와 함께 바라보기를. ‘하나님은 나의 이야기를 통해 무슨 내용을 전달하려 하시는 것일까?’ 그때가 우리가 우리의 믿음으로 견디겠는가? 나는 나의 믿음을 그리 대단히 신뢰하지 않는다. 언제나 변덕스럽고 기복이 심한 것을 잘 안다. 믿음으로 모든 일이 잘 풀려서 해결됐다고 한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눅 18:8).”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오늘 말씀으로 마음을 다잡게 하는 것 같다.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약 2:14, 26).” 나는 무엇으로 주께 향한 믿음을 행하고 있을까? 오늘 나의 묵상글을 저 아이가 읽기를 바란다. 그리고 주 안에서 주가 주시는 새 힘과 용기를 얻기를 바란다. 나는 저에게 말하길, 지금의 이 일이 큰 일인 것 같고, 이 일만 해결되면 모든 게 다 잘 될 것 같지만, 어느새 그 나이도 스물일곱. 살면서 겪었던 일을 돌아보면 앞으로 더 살날 동안에 이와 같은 시련은 적잖이 우리를 쥐고 흔들 거였다. 그러니 어쩔 것인가? 옛 생활로 돌아갈 것인가? 나는 우리의 내친걸음을 독려하였다. 부디 낙심과 좌절로 굴하지 말고, 오히려 더 단단해지는 계기가 되기를. 없던 공황도 생겨날 판에 가뜩이나 공황이 더해져 힘에 겨워하지는 않을지…. 나는 종일 마음이 좋지 않았고 그럴 때마다 내 곁의 ‘기도의 사람들’에게 저의 소식을 알리며 기도를 부탁하였다.

 

올 가을에 학습 세례를 받고 내년 봄에 세례 교인으로 우리 같이 믿음으로 나아가자 하고 있는 이때에 하필이면… 하필이면 모든 좌절과 낙심은 기다렸다는 듯 손을 내민다. 아, “여호와께서 시온을 택하시고 자기 거처를 삼고자 하여 이르시기를 이는 내가 영원히 쉴 곳이라 내가 여기 거주할 것은 이를 원하였음이로다(시 132:13-14).” 하시고 그곳에서 우리도 함께 하게 하시려고, 하다못해 4년마다 개최되는 올림픽에서의 영광을 위해서도 선수들의 땀과 눈물이 밑거름이 되는데 하물며.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엡 1:4-6).” 이는 우리에게 영원히 보장된 영광이다. 부디 이를 붙들고,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약 2:22).”

 

우리의 믿음은 믿어서가 아니라 이를 행함으로 온전하게 되는 것이었으니, “여호와여 다윗을 위하여 그의 모든 겸손을 기억하소서(시 132:1).” 오늘 시편은 다윗의 겸손을 성전으로 올라가는 길목 말미에 깃발처럼 세우고 있다. 그리하여 “내 눈으로 잠들게 하지 아니하며 내 눈꺼풀로 졸게 하지 아니하기를 여호와의 처소 곧 야곱의 전능자의 성막을 발견하기까지 하리라 하였나이다(4-5).” 우리들도 그러하기를. “이는 내가 영원히 쉴 곳이라 내가 여기 거주할 것은 이를 원하였음이로다(14).”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