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너희를 높이시리라

전봉석 2021. 8. 8. 05:24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지어다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꿀지어다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

약 4:9-10

 

보라 밤에 여호와의 성전에 서 있는 여호와의 모든 종들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시 134:1

 

 

인생은 때로 자신에 대해 묻는 것 같다. 우리의 허물로 씨름하는 대상은 결국 하나님이시다.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주께서 심판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시 51:4).” 그리고 말씀 앞에 가만히 앉아 듣는다.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지어다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꿀지어다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약 4:9-10).” 이는 우리가 추구하려는 삶과 다르다. 그럼에도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끝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는 이것을 그의 마음에 둘지어다(전 7:2).” 이는 살아서 사는 동안에 알고 취해야 할 자세였다.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우매한 자의 마음은 혼인집에 있느니라(4).” 왜 그런가 했더니,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야 4:14).”

 

이를 실제로 내 겨드랑이에 끼고 사는 것이 복이었다. 하나님이 아니라면 죄로 고통당할 이유가 무엇이겠나? 결국 내 안의 부정적인 마음이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향해 의문을 갖게 한다. 감정을 유발하는 것들에 대해 나는 예민하게 반응한다. 아무 이유 없이 일어나는 감정은 없다. 심지어 내 속의 어떤 기억, 당해내지 못하고 있는 어떤 마음이 여전하여서도 감정은 배가 된다. 그래놓고는 내내 그 마음으로 힘들어하다 누구, 무엇을 탓한다. 전가하려는 것이다. 아내는 종종 내가 모르는 나를 일깨운다. 무엇 때문에 무슨 말 끝에 ‘다 내 탓이래!’ 하는 소리가 퍼뜩, 정신을 차리게 하였다. 장난스럽게 ‘다 당신 때문이야!’ 하고 말해놓고 보니 익숙하다. 우리 안의 죄의 속성은 이처럼 자신의 책임을 남에게 전가하는 특성이 있었다. 처음 사람 아담이 하와에게 하와가 뱀에게 전가하는 모습을 보면 간단하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창 3:9).” 하시며 찾으신다. 그때에 우리 안의 내장된 양심은 찌른다. “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10).” 죄의 첫 번째 특성은 숨고 숨기고 은폐하는 것이다. 이에 “이르시되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알렸느냐?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11).” 하시는 물음 앞에 “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12).” 결국은 하나님께로 그 탓을 돌리는 셈이다. 여자가 주어서 먹었는데, 그 여자는 하나님이 주신 게 아니냐? 하는 것이다. 여자 또한, “여호와 하나님이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여자가 이르되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13).” 뱀도 역시 하나님이 창조하셨으니 결국은 ‘탓’을 하는 게 다 하나님 탓이다.

 

그러니 우리 안의 죄의 성질은 수치심으로 지독하다. 눈을 내리 깔고 어깨를 늘어뜨리고 의기소침하여 현실을 도피하며 살 궁리만 하게 하는 것이 우리 안에 내재된 수치심이다. 죄의 특성 두 번째는 ‘자신이 벗은 것’ 또 그 실체를 가리고 숨기는 일이다.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7).” 수치심이 참 괴로운 것은, 드러날까 하여 다른 것으로 대체한다. 웃음으로, 친절로, 배려로, 과하다 싶을 정도로 자기희생으로 우리 안의 순기능을 역기능으로 삼으면서까지 감춘다. 수동적으로 안전을 추구하는 것이다. 그러느라 기꺼이 사랑하는 사람 탓을 한다. 하나님의 사랑과 관심도 위험해 보인다. 믿을 수 없는데 믿어야 하는 아이러니한 믿음으로 살아가기도 한다.

 

자신이 드러날까 하는 두려움인데 실은 현실을 모면하려는 이유에서다. 내가 아는 누구는 어릴 때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을 당했다. 실은 그 일을 열거할 필요도 없다. 가족 누구에게 무시당하는 말을 들었던 기억에서부터 가까이 따르던 친구나 누구에게 거절, 배신을 당한 기억일 수도 있다. 그게 무엇이든 드러내어 털어내지 않고 내재하면 이는 수치심으로 고착한다. 이금이의 청소년 소설 <유진과 유진>에서 이름이 같아 큰 유진과 작은 유진으로 불리며 유치원을 다니다 아이 때 둘 다 성추행을 당한다. 이 일이 드러나고 부모는 원장을 고소하고 서로 대책위원회를 꾸려 상대하는데, 작은 유진이 홀연히 사라졌다. 이사를 가버린 것이다. 그 엄마는 자신의 어떤 기억으로 인한 것인지, ‘학습된 대응책’이 회피였다. 숨기고 없었던 일로, 아이도 자신도 그 일을 억지로 지워버린다.

 

그게 가능할까 싶지만 실제 수동적인 삶으로 아무렇지도 않은 듯하다. 자신을 ‘그 일’로부터 격리하는 것이다. 토마스 화이트맨과 랜디 피터슨의 공동 저서로 <사랑이라는 이름의 중독>(국제제자훈련원)을 읽을 때 충격적이었던 기억이 있어서 어제 다시 책상 위로 꺼내두었다. 거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대부분이 특히 성적인 유년의 ‘나쁜 기억’을 숨기고 살다가 사랑을 하고 결혼을 하면서 여러 파국을 맞이할 수밖에 없는 사례들이 기록되어 있다. 갑자기 <유진과 유진>을 떠올린 것도 누구를 무슨 일 때문에 격려하다가 그 일을 마주하는 대처에 대해 말해주다 그랬다. 한동안 글방 아이들과 필독도서로 읽고 토론을 했던 작품이기도 한데, 그때의 큰 유진은 상대적으로 엄마도 아이도 속상하고 억울하지만 훌훌 털고, ‘똥 밟았다고 생각해! 네가 잘못한 것 아니야!’ 하는 식으로 서로들 인정하고 드러내고 생의 한 페이지에 드러내고 살았다. 그러던 것이 중학교 3학년이 되면서 우연히 작은 유진이 전학을 오게 되고 서로 다시 친해지면서 벌어지는 일이다. 신기하게도 작은 유진은 그때의 일을 기억하지 못하고 살았다!

 

없었던 일로 덮어두고도 살만하면 그게 사는 게 나을 수도 있다고 한다. 그러나 시편은 온갖 감정을 표출하면서 그러는 데 따른 역기능을 가감 없이 표출시킨다. 하나님은 기꺼이 이를 상대하신다. 오히려 ‘탓’을 하며 누구에게 전가하고 자신은 은폐하려 할 때 하나님은 노하신다. 이때에 시편은 우리의 저주까지도 두 팔 벌려 받아낸다.

 

그들에게 저물어 돌아와서

개처럼 울며 성으로 두루 다니게 하소서

그들은 먹을 것을 찾아 유리하다가

배부름을 얻지 못하면 밤을 새우려니와

 

나는 주의 힘을 노래하며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을 높이 부르오리니

주는 나의 요새이시며

나의 환난 날에 피난처심이니이다

(시 59:14-15, 16).

 

표출하지 않으면 아무도 알 수 없고 자신마저 속는다. 상처는 덮어두면 성난다. 당장은 괜찮은 것 같아도 그것으로 곪고 썩어서 다른 신체까지도 위험하게 한다. 즉 작은 유진은 역시나 공부도 잘하고 모든 데 능한 모범생으로 자랐다. 상대적으로 큰 유진은 털털하고 덜렁거리며 성적으로는 중간이하로 지내면서 즐거운 학창시절을 보내고 있었다. 작은 유진은 아예 큰 유진을 기억하지 못하다가 하나둘 기억이 떠오르면서 뒤늦게 탈선을 하고 방황을 한다. 이를 두고 아이들과 토론을 할 때 설왕설래 의견이 갈리기도 하였다. 잊고 사는 게 낫다, 결국 긁어 부스럼만 만든 셈이다 하는 주장과 그때 그냥 털고 가야 한다, 드러내어 받아내야 옳다 하는 주장과 서로 갈린 기억도 있다. 지금도 여전히 나름의 주장은 다를 수 있다.

 

그럼 성경은 어떤 시각일까? “이 땅으로 헤매며 곤고하며 굶주릴 것이라 그가 굶주릴 때에 격분하여 자기의 왕과 자기의 하나님을 저주할 것이며 위를 쳐다보거나사 땅을 굽어보아도 환난과 흑암과 고통의 흑암뿐이리니 그들이 심한 흑암 가운데로 쫓겨 들어가리라(사 8:21-22).” 이에 따른 재반박이 있을 수 있겠지만 나는 이 말씀에 두 손을 들었다. 그 이유는 내 삶이 증거 한다. 자주 내 이야기를 들추어 말씀으로 묵상글에 덧붙이고, 말씀을 내 이야기에 접목시키는 까닭도 실은 그래서이다. 말씀으로가 아니면 나는 교묘하게 숨는다. 은폐하고 숨긴다. 기가 막히게 나는 그런 요령이 있다. 더욱이 내가 가진 장애로 모두를 속일 수도 있다. 저들은 나의 내심을 알아채지 못한다. ‘~함에도’ 늘 긍정적이고 밝고 낙천적이라고 호감을 가질 정도이다. 그렇게 나에게는 별로 적이 없었다. 싫어하는 사람이 드물었다. 다들 나를 좋게 여겨주었다. 그만큼 나는 교묘하고 가증스러울 수 있다. 그러다 불쑥, ‘당신은 다 내 탓이래!’ 하는 아내의 말에 가끔씩 ‘따귀 맞은 영혼’이 된다. 아닌 척, 의연한 척 굴던 가면이 순간적으로 홀라당 벗겨지는 기분이다.

 

누가 나처럼 약을 먹고 자신의 감정을 다스리며 산다. 하긴 내 곁에 그런 부류(?)의 사람들이 하나둘 늘어 서로 동질감을 느끼는가, 유대관계를 형성하게 되는 것 같다. 암튼 저는 ‘어떤 기억’을 숨기고 산다. 짐작은 하지만 먼저 묻거나 속단하지는 않는다. 또한 그게 뭐냐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가령 <사랑이라는 이름 중독>에서 한 여자는 목사의 딸로 엄격한 신앙 교육 아래에서 자랐다. 어릴 때 교회 안에서 어느 전도사의 성추행이 있었고, 그때에는 서로가 별로 죄의식도 없었다. 소녀도 그에 대한 호감이 있었고, 전도사는 애가 아직 미성년자이기는 하나 훗날에 저를 사랑하고 결혼할 거라 약속하며 가끔은 또는 자주 그런 은밀한 시간들을 즐겼다. 결국 전도사는 다른 교회로 부임 받아 떠나고, 소녀는 순간 자신이 좀 더 적극적으로 ‘잘하지 못해서’ 그가 자신을 떠났다고 이해했다. 저의 기억은 거기서 멈춘 듯 그 일은 그리 심각한 게 아닐 줄 알았다.

 

한데 그녀는 번번이 남자를 만나고 사랑을 느끼면 무르익을 쯤에 이별을 하게 된다. 그게 다 자신이 못해서 그런다고 생각하고, 남자들은 여자가 너무 밝히고 적극적이어서 부담을 느끼고, 그렇게 이별이 너무 흔하다 한 남자를 만나 결혼까지 한다. 저는 선교사로 둘은 같이 타국 선교지로 부임 받고 나갔다. 남자는 여자 몰래 음란서적이나 유인물을 보았다. 여자도 그 사실을 알지만 그럴 수 있다고 이해했다. 아내가 알면서도 내버려두자 남자는 선교지에서 돌아오면 하루의 피로를 아예 버젓이 그런 음란물을 찾아 위로를 취했다. 그럴 때면 여자는 사모로서보다 여자로서 자신이 더 잘해야 한다는 강박이 있어 자존심도 상하고 모멸감도 느끼지만 참았다. 그러자 어느 순간부터 남자는 밤새 사창가에 가 있다가 들어오기도 하였다. 처음에는 미안해하더니, 그럴 수 있다고 하는 아내의 허용 아닌 허용에 더욱 과감해져 아예 현지처를 두는 형국이 되어 이중살림을 꾸렸다. 결국 여자는 선교센터에 탄원하고 본국으로 소환되어 이혼을 준비했다. 이 과정도 순탄하지는 않았다. 남자는 그때마다 용서를 빌었고 여자는 또 자신이 잘하면 나아질 거라는 주문을 외웠다. 이혼을 보류하고 본국에서 다른 사역지를 준비하다 남자는 결국 다른 여자를 만나면서 먼저 이혼을 청구했다. 이 이야기는 인상적으로 기억에 남은 한 사례이다.

 

시편 59편은 다윗의 저주 시로 따로 분류한 세 편 109편, 137편 중 하나이다. 우리 안의 저주, 어떤 노려움이든 분노를 일으킨다. 분노는 엄연한 감정의 하나로 순기능보다 역기능이 강하지만 그것으로 자신의 추한 실상을 직면하게 한다.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약 1:20).” 분으로는 어떤 문제도 해결될 수 없다. 분을 내든 삭이든 둘 다 그 속은 문드러진다. 이때 시편은 하나님께로 그 분풀이를 하도록 유도한다. 무조건 없던 일로 덮으라고 하지 않는다. 참고 또 참으라고만 하지 않으신다. “백성들아 시시로 그를 의지하고 그의 앞에 마음을 토하라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셀라)(시 62:8).” 이는 ‘행동적 확증’으로 가능하다. 그때에 우리 안에 놀라운 신뢰가 인다.

 

하나님이 한두 번 하신 말씀을 내가 들었나니

권능은 하나님께 속하였다 하셨도다

주여 인자함은 주께 속하오니

주께서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심이니이다

(11-12).

 

말씀을 묵상하는 일이 소중한 까닭은 기도만으로는 감정을 다스릴 수 없다. 기도도 엄연히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함인데 그게 또 그런가? 우리 할 말만 들입다 아뢰고 고하느라 정작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에는 귀를 기울일 시간을 남겨주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 안에 남은 ‘찌꺼기’ 때문이다.

 

포악을 의지하지 말며

탈취한 것으로 허망하여지지 말며

재물이 늘어도 거기에 마음을 두지 말지어다

(10).

 

스스로의 타협과 괜찮다고 여기는 모든 일에서는 하나님의 권능이 작동하지 않는다. 엄연히 우리는 인정함으로, “내가 주께 범죄하지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119:11).” 시편이 가리키는 방향은 모두 한 곳을 향한다. 그것이 애가든 저주 시든 탄원 시든 축복 시든, “아, 슬프도다 사람은 입김이며 인생도 속임수이니 저울에 달면 그들은 입김보다 가벼우리로다(62:9).” 인생의 덧없음은 한계에 있다. 우리의 방어능력도 그렇다. 오늘 야고보서에서도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약 4:3).” 그러니 어쩌란 소릴까?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7).” 이는 우리의 숙명이다.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8).” 그리하여,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지어다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꿀지어다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

(9-10).

 

우리 자신은 그렇게 생각보다 강하지 않다. 자신하는 만큼 자신할 수 없는 존재들로 아슬아슬하게 살아갈 뿐이다. 그러나 또 생각처럼 약하지 않다.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14).” 이를 알고 단호하게 자신의 감정을 처리하며 살 수만 있다면, 훨씬 주의 권능을 누리며 자유롭게 살 수 있다.  가령 나는 누구보다 약하여 안정제를 먹고 혼자 빌빌거리기 일쑤면서 주가 보내시는 이의 어떤 슬픔도 같이 받아낼 수 있다. 이는 나의 능력이 아니라 주의 권능으로다. 같이 울고 같이 주의 이름을 부르면 된다. “그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아니하면 죄니라(17).” 주께 아룀으로 나의 부끄러움도 수치심도 기어이 주를 송축할 수 있는 발판이 된다. “보라 밤에 여호와의 성전에 서 있는 여호와의 모든 종들아 여호와를 송축하라(시 134:2).” 우리가 주의 백성으로서 성전으로 올라가는 이유와 목적이 그것이었다. ‘보라, 밤에’ 내가 숨었던 그 어두움에 또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의 밤에.

 

보라 밤에

여호와의 성전에 서 있는 여호와의 모든 종들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성소를 향하여 너희 손을 들고

여호와를 송축하라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네게 복을 주실지어다

(시편 134편 전문),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