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뜨겁게 서로 사랑하라

전봉석 2021. 8. 10. 05:12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서로 사랑하라

벧전 1:22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 136:1

 

 

황동규의 시 <즐거운 편지>에서처럼 내가 누구를 생각함이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것이나 나는 그 사소함으로 저를 생각하고 주께 바라며, 저의 일로 주께 씨름하듯 되뇐다. 자꾸 누구 일이 마음에 밟힌다는 것은 내가 그만큼 받은 은혜가 크고 귀하고 족함이었다. 오늘 베드로 사도의 간절함을 사랑한다.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서로 사랑하라(벧전 1:22).” 진리를 사랑함은 자신과의 화해를 이루고 지난날에 더는 얽매이지 않으며, 이를 가지고 주께 오히려 감사한다는 소리겠으니,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시 136:1).” 하는 오늘 시편의 말씀이 그대로 흡수된다.

 

자신을 이고 산다는 게 얼마나 괴로운 일인가 하면, 티벳 어느 고원에 있는 한 수도승의 이야기가 생각난다. 저들은 탁발 승려들로 하루 한 번 일렬로 마을을 돌며 사람들의 공양으로 끼니를 달래며 묵언수행을 하는 것이다. 하루는 잠깐 내린 비로 마을로 들어가는 길의 실개천이 불었다. 저들은 일렬로 합장을 하고 물을 건너는데 저만치 한 여인이 허리춤을 넘기는 물길 앞에서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그때 한 승려가 대열에서 나와 여인에게로 가서 뭐라 묻고는 그녀를 업고 물을 건네주었다. 그런 뒤 다시 돌아와 평소처럼 대열에 합류하여 하루의 수행을 마치고 수도원으로 돌아왔다. 한데 묵언수행이 끝난 승려들이 행장을 정리하며 뭐라 쑥떡거리는 것이다. 어찌 묵언 중에 말을 할 수 있나, 수도승의 신분에 어찌 여인의 몸에 손을 댈 수 있나, 아무리 그래도 어찌 여인을 등에 업을 수 있나, 저들은 설왕설래하다 한 이가 다가와 이를 문제 삼으며 저를 힐문하였다. 그러자 그 승려는 저들의 술렁거림을 알고 있던 터라, 합장을 한 뒤 물었다. ‘그대들은 아직도 그 여인을 등에 업고 있나?’

 

아주 오래 전에 어디서 읽고 가끔씩 아이들에게 들려주던 이야기인데, 우리 안의 어떤 생각-골똘하게 그 마음을 떠나지 않는 지난날의 일로 우리는 자주 씨름한다. 이를 존 번연의 <천로역정>에서 기독도-크리스천이 등에 지고 가던 미련과 원망과 아쉬움과 아무에게도 말 못할 여러 무거운 짐으로 놓고 보아도 무방하겠다. 아직도 등에 업고 사는 것들에 대하여, 저마다의 생각에는 수억 개의 그럴 수밖에 없는 사연들이 뒤엉겨 있기 마련이다. 그러니 이를 무면하려 애써 나은 척 하는 이나 다른 일에 더욱 몰두하는 이나 서로 다를 게 없다. 그런 가운데 우리의 남다름은 그것으로 하나님과 씨름하는 것이다.

 

밤에 부른 노래를 내가 기억하여

내 심령으로,

내가 내 마음으로 간구하기를

주께서 영원히 버리실까,

다시는 은혜를 베풀지 아니하실까,

그의 인자하심은 영원히 끝났는가,

그의 약속하심도 영구히 폐하였는가,

하나님이 그가 베푸실 은혜를 잊으셨는가,

노하심으로 그가 베푸실 긍휼을

그치셨는가 하였나이다 (셀라)

(시 77:6-9).

 

이를 사람에게 표출하여 잘잘못을 따지려 하면 서로의 감정은 골이 깊어져 자기변호에만 급급하여 상대를 공격하게 되어 있다. 아니면 한 쪽이 누르고 한 쪽은 수그러져 어떠하든지 공정할 리 없다. 이에 오직 주께만 아뢰는 일,

 

또 내가 말하기를 이는 나의 잘못이라

지존자의 오른손의 해

곧 여호와의 일들을 기억하며

주께서 옛적에 행하신 기이한 일을 기억하리이다

또 주의 모든 일을 작은 소리로 읊조리며

주의 행사를 낮은 소리로 되뇌이리이다

(10-12).

 

이를 작은 소리로 읊조리는 일과 같이 언어로 씌워 정의하면 정체모를 나의 감정은 형상화되면서 분별이 가능하여진다. 그렇게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벧전 1:23).” 말씀을 언어화하여 오늘 우리에게 성경으로 두신 것이니, 이를 읽고 묵상하며, 되뇌어 그 뜻을 분별할 수 있는 일이 복되었다. 곧 우리는 썩어질 존재에서 썩지 아니할 존재로,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과 같이 하는 영혼을 가졌다. 베드로의 진술도 그렇게 이어진다.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24-25).”

 

종종 누가 아픔을 겪고 고통스러워할 때 나는 저를 위로하며 객쩍은 말로써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유도하는 것도 그것이다. 그렇게 누구와 통화를 하고 이미 엎질러진 물과 같으니 인정할 것은 인정하고, 그러면서 자신을 돌아보아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라고 일렀다. 오후께는 ‘아픈 아이’와 통화가 되지 않아 잠깐이나마 마음을 졸였다. 안산 병원으로 약을 타러 가는 날인데 핸드폰 충전이 다 됐다고 하며 한참 뒤에나 연락이 왔다. 누구 일로 마음 졸이다 누구 일로 또한 안도하는 모습이 행여 ‘아직도 등에 업고 있나?’ 되묻고 있는 어느 승려를 생각나게 하였다. 그러니 그러지 말아야지, 한다고 해서 감정이 무슨 젖은 옷 갈아입듯이 홀가분한 일이겠나? 어떤 기억은 물을 머금은 옷처럼 쩍쩍 달라붙어 사람을 참혹하게도 한다. 고통스러운 기억을 안고는 하나님의 선하시고 인자하심을 다 알 수가 없다. 그럼에도 ‘상한 심령’일 때 더욱 주를 바라는 것이어서,

 

내가 산 자들의 땅에서

여호와의 선하심을 보게 될 줄

확실히 믿었도다

너는 여호와를 기다릴지어다

강하고 담대하며

여호와를 기다릴지어다

(시 27:13-14).

 

나름은 의원이 없이도 잘만 산다는 자들의 행색에서 오히려 주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바라고 알게 되는 일이다. 누구에게 말하면서도 너나 나나 우리가 건강한 것은 스스로 문제가 많은 환자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오히려 자신은 문제없고 건강하다고 자부하는 자들에게서 더욱 고약한 냄새가 나는 것이어서,

 

여호와는 그를 경외하는 자 곧

그의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를 살피사

그들의 영혼을 사망에서 건지시며

그들이 굶주릴 때에 그들을 살리시는도다

우리 영혼이 여호와를 바람이여

그는 우리의 도움과 방패시로다

(시 33:18-20).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막 2:17).” 그러니 우리의 참 지혜는 자신을 자부하며 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내어놓고 주의 뜻을 기리며 확신과 기다림으로 사는 일이겠다. 오늘 시편의 말씀을 그리 마주한다.

 

우리를 우리의 대적에게서

건지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모든 육체에게 먹을 것을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하늘의 하나님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 136:24-26).

 

감사할 게 차고 넘치는데 늘 모자란 데서 벌벌 떨며 기를 쓰고 악다구니하고 사는 꼴이었으니,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산다는 일은 영적인 능력이 아닐 수 없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얼굴을 마주하며 앉을 때까지 천날만날 참고 기다리신다. 그때까지 우리의 결말을 알게 하지 않으신다. 한 치 앞도 모르게 감추어두셨다. 이생에 사는 동안에는 누구라도 지난날의 기억으로 주의 뜻을 헤아려 알 수밖에 있다. 내일 일은 내일이 알아서 할 일이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마 6:34).” 내일의 나는 아직 내가 아니다. 오늘에 족한 줄 알고,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33).” 말씀은 우리로 우리 자신을 역순으로 보게 하신다. 오늘까지 어떻게 나와 함께 하셨는가를 묵상함으로,

 

그러나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은

주를 경외하게 하심이니이다

나 곧 내 영혼은 여호와를 기다리며

나는 주의 말씀을 바라는도다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내 영혼이 주를 더 기다리나니 참으로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하도다

(시 130:4-6).

 

기다림은 곧 은사였고 주가 더하시는 권능이다. 그때마다 우릴 어지럽게 하는 것이 조급함이고 혼란스러운 마음이다. 엊그제 묵상했던 야고보서에서 어찌 그럴 수밖에 없는지를 명확히 진단하고 있었다. “너희는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여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므로 다투고 싸우는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약 4:2-3).” 나름 한다고 하는데 그 삶이 고단할 뿐, 참 기쁨을 알 길이 없다. 해도 해도 끝이 없는 숙제처럼 주를 바라는 일도 때로는 지겨울 때가 있을 텐데… 이는 누구나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루지 못할 때 화가 난다. 감정이 요동을 친다. 그럼 그럴수록 자신의 의에 초점을 두고 하나님께는 소망을 거두기 시작한다. 그러느니 내가 뭐라도 하는 게 훨씬 합리적일 것 같아서이다.

 

솔직히 나는 지금 내용을 누가 읽을 것이라 염두에 두고 의도하며 쓴다. 저는 아는 것이 자신의 지금 심정이 그야말로 그러하지 않던가? 하나님이 들어주실 거란 확신은 점점 희미해지고 당장 처한 현실에서 한 푼이라도 벌고 또 벌어서 남들처럼은 살아야 하지 않겠나 하는 것이 저의 축복의 전부가 되어버린 셈이니. 주께 돌이키게 된 계기도, 그때의 그 감격도, 천국에 대한 소망도 그저 희미하고 아련하여 그랬었나? 하는 정도에서 색이 바래가고 있었으니. 그러할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격동을 주신다. 그 안에 분노를 휘저어 아래 깔려있던 부유물을 흔들어버리신다. 누가 말하다 느닷없이 아주 예전에 있었던, 지금 일과는 전혀 연관도 없는 것 같은 이야기로 씨름하는 것을 듣다보면… 결국은 하나님과 나의 문제다. 풀리지 않은 매듭이 내내 씹히고 충격은 더해져서 고달팠던 것이었다. 하나님은 이를 알게 하시려고 기꺼이 우리 안에 부유물을 휘저으신다. 별 것도 아닌 말에 욱, 하고 걸려 올라오는 화를 통해. 누구의 별 뜻 없는 시선에서 조롱과 원망의 눈초리를 떠올리기도 하면서. 이는 엄연히 포기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이시었다.

 

여호와여 이 세상에 살아 있는 동안

그들의 분깃을 받은 사람들에게서

주의 손으로 나를 구하소서

그들은 주의 재물로 배를 채우고

자녀로 만족하고 그들의 남은 산업을

그들의 어린 아이들에게 물려주는 자니이다

(시 17:14).

 

누구의 모습에서 또는 저의 잘되는 것에 부러움은 시기와 분노로 바뀌면서…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 4:16).” 우리의 감정은 역기능에서 순기능으로 주를 바라게 하신다. 이는 우리로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벧전 1:4).” 그 존재의 의미를 전혀 새롭게 알게 하시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6).” 이것으로 더는 예전의 내가 아닌 것으로, 더는 나 혼자 두지 않으심을 알며,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7).”

 

그렇게 오늘도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8-9).” 이를 살펴 내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받으실 영광을 묵상한다(10-11). 자,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다 주실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13).” 그리하여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시 136:1).” 이는 “우리를 우리의 대적에게서 건지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24).”

 

모든 육체에게

먹을 것을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하늘의 하나님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25-2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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