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주의 오른손이 나를 구원하시리이다

전봉석 2021. 8. 12. 05:05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

벧전 3:15-16

 

내가 환난 중에 다닐지라도 주께서 나를 살아나게 하시고 주의 손을 펴사 내 원수들의 분노를 막으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구원하시리이다

시 138:7

 

 

일상으로의 회복이 불가능해 보인다. 아무래도 ‘포스트 코로나19’ 시대를 대비함이 옳을 듯하다. 얼마나 더 턱받쳐 밀려와야 할까. 이런저런 생각이 많은 날들이다. 그때에 말씀은 이르시되,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겠으나 너희는 삼가 두려워하지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아직 끝은 아니니라(마 24:6).” 이제 시작일 뿐이다.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곳곳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이 모든 것은 재난의 시작이니라(7-8).” 당면한 현실이 그러하다. “그 때에 많은 사람이 실족하게 되어 서로 잡아 주고 서로 미워하겠으며,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겠으며,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10-12).” 오늘 우리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 곧 누가 나의 괴로움인가?

 

나를 책망하는 자는

원수가 아니라 원수일진대

내가 참았으리라

나를 대하여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나를 미워하는 자가 아니라

미워하는 자일진대

내가 그를 피하여 숨었으리라

그는 곧 너로다 나의 동료, 나의 친구요

나의 가까운 친우로다

우리가 같이 재미있게 의논하며

무리와 함께 하여

하나님의 집 안에서 다녔도다

(시 55:12-14).

 

차라리 나를 미워하고 대적하는 자가 원수이면 원수이겠는데, 저는 가까운 내 친구다. 함께 주의 집에서 주를 섬긴다고 섬디며 교류하던 자이다. 이게 어디, 진영논리로 정치 싸움에서만 일어나는 일이겠나? 사람과 사람 사이, 내가 누구를 두려워해야 하겠나? 사람은 다 거기서 거기다. 먼 사람은 나를 해치 않는다. 오히려 가까운 자가 나를 친다. 상처주고 무안주며 무시하고 외면한다. 그러니 사람에게서는 의로운 자도 없고 믿을 수 있는 사람도 없다. 이에,

 

나는 하나님께 부르짖으리니

여호와께서 나를 구원하시리로다

저녁과 아침과 정오에

내가 근심하여 탄식하리니

여호와께서 내 소리를 들으시리로다

(16-17).

 

오늘 날 우리 사회의 모습은 우리들로 하여금 어디에 몸을 숨겨야 하는지를 알게 한다. 이에 견딘다는 것,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마 24:13).” 우리 주님의 말씀은 결연하시다. 무엇을 위한 견딤인가? “너희는 떨며 범죄하지 말지어다 자리에 누워 심중에 말하고 잠잠할지어다 (셀라)(시 4:4).” 주를 경외함이란 참 두려움을 두려워할 줄 아는 일이다.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다른 무엇도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

 

밤에는 슬피 우니 눈물이 뺨에 흐름이여

사랑하던 자들 중에 그에게 위로하는 자가 없고

친구들도 다 배반하여 원수들이 되었도다

(애 1:2).

 

산다는 게 고작 이게 다인데, “나의 가까운 친구들이 나를 미워하며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돌이켜 나의 원수가 되었구나(욥 19:19).” 이를 얼마나 더 지나서야 알게 될까? 기어이 “형제가 형제를, 아버지가 자식을 죽는 데에 내주며 자식들이 부모를 대적하여 죽게 하리라(막 13:12).” 그야말로 파국이다. 이런 시국에 교회에 나간다고 해도 말려야 할 판에 스스로 주일을 범하고 예배를 멀리하는 데도 등한히 하고, 목회를 목회답지 못하게 하는 데도 그러려니 하고, 서로가 서로에 대해 좋은 게 좋은 것인 양 언젠가 믿겠거니 하고 내버려두는, 가족에 대한 이와 같은 친절과 배려를 존중이라 여기고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분노할 줄 모르는 분노는 자신을 죽이는 것뿐 아니라 모두를 파국으로 몰아간다. 에이, 설마… 할 때에, 우리 앞에는 이미 모든 일이 일어나고 난 뒤였다. 그때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13).” 이는 말씀의 엄연한 선포다.

 

오늘을 즐겁게, 안이하게, 태평하게 바라볼 게 아니다.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벧전 3:15-16).” 오늘 말씀이 주는 의미는 참으로 무섭게 느껴진다. 항상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라니, 이에 따른 나의 선한 양심은 무엇이겠나?

 

여호와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과

그의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들을

기뻐하시는도다

 

그의 말씀을 보내사

그것들을 녹이시고 바람을 불게 하신즉

물이 흐르는도다

(시 147:11, 18).

 

바른 좌표를 잃지 말라고 말씀을 보내신다. 누구를 통해, 어떤 계기와 우연을 빌어서, 그 속의 막힌 감정을 뚫어내려 하신다. 그런데 학습된 우리의 자아는 미루거나 외면하거나, 다른 것으로 대체하거나 더 급한 핑계를 대거나. 오늘 베드로 사도는 이를 우리에게 묻고 점검하고 있는 듯하다. 그러니 먼저 우리 마음에 일러,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무엇보다 자신의 마음을 먼저 다잡아야 한다. 누굴 위한 게 아니었다. 그러할 때에 다음 행보가 정해진다.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곧 준비된 자로 서야 한다. 그리 살지 못할 때, 환경에 끌려다닌다. 가족들 일로, 먹고 사는 일로 분주하다. 우선권이 늘 거기에 있다. 그러다 어려움이 닥쳐오면 우리는 속수무책이다. 대비한 것이 없다. 울타리가 돼 줄 줄 알았던 아내와 남편은 가장 먼저 남이 된다. 이혼이 흔하다. 자녀들이란 품 안의 것일 뿐, 저들이 알아서 큰 줄 안다.

 

아,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선한 양심을 가지라.” 하는 말씀의 맥락을 짚을 수 있을 것 같다.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 오늘 하루, 나의 삶이 더 연장되는 이유였다. 그 목적은 하나다.

 

내가 환난 중에 다닐지라도

주께서 나를 살아나게 하시고

주의 손을 펴사

내 원수들의 분노를 막으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구원하시리이다

(시 138:7).

 

오직 말씀의 관심은 나의 구원이다. 나로, 믿음 안에서의 성장이었다. 파국으로 치닫는 이 시점에 우리로 무엇을 바라게 하시는지를 알게 한다. 이는 곧,

 

여호와께서 나를 위하여 보상해 주시리이다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이 영원하오니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을 버리지 마옵소서

(8).

 

그러므로 우리의 고백을 하나로 통일되게 하심인데,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아, 이와 같은 고백이 삶을 중심을 붙드신다면 더는 무엇을 두려워하겠나? 그러므로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 이 얼마나 든든하고 멋지고 흥분되고 기대되는 일인지. 과연 그러한지. 얼마나 그러한지. 오늘 우리의 하루하루가 되묻고 있는 것 같다.

 

이러할 때 내가 누구를 생각함은, 마치 해산하는 고통과 같아서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내가 이제라도 너희와 함께 있어 내 언성을 높이려 함은 너희에 대하여 의혹이 있음이라(갈 4:19-20).” 누구를 위한다는 일은 그저 그러려니 하고 마는 정도의 일이 아니었다. 정작 상처를 주고 받지 않는 사이는 아무 사이도 아니다. 사랑하면 할수록 부대끼고 치대며 으르렁거리는 게 당연하다. 타인이면 그럴 게 뭐 있겠나? 그저 ‘친절한 타인’일 뿐인데. ‘내가 저로 인하여 슬픔을 담당하는 것이었으니’ 사랑보다 어려운 것도 없다. 내가 누구를 사랑한다는 일은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주는 일이다. 그럼에도,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고전 13:4-7).

 

사랑보다 고달픈 게 있을까? 사랑이 어찌 아프지 않고 사랑이겠나? 좋아하는 것이야 그러다 더 좋은 게 있으면 그걸 더 좋아하면 그뿐이지만 사랑은 죽으나 사나 사랑이었다.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일 4:8).” 누구로 인해 아파하지 않고 근심하지 않고 애달파하지 않고 괴로워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어찌 사랑이겠나?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16).” 내가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한다는 것은 그 사랑의 고통까지도 견디는 일이겠으니, 이를 바울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라 하였다.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

 

이를 주님은 ‘자기 십자가’라 하셨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4).” 가령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로 인하여 아무렇지도 않다면 그건 사랑이 아니다. ‘아픈 건 사랑이 아니라는 말’ 여기에는 숨은 함정이 있었다. 하나님이 그저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는 정도의 사랑이셨다면 사람의 타락으로 더 좋은 사람을 지으시는 게 나았다. 사람 대신 타락한 천사를 돌이키게 하시는 것이 훨씬 더 수월하셨을 테고. 그러나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은 죽으나 사나 사랑이다. 하여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눅 14:27).” 하실 때의 '자기'는 하나님이 목숨으로 값을 치른 '나, 자기'이다. 그런 자기의 사랑, 곧 하나님의 사랑을 지고 따른다는 말씀을 바울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으로 표현하며 교회를 사랑함을 '해산의 고통'으로 알고 섬겼던 일이다. 이에 우리가 주의 제자로 성숙된 사랑 안에 산다는 일은, ‘해산하는’ 고통이 필수적이다. 적당한 사랑은 이미 사랑이 아니었다.

 

가만히 이와 같은 말씀 앞에 앉아있으면, 때론 주춤거리고 의기소침하며 시무룩해지고, 나는 과연 감당할 수 있겠나? 싶어진다. 이때에도 말씀은,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시 43:5).

 

고로 주를 두려워한다는 일은 하나님만으로 다른 무엇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소리다. 내 안에 이는 온갖 불안과 염려와 근심과 두려움이 죄는 아니다. 다만 그것으로 주를 더욱 바람인데,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마 26:38).” 예수님도 온전한 사람으로서 자신의 두려움을 우리에게 기도로 부탁하셨다. 이때의 두려움은 죽음이나 고통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었다. 성부 하나님의 죄에 대한 진노를 두려워하신 것이다. 우리는 그와 같이 서로에게 기도로 부탁하는 사람들이다. 거기가 교회다. “이르시되 내가 주의 이름을 내 형제들에게 선포하고 내가 주를 교회 중에서 찬송하리라 하셨으며 또 다시 내가 그를 의지하리라 하시고 또 다시 볼지어다 나와 및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자녀라 하셨으니(히 2:12-13).” 교회에서 우리는 서로가 형제와 자녀다. 혈연적인 이 땅의 관계로가 아니다. 그 관계는 지나간다.

 

“그러므로 그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속량하려 하심이라(17).” 저가 우리로 도우시고 고난을 당하심은, 우리의 영원한 형제로 우리를 능히 도우시려 하심이었다.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18).” 이에 “너희의 두려워하며 정결한 행실을 봄이라(벧전 3:2).” 곧 우리 안에 주의 영이 계심으로,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4).” 이로써 영원한 삶을 산다. 그러니 무엇을 준비할까?

 

“그러므로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거짓을 말하지 말고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며 그것을 따르라(10-11).” 곧 우리가 주를 사랑함은 주를 두려워할 줄 앎이고, 주를 경외함이란 주의 눈이 항상 내게로 향하심을 아는 것이다. “주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의인의 간구에 기울이시되 주의 얼굴은 악행하는 자들을 대하시느니라 하였느니라(12).” 이에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15-16).”

 

이 아침도 어김없이 말씀을 되새김질하며 주 앞에 앉게 하심이 은혜인데, “내가 전심으로 주께 감사하며 신들 앞에서 주께 찬송하리이다(시 138:1).” 곧 “내가 주의 성전을 향하여 예배하며 주의 인자하심과 성실하심으로 말미암아 주의 이름에 감사하오리니 이는 주께서 주의 말씀을 주의 모든 이름보다 높게 하셨음이라(2).” 고로 “내가 환난 중에 다닐지라도 주께서 나를 살아나게 하시고 주의 손을 펴사 내 원수들의 분노를 막으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구원하시리이다(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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