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사랑의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전봉석 2021. 8. 14. 05:10

 

너희는 사랑의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 모든 이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벧전 5:14

 

악담하는 자는 세상에서 굳게 서지 못하며 포악한 자는 재앙이 따라서 패망하게 하리이다

시 140:11

 

 

성경의 권위보다 우선되는 모든 진리는 우상이다. 하나님께 드려지는 사랑보다 앞서는 사랑은 신이 된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지 않는 모든 것은 다른 신을 섬기는 것과 같다. 이에,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고전 13:3).

 

우리 사람의 기준은 그 어떤 것도 의롭지 못하고 선하지 않다. “내 허무한 날을 사는 동안 내가 그 모든 일을 살펴 보았더니 자기의 의로움에도 불구하고 멸망하는 의인이 있고 자기의 악행에도 불구하고 장수하는 악인이 있으니(전 7:15).” 인생은 부조리하고 우리의 가치는 모순되다. 결국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아는 것이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하게 한다. 하면, “너는 이것도 잡으며 저것에서도 네 손을 놓지 아니하는 것이 좋으니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날 것임이니라(18).”

 

하나님을 경외함이란 그의 성품 아래에 온유 하는 것이다. “여호와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과 그의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들을 기뻐하시는도다(시 147:11).” 이에 우리가 서로 사랑의 입맞춤을 한다는 것은, “너희는 사랑의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 모든 이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벧전 5:14).” 서로가 어찌 지내는지, 주 안에서 평안한지를 돌아보고 저를 마음에 두고, 찾아보고, 위로를 더하는 일이다. 이를 훼방하는 게 악담이다. “악담하는 자는 세상에서 굳게 서지 못하며 포악한 자는 재앙이 따라서 패망하게 하리이다(시 140:11).” 악담은 악의적으로 남을 비난하는 것이다. 악의란 자신이 저보다 낫다고 여기는 데서 생겨난다.

 

어쩌면 우리 안에 있는, 집을 나가 모든 가산을 탕진하고 돌아온 둘째보다 늘 아버지의 집에서 아버지를 섬기며 살았다고 자부하는 첫째의 의가 더 악하다(눅 15:11-32). 한동안 나는 렘브란트의 <돌아온 탕자> 유화를 자주 들여 보곤 하였다. 물론 책에 실린 사진으로가 전부지만 그 그림에 묘사된 아버지의 두 손은 의도적으로 여성성과 남성성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 뒤에 둘러서 있는 구성원들의 눈빛도 의미를 더했다. 어제는 책장을 서성거리며 렘브란트의 유화집을 찾다 누구를 준 것 같아 그만두었다.

 

이번 주일은 아버지가 오셔서 말씀을 전해주시는 주일이라 한 주간 동안 헐렁하였다. 고작 한 편의 설교원고를 작성하는 일인데 그마저 안 해도 되는 주간이라, 나는 헐거운 시간에 슬픈 영화를 찾아본다. 이번 주간에는 <레인 오버 미>를 며칠에 걸쳐서 보았다. 루이스 세풀 베다의 소설 <연애소설 읽는 노인>에서 안토니오 호세 볼리바르 영감처럼 나는 종종 ‘억장이 무너지는 이야기’를 좋아한다. 올해 기억에 남는 영화는 <미안해요, 리키>, <나 다니엘 브레이크>, <스탠바이 엔디> 등이다. 저들의 이야기에 한참을 울다보면 먹먹했던 가슴에 주의 은혜를 더욱 바라는 마음이 차지한다. 사는 게 너무 어렵다. 누구와 말씀을 같이 나누다 하나님이 안 계시다면, 그래서 사후의 영생이 없다면 뭐 그리 애써 수고하고 남다르게 성실히 살 게 무언가? 그야말로 ‘인생을 즐겨라.’ 하며 내 멋대로 살다 내 맘 대로 가면 그만일 것을.

 

그때에 우리에게는 중심이 필요하다. 어떠해도 흔들리지 않는 진리가 말이다. 신념 따위를 말하는 게 아니다. 그 마음의 각오를 신뢰하지 않는다. 솔직히 사람은 믿을 게 못 된다. 그 가치 또한 “아, 슬프도다 사람은 입김이며 인생도 속임수이니 저울에 달면 그들은 입김보다 가벼우리로다(시 62:9).” 그러한 가벼움으로 우리가 ‘바람에 나는 겨’와 달리 늘 그 자리에 우뚝 서 있을 수 있는 ‘시냇가에 심겨진 나무’이기 때문이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1:3).” 그러나 “악인들은 그렇지 아니함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4).” 우리는 같이 바람에 나부껴도 어느 날 바람이 자자들 때에 여전할 수 있는 것은 말씀으로다.

 

무슨 ‘나실인성경원’인가? 하는 데 특히 목사들이 몰려가 이를 교계에서 이단, 이도교로 규정하는 기사를 훑어보았다. 그야말로 아차, 하는 순간에 훅, 간다. “롯의 처를 기억하라(눅 17:32).” 예수님의 경고는 두려울 따름이다. 구원 받았다고 여겼는데 한순간 아차, 하고 뒤를 돌아본 것뿐이다. 이 한 말씀에서 우리는 모든 경거망동의 결과가 어떠한지, 내포되어 있음을 알 것 같다. 경솔함이란 본래 그런 게 아니라 아차, 하는 어느 순간의 일이다. 그로 인해 망령되이 행동한다. 재밌는 건 이 망령(亡靈)이라는 한자어는 죽은 영혼을 뜻한다. 그러니 저는 산 것 같으나 이미 죽었던 것이다! 그리고 덧붙여 혐오스런 과거의 잔재를 일컫는데, 실은 많은 사람들이 과거에 붙들려서 산다. 좋은 기억으로든 나쁜 기억으로든 과거는 오늘을 지배하고 오늘은 속수무책 과거의 책임 하에 있다. 그러니 미래 또한 기대할 것이 없다. 애써 그래봐야 '롯의 처'의 결과인 셈인데, 이 아니 두려운가?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나 여호와는 내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를 죄 없는 줄로 인정하지 아니하리라(신 5:11).” 그러려면 그 마음이 혼인집보다 초상집에 가 있는 게 낫다.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끝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는 이것을 그의 마음에 둘지어다(전 7:2).” 이를 지혜자의 마음으로 규정하였다.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우매한 자의 마음은 혼인집에 있느니라(4).” 전에 같으면 코미디를 좋아하고 너스레를 즐거워했다. 그러다 보니 “이 백성이 모두 경건하지 아니하며 악을 행하며 모든 입으로 망령되이 말하니 그러므로 주께서 그들의 장정들을 기뻐하지 아니하시며 그들의 고아와 과부를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시리라 그럴지라도 여호와의 진노가 돌아서지 아니하며 그의 손이 여전히 펴져 있으리라(사 9:17).” 이에 말씀의 의미를 알겠다.

 

그래서 일부러 슬픈 영화를 골라서 본다는 소리는 아니고, 것도 요즘은 한 편을 한 번에 다 보지 못하고 여러 날 나누어서 찔끔거리듯이 본다. 신기하게도 그때마다 눈물이 고인다. 늙어서 그렇다면 할 말이 없는데, 늙는다는 게 확실히 좋은 것은 여러 개다. 여하튼 헐거웠던 나의 일주일은 아침마다 묵상글 쓰기에 전념하고, 누구 일에 관여하고, 하루에 몇 번씩 카톡을 하거나 통화를 하는 아이와의 일과가 전부였다. 그러다 접한 기독신문의 어느 목사의 이단성시비 기사를 읽으며 잠깐 두려움에 몸서리치기도 하면서. “그것들은 헛 것이요 망령되이 만든 것인즉 징벌하실 때에 멸망할 것이나(렘 10:15).” 이를 두려워할 줄 아는 게 복이다. 거짓의 위험에서 벗어나야 한다.

 

바울은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일러,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따르리라 하셨으니 자기 양심이 화인을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딤전 4:1-2).” 자칫 믿음을 떠나게 되는 경우는 흔하다. 어쩌다 내 곁에 참 좋아하는 사람 몇이 그러한데, 특히 선생은 나의 인생에서 꽤 긴 시간을 교류하며 의존하던 사람이었다. 지금은 저가 진리를 떠나 비진리에 자신을 내어준 바 되었으니, 모든 게 다 선하고 의롭다. 하나님은 삼라만상에 깃든 모든 신들의 신이다. 언제부턴가 저의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과 전혀 다른 하나님이다. 저에게 하나님은 천지신명이기도 알라와 부처와 성모마리아와 여러 성인의 그것과도 하나다. 우주의 기운이며 사람이 곧 신이다. 

 

반드시 구별해야 한다.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마 7:15).” 오늘과 같이 날이 험할수록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 17:21).” 정신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그야말로 한 방에 훅, 간다. 그러려면 더더욱 묵상만이 살 길이다. 말씀 없는 명상은 악하다. 마음의 진정을 꽤하는 묵상은 거짓되다. “거짓 증인들을 세우니 이르되 이 사람이 이 거룩한 곳과 율법을 거슬러 말하기를 마지 아니하는도다(행 6:13).”

 

실은 어제 묵상글을 쓰고 내심 마음이 조심스러웠다. 이처럼 새벽에 일찍 글을 쓰며 말씀을 묵상하고, 이를 아침에 교회에 나가 다시 읽으며 철자를 다듬고 문장 서술을 고치고는 하는데, 그러면서도 묵상이 되지만 울컥, 하며 치대는 감정 앞에서 나는 주춤하였다. 행여 나의 이야기가 하나님의 이야기를 가리지 않을까, 하는. 지나간 나의 일이 서러워 눈물 흘리는 것은 카타르시스에 좋은 심리적인 효과는 기대할 수 있으나 하나님의 은혜로는 그 거리가 미치지 못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누구의 이야기에 같이 울기도 하지만 저의 감정이 치대거나 복받쳐 하는 일에는 다소 냉정을 찾으려고 애쓴다. 우리의 감정보다 거짓말쟁이는 없다. 그러므로 말씀으로밖에 붙들려야 한다.

 

아니면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마 23:37).” 내 안의 의가 악의적인 것이 되어 대적한다. 그러므로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벧전 1:16).” 베드로 사도의 권면은 직설적이다.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이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가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17).” 결국은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아는 마음이 다른 데 기웃거리는 마음을 다잡아준다. 말씀 없는 기도는 자기 푸념과 요구 일색이고, 말씀 없는 찬양은 감정을 북돋으며 속이 풀리기만을 바랄 뿐이다. 말씀 없는 말씀은 자기 이야기에 함몰되기 일쑤고, 말씀 없는 예배는 예배가 예배 되는 우상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나를 독점하신다.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그가 바로 몸의 구주시니라(엡 5:23).” 그러므로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22).” 함축적인 의미로 우리는 모두 주의 아내다. 저는 신랑되신다.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계 21:2).” 그러하여서 오늘 우리의 경건함은 슬기로운 다섯 처녀와 같이 신랑을 맞으려는 것과 같다. 그래서 더 조심할 줄 안다.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울까를 조심할지니라(고전 3:10).”

 

기껏 평생을 목회 잘하시다 노년에 엉뚱한 진리를 좇아 그리고 나가는 이도 적잖으니, 이 말씀이 얼마나 귀하고 소중한지를,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12:7).” 하여 나의 묵상이 행여 나의 이야기로 늘어지는 게 아니기를. 감정에 서러움을 쏟아내는 것으로는 묵상이 아니다. 오늘 시편의 말씀도 이를 일깨우시는 것 같다.

 

내가 알거니와 여호와는 고난 당하는 자를

변호해 주시며 궁핍한 자에게 정의를 베푸시리이다

진실로 의인들이 주의 이름에 감사하며

정직한 자들이 주의 앞에서 살리이다

(130:12-13).

 

이를 곧바로 이어서 베드로 사도의 설교로 들으면,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벧전 5:6).” 그러므로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7).” 오직 주만을, 오직 말씀으로만, 오직 예수 이름으로, “너희는 사랑의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 모든 이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14).” 서로를 돌아보아 저를 위해 기도하고 위하는 마음만큼 주의 도우심을 더하고 바라는 심령으로,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7).” 하여 나는 ‘그 이상의 것을 구하지 않는다.’

 

어떤 영화를 보다 또는 무슨 귀에 익은 멜로디를 듣다 문득 떠올리게 되는 누구를 생각한다. 그럴 때면 먼저 마음을 단속해야 하는 것이 내가 어찌하려 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나는 이 놀라운 비결을 알게 되었다.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롬 12:3).” 그 뒤로 남이 나를 어찌 여길까, 하는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 또한 내 안에 이는, 당위적인 어떤 의무감이나 율법적인 자세로부터 자유로워졌다. 더는 죄책으로부터 시달리지 않는다. 물론 염려와 근심은 끊이지 않으나 그것으로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된다. 아니면?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벧전 5:8-9).”

 

아차, 할 때 훅, 간다. 이를 방지하는 대책 가운데 하나가, “너희는 사랑의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 모든 이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벧전 5:14).” 서로의 안부를 묻고 살핌으로 저로 인해 주의 이름을 한 번 더 부르는 데 있었다. 우리는 무엇으로 이 전쟁과 같은 날들을 살아낼 것인가? “내 구원의 능력이신 주 여호와여 전쟁의 날에 주께서 내 머리를 가려 주셨나이다(시 140:7).” 주가 아니시면 살 수가 없음을. 말씀으로밖에는 달리 길이 없음을.

 

내가 알거니와 여호와는

고난 당하는 자를 변호해 주시며

궁핍한 자에게 정의를 베푸시리이다

진실로 의인들이 주의 이름에 감사하며

정직한 자들이 주의 앞에서 살리이다

(12-13),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