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
벧후 1:5-7
의인이 나를 칠지라도 은혜로 여기며 책망할지라도 머리의 기름 같이 여겨서 내 머리가 이를 거절하지 아니할지라 그들의 재난 중에도 내가 항상 기도하리로다
시 141:5
누구를 또는 어떤 일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 우리 뜻대로 어떤 일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또는 누구를 생각하는 데 있어 그 사람이 내 마음 같지 않을 때, 이를 주의 뜻으로, 주의 마음으로 여겨 내 안에 두는 일은 성령으로가 아니면 어렵지 않겠나? 가령 예수님의 족보에서도 우리의 이해와 상식을 깨는 성경의 드러내심이 기이할 따름이다. 다말이 누구인가? 연달아 과부가 되어 스스로 창기로 변장하여 그 시아버지와 관계하여 자식을 낳은 이가 아닌가? 저의 아들이 예수님의 조상이 되었다. 라합은 또 누구인가? 여리고 여인으로 내로라하는 기생이었는데 저가 유대인과 결혼하여 낳은 아들이 예수님의 조상이 되었다. 밧세바는 또 누구인가? 그의 아리따움에 다윗의 성적노리개처럼 불려가 임신까지 하여 훗날 다윗의 후계자를 잇고 예수님의 조상이 되었다.
흔히 우리의 편견과 상식을 깨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일에 대하여 하나님이 두시는 선의 기준은 엄연히 다른 것이다. 우리가 누구를 또는 무슨 일을 두고 이를 판단하고 선택하는 데 있어 얼마나 자기 의와 기준으로 좌우되는지를 보게 한다. 이에 오늘 말씀은 믿음이 전부가 아니고 우리가 이루는 덕이나 절제나 경건이 온전하려면 더해져야 하는 것에 주목하게 한다.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벧후 1:5-7).” 나 혼자 잘 믿고 잘 살면 그만이 아니다. 덕은 자신을 위한 게 아닌 남을 위한 것이다. ‘남을 넓게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마음이나 행동의 인격적인 능력’이다. 한데 그게 또 남을 위하는 것으로가 전부가 아니라 지식을 바로 더해야 한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 이는 곧 영생이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 그래서 지혜자는 “근신을 지키며 네 입술로 지식을 지키도록 하라(잠 5:2).” 이는 지켜야 하는 것으로 “훈계를 좋아하는 자는 지식을 좋아하거니와 징계를 싫어하는 자는 짐승과 같으니라(21:1).”
애나 어른이나 훈계, 싫은 소릴 좋아라 하는 이는 없다. 다 그 말을 들어주고 좋다, 좋다 해주는 것에 귀가 익어서 행여 바른 소리라도 한 마디 하면 졸지에 서로가 서먹하여 기분이 상한다. 그러니 덕에 지식을 온전히 더하지 않으면 앞서 그 믿음도 자기주의에 따른 신념으로나 쓸까? 주가 주신 것으로 간주하기에는 어려운 것이다. 이에 그 지식에는 절제를 우선한다. 가끔 누구를 생각하다보면 마음이 어려운 게 저의 열심이 저로 그릇 믿음을 행사하게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우려에서다. 성경을 알고자 그 열심을 다하지만 오늘 베드로 사도도 “먼저 알 것은 성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벧후 1:20).” 이를 사사로이 풀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사사로이 푼다는 것은 자신의 이해와 지식으로 아는 것으로는 어림없는 것이다. 온갖 박사가 성경에 매달리고 원어와 원문을 분석하고 연구한다고 하여 이를 온전히 알 수 있는 게 아니다. 왜냐하면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라(21).” 오직 성령으로다. 성령으로만이 받을만한 말씀이다. 이에 그 지식에는 성령의 내주 감동하시는 절제가 필수다.
할 때 마음이 상한다. 나름 자신보다 못한 학벌과 경력과 이력을 소유한 누군가의 교훈이나 훈계에 대해 시큰둥하다. 반면에 저의 독보적인 지식과 경력이 저의 화려한 수임료와 행색을 무마하기도 하는가 보다. 요즘 어느 상담가의 고가의 상담료와 저의 의상이 화제였다. 그럴 수 있다는 이의 판단이 우세한 것 같은데 나는 마음이 어려웠다. TV에 나오는 것을 몇 번 봤는데, 아이들의 특성과 그 문제를 짚어 상담하고 치료하는 과정이 놀랍기는 하였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5분 상담에 9만원, 한 시간 상담료가 8, 90만원을 호가하고 저가 입은 무슨 브랜드의 옷이 우아한 인품을 돋보이게 하는가, ‘브랜드의 가치를 돋보이게 하는 모델’이란 헤드라인 기사를 읽으며 치를 떨었다. 나의 판단으로는 저의 능력이 어떠한지, 자본주의 사회에서 능력껏 그리 번다고 하는 데 뭐라 할 게 없다지만 절박한 이들의 절신한 마음을 엄청난 값으로 자신을 품을 파는 게 아니겠나? 무엇보다 나는 저의 결여가 절제라고 생각한다.
이런 일로 아내와 의견을 달리했는데 어쨌든 나는 그것이 선히 여겨지지가 않았다. 물론 절제는 어려운 것이다. 자기 인내를 필요로 한다. 내 능력껏 내가 살겠다는데, 분수에 맞게 그 정도 신분과 능력과 사회적 판단에 따라 살겠다는데 뭐라 할 게 없다니! 한 벌에 수천을 호가하고 들고 다니는 가방이 어디 것으로 얼마고, 5분 상담에 9만원이고 어쩌고. 저가 신앙이 있는지, 믿는 자인지 어떤지는 알 수 없으나 “절제에는 인내를” 더라하는 말씀에서는 엄연히 어긋나는 듯하다. 그 인내에는 경건이 따른다. 주를 사모하는, 경외하는 마음으로의 삶이다. 이는 결정적으로 ‘형제 우애’ 즉 같은 사람으로서, 한 여성으로, 부모로서 아이를 둔 입장에서 자식의 일로 절박한 내담자에게 자신의 능력을 내세워 엄청난 값을 욕구한다는 게 나로서는… 결국 이는 사랑의 문제다. 하긴 다들 자본주의 사회의 생리에 걸맞게 능력이 되면 그 능력을 누리며 사는 것을 당연한 권리로 생각하는데, “사랑이 없이는”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성경은 단지 이론인가? 그래서 이론과 실제는 다른가? 말씀과 현실은 같을 수 없다는 것인가? 그럴 소릴 그럼 하나님은 어쩌자고 문서화하여 언어로 기록하게 하신 것일까? 오늘 날 왜 하나님은 말씀을 언어로, 성경으로 우리에게 두신 것일까? 언어야 말로 온 인류가 오랜 역사와 시간을 거쳐 오면서 축적된 함의와 지식과 경험으로 이뤄낸 말이다. 그 말로써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다” 함은 놀랍고도 기이한 일이다. 고로 우리의 선의 기준은 말씀으로 우리의 이해를 표본으로 하지 않는다. 하면 오늘 시편의 말씀으로 이어진다. “의인이 나를 칠지라도 은혜로 여기며 책망할지라도 머리의 기름 같이 여겨서 내 머리가 이를 거절하지 아니할지라 그들의 재난 중에도 내가 항상 기도하리로다(시 141:5).” 악인의 악의적인 짓이라 하면 악함으로 치부하면 될 일인데, 의인으로 저가 나를 친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싶은 이율배반적인 형태가 우리 사회가 어디 한둘인가? 그럼에도 이를 은혜로 여김은 ‘내 머리’ 곧 나의 기준이나 판단으로가 아니라 주의 선하심으로다. 할 때에 저들의 재난에 대하여도 우리로서는 항상 기도한다. 예수님의 족보에 오른 네 명의 여인 가운데 예수의 모친 마리아를 두고, 라합이니 밧세바니 다말이니 하는 이들을 어찌 우리의 판단과 기준으로 용납할 수가 있을까?
옛날에 출판사에 잠깐 근무할 때에 나는 은밀하게 누구의 자서전이나 저의 이름으로 대리 출판하는 일을 맡은 적이 있다. 당시 김대중 총재의 충복이라 할 정치인의 옥중서신을 써주기도 하고, 모 대학의 저명하신 교수의 책을 짜깁기하며 표절 아닌 표절로 둔갑시켜주는 일을 하였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컴퓨터나 인터넷이 발전하지 않은 때라 모두가 수작업으로 이뤄졌는데, 저들 비서가 내가 기거하는 집으로까지 한 박스씩 자료로 쓸 책이나 문서를 실어 나르곤 하였다. 덕분에 공식적으로 받는 월급 외에 비밀리에 받는 돈이 제법 되었고, 나는 그 일에 우쭐하며 글쓰기를 허비하다 치질만 생겼다. 당시 어느 부자, 나름 모 단체의 장이면서 향우회의 끝발있는 어느 인사의 자서전을 써준 게 있는데 90%는 과장과 축소와 은폐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수성가하여 내세울 게 많았던 그는 숨길 것도 많아서 이를 교묘하게 인정하는 듯 부정하고 부정하는 듯 인정하는, 내가 쓴 원고를 꼼꼼히 읽고 그때마다 수정을 골백번도 더하였던 기억이 있다.
하물며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족보에 버젓이 저 모든 치부를 가리지 않다니! 다윗의 행적에서는 물론 아브라함이나 모세, 엘리야에 이르기까지 주의 선지자들이며 성경의 굵직굵직한 인물들의 행적에서도 성령의 감동으로는 저들의 업적을 고스란히 드러내어 이 또한 우리에게 더하시는 말씀으로 공개하셨다. 오늘 날 나는 누구의 능력껏 사는 모습에 대하여 또는 어느 인사의 자기 확신에 대하여 뭐라 말하다보면 지친다. 세상은 그런 우리의 행적을 별로 달가워하지 않는 듯하다. 아내와도 누구 이야기로 저의 상담료에 대해 말하는데 전혀 별개의 의견을 가진 것에 대해 ‘그럴 수도 있는’ 시각에 대하여 나는 입을 다물었다.
이 아침 베드로 사도는 우리 믿음에 덕과 경건과 지식과 절제와 인내를 이루어야 하는 것에 대하여 일깨운다. 이는 어느 것도 나의 능력으로가 아니다.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이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벧후 1:3).” 우리는 다만 ‘선물로서의 사랑’을 받은 것이지 스스로의 노력으로 취하고 얻은 것이 아니다.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4).” 결국 우리는 저들과 다르다. 달라야 한다. 쓰는 가치나 소유하는 가치가 달라야 한다. 어느 일정 그 이상의 값을 주는 모든 소유는 헛되다. 누가 자기 신발들을 장식하고 그 값을 말하는데 무슨 신발이 수백만 원이 넘고 무슨 가방이 수천만 원을 호가하며 이를 또한 신주단지 모시듯이 하며 사는 꼴이라니! 생은 참 가관이라. 가지가지 하며 산다. 어쩌겠나? 서로의 가치 기준이 다른 것이라는데, 나는 그 말이 아니라 우리의 가치 기준은 이 예언의 말씀을 능가하지 않는다.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다시금 베드로의 절박한 심정의 설교가 새삼스럽다.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
(벧후 1:5-7).
이때에 우리는 우리의 앎으로가 아니다.
먼저 알 것은 성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라
(20-21).
말씀 앞에 승복하기를. 이는 “내가 이 장막에 있을 동안에 너희를 일깨워 생각나게 함이 옳은 줄로 여기노니 이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지시하신 것 같이 나도 나의 장막을 벗어날 것이 임박한 줄을 앎이라(13-14).” 우리는 무엇으로 붙들려 살아야 할까? 하는 데 대하여,
여호와여 내가 주를 불렀사오니
속히 내게 오시옵소서
내가 주께 부르짖을 때에
내 음성에 귀를 기울이소서
나의 기도가
주의 앞에 분향함과 같이 되며
나의 손 드는 것이
저녁 제사 같이 되게 하소서
(시 141:1-2).
삶이 곧 드려지는 예배이기를. 이를 위하여 “여호와여 내 입에 파수꾼을 세우시고 내 입술의 문을 지키소서(3).” 하는 시인의 기도에 나는 아멘, 한다. “내 마음이 악한 일에 기울어 죄악을 행하는 자들과 함께 악을 행하지 말게 하시며 그들의 진수성찬을 먹지 말게 하소서(4).” 아니면 내 속엔들 이 땅의 쓴 뿌리가 어찌 없어지겠나? 그러므로 “주 여호와여 내 눈이 주께 향하며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내 영혼을 빈궁한 대로 버려 두지 마옵소서(8).” 하고 주께 엎드리게 된다.
나를 지키사
그들이 나를 잡으려고 놓은
올무와 악을 행하는 자들의 함정에서
벗어나게 하옵소서
악인은 자기 그물에 걸리게 하시고
나만은 온전히 면하게 하소서
(9-10),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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