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전봉석 2021. 8. 26. 05:18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계 1:3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

시 2:11

 

 

말을 하고 듣고, 글을 읽고 쓰고 이해하는 일은 지식의 문제가 아닌 것 같다. 그 사람의 성품이며 성질이다. 관심이고 성향이기도 하다.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보고 싶은 것만 보는 데야 별 수 있겠나?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는 도마가 그러했다. 예수님은 자신이 곧 가시는 길에 대하여 제자들을 안타까워하며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요 14:1).” 하고 말씀하셨다. 나에게 이 구절의 말씀은, 신대원을 시작하면서 엎친 데 덮치고, 설상가상으로 일이 일에 엇물려 쓰러지고 넘어뜨려 나를 세차게 몰아세울 때 강하게 붙든 말씀이다. 어쨌든 예수님은 3년 반을 같이 동고동락하였던 저들을 향해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2-3).” 하고 위로하시고 그 마음을 붙드신다.

 

그러면서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너희가 아느니라(4).” 하고 당연히 말씀하시는데, 난독증에 가까운 도마는 입을 연다. “도마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5).” 여기서 길이 어딘지? 어딜 가신다는 소린지, 그 지명도 말씀하지 않으시고 길을 알 것이라 하니 저로서도 황당하였던 모양이다. 그러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6).” 여기서 길은 무엇인지, 어디를 향한 것인지를,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7).” 주님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 모두의 목적지를 알게 하신다.

 

하긴 예수님의 언어는 은유다. 은유의 세계는 무한하고 막힘이 없으며 늘 새로운 세계를 내포한다. 예수님은 자신을 일컬어 길이다, 진리다, 생명이다 하셨다. 시인은 자주 여호와 하나님을 반석이시다, 요새이시다, 망대이다 하였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시 18:2).” 곧 성경의 언어는 은유의 세계다. 은유의 공식은 ‘A=B’이다. ‘사물의 상태나 움직임을 암시적으로 나타내는 수사법’이다. 그러니까 그 대상을 유사한 의미와 성질의 다른 말로 암시하고 그 의미를 확대, 내포하여 더욱 강렬한 전달을 목적으로 한다. 가령 ‘시간은 금이다.’ 할 때 금의 가치를 시간의 의미로 포개어 전달하고자 하는 뜻을 더욱 단단히 묶어 두는 것이다.

 

오직 그만이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요새이시니

내가 크게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62:2).

 

내가 흔들리긴 흔들려도 크게 흔들려 아예 파선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오직 그만이’ 곧 나의 반석, 요새, 나의 피할 바위, 방패, 뿔, 나의 하나님이 나의 산성이심을 강조한다.

 

오직 그만이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요새이시니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6).

 

그러므로 크게 흔들리지 않는 데서 아예 흔들리지 않는 자리로까지 나아가는 세계를 구축한다. 예수님은 성경학자 니고데모에게 ‘다시 태어나야 하겠다’고 하실 때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이르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요 3:2).” 저가 아는 것과 예수님이 알리시려는 것이 서로 다름을 두고,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3).” 그럴 때 당대의 지식인이며 성경지도자인 저가 묻기를 “니고데모가 이르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4).” 하는 질문이 도마의 질문과 다를 게 없어 보인다.

 

곧 성경의 언어는 사람의 이해와 지식으로 감당할 수 없다. 이를 억지로 풀려다가 그릇 행하는 경우가 많다. 베드로는 후에 이 사실을 깨닫고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벧후 3:16).” 자칫 억지로 풀다 망한다고 경고하였다. 그러니 늘 말씀을 다루고 함께 하면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이를 대하고 접할 때, 나의 가장 바람은 성령으로다. 성령으로가 아니시면 말하는 이나 듣는 이가 모두 허사라. 오히려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갈 뿐이다.

 

아침 일찍 누가 오겠다고 연락을 하였다. 본래 다른 이가 오는 날인데 따로 연락이 없어 그러자고 하였다. 머리를 반삭하고 어디 막일을 하려 갈 채비를 하고 나선 저의 모습이 안쓰럽기도 하고 기특하기도 하였다. 주일에도 일이 있어 그나마 줌으로라도 만나 예배드리는 것을 함께 하지 못해, 어쩔까 하다 주일 날 설교원고를 그의 앞으로 디밀었다. 말씀으로 시작하자! 그러는 나나, 그러자고 네, 하고 따르는 저나… 나는 이 모든 되어지는 일이 내가 임의로 하는 게 아님을 확신한다. 성령이 하실 것이고 나는 그저 전할 뿐이다. 누구라도 저를 좀 안다면, 그럴 놈이 아닌데… 누구라도 나를 좀 안다면 내가 그럴 위인이 아닌 걸 잘 알 텐데… 문득 베드로와 요한의 진언이 가슴에 울렸다.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행 3:6).”

 

내가 줄 수 있는 단 하나, 그 이름 예수 그리스도, 그 은유의 세계를 사랑한다. 은유의 언어는 그 말이 실은 그 말이 아니거나 그 말이거나, 그 의미가 그 이상이거나 그 이하거나… 말하는 이도 듣는 이도 그 세계의 끝을 알지 못한다. 주님은 자신을 가르쳐 지칭하신다. ‘나는 선한 목자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물어 가고 또 헤치느니라(요 10:11-12).” 나는 이 말씀 앞에 주춤하며 나의 오늘을 돌아보게 된다. “달아나는 것은 그가 삯꾼인 까닭에 양을 돌보지 아니함이나(13).” 실은 내 안에 달아나고 싶은 욕구가 누구보다 강하기 때문이다.

 

오후께 누가 전화를 했다. 본래 오면 수요일에 오는 이인데 자신이 오는 요일을 묻고 내일, 목요일에 가겠다는 연락이었다. 누가 오고 안 오고, 하고 안 하고, 듣고 안 듣고 하는 일에 이제는 적당히 이골이 날만도 한데 나는 늘 그것으로 상처를 받는다. 부쩍 가슴이 답답하고 숨을 쉴 수 없어서 정신과로 전화를 하였다. 먹는 약의 종류가 세 개인데 두 알은 그 용도가 광범위해서 적당히 내가 조절하며 더 먹거나 덜 먹기도 한다. 한데 다른 한 알은 신박한 약이어서 가슴이 두근거리고 호흡이 가빠질 때 쓰는 약인데 이게 희한한 것은 단순히 안정제가 아니라 뇌에도 영향을 미치고 혈압과 혈액 순환에도 관여를 한다. 가령 어떤 날은 너무 자주, 많이 복용을 하면 맥박이 느려지고 혈압이 내려가 어지러울 때도 있었다. 그러니 얼마까지 얼마나 더 먹어도 되는가, 하고 담당의한테 물었다.

 

왜 그럴까? 내가, 네가, 우리가 왜 그럴까? 나는 언제부턴가 ‘왜?’ 하는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 걸려 넘어져 다리가 부러졌는데 왜? 하고 물은들? 어느 날 소화가 안 돼 병원에 갔다가 위암이라는 판정을 받았는데 왜? 하고 의문을 품은들? 다년간 나를 상대하고 누구를 마주대하며 상대하다보니 왜? 하는 질문보다 우문은 없었다. ‘왜?’가 아니라 ‘그럴 수 있는 일’로 받아야 한다. 사고의 영역을 확장해야 한다. 그 세계를 넓히지 않으면 좁아진 혈관으로 피가 통할 수 없는 것처럼 우리의 영적인 혈액은 원활히 돌지 못하고… 그럼에도 은연중에 이를 되묻는 고약함을 어쩌겠나? 나는 아들의 침묵에 숨이 막힌다. 아내의 동문서답에 말문이 막힌다. 누구의 일방적인 파기와 새로운 약속에 마음이 어렵다. 그러니 나는 삯군으로 어울린다. 선한 목자인 척은 하는데 언제든 도망칠 궁리밖에는 할 게 없으니!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요 1:14-15).

 

하시는 말씀 앞에 울컥, 마음이 저며 오는 것은 당연하다. 나는 감당할 수 없는데 나로 감당하게 하시는 일에 대하여, 아이는 슬그머니 약통을 꺼내어 안정제를 입 안에 밀어 넣고 찬 커피를 마시며 시치미를 뗐다. 나는 묻지 않았고 모르는 척하였다. 실은 나도 아이가 오기에 앞서 안정제를 먹고 괜찮은 척 시치미를 떼고 있는 중이었으니까. 우리의 이 연약함을 우리 주님은 누구보다 잘 아신다. “인자야 너는 이스라엘 목자들에게 예언하라 그들 곧 목자들에게 예언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자기만 먹는 이스라엘 목자들은 화 있을진저 목자들이 양 떼를 먹이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너희가 살진 양을 잡아 그 기름을 먹으며 그 털을 입되 양 떼는 먹이지 아니하는도다(겔 34:2-3).”

 

나는 이와 같은 말씀 앞에서 주가 나를 알아주실 것을 요구한다. 안정제를 먹으면서도 누구를 받고, 누구는 안정제를 먹으면서 저 앞에 앉아 말씀을 받는다. 하니 “너희가 그 연약한 자를 강하게 아니하며 병든 자를 고치지 아니하며 상한 자를 싸매 주지 아니하며 쫓기는 자를 돌아오게 하지 아니하며 잃어버린 자를 찾지 아니하고 다만 포악으로 그것들을 다스렸도다(4).” 하시는 말씀에는 유다의 뻔뻔함으로 ‘저는 아니지요?’ 하고 되묻게 된다. 우리에게는 우리의 선하시고 인자하시고 자기까지도 아낌없이 내어주신 우리의 선한 목자가 계심이다. 나는 결코 저의 목자가 아니며 저는 결코 나의 양이 아니다.

 

‘내 양을 먹이라’ 하실 때에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요 21:17).” 나는 베드로의 근심에 공감한다. 할 수 있다고, 하겠다고 하는 데도 그게 그처럼 내 의지로는 할 수 없는 것이어서, 이는 주의 양이라. 나는 다만 저에게 먹이시는 데 따른 그 음식을 담아내는 그릇이면 족한 것이다. 우리에게는 우리를 이끄시는 목자가 필요하다. “목자가 없으므로 그것들이 흩어지고 흩어져서 모든 들짐승의 밥이 되었도다(겔 34:5).” 그러니 나 같은 못난 사람에게 누가 오고, 어떤 사연을 두고 주의 이름을 부르는 데 있어 우리의 이 우스꽝스런 풍경도 주의 성령이 어여삐 여겨주실 것을 믿는다.

 

주님은 단언하셨다.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나 곧 내가 내 양을 찾고 찾되 목자가 양 가운데에 있는 날에 양이 흩어졌으면 그 떼를 찾는 것 같이 내가 내 양을 찾아서 흐리고 캄캄한 날에 그 흩어진 모든 곳에서 그것들을 건져낼지라(겔 34:11-12).” 이는 주의 일이다. 나는 다만, 거기에 있다. 가끔은 아들의 사늘한 태도에 상처를 받고 숨이 막힌다. 아내는 늘 자신의 관심 외에 듣거나 보려하지 않는다. 이 모두는 가르치거나 뭐라 역정을 내서 될 일이 아니다. 내일 누가 온대. 오늘 누가 왔는데, 하고 말을 하고 싶은데 아내는 별로 귀담아 듣지 않고 전혀 엉뚱한 데서 다른 말을 한다. 순간 나는 숨이 막히고 시무룩하여 입을 꾹 다물게 된다. 아니, 좀 더 노골적으로 표현하면 다 버려두고 도망치고만 싶다.

 

나는 말하기를 만일

내게 비둘기 같이 날개가 있다면

날아가서 편히 쉬리로다

(시 55:6).

 

어쩌면 나의 숨 가쁜 씨름은 이 때문인지도 모른다. 도망칠 수도 외면할 수도, 피할 수도 없는 것처럼 살 수도 없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늘 같이 있으면서도 같은 말을 나눌 수 없고, 같은 세계를 보지 못하는 일에 대하여, 은유의 세계는 무궁무진하다. “그러므로 너희 목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목자들을 대적하여 내 양 떼를 그들의 손에서 찾으리니 목자들이 양을 먹이지 못할 뿐 아니라 그들이 다시는 자기도 먹이지 못할지라 내가 내 양을 그들의 입에서 건져내어서 다시는 그 먹이가 되지 아니하게 하리라(겔 34:9-11).” 말씀의 세계는 은유다. 의미가 확장되거나 축소된다. 말씀의 탓이 아니다.

 

나는 오늘 요한계시록을 앞에 두고 주춤거린다.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계 1:3).” 누구의 계시록 강해를 읽다 접고 누구의 ‘명설교’를 찾아 듣다 접었다. 이는 마치 언어풀이, 뜻풀이 같은 것으로 성경의 언어를 알지 못하는 자들의 도식적인 해석과 그 어원을 건드려대는 정도여서, 솔직히 ‘주먹이 운다’고 할 때 주먹의 사전적인 의미가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시간은 금이다.’ 할 때 그 금이 몇 금으로 얼마만큼의 무게와 가치를 따지는 게 다 무슨 유익이 있단 소린지. 뭐라 할 건 없지만, 그러느니 나는 다만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시 2:11).” 얕은 지식으로 얕은 물가에서 첨벙거리는 정도라 해도, 나는 섬기고 떨며 즐거워하는 것으로 족하다.

 

모르면 모르는 대로 놓아두는 게 낫다. 앞서 베드로의 충고처럼 이를 억지로 풀다 이단이 되고 삼단이 되고, 자기가 예수가 되고 ‘허경영’이가 된다. 별난 세상에서 별의 별 사람을 다 대하며 살지만,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요 10:14-15).” 하시는 주의 말씀으로 족하다. 나는 성경학자가 될 마음도 누구보다 특출해서 모든 이의 주목 받는 생이고 싶지 않다. 다만 내 앞에 두시는 한 영혼으로다. 어쩌면 내게 맡기신 나 하나로도 족하다. 나는 저를 알고 저도 나를 아신다. 저가 나를 위해 목숨을 버리셨다.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그들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16).” 이때에 나는 묵묵히 주를 나의 목자로 따르고, 나의 따르는 모습에서 누구 하나 같이 하면 감사한 일일 테고. “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내가 다시 얻기 위함이니 이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느니라(17).” 이와 같이 주의 세계에 나도 포함되어 함께 함이 송구하고 감사할 따름이다.

 

오늘 오겠다는 그 이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나는 알지 못한다. 다만 주가 하시는 일이라,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18).” 말씀으로만, 말씀 안에서, 말씀만으로 씨름하는 것뿐이니.

 

 

주는 내가 항상 피하여

숨을 바위가 되소서

주께서 나를 구원하라 명령하셨으니

이는 주께서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이심이니이다

(시 71:3).

 

내가 어디로 가며 어디로 숨을 것인가? “여호와는 나의 요새이시요 나의 하나님은 내가 피할 반석이시라(94:22).” 더는 됐다. 서로가 면구스러워하면서도 못 본 척, 안정제를 몰래 삼키면서도 이처럼 말씀으로 말씀 앞에 앉히시는 이의 강권하심으로 됐다. 하면 오늘 시편의 말씀은 일갈한다.

 

그의 아들에게 입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니

그의 진노가 급하심이라

여호와께 피하는 모든

사람은 다 복이 있도다

(2:12).

 

이에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계 1:3).” 무엇보다 감사하고 긴 숨을 내쉬며 안도하는 것도 우리에게 주신 복으로다. “볼지어다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 사람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것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로 말미암아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7).” 때를 준비하고 마음을 다하고 정성을 다해 주를 사랑함으로, “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8).” 이와 같은 진리 앞에 아멘,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