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 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 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
계 2:17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천만인이 나를 에워싸 진 친다 하여도 나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이다
시 3:5-6
어느 훗날 주님 앞에서 섰을 때 나의 새 이름이 새겨진 흰 돌을 쥐고, 불리어지는 이름으로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주를 맞이하는 것을 상상해본다. 그 날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조바심 같은 갈망인지 두려움인지 부끄러움인지, 주를 바라는 마음이 옥죄는 것 같다. 삼백여년 전쯤 조나단 에드워즈 목사는 청교도적인 사명으로 23년을 섬기던 노스삼톤 교회에서 쫓겨났다. 저는 교회 성도들의 대부분이 구원받지 못한, 거짓된 영혼으로 주 앞에 나오는 것 같아 그런 자들을 걸러내어 주의 성찬예식에 참여하지 못하게 하였다. 아무나 구원 받았다고 여기며 멋대로 살아가는 것을 경계하고자 하는 것이었는데, 2, 3년의 분쟁 끝에 결국은 교회에서 쫓겨나게 된 것이다. 과연 우리는 자신이 믿음이 있고 신앙을 가지고 구원 받았다고 하는 확신을 어디서 찾고 사는 것일까?
너무 쉬운 신앙의 시절을 사는 게 아닐까? 아무렇지도 않게 신앙을 고백하고, 교회마다 얼씨구나 하고 이 사람 저 사람 할 것 없이 모두를 성도라 지칭하며 값싼 구원과 위선의 믿음 행세를 옳다구나 하고 받아주는 것은 아닐까? 새삼 에드워즈 목사의 행적을 떠올리고 저의 강경함에 동의하고 안 하고를 떠나, 나는 과연 어떠한가를 되새기게 된다. 믿는다 하고 구원 받았다고 여기며 사는 그 신앙의 근거가 대체 무언가 말이다. 바울이 운다. 눈물로 호소하며 빌립보 교회를 향해 목청껏 외친다.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그리고 너희가 우리를 본받은 것처럼
그와 같이 행하는 자들을 눈여겨 보라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빌 3:17-18).
새삼 나에게 묻게 된다. 혹여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는 사도 바울의 심정으로 내가 나에게, 또는 너에게 나를 본받으라고 할 수 있을까? 어쩌면 나의 겉과 속, 안과 밖의 차이 때문에 나의 영혼은 힘에 겨운 것이 아닐까? 오전에 오기로 한 이가 몸이 좋지 못해 오지 않았다. 나는 다음으로 미루었던 정신과로 갔다. 약이 떨어진 것보다 너무 과용하는 게 아닌가, 하여 묻고자 해서 말하다. 이런저런 내용의 말은 빤하고 별로 의미가 없다. 나름 원인도 알고 이유도 알고 이를 극복하는 방법도 안다. 그리 하면 된다! 그런데 그게 아는 것과 사는 일이 같아야 말이지. 자꾸 눈물이 날 것 같고 어디론가 도망치고만 싶은 심정으로 울렁거렸다. 여기서 다시 바울의 심정을 읽어보면,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19).
과연 나는 ‘그들’이 아니라고 확신할 수 있나? 이처럼 쩔쩔매는 것은 나의 배가 신이다. 자기 뱃속만 차리는 자를 일컬어 거짓되고 위선적이라 한다. 특히 그런 자는 남의 말하기를 좋아한다. “남의 말하기를 좋아하는 자의 말은 별식과 같아서 뱃속 깊은 데로 내려가느니라(잠 18:8).” 남에 대해서는 판단하고 비난하고 헐뜯으며 찧고 빻고, 이는 마치 별식과 같아서 뱃속 깊은 곳으로 넘어간다. 나를 돌아보며 나는 어떠한가를 생각하지 못한다. 그러니 나의 영광은 이 땅의 것으로다.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감히 말하여 나는 아니라고 할 수 있겠나? 어쩌면 상대적으로 느끼는 박탈감 때문인지도 혹은 나의 입장과 사정으로만 힘에 겨워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가슴에 벽돌 서너 장을 얹고 살아가는 것처럼 답답하고 숨 쉬기가 어렵다. 누구 때문이다, 하고 여기면 금세 이해가 되는데 그게 나 때문이라는 생각은 한사코 부인한다. 이 모두 나의 영광을 이 땅의 것으로 두고 살기 때문이라니! 자식이라 하여 그게 나의 것이겠나? 아내는 내 것이겠나? 분리관계로의 적당한 거리두기가 필요하다. 나도 안다. 아는데 안다고 이를 능숙하게 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니어서, 누구를 대하는 데 있어서 나의 위선과 아집이 나를 짓누르는 것이 아닐까? 그런 나에게 바울은 눈물로 말한다.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
(빌 3:20-21).
어쩌면 나의 영혼이 너무 밀착관계를 고집하는 것으로 사서 고생이란 생각이 들었다. 의사는 스트레스를 피하라고 하는데, 그러니 산에 들어가 중이 될 수도 없는 일이고! 오후 내내 마음이 어려워 긴 한숨을 쉬고 있을 때였다. 누가 전화를 하여 글짓기를 배웠으면 한다고 하였고, 나는 이제 더는 ‘학원으로’ 가르치지 않는다고 정중히 사양하였다. 내가 목사인 것과 그리하여 글쓰기를 ‘상한 심령이 토하는 말’로 정리하여 설명하였다. 같은 신앙을 가져야 하고, 안 믿는다면 같이 믿으려 해야 하고, 엄마가 같이 기도하며 아이를 가르치고 아이 일로 엄마가 더욱 주를 바라야 한다는 조건(?)을 내세우며 거절하듯 내 뜻을 밝혔다. 그런데 이게, 아니 그러니까 하나님은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러시는 것일까? 아이가 어릴 때 무슨 일이 있었고, 그래서 최면치료도 해봤고 누구는 귀신이 씌었다고도 하였고, 지금은 일반적인 생활을 하고 있지만… 하면서 아이의 그런저런 사정을 말하며 더욱 바라고 구하는 게 아닌가!
내가 지금 불안증에 시달리며 별 볼일 없는 목사로 목회를 근근이 하는 처지라, 하면서 어찌 좀 사양을 할까 하는데… 작정하고 하나님이 갖다 붙이시는 영혼이란 게 틀림없었다. 그러니 계속 싫다, 못하겠다고 거절할 수만은 없었다. 결국 토요일 오전에 아이와 같이 교회로 오기로 했고, 그리하기로 해놓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하나님을 당해낼 재간이 없다. 그야말로 내 코가 석 자고 나야말로 정신과에 다녀와 ‘내가 왜 이럴까?’ 하며 나의 일로도 쩔쩔매는 주제인데, 당최 하나님은 무슨 생각으로 이러시는 것인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것도 자꾸 마음이 쓰여 ‘아픈 아이’에게는 앞서 전화를 하여 내일 오전 근무가 끝나고 교회로 오라하고 점심을 사 먹일 생각을 하였다. 코로나19 거리두기 4단계가 되면서 주일에 예배도 줌으로 드리면서 아이를 못 본지 한 달이 다 돼 가고 있어서 말이다. 그럼에도 가장 성실하게 순종하고 성경을 매일 서너 장씩 필사하고 있는 아이를 응원해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다. 이거야말로 오지랖이지 않겠나? 내가 더 빌빌거리면서, 이게 대체 뭐하는 것인지….
왜 하나님은 좀 더 능력자를 쓰지 않으실까? 아니, 하필이면 나처럼 나 하나 건사하기조차 힘에 겨워 늘 빌빌거리고 약통을 들고 다니며 안도하는, 꼴에 목사라고 누구의 상한 심령을 운운하기는 하는데 나야말로 불치의 영혼이 아니겠나? 자꾸 눈물이 날 것 같기도 하고 어려운 마음에 도망치고 싶은 생각도 들면서, 그럼에도 그런 주제밖에 안 되는 나 같은 이에게 이 어찌 막중한 사명인가 싶어 송구하고 몸 둘 바 모르는 일이겠으니! 그러고 있는 내게 오늘 말씀은 뼈를 때리는 소리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 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 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
(계 2:17).
어느 훗날, 아니 지금, 내 안에 불리어지는 어떤 이름-나는 아직 그 이름이 무엇인지 모른다. 하지만 분명히 나를 부르는 소리라는 것은 안다. 나는 못하겠다고 발뺌을 해도 이기는 너에게 감추었던 만나를 주시겠다고 하는 것인데, 그것도 뭔지 어렴풋이는 안다. 이처럼 글을 쓰고, 나에게 글쓰기란 나의 상한 심령을 주 앞에 토하는 것이라!
백성들아 시시로 그를 의지하고
그의 앞에 마음을 토하라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셀라)
(시 62:8).
아니면 내가 누구에게 무슨 말을 할까? 가족에게는 가족이어서, 친구에게는 친구이어서, 우리는 저마다 말할 수 없는 사연을 가슴에 묻고 중무장을 하고 산다. 서로에게 총구를 겨누며 으르렁거리듯 ‘너 때문에’ 하는 ‘남의 말하기’로 나의 배를 신으로 섬긴다. 아 그러한데도 오늘 말씀은 아랑곳하지 않고 일갈하신다.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천만인이 나를 에워싸 진 친다 하여도
나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이다
(시 3:5-6).
대체 나는 또 뭘 믿고 이러는 것일까? 끝까지 거절하고 사양했어야 하나? 싶은 후회가 통화도 끝나기 전에 밀려드는데, 전화 저편의 아이엄마는 절박한 심정으로 누구에게도 말하기 힘들었을 ‘그 이야기’로 나를 붙들어 잡았다. 그 심정이 어떤지, 저이도 믿는 이임을 강조하고 앞으로 더욱 신앙에 더 열심으로 임하겠다는 공수표 같은 다짐으로 내게 아이를 보냈으면 하는 것인데, 난들 무슨 힘이 있겠나? 같이 기도하셔야 한다. 나도 빌빌거리는 사람일 뿐 하나도 나은 게 있는 사람이 아님을 덧붙이려다 그만두었다. 그쯤에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인 것을 눈치 챘다. 거절한다고 될 일이 아니었다. 에라, 모르겠다, 하는 심정으로 시간을 정하고 우선은 만나기로 하였다.
언제부터 우리가 이처럼 힘겨워하는 것일까? ‘그들의 배가 신이다.’ 자기만족과 그 포만감으로 행복에 겨워 생을 가벼이 여기며 그 즐거움을 영광으로 삼으면서이다. 자기 신앙을 확신하면서 정작 그 신앙은 에드워즈 목사의 필사적인 경계처럼 거짓되고 위선적이어서, 우리에게 이제 남은 것이 없다. 너덜너덜 영혼마다 진저리치며 오금이 저려 몰골이 말이 아니다. 그런 나를 위하여,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고후 5:15).
사는 목적이 다른 것이다. 살아가는 이유가 달라져야 하는 것이다. 우리 영혼의 가치는 그 어떤 값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가치의 값어치로 값이 치러졌다. 한데도 우린 우리의 영광을 부끄러움에 두고 있으니, 세상을 중요하게 여기고 저들이 추구하고 바라는 것으로, 나도 어찌 좀 한 자리 끼어서 누리며 대접받고 살고 싶은 것인데, 그것으로 영광을 삼는 일에 대하여,
간음한 여인들아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됨을 알지 못하느냐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니라
(약 4:4).
그게 나는 아니라고 말할 수 없어서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것은 아닐까? 천국의 시민권을 가졌다고 하면서도 이 땅의 영광을 놓지 못하고, 자식에게 인정받고 아내에게 존중 받고 사람들의 이목을 끌며 주목 받고 싶은 생이고 싶은 것은 아닐까? 아니긴! 그러니 그렇지 못한 것들이 스트레스가 되어 내 영혼에 작동하고 이에 짓눌려 숨을 쉬기 힘들 정도로 가슴이 답답하고 불안과 초조에 쩔쩔매는 게 아니겠나? 그런 나의 정체를 성경은 밝히신다.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
(빌 3:20-21).
주가 아니시면, 그리하지 않으시면 나야말로 구제불능인 것을. 정신과를 다녀오고, 의무적으로 설교원고를 다듬다가도 길게 한숨을 내쉬면서, 하루를 마치려는데 느닷없는 누구의 전화라니! 하나님 특유의 사랑과 관심 앞에 나는 두 손 들었다. 그냥 싫다, 못하겠다, 할 수도 없게 만들어놓으시곤 할 수 있는 능력은 아랑곳하지 않으시면서… 요단강을 밟으라, 그럼 마를 것이다! 하시는데 나는 자꾸 요당간이 마르면 내가 밟겠습니다, 하고 힘겨루기를 한들! 누구도 하나님을 당해낼 수 없다는 데 나는 항복을 한다. “싸울 날을 위하여 마병을 예비하거니와 이김은 여호와께 있느니라(잠 21:31).” 그러니 어쩔 것인가? 에라, 모르겠다! 알아서 하시라. 하는 수밖에. 죽이시든 살리시든. 이때 바울의 말이 떠올랐다.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
(고후 13:5).
이런 젠장. 나의 슬픔이 기쁨이었고, 나의 두려움과 염려가 주를 바라는 원인이 되었으며, 나의 고달픈 마음이 주밖에 없음을 뼈저리게 알려주시는 확성기 같았으니. 이런 나를 도대체 어쩌면 좋단 말인가? 오늘 본문으로 나를 앞에 앉히시고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계 2:4).” 하고 엄히 돌아보게 하신다.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5).” 이를 두려운 마음으로 되새길 수 있는 게 복이라는 것을, 답답증을 느끼고 호소하며 주의 이름을 부르고 주 앞에 불려나오는 게 복에 복인 것을, 아이엄마의 절박함으로… 나는 이제 국어나 글짓기 학원으로 그 일을 하지 않는다고 사양하면서 듣기 싫으라고, 상한 영혼을 운운하고 꼰대 같은 목사 흉내를 내듯 교회를 다니시는가, 신앙은 어떠하신가 하고 물을 때, 됐다 그러고 그만둘 줄 알았는데… 아뿔싸! 하나님의 함정이었다.
더는 거절 할 수 없는 자리에까지 밀어붙이시는, 고약한 하나님의 사랑 앞에 나는 두 손을 든다. 맘 대로 하시라! 그러자 서머나 교회를 향한 말씀으로 내게 큰소리로 편지를 읽으신다.
너는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에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
(2:10).
아, 나는 과연 그럴 수 있을까? 못하겠다고 슬그머니 주 앞에서 물러나려 할 때, 버가머 교회를 향한 서신으로 나를 불러세우신다.
그러나 네게 두어 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자손 앞에 걸림돌을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
(14).
그러니 내가 안 한다고 하면, 저이는 어디 안 믿는 사람들의 세상에서 아이 일로 기웃거리며 주를 더욱 멀리하게 될 터인데. “그러므로 회개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속히 가서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16).” 내가 먼저 회개하고 주 앞에 엎드릴밖에. 그리고 두아디라 교회를 향한 음성으로,
그 눈이 불꽃 같고 그 발이 빛난 주석과 같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시되
내가 네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
그러나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
(19-20).
나 몰라라 하는 일이 이처럼 무서운 결과인 것을, 이에
다만 너희에게 있는 것을
내가 올 때까지 굳게 잡으라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
그가 철장을 가지고 그들을 다스려
질그릇 깨뜨리는 것과 같이 하리라
나도 내 아버지께 받은 것이 그러하니라
(25-27).
아, 나의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내가 또 그에게 새벽 별을 주리라(28).” 끝까지 완주하게 하실 것을 믿는다.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빌 1:6).” 결론은, 내가 하는 게 아니었다. 하게 하신 이가 또한 맡아서 하실 것임을 확신한다. 나는 다만 그러는 동안에 살아계신 하나님을 마주할 뿐이다. 이에,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천만인이 나를 에워싸 진 친다 하여도
나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이다
(시 3:5-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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