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계 3:20
여호와께서 자기를 위하여 경건한 자를 택하신 줄 너희가 알지어다 내가 그를 부를 때에 여호와께서 들으시리로다
시 4:3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인정하고 주께 맡길 때 이를 영광으로 삼아 기뻐하시는 것 같다. 그러니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잠 3:4).” 내가 뭘 어떻게 하려하기보다 하고자 하시는 이의 뜻에 맡겨 두는 것, 나의 부모의 비결은 거기에 있었다. 어릴 땐 그게 참 무심하고 때론 서럽기도 하였던 것 같은데 오늘에 이르러 우리 형제들이 모두 주의 길을 가는 것을 보면 다른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 나의 삶의 중심은 무엇인지? 그 신앙의 정점을 어디에 두고 사는지를 되묻게 된다. 자칫 ‘십자가의 원수’가 될 수 있다는 데 치를 떨면서.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빌 3:18).
사도의 눈물이 느껴진다. ‘여러 사람이’ 어쩌다 그런 것일까? 말씀을 되새길 때면 섬뜩한 마음마저 든다. 내가 아닐까, 하는 두려움으로 나는 아니라고 말할 수가 없어서 말이다. 결국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19).” 이는 우리 모두의 특성이 아니겠나? 형편이 좀 된다 싶으면 내남없이 골프에 유명 브랜드의 옷이며 타고 다니는 자동차며, 필요에 의한 것을 과시에 따른 만족으로 충족시켜 그것들로 휘감고 자신을 꾸미고, 결핍을 대신하려 하는 것을 어찌 뭐라 할 수 있겠나만, 나는 안 그런가? 할 때에 내 안에도 여전하였다. 나의 신이 배다. 나의 영광은 세상을 좇고 바라며 남부럽지 않게 살고자 하는 ‘땅의 일’이 되었다. 이는 ‘여러 사람’의 공통된 바람이기도 하다.
어제는 ‘아픈 아이’를 오게 하여 같이 점심을 먹었다. 어느새 시편에서 시작하여 신약까지 끝내고 구약으로 넘어와 욥기서를 쓰고 있었다. 하루에 서너 장씩 그래도 묵묵히 쓰고 또 쓰는 아이에게 칭찬 겸 얼굴이라도 한 번 보고 싶어서였다. 그런데 옷차림이 너무 막일하는 복장이어서, 그래도 회사 다니는데 그런 차림이어서 되겠나? 하고 물었더니 바지를 엊그제 샀다며, 원래 15만원인데 8만원에 산 것이라고 메이커를 보이며 자랑하였다. 그래도 그렇지… 하고 뭐라 잔소리를 하다 그만 멈추었다. 그래도 많이 좋아진 걸 알지만 충동적으로 그렇게 있는 데 또 사고 있는 데 또 사고 하는 것이어서, 그러니 아이엄마의 속은 오죽할까 싶었다. 나까지 뭐라 하니 아이는 주눅이 드는지 바른 자세를 하고 눈치를 보았다. 그러니 잘했다고 하기에는 너무 허접한 추리닝을 무슨… 것도 한 주 용돈이 그 정도도 아닌 것을, 어쩐지 오자마자 이것저것 먹고 싶다는 건 많은데 눈치를 본다 싶었다.
그게 어디 아이 문제일까? 뭐라 하다보면 죄다 내가 들어야 할 소리다. 충동적으로 사는 시대다. 서로가 당해낼 수가 없다. 자기 능력껏 사는 일이라고 하면 할 말이 없는 것이지만 그 됨됨이의 문제다. 나는 자꾸 어느 상담가의 고액의 상담료와 저가 입은 유명브랜드의 옷을 떠올리게 된다. 더욱이 그것을 두고 양분되는 의견들 앞에 나는 다만 속상하다. 스스로 그리 꾸며 호화로운 치장을 하는 이의 됨됨이와 저가 아픈 아이들을 살피며 의학적인 분석과 판단으로 상담의 하는 일의 가치와 이를 두고 서로들 설왕설래하는 것에 대하여 나는 모든 게 마음이 언짢다. 다시는 안 그런다, 다음부터는 돈을 아끼겠다, 하며 지레 묻지도 않은 말을 저 혼자 다짐하며 또 내게 용서를 비는 아이의 모습에서 마음이 상했다. 속상하고 답답하여, 그러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내 속의 불편함이 언짢음으로, 언짢음이 부끄러움으로 나 자신을 건드리는 것이었다.
좀 산다 싶으면 마치 기성복 같이 서로들 닮아가고 부러워하고 같이 또 그것을 자랑으로 여겨 자기 배를 섬기는 일이었으니, 그래서 사도는 앞에 이를 경계하며 자신의 자세를 점검하였던 것이구나!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14).” 목적이 이끌지 않으면 생활은 무너지게 돼 있다. 나는 아이에게 몇 푼 안 되는 돈을 벌기위해 그 고생을 하면서 그런 데 허투루 돈을 쓰면 되겠냐는 이야기를 하다 멈추었다. 뭐라 해도 소용없는 아이의 병적인 충동은 나를 가끔 주춤거리게 한다. 그래도 또 말해줘야 하는지, 뭐라 해야 하는지, 그러려니 하고 놓아두고 나 몰라라 해야 하는지, 어쩌는지… 그러할 때 우리의 자세는 주만 바라봄이다. 주께 맡기는 것, 일찍이 나의 부모가 그리 선택을 하신 거였구나! 4남매의 자식을 부모로서 마음만 동동거리며 끌려가다가는 도저히 주의 길을 갈 수 없으니까, 하나님이 알아서 하시라! 하고 내맡겨버리는 것. 그런데 우리 하나님은 그런 데서 영광을 받으시고 기뻐하시는 분이시었다. 우리가 두려워하고 주의 인자를 바라는 데서, “여호와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과 그의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들을 기뻐하시는도다(시 147:1).”
그런 거 보면 우리 주님은 다른 걸 바라시는 게 아니다. 우리가 준비하는 어떤 훌륭한 자세와 도구와 오랜 연마로 일구어낸 탁월한 실력을 기대하시는 게 아니다. 다만 “싸울 날을 위하여 마병을 예비하거니와 이김은 여호와께 있느니라(잠 21:31).” 아무리 애쓰고 수고한다 해도 모든 이김은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데서 영광이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사 11:9).” 내가 누구에게 뭐라 하다 순간 입을 다물게 되는 것은 그 소리가 모두 내가 들어야 하는 소리다.
나이가 들면서 가장 그리운 것은 새로운 사람이 아니라 오랜 사이의 사람이고, 저의 입바른 칭찬보다 뭐라 꾸짖는 잔소리였다. 언제부턴가 뭐라 야단 쳐주는 사람이 없어졌다. 기껏 아이를 오게 하여 밥이라고 한 끼 먹이면서 응원하고 격려하려던 마음이 어서 구제품으로나 줘도 입을까 말까 한 추리닝을 8만원에 주고 사서 보자마자 돈이 없다는 소릴 하는 녀석에게 나는 뭐라 하다 입을 다물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어정쩡하게 같이 식사를 하고 잠깐 산책을 하다 돌려보낸 게 다였다. 그러니 참, 우리의 됨됨이에 대하여 누가 누구를 뭐라 나무라겠으며 무엇을 두고 비난하고 비판하겠나? 다들 자신이 옳다고 여기고 판단하는 대로 산다. 그 사는 모습이 지능이 병적으로 낮은 어른아이의 모습과 다를 게 없다. 아니 오히려 더 뻔뻔하고 과하다. 같은 건물에 무슨 골프 연습장이 있는데 이 와중에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명품으로 치장하고 고가의 장비를 들고 삼삼오오 오가는 이를 엘리베이터에서 만날 때면, 뭐라 표현하기가 어렵다. 욕을 할 수도, 부러워할 수도, 같이 탄 아이들 보기에 부끄러워하기도….
이것이 우리의 실상인 것을, “간음한 여인들아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됨을 알지 못하느냐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니라(약 4:4).” 그러니 세상에 살면서 세상이 좋은데, 세상도 좋고 하나님도 좋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세상을 저버리기에는 부러운 게 너무 많고, 하나님만 좋다고 하기에는 너무 막연하여 광신자가 되지 않는 이상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것일 텐데. 그런 우리에게 성경은 일깨우시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
(빌 3:20-21).
결국은 주의 영광의 몸의 형체로 변하기까지, 별 수 없다. 끝없이 자신과 싸워야 한다. 하나님과 씨름하는 일이다. 아이의 병적인 충동적 구매에 혀를 끌끌 차며 그러려니 하고 무시할 일이 아니다. 우리의 속성이 모두 다를 게 없다. 우리는 너무 쉽게 구원을 생각한다. 예수 믿고 아멘, 하고 죄를 인정하면 구원 받아 천국 백성이 됐다고 자랑한다. 이를 교회에서 배웠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놀라운 확장은 너무 가벼운 구원과 값싼 은혜의 결과다. 그러니 믿는 자나 안 믿는 자나 복을 추구하는 것은 다를 게 없다. 목사가 되고 이런저런 기도제목을 누가 말하며 부탁할 때 열에 아홉은 자신들의 필요다. 마치 교회가 무슨 흥신소 같다. 서로 합심하여 기도하면 뚝딱, 하나님은 부르면 달려가는 A/S 서비스센터 직원 같다. 늦으면 또 늦는다고 짜증, 금방 해결이 안 되면 안 된다고 건의하듯 부르짖고, 그걸 마치 대단한 신앙인양 기도의 사람처럼 행세하며 요구하는 것은 모두 사는 데 따른 필요다.
그러니 나는 안 그런가? 아이를 뭐라 하다, 누구에게 뭐라 이르다, 그게 다 내가 들어야 하는 소리여서 주춤, 부끄러움에 얼굴이 화끈거리게 되는 것이다. 그런 나에게 오늘 주님은 가만히 들려주신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계 3:20).
그러한 주님의 방문을 우리는 과연 달가워하는 성도일까? 믿음으로 산다고 하면서 정작 주의 내주임재하심을 바라기는 할까? 그러할 때 여태 아무렇지도 않던 것들을 치워야 하고 버려야 하고 포기해야 하는데… 그러니 문을 열 수도 없고 싫다고 돌아가시라 할 수도 없고. 여전히 문 밖에 세워두고 우리는 어쩌면 외면하고 모르는 척 차일피일 미루며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때의 오늘 시편의 일갈이 뜨끔, 하게 한다.
여호와께서 자기를 위하여
경건한 자를 택하신 줄
너희가 알지어다
내가 그를 부를 때에
여호와께서 들으시리로다
(시 4:3).
여기서 오랜 의문이 풀린다. 왜 그토록 부르짖고 나름 애써 구하고 간구하는 데 들으시지를 않는지. 귀가 들리시지 않나? 눈이 보이시지 않나? 왜 나의 부름에는 아무런 답이 없으신가? 하였던 의문이 풀린다. 과연 나는 경건한 자로 택하심을 받은 것일까? 이를 오늘 말씀은 누차 일깨우고 있는 것이다. “너는 일깨어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건하게 하라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 이와 같은 말씀 앞에 두려움이 없다면?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켜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둑 같이 이르리니 어느 때에 네게 이를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계 4:3).” 아무런 느낌도 없이 이와 같은 말씀을 읽어 내릴 수 있다면, 벌써 어디가 마비가 됐거나 죽었거나 둘 중 하나가 아니겠나? 성경은 분명히 약속하신다.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의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5).
설렘과 두려움이 공존하는 아침이다. 말씀 앞에 쭈뼛거리며 나를 돌아본다. 기껏 아이를 오라 했다가 그리 돌려보내고는 내내 마음이 어려웠다. 그럼에도 돌아가서 다른 날보다 몇 장을 더 성경을 쓰는 아이의 심정을 헤아리다 눈물이 핑, 돈다. 녀석도 뭐라 한 내게 또 실망을 주었다는 데서 자꾸 죄송하다고 하는 것이겠다. 아니다, 괜찮다, 하고 웃자고 이모티콘도 던지고 마음을 푼다고 풀었는데도, 나야말로 참 뻔뻔하다.
아, 나는 지금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켜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10).” 하시는 말씀으로 마음이 든든히 설 수 있을까?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12).” 이 얼마나 신나고 벅찬 감격인가? 감히 이를 기대하기에는 나의 나 됨이 참으로 허접하고 옹졸하여 몸둘 바를 모르겠다. 그러는 내게,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19).” 나의 열심과 회개는 주를 인정하는 것, 비로소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20).” 하시는 데서 안도한다.
오늘 이 한 날의 하루를 더하신 것은 아직 주께서 사용하고자 하심이니,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21).” 말씀 앞에 아멘, 한다. 하여,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가득함이니라
(합 2:14).
나의 하루에서 주를 인정하는 것으로 가득하여지기를. 그러할 때, “땅이여 두려워하지 말고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여호와께서 큰 일을 행하셨음이로다(욜 2:21).” 하나님이 어찌 다루시고 인도하심으로 주의 영광이 가득하게 하실는지. “내 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를 때에 응답하소서 곤란 중에 나를 너그럽게 하셨사오니 내게 은혜를 베푸사 나의 기도를 들으소서(시 4:1).” 다만 주께 기도한다. 그렇게 “여호와께서 자기를 위하여 경건한 자를 택하신 줄 너희가 알지어다 내가 그를 부를 때에 여호와께서 들으시리로다(4).” 이를 붙들고 산다는 일은,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그들의 곡식과 새 포도주가
풍성할 때보다 더하니이다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살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이시니이다
(7-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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