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외로운 자가 주를 의지하나이다

전봉석 2021. 9. 3. 05:08

 

그 날에는 사람들이 죽기를 구하여도 죽지 못하고 죽고 싶으나 죽음이 그들을 피하리로다

계 9:6

 

여호와여 어찌하여 멀리 서시며 어찌하여 환난 때에 숨으시나이까

시 10:1

 

 

두려움의 날이 열린 것 같다. 서로가 서로에게 자신을 주장하며 이상하다고 말한다. 서로의 말은 귀에 들어오지 않고 자기 소리로만 가득하다. 그 소리는 억울함과 분함과 원통함과 서러움으로 가득가득하여서, 말하다 울고 울다가 꺼이꺼이 가슴을 친다. 나는 저를 바라보며 어디서 무슨 말로 위로를 할지 혹은 뭐라 할지, 종잡을 수 없어 답답하였다. 섬기는 교회는 교회대로 이상하고, 부부는 부부로도 부모로도 이상하고, 가운데 낀 아이는 아이대로 이상해져가고, 친정은 친정대로, 시댁은 시댁대로… “다섯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내가 보니 하늘에서 땅에 떨어진 별 하나가 있는데 그가 무저갱의 열쇠를 받았더라(계 9:1).” 사는 게 지옥이다. 그러니 “그 날에는 사람들이 죽기를 구하여도 죽지 못하고 죽고 싶으나 죽음이 그들을 피하리로다(6).” 아, “여호와여 어찌하여 멀리 서시며 어찌하여 환난 때에 숨으시나이까(시 10:1).”

 

이 모든 일에 죄를 짓지 않으려 하나 그 또한 괴롭기만 하여서,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아니하니라(욥 1:22).” 이내 꺼이꺼이 운다.

 

울어도 못 하네

눈물 많이 흘려도

겁을 없게 못하고

죄를 씻지 못하니

울어도 못 하네

 

힘써도 못 하네

말과 뜻과 행실이

깨끗하고 착해도

다시 나게 못하니

힘써도 못 하네

 

참아도 못 하네

할 수 없는 죄인이

흉한 죄에 빠져서

어찌 아니 죽을까

참아도 못하네

 

-십자가에 달려서

예수 고난 당했네

나를 구원하실 이

예수밖에 없네

 

믿으면 되겠네

주 예수만 믿으며

그 은혜를 힘 입고

오직 주께 나가면

영원 삶을 얻네

(새찬송가 544장, <울어도 못 하네>)

 

로버트 로우리(1826-1899)의 찬송시다. 1898년 선교사 배위량의 아내 안애리의 번역으로 우리나라에 소개되었다. 로우리의 곡은 <나의 갈 길 다가도록>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당시에 저는 침례교 목사로 격동의 시대를 사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심금을 울리는 찬송시를 지었다.

 

어제는 누가 다녀갔다. 이런저런 사정을 듣다보면 가슴을 짓누르는 듯 오후 내내 이 찬송가가 귓가를 맴돌았다. 운다고, 참는다고, 힘쓴다고 되겠나? 오죽하니 저의 말끝에 나도 모르게 총체적난국이란 표현을 붙였다. 저에게는 죄스러워하지 말고 정신과에 가서 약을 좀 타서 먹고 안정을 좀 찾으라고 일렀다. 나의 말은 너무 현실적이어서 무책임하였고 덩달아 출렁거려서 무기력하였다. 이럴 때 뭔가 ‘성령의 은사’로 확, 어떤, 신비한 체험 같은, 그런, 뭔가, 능력인지 권능인지 하는 것으로, 좀 어떻게 할 수 있으면 좋겠는데… 하나님은 의도적으로 침묵하시고, 세상은 너무나 아무렇지도 않게 잘만 돌아가고 있었다. 이에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이시니라(약 5:11).”

 

고통과 인내로 꼽으라면 욥이 단연 대표적인 인물이겠으나 절망적인 저의 시련은 상상만으로 헉헉, 숨이 막히는 것 같다. 그러니 하나님의 뜻을 안다는 일은,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마 11:29-30).

 

모든 물은 흘러 한 곳으로 모이는 것과 같이 ‘예수밖에 없네’ 하는 찬송으로 귀결된다. 우리가 주께 맡긴다는 것, 주 앞에 나의 모든 짐을 내려놓는다는 것, 이는 결코 용기도 아니고 결단으로도 아니다. 고난은 목적이 있고 그 목적을 다하기까지 그칠 수 없는 것이었으니, “그러므로 만물이 그를 위하고 또한 그로 말미암은 이가 많은 아들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그들의 구원의 창시자를 고난을 통하여 온전하게 하심이 합당하도다(히 2:10).” 그러니 보라, “여섯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내가 들으니 하나님 앞 금 제단 네 뿔에서 한 음성이 나서 나팔 가진 여섯째 천사에게 말하기를 큰 강 유브라데에 결박한 네 천사를 놓아 주라 하매 네 천사가 놓였으니 그들은 그 년 월 일 시에 이르러 사람 삼분의 일을 죽이기로 준비된 자들이더라(계 9:13-15).”

 

가령 오늘의 미얀마사태가 남의 나라 일인가? 아프가니스탄의 일이 저 먼 나라의 일인가? 우리가 채 몇 십년 전에 겪었고, 오늘도 여전하여 전쟁 아닌 전쟁의 상태로 휴전중이지 않던가? 남북한의 종전을 선언하는 일에도 서로 얽히고설킨 이해관계가 상충하고, 그것이 강대국들 때문인지, 내전으로 서로의 사상의 문제인지, 이념적 갈등이든 이권의 다툼이든, “이 재앙에 죽지 않고 남은 사람들은 손으로 행한 일을 회개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여러 귀신과 또는 보거나 듣거나 다니거나 하지 못하는 금, 은, 동과 목석의 우상에게 절하고 또 그 살인과 복술과 음행과 도둑질을 회개하지 아니하더라(계 9:20-21).” 이것이 참으로 오늘의 참상이지 않겠나?

 

섬기는 교회를 두고 뭐라 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이상하다’는 느낌은 지울 수가 없었고, 정신 똑바로 차리라고 이를 뿐… 저는 상처난 감정들로 허덕이는 것이었으니,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에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마 8:17).” 주께 모두 내려놓고 맡기지 않는 이상 어찌 감당하려 하는 것인지. 부디 그러자, 그래라, 그래야 한다 하고 이른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 8:26).” 그러니 마음 같아서는 안타까워서라도 어찌 좀 뭐라도 하겠는데, 성령으로밖에는 우리가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닐 거였다.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27).”

 

교회는 목사의 권위로 굴러가면 사교가 되고, 비화밀교와 다를 바 없는, 은밀하고 친밀하게 저들끼리의 숭배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목사의 특별한 은사는 가려져야 하고 더욱 겸손해져야지 그것이 사람들의 마음을 선동하는 데 앞장서면 이는 ‘금송아지’와 다를 게 없다. 목사 중심으로 어떤 특별한 은사에 허덕거리며 필요에 따라 서로들 모여든 사람들은 하나님을 부르지만 실은 ‘이것이 너희를 인도해낸 하나님이다.’ 하는 꼴과 다를 게 없다. 감히 말하지만 특별한 은사일수록 더더욱 겸손을 바탕으로 하고, 자신은 한없이 낮아지고 녹아져서 사람들의 주목을 끌어서는 안 된다. 엊그제도 묵상하였던 것처럼, 우리에게는 말씀이 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다. 이는 어느 특정한 누구, 어떤 사람, 그를 중심으로 일컫는 제2, 제3의 예수를 만드는 게 아니다. 우리 모두의 일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이는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요 6:54).” 하시며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51).” 다시 말해 말씀은 귀에 안 들어오고 온통 누구의, 어떤, 뭔가 특별하고 희한하고 시끄럽고 요란한 은사에만 눈이 멀어서… 무슨 교회가 목사의 카리스마로 운영되고 유지되고 사람들을 끌어 모아 좌지우지 한다는 소린지. 거기에 충성하느라 자기 가정을 뒷전이고, 사모와 아이를 대하는 일에 있어 막말과 막대하는 행동으로, 그러고도 그게 무슨 사역이라고! 미치지 않고서야 어디에, 무얼 위해 충성한단 말인가? 밤마다 모여 무슨 기도회는 또 그렇게… 대체 뭘 위한 기도회고 누구를 위한 기도인가?

 

듣다듣다 속이 터질 것만 같은데 대놓고 욕은 할 수 없고… 그러니 요즘은 개인이고 교회고, 믿는 자고 안 믿는 자고, 온전한 정신으로 온전하게 사는 삶이 어렵다. 다들 미쳐 환장하는 일이 있으니 돈이면 돈, 오락이면 오락, 자기를 꾸며 드러내는 일이면… 모두가 메두사의 주문에 걸린 것처럼 손에 손에 검은 물을 들고 홀짝거리며 자신들의 제단 앞에 무릎을 꿇는 형국이다. 그러니 이 시대에 저의 목을 자를 페르세우스는 누구일까? 못난 놈은 가정에서 아내와 아이 앞에 굴림하고, 못난 목사는 말씀을 떠나 자신을 과신하며 겁에 질린 사람들을 선동하듯 모아대고, 임대인은 임차인을 임차인은 임대인을 서로가 서로의 목을 쳐대는 페르세우스를 자청하고 나선 것인지. 그러니 “제자 중 여럿이 듣고 말하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한 대(요 6:60).” 여기서 어렵다고 하는 사람들은 엄연히 제자들이었다. 나름은 예수를 따른다고 길을 나섰던 자들로 그의 가르침을 선호하였던 자들이다. 군중이나 무리가 아니다. 한데 “그 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66).”

 

그러니 환장할 노릇이다. 오만 잡신이 우글거리는 세상이다. 그게 다 아이 이름에 문제가 있어서 그렇다며 친정엄마는 어디서 새로 아이 이름을 받아와서 부른다. 저이는 그런 거 안 믿고 싫다면서도, 그래서 그런가싶어 혹시나 하는 눈치였다. 그러니 부디 애 문제고 남편 문제고 다 내려놓고 자신을 좀 돌보라, 권하면서 내가 고작 할 수 있는 말은 당장이라도 정신과에 가서 약을 좀 타서 먹고 스스로 진정을 좀 하라 일렀다. 나도 안다. 같은(?) 목사로서 나는 참 볼품없고 쪼다 같다. 저가 돌아가기 전 기도를 좀 하는데, 내가 구할 말은 하나도 대단한 게 아니었다. 주님, 도와주세요! 나는 저를 위해 기도할 때면 다른 말이 떠오르지가 않는다. 저이는 저이 스스로도 벗어나지를 못한다. 그렇게 말해주었다. 결국은 남 이야기가 아니라 자신의 이야기다.

 

자기 불안으로 시달린다. 자신도 안다. 하긴 심리학과 전공이니 오죽 잘 알겠나? 스스로를 진단하기를 범불안증이라 하였다. 이런 제기랄! 우리의 죄는 아는 게 병이다. 차라리 모르면 납작 엎드리기라도 하지. 에이, 설마. 괜찮아요, 하는 말이 어디서 그리 천연덕스럽게 나온담! 애는 애대로 병들어간다. 신랑은 신랑대로 엉뚱한 데서 삽질이다. 그래놓고는 고단하여 분풀이를 연약한 애나 마누라한테 일삼는다. 고약하다. 사는 일이 참으로 고약하다. “그가 무저갱을 여니 그 구멍에서 큰 화덕의 연기 같은 연기가 올라오매 해와 공기가 그 구멍의 연기로 말미암아 어두워지며 또 황충이 연기 가운데로부터 땅 위에 나오매 그들이 땅에 있는 전갈의 권세와 같은 권세를 받았더라(계 9:2-3).” 말씀은 가려지고 온갖 벌레 같은 또는 권세 같은, 여기서 을이 저기서 갑이 되어 갑질을 하는데, 저기서 갑이 또 다른 데서는 을이 되어 당해댄다. “그러나 그들을 죽이지는 못하게 하시고 다섯 달 동안 괴롭게만 하게 하시는데 그 괴롭게 함은 전갈이 사람을 쏠 때에 괴롭게 함과 같더라(5).” 그저 서로가 서로를 괴롭히고, 서로로 인해 괴로움을 호소하지만 정작은 또 그게 서로를 필요로 하는 것이어서… 이혼까지 생각하는 저의 말에는 그만큼 사랑을 갈구하는 것이었으니.

 

아, 사는 게 다들 지옥이라. 본래 지옥에 사는 자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지옥스럽게 잘만 살아가는데 천국 백성으로 지옥을 견디려니 죽은 자식 부랄 만지는 격이라. 아, “여호와여 어찌하여 멀리 서시며 어찌하여 환난 때에 숨으시나이까(시 10:1).” 주여 주여 하고 주를 부르는데 주님은 너무 멀리 계시는 것만 같다. 실은 그 속이 온통 죄라. 죄가 있는 곳에 은혜도 있는 법, 말씀을 들여다 보며 좀 가만히 주를 바라면 좋으련만, 그럴 겨를이 없다. 여기저기 동영상이 널린 시대라, 열면 나오는 말씀인들 들으려고 하지를 않는다. 그러니 전갈이 저의 마빡을 쏘아대도 고통으로 일그러져 곡소리만 낼뿐 도망칠 생각이 없다. 입에 들어오는 것도 없는데 종소리만 나면 입을 벌리고 침을 질질 흘리며 먹이를 구하는 개꼴이다. 그러니 어쩌면 좋을까? 가장 사랑하는 사람마저, “그의 아내가 그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온전함을 굳게 지키느냐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욥 2:9).” 하고 저를 떠나버린다.

 

도무지 이 비극을 피할 수가 없다. 그러니 어째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와 같은 고통을 던져놓으시는 것일까? 우리에게 비극이 없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도 없다! 저마다는 알아야 한다. “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창 4:13).” 행여 저이가 읽으면 감정 상할 수 있는 말이지만, 친정도 시댁도, 신랑도 본인도, 심지어 아이에게까지도… 결국은 죄의 고리다. 악순환이다. 뜬금없이 저이의 말이 ‘이해는 가요, 그이도 안 됐죠!’ 하는 말에 나는 버럭, 화를 냈다. 나는 제일 이해가 가는 게 사탄이다. 천사로 하나님 곁에서 오죽했으면 하나님처럼 되고 싶었겠나. 나는 다음으로 제일 이해가 가는 사람이 사울 왕이고 가룟인 유다다. 저들 나름, 얼마나 애써 수고하여 온 맘으로 주를 바란다고 바라고 섬기며 주를 따랐나? 자신의 이상과 현실을 붙들고 사는 이상 별 수 없다. 지옥에는 온통 안타까운 사연뿐이고, 이해하지 못할 대상은 없다. 다들 나름은 한다고 애써 수고하고 애쓴 자들이 모여 우글거리며 아우성이다.

 

어디서 누굴 이해한단 소릴. 누가 이해로 죄 사함을 받고 구원을 얻을 수 있겠나? 그럴 거였으면 고작 선악과를 하나 따 먹은 것뿐인데, 이해하고 말지 그걸 뭘 그렇게….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설마, 하면서 하루하루 혹시나, 하고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가장 두렵고 아찔한 순간은 이내 회개할 기회마저 잃는 것이다!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그가 그 후에 축복을 이어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히 12:17).” 내가 저와 더 만나 이야기를 듣다가는 내가 미칠 것 같은데도, 나는 저에게 일주일에 한 번 더 오는 것은 어떻겠나? 하고 제안했다. 자신을 돌봐야 하는데, 다 내어맡기고 말씀으로만 서면 안 되겠나? 하고. 기도는 무슨, 백날 구하는 게 안 믿는 자들의 소원과 다를 게 없는 것을 비는 기도가 무슨 기도이겠나? 그러니 교회 잘 다니던 친정부모도 교회를 등지고 어디서 무슨 용하다는 미친 작자에게 손자 이름이나 새로 받아오는 신세로 전락한 것인데… 그게 그저 이해하고 말인가 말이다.

 

이는 우리 인생의 가장 밑바닥의 문제다. “어찌하여 내가 태에서 죽어 나오지 아니하였던가 어찌하여 내 어머니가 해산할 때에 내가 숨지지 아니하였던가 어찌하여 무릎이 나를 받았던가 어찌하여 내가 젖을 빨았던가(욥 3:11-12).” 아, 주님! 이 인생의 난공불락 같은 오늘의 처지를 어찌 해결할 방법은,

 

믿으면 되겠네

주 예수만 믿으며

그 은혜를 힘 입고

오직 주께 나가면

영원 삶을 얻네

 

부디 주 앞에 모두 내어놓을 수 있기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눅 5:32).” 주만 바라며, 주께 모두 맡김으로, “여호와여 일어나옵소서 하나님이여 손을 드옵소서 가난한 자들을 잊지 마옵소서(시 10:12).” 이에 “주께서는 보셨나이다 주는 재앙과 원한을 감찰하시고 주의 손으로 갚으려 하시오니 외로운 자가 주를 의지하나이다 주는 벌써부터 고아를 도우시는 이시니이다(14).”

 

여호와여 주는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으셨사오니

그들의 마음을 준비하시며

귀를 기울여 들으시고

고아와 압제 당하는 자를 위하여

심판하사 세상에 속한 자가

다시는 위협하지 못하게 하시리이다

(17-18),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