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라

전봉석 2021. 9. 1. 05:05

 

이는 보좌 가운데에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라

계 7:17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시 8:9

 

 

자신이 선호하는 바를 추구하며 살아가듯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는 것도 그러하지 않을까? 필요에 따라, 각양 선택에 의해, 자기 위주의 선을 구하고 의를 바라는 것을 마치 신앙으로 알고 주를 섬기는 것은 아닐까? 내 안에 이는 어떤 어려움이 이를 내게 물었다. 나는 아니라고 단언할 수 없어 주춤거렸다. 내가 믿는 하나님, 그 의를 구하고 따르는 것이 과연 주를 바람인지, 나의 필요를 위함인지. 누가 말하길 욥은 고난을 통하여 온전하여졌다고 한다. 하지만 성경은 보란 듯 앞서 저는 당대의 의인이었다고 증언한다. 그것도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의였다.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주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는 세상에 없느니라(욥 1:8).” 그럼에도 저에게 고난을 허락하신 이유는 무얼까?

 

이래저래 마음이 어려울 때면 성경의 여러 인물들의 어려움을 돌아보게 된다. 요셉이 겪었을 얼토당토않은 역경에 대해, 아브라함의 황망한 인생길에 대해, 노아의 막연한 사명감에 대해… 어려움은 의외로 주의 뜻을 돌아보게 한다. 도대체 하나님은 무엇을 바라시는 것일까? 그러다 마주하게 되는 오늘의 질문,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시 8:4-5).

 

내 안에 이는 어떤 갈급함이 나로 되묻게 하는 것이다. 내가 뭐라고 이를 마땅히 요구하며, 누가 이런 권리나 자격을 주신 것일까? 나 같은 게 뭐라 스스로 존귀하게 생각하는 것일까? 그렇게 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이 추구하는 바, 그 선호에 따라 예수를 따랐다. “그의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진지라 사람들이 모든 앓는 자 곧 각종 병에 걸려서 고통 당하는 자, 귀신 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을 데려오니 그들을 고치시더라(마 4:24).” 저마다의 필요와 이유와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게 “갈릴리와 데가볼리와 예루살렘과 유대와 요단 강 건너편에서 수많은 무리가 따르니라(25).” 그러던 저들이 자신들이 추구하는 게 아닌, 말씀을 어려워하며 떠나갔다. “제자 중 여럿이 듣고 말하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한 대, 그 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요 6:60, 66).”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는 그와 함께 다니지 않았다.’ 나는 이 말씀 앞에서 황망하였고, 내 안의 이런저런 마음으로 주께 가지고, 바라고, 구하는 것들을 돌아보았다. 추구하고 선호하는 바가 아니면,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하루에도 몇 번씩 나의 순간순간에 벌어지는 마음은 아닐까? 함께 하지 않는 마음은 어려움으로 투덜거리고 불평과 불만을 일삼기 시작한다. 그러다 순간 말씀 앞에서 아찔하게 되는,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를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하게 하여

거룩하게 하거든,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

(히 9:13-14).

 

즉 구약시대에는 자신의 죄를 짐승에게 전가하여 피의 제사로 사함을 구하였다. 이는 일시적인 일로 매번 죄를 가지고 다시 치러야 하는 일이었다. 이로써 육체의 정결을 거룩하다 하였는데, 하물며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지 않겠나? 하고 반문하고 계신 것이다. 그럼에도 나의 섬김은 어떠한지?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 하는 성경의 물음 앞에 나는 주춤거린다. 물론 다 알 수는 없다. 영적으로 하나님의 섭리를 다 이해할 수는 없다. 그러나 어쩌자고 점점 둔감하여지고 엉뚱한 데 마음을 두고 휘청거리고는 하는 것일까? 우리의 한계에 대하여,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롬 3:10-11).

 

아찔하고 한심할 수밖에. 그럼에도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리도 귀히 생각하시는가? 하고 되뇌어 묵상하는 오늘 시편의 물음이 가슴을 먹먹하게 하는 것이다. 사느라 사는 데 급급한 하루하루 쳇바퀴 돌아가는 날들 같은 날들 속에서 말씀은 나를 불러 세워 나의 존재가 어떠한지, 그 하찮음과 번복할 수 없음에 두고 대체 고민하고 사는지 묻고 계신 것 같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 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

(히 9:27-28).

 

그러니 내가 뭐라고, ‘사람이 뭐라고’ 우리 죄를 담당하시는 제물이 되어 ‘단번에 드리신 바’가 되신 것일까? 그리고는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 하시는 말씀 앞에서 나는 전율한다. 내 안에 이는 이런저런 악의적인 생각과 마음과 침울하게 하는 것들에 대하여, 결국 피 흘림이 없이는 죄 사함도 없는 일을 두고,

 

율법을 따라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하게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22).

 

손수 제물이 되어 피 흘림의 산제사가 되심을 묵상하다 아찔하다. 나의 힘으로는 하나님의 요구에 충족될 수 없다. 그렇게 욥의 의는 그 자신의 신조에 따른 것이었다! 하나님을 믿으면 복을 받고 모든 일에 형통하여야 한다는 나름의 신조가 욥의 신조였고 나름의 모든 종교의 주장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저마다의 신조를 가지고 주를 찾고 부르고 갈망하며, 오늘도 이를 신앙으로 붙들고 산다. 그러한 우리의 충족은 가난과 병 고침과 천대와 능멸로부터의 해방이다. 나름 '뽀대나게' 살아보는 게 목적이다. 그러니 오늘 우리의 모습이나 당시 사람들의 모습이나, 말씀은 더디고 너무 모호하여 갈증난다. 그러자 “제자 중 여럿이 듣고 말하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한 대(요 6:60).” 정작 어려운 것은 자신들이 추구하는 바가 아닌 것이다. 그러니 별로 선호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주님은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63).” 이 무슨 엉뚱하고 뚱단지 같은, 바람을 잡는 소리람? 당장의 육의 일로 허덕이는 하루하루에서 무슨 뜬구름 잡는 소리도 아니고, 그러니 사람들이 떠나간다. “그 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66).” 그렇듯 우리는 당연한 문제를 해결받기 위해 예수가 필요할 뿐이다! 

 

우리의 요구는 당장의 허기진 배다. 필요한 욕구다. 남부럽지 않은 삶으로 '즐거운 인생'이다. 늘 되풀이 되는 이와 같은 갈망이 우리를 다시 일터로, 지긋지긋한 현실로 내논다. 영혼을 돌볼 겨를이 없다.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무디게 한다. 노아의 때에 많은 사람들도 그러하지 않았을까? 처음 저들도 심판을 운운하며 배를 짓기 시작하는 노아 곁에서 몇몇은 그래도 이에 동조하고 같이 하지 않았을까? 그런데 말씀은 더디고 배고픔은 끼니마다 되풀이 되는 일이어서, 어떤 갈망도 말씀으로는 채워질 수가 없었다… 그러느니 떠나가는 사람들 틈에 끼는 게 현명한 것 같다. 주님은 마치 기다리셨던 것처럼 우리에게 물으신다. “너희도 가려느냐(67).” 이는 실망하여 물으시는 게 아니다. 그리 떠나가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시고, 나는 어떠한지를 알고 싶어하신다. 그때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68).” 아, 이 발칙한 답변은 어디서 온 것일까? 말이 안 된다. 이런저런 갈등과 마음의 번민을 말씀이 해결해준다고? 그런 마음으로 꾸역꾸역 설교원고를 정리하고 있다가 나는 눈을 번쩍 떴다.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여

하나님의 일을 선포하며

그의 행하심을

깊이 생각하리로다

 

의인은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그에게 피하리니

마음이 정직한 자는

다 자랑하리로다

(시 64:9-10).

 

모든 사람이 두려워한다. 사느라 산다고 사는 일에 치여 말은 안 하지만 두려워들 한다. 그럼에도 의인은 여호와로 즐거워한다?! 하고, 그 일이 어찌 가능한지를 생각하다 두려워졌다. 나의 두려움은 모두의 것 같으나 또한 다르다. 우리는 그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생각한다. 희한한 일이다. ‘하여 하나님의 일을 선포하며, 그의 행하심을 깊이 생각하리로다.’ 하는 데서 그러고 있는, 그렇게 되는 오늘의 내가 희한하기만 하다. 내가 아는 내가 아니다. 내가 그럴 리 없다. 이것이 서로가 알기도 전에 구별됨이었다. 나만 해도 이런저런 어려움으로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마음의 원망과 서러움으로 욱, 하고 치미는 감정을 치대는 대로 시달리고 있다가 ‘그의 행하심을 깊이 생각한다.’는 말씀 앞에서, 어! 그러고 있는 나를 낯설어하게 되는 것이다. 도대체 내가 왜? 언제부터였을까? 그러니 나 같은 게 뭐라고 단번에 제물이 되어 피 흘림을 마다하지 않으신 것일까?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하는 오늘 시편의 말씀 앞에 황망하여 입을 다물 수가 없어 무릎을 꿇는다. 나 같은 게 뭐라고! 나를 그리 생각하시며 돌보시는가? 그리하여 율법의 요구가 되시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마 5:17).” 그러므로 우리에게 십자가가 없으면 모든 게 허사라. 십자가의 제물로 죄 사함의 피 흘림이 되셨고,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18).” 율법의 마침이 되신 것이다.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롬 10:4).” 더는 내게 죄를 물을 수 없다. 그 값을 요구할 수 없다. 우리는 자유인이 되었다.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

(고후 3:17).

 

그런데도 죄의 습성을 좇아 여전히 종노릇하며 사는 나의 몰골은 처절하기만 하다. 우리로 본래의 완전케 하심을 회복하셨다. 율법은 종결되었다.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롬 10:4).

 

그런데도 어쩌자고 여전히 그 마음은 끌려 다니기 일쑤인 것일까? 육신의 질병으로 인해 또는 자신이 추구하는 바, 그 선호하는 것을 얻고자 하여, 악착 같이 서로 논쟁하며 다투듯 씨름하는 욥과 욥의 세 친구들의 끝도 없는 논박을 듣고 있노라면… 한심하기만 한 나의 기질이 그대로 드러난다. 오스왈드 챔버스의 <욥기>를 빼들고 첫 장을 넘긴 채 한참을 머뭇거렸다. 2016년 10월 31일에 읽은 것으로 5년 만에 다시 꺼내든 것이다. 21년 8월 31일, 나는 어제 날짜를 쓰고 첫 장을 편 채 한참을 기다렸다. 또 얼마쯤의 시간이 흘러 이 책을 다시 펼쳐보게 될지, 혹시 그때는 좀 나아져서, 5년 전의 나와 지금의 내가 어찌 달라졌는가를 분간할 수 없는 지금처럼 여전하지는 않기를. 나의 독법(讀法)은 느리고 더뎌 첫 장을 다 넘기지도 못하고 덮었다.

 

그리고 나의 나 됨에 대하여, 언제쯤 나는 자유할 수 있을까? 반문하게도 된다. 이미 다 완성된 굴레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사는 나의 오랜 습성을 돌아보았는데… 오늘 아침의 말씀이 나로 시선을 고정하게 하는 것 같다.

 

이는 보좌 가운데에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라

(계 7:17).

 

여전히 이 땅을 사는 날 동안에는 어쩔 수 없이 되풀이 되는 나의 한계와 남들보다 모자란 멍청함에 대하여, 예수님의 가르침은 그런 의미에서였을까?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마 5:19).” 내가 누구인지, 무엇을 가르치는지, 또는 행하는지, 그게 중요한 게 아닐 거였다. 시편은 이를 일갈하시는 것 같다. “의인은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그에게 피하리니 마음이 정직한 자는 다 자랑하리로다(시 64:10).”

 

나의 미숙함으로 내 곁에 두신, 더디고 둔감한 나의 가족들의 영혼과 내 곁의 한 영혼 한 영혼으로 같이 씨름하게 하시는 바, 이를 오늘 계시록은 예언의 말씀으로 들려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또 그의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기매

보좌에 앉으신 이가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시리니

그들이 다시는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도 아니하리니

이는 보좌 가운데에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라

(계 7:15-17).

 

이와 같은 말씀이 내 것으로 들려지는 것이 희한한 일이다. 나 같은 게 뭐라고 그리 귀히 여기시고 자신이 육신이 되어 나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의 피 흘림이 되셨는지를,

 

큰 소리로 외쳐 이르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

모든 천사가 보좌와 장로들과

네 생물의 주위에 서 있다가

보좌 앞에 엎드려 얼굴을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여 이르되 아멘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권능과 힘이 우리 하나님께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하더라

(10-12),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