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연이 성도의 기도와 함께 천사의 손으로부터 하나님 앞으로 올라가는지라
계 8:4
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아는 자는 주를 의지하오리니 이는 주를 찾는 자들을 버리지 아니하심이니이다
시 9:10
흔들리지 않고 어찌 나무가 자라겠으며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고 어떻게 조성된 수목들이 가지런할 수 있겠나? 사시사철 미동도 없는 것은 광물뿐이고 변하지 않는 것들은 인공물들뿐이었다. 모처럼 산책을 하다 가을이 턱밑까지 다가온 것에 놀랐다. 선선한 바람이 싫지 않았고 살아있다는 것들은 불합리한 모습을 있는 그대로 내보이고 있었다. 길가에 만개하였던 꽃들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아무렇게나 불거져 나온 곁가지들은 볼품없이 뒤엉겼다. 어느새 바람은 차가워졌고 구름에 가려진 볕은 기운을 다하지 못했다. 언제 무더웠나싶을 정도로 계절의 변화는 냉정하였다.
아이는 어느새 욥기서를 쓰고 있다. 어제 아침에만 출근 전에 일곱 장을 써대기에 뭔가 마음이 어려운가 싶어, 점심에 퇴근하고 오라 해서 짜장면을 먹였다. 오가는 카톡에서 말투가 반듯해지고, 사랑한다거나 존경한다는 고백이 나오면 마음이 쓰인다. 돌아오는 주일부터는 직접 와서 대면예배로 같이 보고 예배를 드리자고 하였다. 누가 누구를 건사하는지, 마음을 쓰다 마음이 가지런해진다. 아이가 쓴 욥기서를 읽다,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희망이 없노라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아뢰리라(13:15).” 이와 같은 고백 앞에 무너지듯 감탄을 하였다. ‘모든 사건의 뒤에 밝은 면이 있고, 구름 너머에 은빛 찬란한 하늘이 있다.’
희망이 없는데 나를 아뢴다? 우리 안에 두신 믿음이 얼마나 희귀한가를 생각하였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히 11:1).” 곧 보이지 않고 실상도 없는 것을 바라고 그리 아는 것의 증거가 믿음이다. 성경은 대표적으로 아브라함을 내세운다.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롬 4:18).” 저는 우리를 대표한다. 저는 번번이 의심하였고 흔들렸다. 그때마다 다메섹에서 데려다 기른 엘리에셀을 후계자로 삼으려 했고, 약속의 씨가 아닌 이스마엘이나 잘 키우겠다고 체념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하나님은 저의 의심과 나름의 방책을 나무라거나 개의치 않으셨다. 그리고 오늘에 이르러 실제 그리스도인으로 인구의 2억5천명 이상이 기독교인이다. 그런데 저의 실상은 지금의 결과를 알지 못했다.
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
(19-22).
이와 같은 말씀이 믿음의 결정체다. 저는 자기 인생에서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다의 모래알 같이’ 후손을 보지 못했다. 말씀만 붙들고 길을 떠난지 20년이 훨씬 넘은 때에 얻은 아들이 이삭 하나였다. 그때 저는 그 일도 도무지 일어날 수 없다고 여겼다. 아내는 경수가 끊겼고 자신은 노쇠하여 100세에 이르러 아들을 낳을 것이라 하니 둘 다 속으로 의심하며 웃었다. 어쩌면 우리의 믿음은 의심을 먹고 자란다. 흔들리는 나무가 한 해를 다하듯이 흔들리는 믿음으로 성장도 이뤄간다. 우스운 장면 하나, 그렇게 의심하고 미심쩍어하다 이삭 하나를 얻은 게 전부인 것 같으나… 아내 사라가 죽고 늙은 아브라함은 새장가를 들어 137세까지 여섯 명의 자녀를 더 낳았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때로 우리의 기대와 상식을 흔들어버리신다. 나는 아이와 같이 짜장면을 먹으면서 이러한 만남의 기이함을 예측할 수 없었다. 무슨 일이 있나? 하고 그 마음의 일을 물었더니 아이는 역시나 동문서답을 하듯 일찍 일어나게 돼서 그냥 부지런히 썼을 뿐이라고 대답하였다. 나 혼자 염려하던 마음이 주일에 화상으로 드리던 예배를 ‘너는’ 직접 오라고 하게 되었다. 그러시려고 그러신 것인지, 믿음의 길은 바람의 길과 같이 알 수가 없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요 6:47-48).” 이와 같은 말씀으로 배부르다. 내가 어찌 주의 이름을 부르고 아버지라 저를 믿고 의지할 수 있을까?
명색이 나는 글짓기 논술 선생으로 삼십년을 넘게 아이들을 가르치며 살아온 사람이다. 싫든 좋든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사고를 요구하고 훈련한 사람이다. 의심이 많고 사람의 마음이나 말을 쉽게 믿지 않는다. 그러니 증명할 수 없는 존재를 안 믿고, 못 믿는 게 당연한 일이지, 이게 믿어지는 것이 이상한 것 아니겠나? 한데 점점 더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그렇다니까 그저 말씀만 듣고 믿어지게 된다니! 전에 누가 이런저런 논리로 반박하며 신은 없다, 설령 있다고 해도 그게 꼭 하나님 한 분이라는 주장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박박 우길 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저의 말은 틀린 게 없다. 갈 바를 알지 못하면서도 말씀만으로 떠난 아브라함이 이상한 것인지, 하란에 남은 자들은 당연하였다. 성이 멸망한다는 소리를 농담으로나 듣는 롯의 사위들이 정상이지, 말씀만 듣고 헐레벌떡 성을 빠져나가는 롯의 가족들이 이상한 것이다. 믿음은 참 신기하고 이상하고 기묘한 것이다. 안 믿어지고 믿지 못하는 게 당연한 일이다.
그럼에도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 믿음이 믿음으로만은 아닌 것이다. 그런데 믿음으로만 구원 받는 게 또 맞다. 십자가의 한 편 강도가 고작 다 합쳐도 여섯 시간 정도 예수를 믿고 주의 나라에 들어갔다. 그런데 나름 믿음으로 선교를 다니고, 헌신을 하다 옥에 갇히기도 하였던 데마는 이내 세상을 좇아 믿음을 저버렸다.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딛후 4:10).” 아놔! 그러니 결국은 어쩌라는 소린지… 그래서 믿음은 값없이 주신 선물이라 하시는 모양이다. 내 안에 두셔야 그리 여겨지는 것이지, 이를 우리가 임의로 이해하고 따라 얻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오전에 일찍 누구와 통화를 하다 저의 사소한 질문에 나는 진지하게 답을 해야 했다. 이런저런 내용을 다 옮길 수는 없겠고, 다만 우리는 믿음으로 가야 한다. 삶은 어쩌니 저쩌니 해도 결국은 모두 하나라, 내남없이 끝은 같다. 아직 마흔 중후반이라 더 돈을 벌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어린아이의 입에 물린 공갈젖꼭지를 악착같이 빨아대는 꼴이었으니. 그럼 어떻게 해요? 하고 묻는 말에 나도 지친다. 열 번 스무 번은 더 했던 말이고 늘 같은 말을 또 한들 저의 가는 길은 여전하여서 한 푼이라도 더 벌어 모아야 한다는데 별 수 있겠나? 사람 고집 사람이 꺾을 수 없다. 저나 나나 누군들 다를까. 아브라함은 말씀을 받고 무려 이십여 년이 지나는 동안 감감무소식에 저라고 어찌 흔들리지 않았겠으며 의심하지 않았겠나? 결국 아내의 말을 듣고 몸종 하갈에게서 약속의 씨를 구하기도 하였고 저가 알아서 누굴 지목하여 그러려니 하고 말씀의 증거로 삼으려고도 하였다. 그런 저를 두고 우리의 믿음의 조상으로 삼으셨던 것이니….
믿음은 의심을 먹고 자라고 흔들리는 마음으로 단단해진다.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란다는 게 말이 쉽지 이성적인 인간이라면 가당키나 한가? 그럼에도 성경은 “기록된 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가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시니라(롬 4:17).”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은 ‘그런 하나님’이시었다. 죽은 자를 살리시고 없는 것을 있게 하시는 분으로 말이다. 이게 어찌 말이 돼야 말이지! 우리에게는 증명할 수 없는 어떤, 특별한 마음이 있는데 이를 믿음이라 한다. 믿을 수 있는 증거는 하나도 없는데 믿어지는 마음이 희한한 것이다. 사람의 편에서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는 것으로,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히 11:19).” 팔십세의 아브라함과 백세의 아브라함은 다르다. 마음은 스스로 장담할 수 없으나 믿음은 스스로 증명한다.
내가 어찌 이러는가 알 수 없을 때, 짜장면을 곱빼기를 시켜 내 것을 반이나 덜어서 더 먹고도 배가 고프다며 천진하게 웃는 스물다섯 살의 아이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나는 무슨 생각을 할 수 있을까? 말씀이 그렇다니까 믿는 것, 그리 믿어지는 것이 은혜다. 내 이 아이를 뭘 어찌할 수 있겠나? 그저 내 곁에 두심으로 하나님이 무슨 일을 이루시는 것을 아는 것, 그리 여겨지는 것이 믿음이었다. 그런 거 보면 믿음은 밑도 끝도 없이 굉장하다. 하찮은 믿음이란 없다. 믿음이 작고 크고도 없다. 고작 우리끼리 견주어봐야 다들 겨자 씨 한 알만도 못한 크기다. 그러니 결국은 자라가는 수밖에.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
(롬 4:20-22).
믿음보다 희한하고 신박한 게 또 어디 있을까? 말도 안 되는 소리고, 있을 수도 없는 일을 두고 우리는 또 씨름한다. 안 믿는 자들의 눈에 우스운 꼴인 것은 분명하다. 그러니 칠십오 세에 하란을 떠나 백세에 아들 이삭을 하나 얻기까지, “네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하게 하며 이 모든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창 26:4).” 이 허황된 말씀으로 저는 바라였고 믿었음으로 이내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롬 4:18).” 오늘에 이르러 그 이상의 허다한 무리들이 믿음의 후손이 되지 않았나?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히 12:1).” 오늘도 우리는 달음박질 하고 있는 게 아니겠나? 결국 우리는 무엇으로 사는가? 오늘 말씀을 되새기면 그 의미는 새롭다.
향연이 성도의 기도와 함께
천사의 손으로부터
하나님 앞으로 올라가는지라
(계 8:4).
바랄 수 없는 중에 노아가 무엇으로 견디었을까? 아브라함은 무엇으로 걸음을 재촉할 수 있었을까? 기도밖에는 달리… 누구와의 길고 긴 통화에서 저의 되풀이 되는 염려와 근심을 두고도 나는 자꾸 괜찮다, 괜찮다 그리 말해주면서… 우리의 믿음은 흔들림으로 자란다. 의심을 먹고 성장한다. 그러는 동안 얼마나 애써 수고하고 씨름하고 다툼으로 지쳐 쓰러질 때도 우리 주님은 다 이해하신다. 그리하여,
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아는 자는
주를 의지하오리니 이는
주를 찾는 자들을
버리지 아니하심이니이다
(시 9:10).
이를 붙들고 사는 게 복이었다. “그에게 의로 여겨졌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롬 4:23).” 주의 놀라우신 섭리 가운데의 하나였다. 곧 오늘의 나를 위한 것으로,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24).” 그러니 이 놀라운 구원의 역사를 우리가 어찌 이해하고 확신할 수 있겠나? 오히려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25).” 이를 통하여 주의 영광이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온 땅에 가득한 것일 텐데,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사 11:9).
이게 어쩌자고 내게 일어났나? 하는 얼토당토않은 일을 당할 때, 내 의지와 노력으로는 어찌 감당이 안 되는 일을 두고 씨름할 때, 아브라함의 이십여 년의 기다림과 이스라엘의 사십여 년의 광야가 결코 헛되지 않음을.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가득함이니라
(합 2:14).
이를 위하여, 성장하여 더는 흔들리지 않고 의심하지 않는 자리에까지 다다를 수 있을 때까지 우리 주님은 오래 참고 또 기다리시는 거였다. 믿음이 좋으면 흔들리지 않는다는 소리는 모두 개소리다. 사이비종파나 삯꾼 목사들이 돈 벌려는 수작으로 떠벌이는 소리다.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 어디 있겠으며 의심하지 않고 자라는 신앙이 어디 있겠나? 그러는 동안 주의 긍휼하심은 오늘도 참고 또 기다리시는 것이다. 로이드 존스 목사는 말하길, 의심하지 않는 것이 믿음이 아니라 의심에도 대담해지는 것이 믿음이라 하였다. 스스로 다잡은 마음은 곧 풀어지게 돼 있고 설득하여 붙든 마음은 언제고 데마처럼 세상으로 돌아가게 돼 있다. 오직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롬 4:20).” 또한 능히 확신함이니,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21).” 이는 모두 나의 인위적인 노력으로가 아니었다.
여느 때보다 조금 더 일찍 일어나 앉아, “또 다른 천사가 와서 제단 곁에 서서 금 향로를 가지고 많은 향을 받았으니 이는 모든 성도의 기도와 합하여 보좌 앞 금 제단에 드리고자 함이라(계 8:3).” 내가 잠든 사이에도 내 곁에 서서 기다리는 천사를 생각하였다. 저는,
향연이 성도의 기도와 함께
천사의 손으로부터
하나님 앞으로 올라가는지라
(4).
이를 위하여 오늘도 말씀으로 나를 붙드시는 하나님의 손길에 의지하며, 나팔 소리를 듣는다. 오늘의 징조이며 곧 있을 심판의 날을 경고하심이다. 산천이 불에 타고, “첫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피 섞인 우박과 불이 나와서 땅에 쏟아지매 땅의 삼분의 일이 타 버리고 수목의 삼분의 일도 타 버리고 각종 푸른 풀도 타 버렸더라(7).” 바다가 죽어가고 있으며, “둘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불 붙는 큰 산과 같은 것이 바다에 던져지매 바다의 삼분의 일이 피가 되고(8).” 산천이 오염되고 “셋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횃불 같이 타는 큰 별이 하늘에서 떨어져 강들의 삼분의 일과 여러 물샘에 떨어지니(10).” 하늘이 파괴되고 있는 이때에 “넷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해 삼분의 일과 달 삼분의 일과 별들의 삼분의 일이 타격을 받아 그 삼분의 일이 어두워지니 낮 삼분의 일은 비추임이 없고 밤도 그러하더라(12).”
더욱 두려운 일은 아직 세 개의 나팔 소리가 더 남았다는 것이다! “내가 또 보고 들으니 공중에 날아가는 독수리가 큰 소리로 이르되 땅에 사는 자들에게 화, 화, 화가 있으리니 이는 세 천사들이 불어야 할 나팔 소리가 남아 있음이로다 하더라(13).” 두려움으로 심판의 경고 소리를 듣는 것은 묵묵히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는 믿음으로밖에’ 나는 내 안에 두시는 희한하고 신기할 수밖에 없는 믿음으로 주를 바란다. 그렇듯 “내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감사하오며 주의 모든 기이한 일들을 전하리이다(시 9:1).”
원수가 끊어져 영원히 멸망하였사오니
주께서 무너뜨린 성읍들을 기억할 수 없나이다
여호와께서 영원히 앉으심이여
심판을 위하여 보좌를 준비하셨도다
(6-7).
이 한 날의 시간이 얼마나 귀하고 소중한지, “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아는 자는 주를 의지하오리니 이는 주를 찾는 자들을 버리지 아니하심이니이다(10).” 이에,
여호와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나를 사망의 문에서 일으키시는 주여
나를 미워하는 자에게서 받는
나의 고통을 보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주의 찬송을
다 전할 것이요
딸 시온의 문에서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
여호와여 일어나사
인생으로 승리를 얻지 못하게 하시며
이방 나라들이 주 앞에서
심판을 받게 하소서
여호와여 그들을 두렵게 하시며
이방 나라들이
자기는 인생일 뿐인 줄 알게 하소서 (셀라)
(13-14, 19-20).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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