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나의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전봉석 2021. 9. 6. 05:26

 

내가 또 들으니 하늘에 큰 음성이 있어 이르되 이제 우리 하나님의 구원과 능력과 나라와 또 그의 그리스도의 권세가 나타났으니 우리 형제들을 참소하던 자 곧 우리 하나님 앞에서 밤낮 참소하던 자가 쫓겨났고 또 우리 형제들이 어린 양의 피와 자기들이 증언하는 말씀으로써 그를 이겼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들의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

계 12:10-11

 

나는 오직 주의 사랑을 의지하였사오니 나의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시 13:5

 

 

어려움을 마주할 때 이를 대처하는 마음이 각각인 것 같다. 가장 두려운 마음은 고정관념으로다. “생각하여 보라 죄 없이 망한 자가 누구인가 정직한 자의 끊어짐이 어디 있는가(욥 4:7).” 가장 연장자이기도 한 욥의 친구 엘리바스가 자신의 오랜 경륜과 경험을 들어 욥의 어려움을 정리하려 한다. 그러면서 “내가 보건대 악을 밭 갈고 독을 뿌리는 자는 그대로 거두나니 다 하나님의 입 기운에 멸망하고 그의 콧김에 사라지느니라(8-9).” 하는 저의 말은 얼핏 들으면 틀린 게 없다. 어떤 어려움을 겪는 사람을 보며 무슨 죄를 지어 저리 천벌을 받나? 하는 생각은 우리도 은연중에 한다. 그러면서 서로를 비판한다.

 

성경은 그리 단정 짓지 않는다. 오히려 악이 더 흥하여 도무지 망하는 일이 없는 것처럼 여겨질 때도 있다. 그래서 아삽은 고백하기를 “나는 거의 넘어질 뻔하였고 나의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투하였음이로다(시 73:2-3).” 저들이 잘됨을 보고 질투하였던 것을 회상한다. 때론 누구에게 견주어 뭐라 할 수 없는 것이 악인들이 할 수 있는 그들이 더 잘되니, “그들은 죽을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강건하며, 사람들이 당하는 고난이 그들에게는 없고 사람들이 당하는 재앙도 그들에게는 없나니…” 희한하지? 하나님은 어찌 저들을 그대로 두실까 싶을 정도로 승승장구하여, “그러므로 교만이 그들의 목걸이요 강포가 그들의 옷이며, 살찜으로 그들의 눈이 솟아나며 그들의 소득은 마음의 소원보다 많으며, 그들은 능욕하며 악하게 말하며 높은 데서 거만하게 말하며, 그들의 입은 하늘에 두고 그들의 혀는 땅에 두루 다니도다(4-9).”

 

그러니 종종 어려움을 겪으며 이를 하나님의 경고로 듣는 자는 믿음의 자녀들뿐이다. 우리의 죄 때문에, 하고 주를 돌아보며 회개할 기회를 가진다. 그러니 “그 사람이 지혜자일지, 우매자일지야 누가 알랴마는 내가 해 아래에서 내 지혜를 다하여 수고한 모든 결과를 그가 다 관리하리니 이것도 헛되도다(전 2:19).” 인생이란 게 공평하지가 않다. “일평생에 근심하며 수고하는 것이 슬픔뿐이라 그의 마음이 밤에도 쉬지 못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23).” 어떠하든 다들 인생이 참 그렇다. “사람이 여러 해를 살면 항상 즐거워할지로다 그러나 캄캄한 날들이 많으리니 그 날들을 생각할지로다 다가올 일은 다 헛되도다(11:8).” 오히려 어려움을 겪으면서 주의 때가 가까움을 깨달아 아는 일이 복되었다.

 

오늘 본문을 그리 읽으며 묵상한다. “이제 우리 하나님의 구원과 능력과 나라와 또 그의 그리스도의 권세가 나타났으니 우리 형제들을 참소하던 자 곧 우리 하나님 앞에서 밤낮 참소하던 자가 쫓겨났고 또 우리 형제들이 어린 양의 피와 자기들이 증언하는 말씀으로써 그를 이겼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들의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계 12:10-11).” 우리를 돌보시고 지킴으로 승리를 선언하실 것이다. 그때에 “나는 오직 주의 사랑을 의지하였사오니 나의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시 13:5).” 하는 고백이 우리의 것이다. 반드시 주의 날은 도적같이 이를 것이다. “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벧후 3:10).” 이를 명심하고 주의하며 사는 삶이 지혜의 삶이겠다.

 

아무래도 ‘줌’으로 예배를 드리니까 이래저래 마음을 다하기가 어렵다. 특히 누구의 경우 본인도 본인이지만 같이 엄마가 좀 나란히 앉아 예배를 드릴 수 있으면 좋으련만 그게 더 아이의 마음을 건드리는 것 같아 교회로 오게 하였다. 하필 알레르기 비염으로 연신 콧물을 흘리고 재채기를 해대는 바람에 마음이 안 됐지만, 그러니 가끔은 이래도 마음이 쓰고 저래도 마음이 쓰인다. 나는 언제부턴가 누구에 대해 앞서가는 마음을 접었다. 같이 기도하며 ‘아픈 아이’를 위해서도 협력할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우리의 가장 큰 적은 앞서 엘리바스의 고정관념보다 나름의 편견이 더 문제였다. “너는 부르짖어 보라 네게 응답할 자가 있겠느냐 거룩한 자 중에 네가 누구에게로 향하겠느냐 분노가 미련한 자를 죽이고 시기가 어리석은 자를 멸하느니라(욥 5:1-2).”

 

우리의 죄는 어떤 기질이나 우리의 성향 때문이 아니다. 앞서 자신의 경험으로 아는 일과 나름의 판단으로 그리 옳다 여기는 것으로 족한 데서 더는 나아질 게 없다. 그런데 정말 우리 인생은 그리 간단한가? 악한 사람은 벌 받고 착한 사람은 복 받는 게 맞을까?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딤후 3:12).” 이와 같은 말씀 앞에서는 당황스럽기도 하다. 그런데도 누구는 자신이 잘하면 된다고 하는 생각은 있으면서 그 잘함을 안 믿는 자들이 갖는 노력과 기대로 상치한다. 그럼 이상하게 서로 또 그럴듯하게 맞는 것 같다.

 

어제 같이 말씀을 나누면서 우리의 근심은 두 종류로 나뉘는데,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고후 7:10).” 곧 무조건 근심이 나쁜 게 아니라는 소리다. 하지만 대부분이 사망을 이루는 근심으로 세상 근심으로 자리매김하는 것이다. 굳이 아이엄마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니라, 그러니 이래저래 사는 데 정신이 팔려 나름의 수고와 노력으로 어찌 해보려고 하는 것일 텐데, 이를 지혜자는 헛되다고 하는 것이다. “내 허무한 날을 사는 동안 내가 그 모든 일을 살펴 보았더니 자기의 의로움에도 불구하고 멸망하는 의인이 있고 자기의 악행에도 불구하고 장수하는 악인이 있으니(전 7:15).” 서로 어긋나 앞뒤가 맞지 않는데도 끝끝내 고집을 부리며 붙들려 하는 것을 놓지 못한다.

 

이는 또 보면 자기 거만에서 나오는 판단이기도 하다. “볼지어다 하나님께 징계 받는 자에게는 복이 있나니 그런즉 너는 전능자의 징계를 업신여기지 말지니라(욥 5:17).” 엘리바스의 말이 틀리지 않으나 옳게 여겨지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볼지어다 우리가 연구한 바가 이와 같으니 너는 들어 보라 그러면 네가 알리라(27).” 자신이 그리 여기는 것은 자신의 경험과 판단을 기준으로 하는 것이어서이다. 하지만 우리 주님은 그 결과를 자신이 책임지신다.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마 4:19).” 어떻게 믿고 그럴 수 있겠나? 그럴 때보면 믿음보다 희귀한 것도 없다. “그들이 곧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20).” 그리 말씀하시고 그리 행할 수 있게 하시는 이도 하나님이시다.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요 7:38-39).

 

나는 늘 성경이 언급하는 배에 대해 궁금하였다. 그런데 우리말에 자기 잇속만 차린다는 뜻으로 자기 배 불리려 한다고 하는 것을 보면 우리 배 안에 온갖 욕심과 탐욕과 헛된 욕망이 가득하기 때문이겠다. 하여 “남의 말하기를 좋아하는 자의 말은 별식과 같아서 뱃속 깊은 데로 내려가느니라(잠 18:8).” 누구나 남을 판단하고 비난하여 이를 쑤군거리는 것을 즐겨하는 이유가 거기 있다. 겉으로는 이러한데 그 속은 저러할 때가 많다. 자기 이익만을 우선하던 그 배에서 주의 생수가 흘러나온다. 이를 바탕으로 보면 우리 그리스도인은 그저 낙관주의자들이 아니다. “나의 괴로움을 달아 보며 나의 파멸을 저울 위에 모두 놓을 수 있다면 바다의 모래보다도 무거울 것이라 그러므로 나의 말이 경솔하였구나(욥 6:2-3).” 욥의 고백과 같이 어려움으로 비로소 나의 나됨을 알고, 나를 앎으로 주의 절대적인 선을 비로소 생각하게 된다.

 

남들 말은 그저 속이고 지나가는 흘러가는 물과 같이 헛되다. “나의 고통이 계속하며 상처가 중하여 낫지 아니함은 어찌 됨이니이까 주께서는 내게 대하여 물이 말라서 속이는 시내 같으시리이까(렘 15:18).” 그러니 누구에게 무슨 말을 할 때 더러는 말보다 가만히 침묵하는 게 더 낫다. 듣다 나도 같이 우는 것으로 족하다. 뭐라 섣불리 이르며 충고하고 권고하려다 행여 ‘옳은 소리 중독자’로 말만 번지르르할 수도 있다. 의외로 나는 종종 그런 나를 자주 본다. 그럴 때면 내 안에 이는 환멸로 내가 더 부끄럽다. 누구에게 해주는 말이 실은 다 내가 들어야 하는 소리로 나를 찌른다. 그래도 화도 나고 분도 난다.

 

나는 누구에게 뭐라 하기보다 그래서 그냥 주일에 너만이라도 교회로 오라고 하였다. 누구더러도 그리 권하였다. 보면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하다는 말씀이 실감난다. 한 영혼이 주 앞에 바로 서려고 할 때 해코지 않는 이의 손길이 어쩜 그리도 많은지, 저의 옴짝달싹 못하는 모습에 대고 감히 나는 뭐라 하기가 어렵다. 그러저러 해서 당장 돈벌이 열을 올리는 누구에게도, 그럼에도 주일은 지켜야 한다고 말은 하지만 이를 강제할 수 없으니 지나가는 말로나 듣고 만다. 누구는 이런저런 일로 예배에 빠질 수밖에 없고 이를 안타까워하며 주의 이름을 부르지만 누구는 아직도 그럴 여력조차 없다. 굳이 그렇게까지 사모하는 마음이 없는 것이다.

 

그러면서 또 뭐라 이르면 자신도 믿는다, 누구보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니 뭐라 이르는 말 자체가 논란이 될 수 있어 입을 다문다. 그러니 가끔은 성경에 나오는 가말리엘의 말이 가장 합리적이고 옳은 것 같다. “이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사람들을 상관하지 말고 버려 두라 이 사상과 이 소행이 사람으로부터 났으면 무너질 것이요 만일 하나님께로부터 났으면 너희가 그들을 무너뜨릴 수 없겠고 도리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까 하노라 하니(행 5:38-39).” 얼핏 들으면 하나님을 인정하는 소리 같지만 분명한 것은 불신앙적인, 관조적인 삶의 자세이다. 흔히 그런 자세를 견지하며 자신을 멀찍이 두고 남의 일, 강 건너 불구경하듯 하는 이도 있다. 그러면서 누구 말도 듣지 않으려는 이에게는 당해낼 재간이 없는 것이다.

 

그저 참담한 느낌만 든다. “나의 날은 베틀의 북보다 빠르니 희망 없이 보내는구나(욥 7:6).” 나는 욥의 절규를 귀히 듣는다. 거기에서 참된 배움이 있다. “그런즉 내가 내 입을 금하지 아니하고 내 영혼의 아픔 때문에 말하며 내 마음의 괴로움 때문에 불평하리이다(11).” 누구에게? 우리에게는 주가 계시다. 내 안에 꾹꾹 담아둔다고 해도 그것은 저주다. 저에게 직접 퍼부어 분을 내는 일은 당연히 저주다. 그러나 이를 주 앞에 아뢰며 토설하는 것은 탄원이 되고 기도가 된다. 어떤 말도 충분하여 주께 아룀으로 그 뜻을 구할 수 있다. “옳은 말이 어찌 그리 고통스러운고, 너희의 책망은 무엇을 책망함이냐 너희가 남의 말을 꾸짖을 생각을 하나 실망한 자의 말은 바람에 날아가느니라(25-26).”

 

나는 종종 욥기서의 길고 지루한 서로의 논쟁을 들으면서 침묵하기를 배우고는 한다. 아무래도 누구의 말을 들어야 하는 입장에서 뭐라 일러 말해주어야 하는 대상이기도 할 때, 옳은 말이 고통이 될 수도 있다. 꾸짖은들 실망하는 자의 말은 바람에 날아갈 뿐 허망할 따름이다. 그래서 가끔은 울컥, 하고 같이 눈시울을 붉히다 이를 주체하지 못하고 같이 어려워하는 나의 병적인 약함을 두고 주께 감사하게도 된다. 뭐라 이르느니 듣고 주의 이름을 부르며 같이 울고만 마는 것으로도 족한 때가 있다. 이에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마 11:5).” 말도 안 되는 소리가 나의 침묵으로 인하여 듣는 것만으로도 가능해지는 것을 볼 때도 있다.

 

그렇게 오늘 시편을 묵상한다.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이는 주께서 내게 은덕을 베푸심이로다(시 13:6).” 어려운 순간을 호소하며,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원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어느 때까지 숨기시겠나이까

(1).

 

하는 절규를 주는 들으실 것이다. 이에 “나의 영혼이 번민하고 종일토록 마음에 근심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오며 내 원수가 나를 치며 자랑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리이까(2).” 하며 치고 나오는 다음 말을 눈물로 삼킬 때도 있다. 그리할 때,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나를 생각하사 응답하시고

나의 눈을 밝히소서

두렵건대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 하오며

(3).

 

정작 무엇을 두려워해야 하는지를 알게 되는 것이다. “두렵건대 나의 원수가 이르기를 내가 그를 이겼다 할까 하오며 내가 흔들릴 때에 나의 대적들이 기뻐할까 하나이다(4).” 우리의 그릇된 열심 혹은 막연하고 맹목적인 기대가 무너져야 한다. 그리고 다만,

 

나는 오직

주의 사랑을 의지하였사오니

나의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이는 주께서 내게

은덕을 베푸심이로다

(5-6),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