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로잡힐 자는 사로잡혀 갈 것이요 칼에 죽을 자는 마땅히 칼에 죽을 것이니 성도들의 인내와 믿음이 여기 있느니라
계 13:10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다 치우쳐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
시 14:2-3
내남없이 어려운 시절이다. 신앙도 신뢰도 잃어버리기 쉬운 때 같다. 우울은 깊어가는 가을 같고, 하루 모처럼 쉰다는 사람이 오히려 성가시고 어려울 따름이니. 이런저런 일로 올 수 있는 날짜를 정하는데 나는 저에게 뭐라 이를 말이 없다. 말세를 살며 그에 따른 경각심은 없고 하루하루가 버거워 그조차 사치스러울 정도인 듯. 이를 오늘 말씀으로 읽으면 “사로잡힐 자는 사로잡혀 갈 것이요 칼에 죽을 자는 마땅히 칼에 죽을 것이니 성도들의 인내와 믿음이 여기 있느니라(계 13:10).” 그 어느 때보다 우리 성도의 인내와 믿음이 요구되는 시절이다. 무엇보다 자기가 옳다고 여기는 것들에 대하여 줏대 없이 이리 쓸리고 저리 쓸리고 하다 모든 것을 잃게 생겼으니,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다 치우쳐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
(시 14:2-3).
하시는 오늘의 시편이 비통하게만 읽힌다. 150개의 시편 가운데 가장 우울한 시를 꼽으라면 88편이 아닐까? 이는 고라 자손의 시로 에스라인 헤만의 것이라 밝히고 있다. 고라가 누구인가? 모세와 아론에 척을 지며 자신도 우두머리가 되려 하다 땅이 갈라져 저를 따르는 자들과 함께 산 채로 매장된 이다. “땅이 그 입을 벌려서 그 무리와 고라를 삼키매 그들이 죽었고 당시에 불이 이백오십 명을 삼켜 징표가 되게 하였으나(민 26:10).” 선조의 이와 같은 모습에 경각심을 갖게 된 그의 자손들은 성전의 찬송 맡은 자들이 되었다. 아무튼 그 가운데 한 이가 쓴 시로 시편 88편의 내용 중에 자신의 어려움을 토로하며,
무릇 나의 영혼에는 재난이 가득하며
나의 생명은 스올에 가까웠사오니
나는 무덤에 내려가는 자 같이 인정되고
힘없는 용사와 같으며
죽은 자 중에 던져진 바 되었으며
죽임을 당하여 무덤에 누운 자 같으니이다
주께서 그들을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시니
그들은 주의 손에서 끊어진 자니이다
(3-5).
누구와의 대화에서 저의 이런저런 말을 듣다 시편 88편을 연상하게 된 것은 그 때문이다. 나름은 한다고 하는데 모든 게 다 자신에게서 등을 돌린 것만 같은, 그 외로움에 대하여 나는 뭐라 이를 말이 없어 침울하였다. 보면, 자신이 철저히 혼자인 것을 아뢴다. “죽은 자 중에 던져진 바 되었으며/ 죽임을 당하여 무덤에 누운 자 같으니이다.” 과연 그 심정이 어떠할까? 이는 “주께서 그들을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시니/ 그들은 주의 손에서 끊어진 자니이다(5).” 더 할 말이 없다. 하나님 없이 사는 삶에 대하여, 그 외면과 외로움을 가늠할 길이 없어 안타까울 뿐이다. 그 날들이 힘겹다.
주께서 나를 깊은 웅덩이와
어둡고 음침한 곳에 두셨사오며
주의 노가 나를 심히 누르시고
주의 모든 파도가
나를 괴롭게 하셨나이다 (셀라)
(6-7).
그렇듯 힘겨운데 사람들마저 자신을 외면하는 것만 같으니,
주께서 내가 아는 자를
내게서 멀리 떠나게 하시고
나를 그들에게
가증한 것이 되게 하셨사오니
나는 갇혀서
나갈 수 없게 되었나이다
곤란으로 말미암아
내 눈이 쇠하였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매일
주를 부르며 주를 향하여
나의 두 손을 들었나이다
(8-9).
그러한 심정이 어떠한지, 또는 어디에 하소연해야 할지 몰라 주의 이름만으로 엎드리게 되는 것이었으니, ‘그것으로 복이다’ 하고 말해줄 수는 없었다. 이를 스스로 알기까지는 아직 더 가야 할 길이 남았는지, 연거푸 이어지는 신세타령은 기어이 자신을 비하하고 쓸모없는 것으로 치부하는 자리에까지 떨어지게 되는 것이다. 무엇보다 무서운 일은 ‘하나님의 외면’이다. 하나님이 그대로 고개를 돌리신 듯한 영혼의 외로움이 가장 처절한 것이어서,
여호와여 어찌하여
나의 영혼을 버리시며 어찌하여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시나이까
(14).
이보다 더 어렵고 비통한 게 또 있을까? 그런 저가 하나님께 반문한다. “주께서 죽은 자에게 기이한 일을 보이시겠나이까 유령들이 일어나 주를 찬송하리이까 (셀라)(10).” 마치 하나님과 말싸움을 하듯 말도 안 되는 억지스러운 말로 하나님을 조롱하듯 외친다. “주의 인자하심을 무덤에서, 주의 성실하심을 멸망 중에서 선포할 수 있으리이까(11).” 나는 이 대목에서 하나님과 씨름할 수 있는 야곱과 같은 절박함이 우리 믿는 자들의 특권 중에 특권이겠구나, 하고 생각을 하였다. 이어서 더 보면,
흑암 중에서 주의 기적과
잊음의 땅에서 주의 공의를
알 수 있으리이까
여호와여 오직 내가
주께 부르짖었사오니
아침에 나의 기도가
주의 앞에 이르리이다
(12-13).
저의 희망은 주께 호소다. 그러니 나를 좀 돌아보시기를 바라는 마음이 애절하다. “여호와여 어찌하여 나의 영혼을 버리시며 어찌하여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시나이까(14).” 이보다 더 처참하고 절박한 심정이 어디 있겠나? 하나님으로 승부를 보겠다는 결기와 결의가 아니면 살 수가 없다. 어떠하든 하나님은 우리 곁에 짝을 두시고 홀로 독처하는 것보다 나음을 알게 하신다. 지혜자는 이를 일깨운다.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그들이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전 4:9).” 저의 말은 차라리 혼자이길 바라는 듯하나 스스로도 아는 것처럼 사랑받고 싶은 것이다. 위로의 말 한 마디 듣고 싶은 것이다. 나는 차라리 저의 신랑을 좀 보자 할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내가 뭐라 한들 될 일이 아니지만 저의 말만 듣자니까, 그 상대는 모리배 같은 종자라. 어쩜 그렇게 이기적인가 싶은 것인데, 실은 한쪽 말만 들으면 누구라도 같은 종자에서 난 족속일 뿐이다. 그래도 지혜자는 “혹시 그들이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려니와 홀로 있어 넘어지고 붙들어 일으킬 자가 없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10).” 하나보다 둘이 낫다고 한다. “또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하거니와 한 사람이면 어찌 따뜻하랴(11).” 그러니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맞설 수 있나니 세 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12).” 싫든 좋든 그래도 의지할 사람이 주가 두신 내 곁의 사람들이라. 저들에게 잘하는 까닭은 자신의 영혼이 쉼을 얻기 위함이기도 하다.
그러니 누구와의 대화나 저의 사연을 듣다, 오죽하니 시편 88편의 외로움을 떠올리게 되었고 그 심정을 헤아리는데 모두가 다 그러고 사는 게 아니겠나, 싶은 것이다. 다들 적당히 그럭저럭 사람과 사람 사이란 그게 다다. 거기서 거리라,
이런 일이 물 같이 종일
나를 에우며 함께 나를 둘러쌌나이다
주는 내게서 사랑하는 자와
친구를 멀리 떠나게 하시며
내가 아는 자를 흑암에 두셨나이다
(17-18).
철저한 외로움이 아니고는 주의 이름이 절실하지가 않다. 어쩌다 이 지경이 된 것일까? 저마다 사람 의지하기를 하나님보다 더하다보니 당해내야 할 마음 또한 끝도 없는 것이다. 그러니 이를 ‘의로운 절망’이라 부르면 어쩔까? 마주보고 있는 시편 77편이 그리 읽힌다.
또 내가 말하기를 이는 나의 잘못이라
지존자의 오른손의 해
곧 여호와의 일들을 기억하며
주께서 옛적에 행하신
기이한 일을 기억하리이다
또 주의 모든 일을
작은 소리로 읊조리며
주의 행사를
낮은 소리로 되뇌이리이다
(10-12).
우리로 언제 이처럼 주를 되뇌며 주가 행하신 일을 돌아보아 작은 소리로 읊조리게 하겠나? 언제 우리가 이처럼 절박하게 주를 바라며 주의 뜻을 기다리고 사모한 적이 있었던가? ‘기도할게, 힘내.’ 하는 나의 상투적인 말에도 저는 감격하여 마치 천만 응원군을 맞이하는 듯 감사하다고 여러 번 말하였다. 누구의 기도 한 줄이 이처럼 절실하다는 것을 아는 이상,
하나님이여
물들이 주를 보았나이다
물들이 주를 보고 두려워하며
깊음도 진동하였고
구름이 물을 쏟고
궁창이 소리를 내며
주의 화살도 날아갔나이다
회오리바람 중에
주의 우렛소리가 있으며
번개가 세계를 비추며
땅이 흔들리고 움직였나이다
주의 길이 바다에 있었고
주의 곧은 길이
큰 물에 있었으나 주의 발자취를
알 수 없었나이다
주의 백성을 양 떼 같이
모세와 아론의 손으로
인도하셨나이다
(16-20).
물들이 알고 깊음이 진동하며 구름이 물을 쏟고 궁창이 소리를 낸다. 만유의 주 우리 구주가 누구이신가를 회오리 바람이 알려주고 우렛소리가 일깨우고 번개가 그의 세계를 비친다. 주의 길이 바다에 있다. 비로소 그 물 위에서 발자취를 본다. 주의 목자들이 언제든지 내 곁에 있었다. 나는 누구 때문에 헉, 하고 숨을 몰아쉬다 또한 누구 때문에 휴우, 하고 숨통이 트이는 것 같다. 시편은 나의 허약함을 들었다 났다 하시는 것 같다. 우리는 무엇을 기억하고 사는지. 예전에 같이 연애하고 알콩달콩 좋았던 날을 그리워하며 오늘을 서러워하는지. 가까운 ‘미래의 추억’을 끌어다 헛된 꿈으로 그 마음을 달래고는 하는지. 우리가 하나님을 기억한다는 일, 시편 77편은 이보다 더 복되고 은혜인 게 없음을 일깨우는 것 같았다.
때로는 하나님의 의도적인 외면이 우리들로 하여금 주를 바라게 한다. 지금의 그런저런 처지가 아니면 언제 또 그처럼 주를 간절히 바라고 구한 적이 있었나? 특히 신대원 동기들을 볼 때, 내 곁에 나름 잘 믿고 신앙으로 산다는 이들의 안이함에서 나는 종종 위기의식을 느낀다. 차라리 주를 모르고, 안 믿는 자였으면 자신의 완고함으로나마 반성이라도 하며 성실하게라도 살 텐데, 이건 보면 적당한 믿음이 오히려 ‘맏아들’과 같이 늘 아버지 집에 거하는 듯하였으나 정작 그 집에서 쉼을 얻은 적이 없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 곁에, 아니 우리 속에 엇비슷한 것들, 거짓이 너무 진짜 같이 자리매김하고 있다. “너희는 이것이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렘 7:4).” 그저 그럭저럭 먹고 사는 일에 긍긍하면서 것도 무슨 사역이랍시고 주의 이름을 들먹거리기는 하는데….
그러함으로 “그룹에 머물러 있던 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이 성전 문지방에 이르더니 여호와께서 그 가는 베 옷을 입고 서기관의 먹 그릇을 찬 사람을 불러,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예루살렘 성읍 중에 순행하여 그 가운데에서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로 말미암아 탄식하며 우는 자의 이마에 표를 그리라 하시고(겔 9:3-4).” 우리의 가증함이 극에 달했다. 그들은 실제 “여호와의 영광이 성전 문지방을 떠나서 그룹들 위에 머무르니(10:18).” 이를 알아채지 못한다. “내가 든 손과 강한 팔 곧 진노와 분노와 대노로 친히 너희를 칠 것이며 내가 또 사람이나 짐승이나 이 성에 있는 것을 다 치리니 그들이 큰 전염병에 죽으리라 하셨다 하라(렘 21:5-6).” 이것이 오늘날 우리의 실상이지 않겠나?
그럼에도 다들 이게 뭔가? 싶어 ‘에이, 설마’ 하는 안이함으로 대수롭지 않은 듯 삼삼오오 모여 술잔을 기울인다. 영업시간 제한이 밤 열 시까지로 풀리고, 모이는 인원도 8인으로 들어났는데 이를 두고도 볼멘소리를 하는 뉴스 보도를 보면서… 나는 이제 다른 세상 이야기만 같다. 밤이 모여 서로에게 서로가 회포를 풀어야 하는 세상에서 ‘그들이 큰 전염병으로 죽이리라.’ 하시는 경고에 대하여 가소로운 것이다. 그러니 닥치기 전까지는 우리의 안이함이 우세한 법이다. 누가 누굴 탓하겠나?
나는 요즘 계시록을 본다. 아이는 이제 다시 시편을 쓰기 시작하였다. 일 년이 채 걸리지 않아 시편에서 시작하여 시편에까지 성경 한 권을 옮겨 적은 것이다. 오늘 오라 해서 점심이라도 사주기로 했다. 남들은 다 저의 모자란 지능을, 병적인 어떤 병력을 두고 수군거리며 자신들이 잘난 줄 아는데, 나는 내 곁에 있는 믿음의 사람들 가운데 가장 준수한 신앙을 꼽으라면 저 아이가 아닐까 싶다. 그 부모들마저, 아이의 표현대로 ‘짐짝’처럼 여기지만 저는 마음으로 주를 경외함이다. 남들은 할 일이 없어, 그나마라도 하는 것이라 여길 테지만… 저들도 차라리 그것 말고는 할 일이 없는 존재들이었으면 더 좋았을 걸…. 때가 참으로 악하다. “짐승이 입을 벌려 하나님을 향하여 비방하되 그의 이름과 그의 장막 곧 하늘에 사는 자들을 비방하더라(계 13:6).” 온통 여기저기 비방이 난무하다. “또 권세를 받아 성도들과 싸워 이기게 되고 각 족속과 백성과 방언과 나라를 다스리는 권세를 받으니(7).” 성도라고 하는 이들이 맥을 못 춘다. 부디 “누구든지 귀가 있거든 들을지어다(9).” 성경의 호통소리가 크다.
그러니 “사로잡힐 자는 사로잡혀 갈 것이요 칼에 죽을 자는 마땅히 칼에 죽을 것이니 성도들의 인내와 믿음이 여기 있느니라(10).” 정작 우리가 지켜야 할 것에 대하여,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
그들은 부패하고
그 행실이 가증하니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시 14:1).
별 수 없는 일이라면, “그러나 거기서 그들은 두려워하고 두려워하였으니 하나님이 의인의 세대에 계심이로다(5).” 우리는 안다. 오늘의 어려움이 우리들로 하여금 주를 더욱 바라게 하는 것을, 그러므로 “너희가 가난한 자의 계획을 부끄럽게 하나 오직 여호와는 그의 피난처가 되시도다(6).” 주의 도우심이 필연적인 것에 나는 안도한다.
여호와여 주의 은혜로
나를 산 같이 굳게 세우셨더니
주의 얼굴을 가리시매
내가 근심하였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고
여호와께 간구하기를
내가 무덤에 내려갈 때에
나의 피가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진토가 어떻게 주를 찬송하며
주의 진리를 선포하리이까
여호와여 들으시고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여호와여 나를 돕는 자가 되소서
하였나이다
(30:7-10), 아멘.
'[묵상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만국이 와서 주께 경배하리이다 (0) | 2021.09.09 |
---|---|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0) | 2021.09.08 |
나의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0) | 2021.09.06 |
말씀은 순결함이여 (0) | 2021.09.05 |
갖다 먹어 버리라 (0) | 2021.09.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