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
계 14:2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머무를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사는 자 누구오니이까
시 15:1
우리의 인내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것이다. 이에 누가 주 앞에 머물고 주의 성산에서 살까?
정직하게 행하며 공의를 실천하며
그의 마음에 진실을 말하며
그의 혀로 남을 허물하지 아니하고
그의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웃을 비방하지 아니하며
그의 눈은 망령된 자를 멸시하며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자들을 존대하며
그의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변하지 아니하며
이자를 받으려고 돈을 꾸어 주지 아니하며
뇌물을 받고 무죄한 자를 해하지 아니하는 자이니
이런 일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하리이다
(시 15:2-5).
말씀을 그대로 읽고 되새기며 묵상한다. 그렇지 않는 자는 “그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리로다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의 이름 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 하더라(계 14:11).” 서로는 극과 극인 것 같으나 이렇지 못하면 저렇다. 여기가 아니면 저기다. 아직도 거기에 머물면 여기는 어렵다. 늘 같은 날의 반복 같으나 찬송이 그 마음에 있으면 복이다. 설교원고 본문을 펼치고 말씀을 되뇌었다.
하나님이여 찬송이 시온에서 주를 기다리오며
사람이 서원을 주께 이행하리이다
(시 65:1).
말씀은 말씀으로 이어져 마치 굽이쳐 흐르는 물과 같이 자연스럽다. 무턱대고 어찌 찬송이 나오겠나? 그 마음이 시온에 머물 때에 곧 주를 기다리는 마음이 곧 찬송이다. 이는 ‘어떠하든지’의 감사에서 비롯되는 서원이다. 곧 “감사함으로 그의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의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의 이름을 송축할지어다(100:4).” 이를 서원하고 주께 이행하는 것이 어찌 누구나의 축복이겠나? 이는 성도의 권세다. “할렐루야 새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며 성도의 모임 가운데에서 찬양할지어다(149:1).” 다시 오늘 계시록의 말씀은 보면 성도의 특색은 인내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
(계 14:2).
가만히 우리는 머리를 맞대고 교회를 위해 어찌할까? 생각한다. 뜬금없기는 하지만 전날에 아들은 교회의 형편이 어떤지, 가정은 어떠한지, 이를 어찌 감당하고 있는지를 물었다. 모처럼 입이 떨어져 이런저런 말을 하고 관심을 두는 것으로도 나는 감사하였다. 그리고 어제 저녁에는 급기야 각자의 수입과 그 씀씀이에 대해 점검이 이루어졌다. 너저분하게 여기저기 뒤엉겨 있는 수입과 지출을 간단하게 정리하고, 서로 엉겨 있는 끈을 끊어내듯 제 누나와 엄마의 지출 내역을 분리하였다. 교회는 또 어떠한가? 하고 묻더니 그리 안이하게 처리하는 모든 게 사정이야 어떻든 횡령과 배임에 해당한다며 이 또한 명확히 선을 긋고 관리를 따로 맡겼다. 그렇게 가정예배 시간이 길어졌고 나는 피식, 웃으며 꼼짝없이 모든 관리와 처분을 아들에게 맡기는 것에 흡족하였다. 끝에는 모처럼 같이 둘러 손을 잡고 돌아가며 한 마디씩 기도를 하고 마쳤다. 아들을 필리핀에 보내기 전, 그러니까 하나님이 나를 몰아치실 때 가정예배를 시작했는데 그때는 모두 끝날 때 손을 서로 잡고 돌아가며 기도로 마쳤었다. 새삼 그러는 게 쑥스러운지 아들은 그냥 아빠가 해, 하는 것을 딸애가 얼른 먼저 한 바퀴 돌아 자신도 기도를 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라(히 13:15).”
찬송이란 그저 인위적인 어떤 행위나 마음이 아니다. 여기에 둔 마음으로 저기와의 관계를 정리한다. 그럼 ‘여기’가 어딘가? 주의 성소이고 시온이다. 오늘 계시록의 의미는 그와 같은 선의 구분을 명확히 일러 주는 것 같다. 가령 바울은 천국을 사모함으로 빨리 주가 계신 곳으로 가고 싶었다.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고후 5:8).” 뉘앙스가 다르지만 한 마디로 정리하면 일찍 죽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이는 삶에 의욕을 잃고 실의에 빠져 죽고 싶어 하는 자의 마음과는 다르다. 그렇다면 다음 구절의 말씀을 뒷받침할 수 없다. “그런즉 우리는 몸으로 있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노라(9).”
도대체 무얼 힘쓴다는 것인가? 하다못해 이 땅에 살면서도 내일을 위해 오늘을 애쓰고, 저것을 위해 이것을 포기하는 식의 노력과 수고가 기특한 일인 것처럼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10).” 우리 모두는 싫든 좋든 죽음을 맞이할 것이고, 원하든지 원하지 않든지 주의 앞에서 서서 주의 심판대에 서야 할 것이다. 그러하다면 이를 대비하여 자신을 돌아보며 주를 더욱 바라고 섬기는 일은 귀하고도 복되다. 10절의 말씀을 우리말 성경으로 보다 쉽게 풀어보면,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각기 선악 간에
몸으로 행한 것에 대해
보응을 받게 될 것입니다.
곧 오늘 우리가 무슨 일을 행하고 살았는지, 언젠가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 낱낱이 고해야 할 날이 온다는 것이다. 이에 바울 사도는 단지 죽고 싶다는, 삶의 고단함으로 되뇌는 푸념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 하는 결의를 보여주는 설교였다. 이를 시편의 말씀을 준비하며 읽었던 내용으로 다시 연결하면, 성도의 기도에 따른 응답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나타나는 것을 보게 된다. 다윗의 진술이다.
기도를 들으시는 주여
모든 육체가 주께 나아오리이다
(시 65:2).
곧 우리의 기도란 바람이고, 이 땅에서의 바람을 가지고도 어떤 이는 식단을 조절하고 극한 운동을 통해 자신을 만들어가고, 어떤 이는 목표를 정해 그 꿈을 이루려고 모든 시간과 노력을 쏟는 것인데, 하물며!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사 49:15).” 이것이 우리 주 하나님이 우리를 어찌 위하고 생각하고 이를 위해 포기하지 않으실 것을 증명한다. 이사야서를 통한 좀 더 간명하며 절절한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보면,
네가 부를 때에는 나 여호와가 응답하겠고
네가 부르짖을 때에는 내가 여기 있다 하리라
만일 네가 너희 중에서 멍에와 손가락질과
허망한 말을 제하여 버리고,
주린 자에게 네 심정이 동하며
괴로워하는 자의 심정을 만족하게 하면
네 빛이 흑암 중에서 떠올라
네 어둠이 낮과 같이 될 것이며,
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여
메마른 곳에서도 네 영혼을 만족하게 하며
네 뼈를 견고하게 하리니
너는 물 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라
(사 58:9-11).
이와 같은 말씀을 되새기며 여러 번 음미할 수 있는 복이 가슴이 벅차고, 주가 그리 행하심에 대해 감사하고, 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세상이 아무리 어떠하다 해도 나의 형편과 사정이 또한 어떠하다 해도 이제 더는 무슨 상관이 있겠나?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렘 33:3).
말씀 앞에서 나는 싱글벙글하게 된다. 마치 아들 녀석이 모두를 앉혀두고 일일이 씀씀이나 그 내역을 점검하며 뭐라 타박하면서 손수 대차대조표를 작성하며 각각의 것을 분리하고 서로가 관리하며 책임질 것을 일깨울 때의 느낌 같다. 곁에서 딸애는 말하길, 그래서 다들 세무사나 회계사에게 일을 맡기나봐, 하며 너스레를 떨고 싫지 않은 반응이었다. 곧 우리 삶이 얼마나 뒤엉겨 서로가 서로에게 뒤죽박죽인지. 특히 교회 재정에 대해, 아무리 어려워도 그렇게 무턱대고 엄마한테 맡기고 의존하면 어쩌느냐며 뭐라 하는데, 맞는 말이라 할 말이 없었다. 그리고 간단하게 분리, 고정적으로 교회 임대료로 쓰이는 것을 빼고 얼마 안 되지만 남은 것은 모두 목사 사례-인건비로 정리, 그 가운데 얼마를 ‘목회활동비’로 가령 누가 오면 밥을 사고, 책을 사고, 목회 일정에 필요한 돈으로 사용하고 나머지는 이렇게 저렇게 관리하라고 정하였다. 뒤죽박죽 복잡하던 관계나 일이 단순화되었다. 세부적인 것은 아끼고 절약하며, 없으면 없는 대로 주가 채워주시는 만큼으로 한정하였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 15:7).” 주님의 음성을 이와 같이 받을 수 있는 것은 ‘죄사하심에 대한 감사’가 그 속에 분명하고 고백으로 드려지는 일과 같다.
죄악이 나를 이겼사오니
우리의 허물을 주께서 사하시리이다
(시 65:3).
과연 우리는 어떠했는가?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롬 7:18).” 실제 우리의 삶이 이 모양이지 않던가? 들을 때는 알겠다. 생각으로도 충분히 이해가 간다. 그런데 이론과 실제가 다르고 삶과 신앙은 자꾸 괴리감을 보인다. 이때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19).” 그러니 어쩔 것인가?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20).” 바울의 이와 같은 절규, 자신을 감당할 수 없다는 굳건한 인정과 굴복이 궁극적으로 주를 더욱 사모하게 한 것이 아니었겠나?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21).” 그러니 그럼 어쩔 것인가? 그래서 빨리 죽기를 바란 것인가? 아니다. 요한의 고백으로도 알 수 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9).”
우리에게 더하신 날의 즐거움은 천국에서의 모형이다. 하면,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사 5:7).” 주께 맡기고 의뢰하는 일,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행 3:19).” 반드시 우리에게는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에서부터 이를 것이다. 이를 그래서 하나님의 전적인 선물, 구원이라 일컫는 것이겠다.
“주께서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사
주의 뜰에 살게 하신 사람은 복이 있나이다
우리가 주의 집 곧 주의 성전의
아름다움으로 만족하리이다
(시 65:4).
오늘을 살며 간헐적이기는 하나 그 맛을 느끼며, 그 맛을 잊지 못해 추구하고 더욱 바라며 천국을 사모하는 삶이 성도의 삶이었다. 맡은 자의 구할 것은 충성이고 맡기는 자에 대한 신뢰뿐이다. 아내가 곁에서 이러면 이건 어떻게… 저건 어쩌고… 하는 염려어린 말에 아들은 대뜸, 이것이 해결되면 저것은 문제될 게 없고 그건 그럼 내가 책임질게! 하면서 단호히 제 엄마의 염려를 일갈하였다. 우습기도 하고 대견하기도 하고 감사하기도 한, ‘희한한 가정예배’로 나는 모처럼 마음에 흡족하였다. 어찌됐든 하나님이 우리에게 두시는 가정과 교회의 의미이고 목적이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8).”
이를 값없이 받은 하나님의 선물로 인식할 때, 나는 한 게 없으니 송구하고 염치없어서도 감사뿐이다.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롬 3:10).” 그러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24).” 주가 이루신 일이 어디 대수롭지 않은 일이겠나? 결코 그럴 수 없다.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딛 3:5).” 우리의 새로움은 간명하였다.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그 성령을 풍성히 부어 주사 우리로 그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상속자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6-7).” 다른 이유는 없다. 이 땅에 살게 하신, 살아가는 목적은 오직 하나다. 그게 아니면 죽는 게 낫지, 우리의 만족은 주의 성소에서였다. 여기서 지혜자의 말씀도 거든다.
가산이 적어도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크게 부하고 번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잠 15:16).
이 단순하고 명료한 진리 앞에서 왜 우리는 주춤거리며 혹시나 하는 것일까? 모든 게 의미 없다. 그렇게 쏟는 노력이 허사라. 오직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 같이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나느니라(고후 3:5).” 우리에게는 단 하나의 소망, 그것으로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간다. “(율법은 아무 것도 온전하게 못할지라) 이에 더 좋은 소망이 생기니 이것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가느니라(히 7:19).”
나는 이러한 말씀으로 감격하고 감사하고 찬송한다. 그러하기를 바란다. 이 마음을 복으로 삼는다. 주가 주시지 않으면 우리가 소유할 수 없는 감사와 찬송이라, 오늘 아침… 주가 주시는 말씀으로 나의 마음을 점검하게 되는 것이다. 하여 “그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리로다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의 이름 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 하더라(계 14:11).” 우리의 서로 다른 세계가 얼마나 극과 극을 달리는지, 그러므로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12).” 성도로서의 사명과 권세를 잃지 않고 사는 것이 복이었다. 나는 가만히 되새긴다.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머무를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사는 자 누구오니이까
(시 15:1),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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