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그와 함께, 이기리로다

전봉석 2021. 9. 11. 05:21

 

그들이 어린 양과 더불어 싸우려니와 어린 양은 만주의 주시요 만왕의 왕이시므로 그들을 이기실 터이요 또 그와 함께 있는 자들 곧 부르심을 받고 택하심을 받은 진실한 자들도 이기리로다

계 17:14

 

내가 주를 의뢰하고 적군을 향해 달리며 내 하나님을 의지하고 담을 뛰어넘나이다

시 18:29

 

 

이해와 오해는 서로 달려가는 길이 다르다. 이해는 어떠하든 저를 믿고 그리 여겨준다. 그런데 오해는 아주 작은 불씨가 큰 불을 일으키듯이 점점 번지면서 모든 것을 태우는 것과 같다. 그런 뜻이 아닌데 앞서 넘겨짚은 생각이 저의 말을 그리 받는다. 뭐라 하지도 않았는데 그리 여겨져 의심은 삽시간에 모든 신뢰를 무너뜨린다. 여태 알고 있던 모든 것을 삼킨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이해와 오해는 하나님과 나 사이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차라리 욕을 하고 항변하고 힐문하며 따지고 싸우는 게 낫다. 그러는 동안 오해는 풀리고 더 깊은 이해와 사랑으로 나아갈 수 있다. 그런데 저 혼자 끌어들인 오해와 그리 단정 지은 마음은 돌이킬 수 없는 골과 같이 깊어만 간다.

 

누구에 대하여 어떤 일로 한 번 그리 여기기 시작하면, 사람이란 참 미련하여서 그 동안 가지고 있던 모든 신뢰와 친분과 의지하던 마음까지도 저 혼자 구겨버리는 꼴이 된다. 도대체 이와 같은 미련함은 스스로도 당할 수 없다. “미련한 자는 자기 행위를 바른 줄로 여기나 지혜로운 자는 권고를 듣느니라(잠 12:15).” 더는 듣지 않고 들으려 하지 않을 때 스스로도 의심해야 한다. 의심은 맹랑한 마음이어서 ‘확실히 알 수 없어 믿지 못하는 마음이다.’ 그러니까 이해의 사이 때는 불분명하여도 그리 여겨 같은 길을 바라보던 시선이 오해의 골이 깊어지면서는, 공연히 저 혼자 눈치보고 의심하게 된다. 그래서 잠언은 꼭 미련한 자를 지혜자와 나란히 놓고 비교한다. “지혜 있는 자의 집에는 귀한 보배와 기름이 있으나 미련한 자는 이것을 다 삼켜 버리느니라(21:20).”

 

어렴풋하지만 이를 믿고 이해하는 길과 부정하며 다르게 접어드는 길은 엄연히 다르다. 하나님은 자기를 욕하고 비난하고 심지어 조롱하고 힐문하는 것은 참고 끝까지 이해하시지만 오해하고 무시하는 것에 대해서는 참지 않으신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어리석음을 이해하고 충분히 참고 또 기다리시지만 오해에는 답이 없음을 아신다. 그리 여겨 단정 짓는 마음이 오해다. 잘못 알고 있으면서도 그리 여기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이상 더는 회복이 불가능하다. 성경 중에 호세아서를 보면 그 하나님의 애타는 심정을 알 수 있다. 기원전 8세기, 당시 이스라엘은 주변국들보다 부강하였다.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보다 우세하여 세력을 확장하면서 더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갈망하지 않아도 되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오해도 가만히 들여다보면 살만해서, 더는 그리 의지하지 않아도 되는 정도에서 삐져나오는 마음이다. 전에 같으면 이런저런 말을 하고, 의지하고, 도움을 구하기도 하였을 사이가 굳이 없어도 되는 정도가 되면서 오해의 틈을 벌인다. 하나님도 이런 관계에서 질투하신다! “그들이 하나님이 아닌 것으로 내 질투를 일으키며 허무한 것으로 내 진노를 일으켰으니 나도 백성이 아닌 자로 그들에게 시기가 나게 하며 어리석은 민족으로 그들의 분노를 일으키리로다(신 32:21).” 이를 우리는 믿는 자로 살며 얼마나 두려운 마음으로 받고 있나? “너희 중에 계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신즉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진노하사 너를 지면에서 멸절시키실까 두려워하노라(6:15).”

 

결국 “그들의 행위가 그들로 자기 하나님에게 돌아가지 못하게 하나니 이는 음란한 마음이 그 속에 있어 여호와를 알지 못하는 까닭이라(호 5:4).”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일이 마치 거울과 같아서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고 의지하는 마음도 다를 게 없다. 하나님은 우리의 오해와 무지, 하나님을 바로 알지 못하는 것을 괴로워하신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시 51:17).

 

나름 한다고 하는, 저마다의 애씀과 노력을 비웃으신다. 차라리 환난 날이 우리 하여금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온전히 부르게 한다. 이를 위해 우리의 환난 중에도 기다리신다. 엉뚱한 항변이나 변명 따위로 오해를 풀지 않을 때 괴로워 하신다. 

 

내 백성아 들을지어다 내가 말하리라

이스라엘아 내가 네게 증언하리라

나는 하나님 곧 네 하나님이로다

나는 네 제물 때문에

너를 책망하지는 아니하리니

네 번제가 항상 내 앞에 있음이로다

내가 네 집에서 수소나 네 우리에서

숫염소를 가져가지 아니하리니

이는 삼림의 짐승들과

뭇 산의 가축이 다 내 것이며

산의 모든 새들도 내가 아는 것이며

들의 짐승도 내 것임이로다

내가 가령 주려도

네게 이르지 아니할 것은

세계와 거기에 충만한 것이

내 것임이로다

(50:7-12).

 

그럼에도 마치 뭘 더 바라시는가, 하고 이것저것 바친다고 애쓰는 것에 대하여, “내가 수소의 고기를 먹으며 염소의 피를 마시겠느냐?” 하고 되물으신다(13). 그러므로,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지존하신 이에게 네 서원을 갚으며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14).

 

가끔은 우리가 주를 바라고 섬긴다고 하면서 그 마음이 오해투성이다. 가끔 안 믿는 자들의 댓글을 읽다보면 저들의 무지 앞에 혀를 내두르게 된다. 마치 하나님은 돈을 바라고 헌신과 희생만을 요구하는 악질적인 신과 같이 여겨진다. 어쩌다 교회가 그리 여겨지게 만든 것이다. 더는 어찌 말할 게 없을 때, 우리는 침묵하듯이 하나님도 침묵하신다. 하나님의 침묵보다 무섭고 잔인한 응징은 없다.

 

내가 광야 마른 땅에서

너를 알았거늘

그들이 먹여 준 대로 배가 불렀고

배가 부르니

그들의 마음이 교만하여

이로 말미암아 나를 잊었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그들에게

사자 같고 길 가에서 기다리는

표범 같으니라

내가 새끼 잃은 곰 같이

그들을 만나

그의 염통 꺼풀을 찢고

거기서 암사자 같이

그들을 삼키리라

들짐승이 그들을 찢으리라

(호 13:5-8).

 

차라리 하나님의 공격과 보응이 나을 때가 있다. 우리에게 더하시는 고난은, 최소한 하나님의 손길이다. 그렇게라도 다루시는 하나님의 사랑이다. 하나님의 분노는 그럴 수밖에 없는 죄를 이해하시는 방식이고, 하나님의 질투는 여전한 그 백성에 다한 사랑이며, 경멸은 악에 대한 하나님의 당당하심을 드러낸다. 두려움과 절망과 수치는 궁극적으로 십자가의 보혈로 우리의 타락을 없이 하신다. 고난이 결코 달가울 리 없고 환난이 결코 감사할 수 없는 일이지만,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시 119:67).

 

이를 통하여 하나님이 나를 얼마나 어떻게 사랑하셨는가를 알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여느 말씀 중에서도 이 말씀을 사랑한다. 어릴 때 나의 장애가 아니었다면 우리 육신의 불합리함을 알았을 리 없고, 왕따니 소외니 무시당함이 없었더라면 존중하심의 참 의미를 알 리 없었고, 이를 내 스스로 무장하며 사느라 산다고 애쓰는 가운데 나의 교만과 아집을 꺾기 위해서 파산이 없었다면 주께 두 손 들 리 없고, 결국 길 가에 버려져 많은 사람의 발에 밟혀야 할 무가치한 존재였는데 '나 같은 죄인'을 부르심으로 이처럼 주의 맛을 내는 소금으로 또는 빛으로 살고자 하는 소명을 더하셨으니, ‘이제는’ 전의 내가 아닌 것과 고난으로 말씀의 가치를 알게 된 것에 대하여 나는 감사할 줄도 안다.

 

그 하루는 점점 단순하여서 책을 읽거나, 누구의 사연을 듣거나, 그 일로 같이 어려워하거나, 나의 몸으로 힘들어하거나, 이해할 수 없는 감정으로 들썽거리며 안정제를 의존해야 하는 신세에 대하여도 ‘이제는’ 그것으로 말씀을 사모한다. 하찮은 것 같으나 나의 하루는 아침의 이 말씀 묵상으로 시작한다. 이를 위해 생각하고, 메모하고, 누구 일을 염두에 두고, 종일 씨름하다 잠자리에 들면서도 이 시간을 사모한다. 때론 한심할 정도로 단조로운 나의 생활에 대하여 ‘이제는’ 허튼 것으로 사람과 사람 사이를 바라지 않고, 친구도 선생도 어쩌다 그리 정리가 되었다. 가령 추석이 다가오면서 누구에게 마음을 선물하는데 있어, 당신은 선물할 사람 없어? 하고 묻는 아내의 말에 한참을 생각하다 그만두었다.

 

예전의 나와 ‘이제는’ 다르다. 무엇을 주고, 어떤 마음씨로 저를 생각하며, 빈말이 아닌 주의 사랑을 같이 나누며 서로 오가는 '문안'을 기대하고 사랑한다. 마음을 표현한다는 일은 열에 아홉이 겉치레에 가까워서 그리 살뜰하게 챙겨야 할 정도의 사이는 없어졌다. 다만 '사랑의 빚'을 많이 지고 사는데, 하나같이 저들의 공통점은 그것을 두고 말을 꺼내거나 답례나 감사를 표현하려 하면 질겁을 한다. 가령 누가 저의 살림도 어려운 걸 잘 아는데 후원헌금을 더 올렸다. 교회를 시작하면서부터니까 벌써 십여 년이 훌쩍 넘는 시간인데 나는 한 번도 저에게 감사를 어찌 표한 적이 없다. 물론 말을 꺼내거나 어떤 시도를 했을 때 저는 정중히 사양하였다. 이유가 무얼까? 나를 보고, 나에게 준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 드려진 교회의 것으로, 그러므로 나도 저에 대한 고마움을 하나님께 감사로 대신한다. 그런 나를 두고 사회성이 결여되었다고 하지만 나는 그런 말에도 별로 '이제는' 개의치 않는다. 말 그대로 ‘새삼’ 우리가 서로를 생각함은 그 사랑이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네 집에서 수소나 네 우리에서

숫염소를 가져가지 아니하리니

이는 삼림의 짐승들과

뭇 산의 가축이 다 내 것이며

산의 모든 새들도 내가 아는 것이며

들의 짐승도 내 것임이로다

(시 50:8-12).

 

하시는 주님의 마음이 어떤 의미인지 알 것 같다. ‘이제는’ 주님이 무얼 바라시는지, 곧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14).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 되시기를 바라신다. 다른 그 무엇으로가 아니다. 그런 의미로 다시 보면 우리가 겪고 있는 모든 고난은 우선 둘로 나뉜다. 하나님을 믿지 않음으로 하나님과 상관없이 스스로 자초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있고, 하나님의 크고 위대한 목적을 감추고 있는 의도적인 고난도 있다. 그것으로 우리는 하나님과 싸운다. 말다툼이 생기고 서러워하다 원망도 하고 힐문을 한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의 백성의 기도에 대하여

어느 때까지 노하시리이까

주께서 그들에게

눈물의 양식을 먹이시며

많은 눈물을 마시게 하셨나이다

우리를 우리 이웃에게

다툼 거리가 되게 하시니

우리 원수들이 서로 비웃나이다

(시 80:4-6).

 

그럼에도 하나님의 사랑은 기꺼이 이와 같은 비난을 듣고 응수하시며 견디신다. 왜? “주께서 한 포도나무를 애굽에서 가져다가 민족들을 쫓아내시고 그것을 심으셨나이다(8).” 우리의 씨름은 우리로 하나님을 하나님 되심으로 바로 알게 하려 하신다. 그래서 우리의 항변도 마다하지 않으시는 것이다.

 

주께서 어찌하여 그 담을 허시사

길을 지나가는 모든 이들이

그것을 따게 하셨나이까

(12).

 

어릴 때부터 나는 누구의 침묵을 못 견뎌했던 것 같다. 온갖 추론의 결론은 언제나 그게 나 때문인 것 같아 괴로워서 말이다. 자꾸 먼저 말을 걸고 어떻게든 풀려하다 더 꼬이고 싸워 오해의 골이 깊어지는 한이 있어도, 나는 누구에게도 말하길 서로 외면하고 침묵하는 것보다 싸우자, 싸워서 감정이 더 상한다 해도 말로 씨름하고 자신의 생각을 주장을 다 토해내자고 한다. 침묵보다 잔인하고 무서운 단절은 없다.

 

하나님이여 내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고

내가 간구할 때에 숨지 마소서

내게 굽히사 응답하소서

내가 근심으로 편하지 못하여

탄식하오니 이는 원수의 소리와

악인의 압제 때문이라

그들이 죄악을 내게 더하며

노하여 나를 핍박하나이다

(55:1-3).

 

이쯤 되면 미칠 것 같다. 죽겠다고 아무리 외쳐도 들은 체도 않으실 때가 있다. “내가 말하기를 나의 행위를 조심하여 내 혀로 범죄하지 아니하리니 악인이 내 앞에 있을 때에 내가 내 입에 재갈을 먹이리라 하였도다(39:1).” 그리 조심하며 스스로 어찌 잘해보려 하지만, “내가 잠잠하여 선한 말도 하지 아니하니 나의 근심이 더 심하도다(2).” 서로의 침묵은 서로를 미치게 한다.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뜨거워서 작은 소리로 읊조릴 때에 불이 붙으니 나의 혀로 말하기를 여호와여 나의 종말과 연한이 언제까지인지 알게 하사 내가 나의 연약함을 알게 하소서(3-4).” 그로 인하여 더욱 주를 바라며 의지하게 한다. 그리고 가장 원론적인 진리 앞에 선다.

 

주께서 나의 날을

한 뼘 길이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사람은 그가 든든히 서 있는 때에도

진실로 모두가 허사뿐이니이다 (셀라)

(5).

 

주 없는 모든 것은 허사다. 하나님 없이 사는 삶의 결국은 모두가 허망하다. 더 말해 뭐할까? 그래서,

 

내가 잠잠하고 입을 열지 아니함은

주께서 이를 행하신 까닭이니이다

(9).

 

비로소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이루어지는 일인 것을 알게 된다. 참으로 진저리나는 일을 통해,

 

여호와여 나의 기도를 들으시며

나의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이소서

내가 눈물 흘릴 때에 잠잠하지 마옵소서

나는 주와 함께 있는 나그네이며

나의 모든 조상들처럼 떠도나이다

주는 나를 용서하사 내

가 떠나 없어지기 전에

나의 건강을 회복시키소서

(12-13).

 

이를 오늘 계시록의 말씀으로 다시 되새기면, “그들이 어린 양과 더불어 싸우려니와 어린 양은 만주의 주시요 만왕의 왕이시므로 그들을 이기실 터이요 또 그와 함께 있는 자들 곧 부르심을 받고 택하심을 받은 진실한 자들도 이기리로다(계 17:14).” 세상이 세상다울 때, 곧 어린 양과 더불어 싸울 때 우리는 더욱 만주의 주가 누구신지를 알게 된다. 곧 그 승리가 누구의 것으로 어디서 오는지 알 수 있다. 그런 거 보면 ‘고난이 유익이라’는 말 이보다 더 잔인하고 진저리나는 진리는 없는 것 같다. 어쩜 우리는 적당함으로 적당히 견딜 만하여 주를 외면하고 오해하고 무시하며 살게 될까? 이를 때 시편의 한 구절이 모든 의문을 일갈한다. “내가 주를 의뢰하고 적군을 향해 달리며 내 하나님을 의지하고 담을 뛰어넘나이다(시 18:29).” 다른 무엇으로 달리겠는가?

 

점점 세상은 그 종말이 드러나고 있다. “그의 이마에 이름이 기록되었으니 비밀이라, 큰 바벨론이라, 땅의 음녀들과 가증한 것들의 어미라 하였더라(계 17:5).” 단단히 마음 먹고 굳건히 서야 한다. “네가 본 짐승은 전에 있었다가 지금은 없으나 장차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와 멸망으로 들어갈 자니 땅에 사는 자들로서 창세 이후로 그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들이 이전에 있었다가 지금은 없으나 장차 나올 짐승을 보고 놀랍게 여기리라(8).” 곧 “그들이 어린 양과 더불어 싸우려니와 어린 양은 만주의 주시요 만왕의 왕이시므로 그들을 이기실 터이요 또 그와 함께 있는 자들 곧 부르심을 받고 택하심을 받은 진실한 자들도 이기리로다(14).”

 

이에,

 

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오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

(시 18:1-2),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