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과 성도들과 사도들과 선지자들아, 그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라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그에게 심판을 행하셨음이라 하더라
계 18:20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
시 19:14
누구를 대하는 일, 그 한 영혼을 주께 인도하는 일은 참으로 더디고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것 같다. 마음 같아서는 금세 잡힐 것 같은데, 그 고집들이 여간 아니다. 결국 은혜밖에는 답이 없다.
우리 구원의 하나님이시여
땅의 모든 끝과
먼 바다에 있는 자가 의지할 주께서
의를 따라 엄위하신 일로
우리에게 응답하시리이다
주는 주의 힘으로 산을 세우시며
권능으로 띠를 띠시며
바다의 설렘과 물결의 흔들림과
만민의 소요까지 진정하시나이다
(시 65:5-7).
이번 주일은 아버지가 추석을 앞두고 한 주 일찍 오시는 바람에 설교원고를 작성하는 일도 느려지게 되었다. 본문을 읽고 묵상하는 일이 그만큼 되새길 수 있어 그 의미는 새로웠고 마음은 한결 느긋하게 되었다. 토요일에 오는 아이는 다소 수동적이기는 하나 아직 선뜻 다가서기가 어려웠다. 늘 같은 동선을 따라 움직이는 터라, 나에게 코로나의 정국은 그리 불편한 게 없다. 누가 사역을 미루고 그저 사는 일에 급급한 것을 보며 그것도 내가 나설 일은 아니어서 뭐라 하지 못하고 마음만 졸인다. 나의 하루는 느긋하였고 그 시간의 흐름은 차분하였다. 그럼에도 내 안의 소요는 은혜가 아니면 감당이 안 된다. ‘우리 구원의 하나님이시여’ 하고 주를 부르며 ‘의를 따라 엄위하신 일로/ 우리에게 응답하시리이다.’ 하는 시편의 의미를 되새긴다. 주가 이루시고 이끄신다.
‘주는 주의 힘으로… 만민의 소요까지 진정하시나이다.’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모시고 산다는 일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 우리는 마치 돌아서기 무섭게 모든 것을 잊어버리는 망각의 늪을 걸어가는 것 같다. 내남없이 그럴 수밖에 없는 현실을 운운한다. 우리 곁의 여러 무엇 때문에, 심지어는 스스로 일러 ‘꼭 그렇게 해야 해?’ 하고 반문을 제기하고 ‘이럼 됐지 뭐!’ 하고 안주한다. 내가 아는 누가 또 사역을 접고 여느 일에 파묻혔다. 들어보면 그럴 수밖에 없는 현실인 것은 알겠는데, 결국은 죽기 살기로 주의 일에 대한 열망이 없는 것이다. 뭐라 하겠나? 그 소요를 진정시키시는 이도 하나님이실 것을.
오직 주는 여호와시라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과 일월성신과
땅과 땅 위의 만물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지으시고
다 보존하시오니
모든 천군이 주께 경배하나이다
(느 9:6).
누구를 생각하며 드는 어떤 안타까움은 나로 하여금 주를 바라게 하는 단서일 뿐 내가 나설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 거 보면 굳건히 주만 바란다는 것도 은혜가 아니면 어려운 듯하다. 은혜로 살고 은혜로 죽는 인생일 텐데. 가만히 걷다 높아진 가을 하늘을 보고 깜짝 놀랐다. 또 한 계절이 가고 새로 한 계절이 왔다. 저만치 멋들어진 구름이 유유하게 흐르고 있었다. 그런 거 보면 산 같은 믿음이 있고 구름 같은 믿음이 있다. 늘 그 자리에서 묵묵히 그 신앙과 믿음을 지켜가는 사람이 있고, 누구는 가을 하늘의 멋들어진 구름 같이 두둥실 떠서 근사하기는 한데 잠시 돌아보다 보면 마주할 수가 없다. 어디로 갔는지, 흩어져 더는 찾을 수 없는 것이 저의 모습과 같아서, 믿음으로 믿음 안에서 믿음만으로 살 줄 알았는데, 어려움이 가시고 적당한 날이 이어지는가 싶더니… 같은 곳을 바라보며 주를 바라다 저가 내 곁에 없다는 것을 불현듯 알게 됐을 때의 난감함에 대하여.
주의 은혜가 아니면…. 어제는 자주 누구를 생각하다 잠결에 꿈까지 꾸었다. 아주 가끔은, 그러는 것에 익숙해질 만도 한데 여전히 어렵다. 뭘 어찌 해야 할지 몰라 주춤거리다보면 더는 서먹하여 선뜻 다가갈 수 없는 것들에 대하여.
땅 끝에 사는 자가
주의 징조를 두려워하나이다
주께서 아침 되는 것과
저녁 되는 것을 즐거워하게 하시며
땅을 돌보사 물을 대어
심히 윤택하게 하시며
하나님의 강에 물이 가득하게 하시고
이같이 땅을 예비하신 후에
그들에게 곡식을 주시나이다
(시 65:8-9).
나는 설교원고로 준비해야 하는 본문을 되뇌며 주의 섭리를 묵상하게 된다. 이 모든 일이 주의 뜻 안에서라. 누가 어찌 됐는지, 두둥실 떠 있던 저의 영혼은 어디로 흩어져 사라졌는지, 가끔은 그리움처럼 또는 안타까움처럼 저를 생각하기도 하지만 예전 같지가 않은 것이다. 그리고 다시, 새로운 아이. 토요일에 오는 아이 앞에서 나는 낯섦을 불편해하다 누구누구를 생각하였다. 새로운 한 사람과 친해지기까지, 멀어진 사람과 다시 가까워지기까지, 이 사이와 저 사이의 간격이 어디가 더 멀고 가까울까? 하는 의문점에는 여전히 답을 얻지 못했다. 전에 처음 교회를 하고 목사가 되어 누굴 어찌 대해야 할지 어려워하는 마음으로 어느 오래된 목사에게 물었다. 새로 누구를 전도하는 게 쉬울까요? 가까이 하다 서먹해진 이와 다시 가까이 하는 게 쉬울까요? 그때는 그게 우문인 줄 몰랐다. 나이든 목사는 한참 말을 못하다 그래도 알던 사람을 다시 가까이 하는 일이 더 쉬운 일이 아니겠나? 하고 반문하였다.
지금에 나는 둘 다, 이 사이나 저 사이나 그 사이의 길이에 대하여는 뭐가 더 나은지, 쉬운지 단정 지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모든 게 다 때가 있어서,
찾을 때가 있고 잃을 때가 있으며
지킬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으며
…
(전 3:6).
그 ‘때’는 가을 하늘 저만치에 흘러가는 구름과 같다. 굳은 산은 한 자리를 지키며 꿋꿋하게 서 있어야 하는 숙명으로 오고 가는 것에 관여할 수 없다. 때론 부럽고 불안하기도 한 것이, 나만 이러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불안이 엄습할 때인데, 그때마다 주가 또 이루어 가시는 세계라.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이시라
여호와께서 네 오른쪽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낮의 해가 너를 상하게 하지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지 아니하리로다
(시 121:5-6).
그런 거 보면 나의 고질적인 애착관계로 인한 하나님의 의도적인 관여이신 것도 같다. 누구를 좋아하면 병적으로 그에게 끌린다. 누구를 생각하면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하면서 전적인 일이 된다. 그러다보니 다른 사람을 돌아볼 겨를이 없어진다. 이를 누구보다 주가 더 잘 아심으로, 그 ‘때’가 오고 감은 나로 하여금 속수무책이게 하셨다. 그러니까 언제부턴가 내 곁에 누가 오고 안 오고, 가고 남고 하는 일에 나는 일체 관여하지 못하게 하신 듯하다. 대신 그때마다 주가 어찌 관여하시고 다루시는가를 나로 더욱 집중하게 하여 주를 바라게 하심은 분명히 알겠다. 예전 같으면, 자신 있었다. 누구를 좋아하는 일은 물론 좋아하게 하는 일에서도 마치 바람둥이처럼 마음만 먹으면 다 되는 줄 알았다. 실제 그렇게 사람의 끌림과 홀림에서 나는 자신 있어 하였다. 그런데 이젠 내가 임의로 누굴 오거나 가게 할 수 없다.
그런 거 보면, 누구 말마따나 나는 누구 일에 상담을 하거나 그 한 영혼을 감당할 위인이 못 된다. 너무 감정이입이 심해져서 스스로도 못 견뎌할 뿐 아니라, 어느 순간 상대도 이를 못 견뎌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 그러니 나로서는 그런 소리가 억울할 때가 있다.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 하고 묻는 어느 영화의 대사처럼 누가 누구를 생각함이 사소함으로 온통 하루의 일상을 장악하는 것은 당연한 게 아닌가? 나는 종종 나의 이런 소모적인 감정을 두고 주께 고한다. 좀 더 의연하고 태연할 수 있게 해달라고, 그러려니 하고 말 수 있는 감정의 무덤덤함을 허락하여 주시기를. 그런데 주님은 아랑곳하지 않으시는지 나의 기도는 들은 체도 않으시는 것 같다. 보면 늘 나 혼자 안달이다. 가령 누구의 일이 마음이 쓰여 전화를 하였을 때 통화가 안 되면, 종일 나는 저의 연락을 기다린다. 또는 누구에게 권하고, 다음은 어찌 됐나 하고 저의 소식을 기다리는데 저는 감감무소식 아무런 연락도 없을 때 나의 하루는 마비되는 것 같다. 누가 온다고 하면 몇 시간 전부터 마음을 준비하고 같이 마실 차나 접대할 간식을 준비하고, 무슨 말을 할까, 어떤 자세로 저를 맞이할까 하여 시간이 가까울수록 나의 조바심은 극에 달한다. 그러다 5분이 지나고 10분이 지나도 저에게 아무 소식이 없을 때면 난감하다. 연락을 해봐야 하는지, 마냥 기다려야 하는지, 나에게 이런 문제는 너무 어렵다.
다들 어쩜 그리도 태연할까? 그만큼 내가 존재감이 크지 않은 것이려니, 누구의 권고처럼 그리 생각하는 편이 도리어 마음을 편하게 한다. 그래서 나는 주목받는 생이고 싶지 않다. 내게 두시는 나조차 내 일이 아니었다. 하물며 내 곁에 맡기시는, 한 영혼을 대하는 일은 그저 가을 하늘 저만치에 흘러가는 구름과 같이 데면데면하고 말 일인가? 나의 이 풀리지 않는 마음으로 주의 이름을 부른다. 솔직히 누구를 위해 기도한다는 일은 내가 못 살겠어서이다. 저를 위해 기도한다지만 내가 궁금해죽겠다.
어느 여류 소설가가 쓴 작품인데 무슨 이별이란 단편제목이었던 것 같다. 가정이 있는 여자로 다른 한 남자를 사랑하게 되었다. 저이는 지금의 가정도 너무 소중하고 사랑한다. 그래서 두 배 세 배 혼신을 다해 하루하루를 산다. 가령 그와 만나는 날, 그와의 짧은 몇 시간의 만남을 위해 저이는 며칠 전부터 그 시간의 공백을 무리 없이 채우려고 갖은 애를 쓴다. 그렇게 40분 또는 한 시간, 차 한 잔을 같이 하는 시간을 마련하느라 수 곱절의 시간을 준비하고 나왔는데 저는 번번이 5분 10분을 늦는다. 그때마다 저이는 애가 탄다. 한데 저에게는 대수롭지 않은 듯 늘 자기 일에 정신이 팔려 있다. 같이 있는 동안만은 자신에게 전념하길 바라지만… 이내 여자는 이별을 통보하고 자리에서 먼저 일어서는 것으로 그간의 서러움을 소극적으로 복수한다. 너무 오래 전에 읽은 내용이라 앞뒤는 기억이 없다. 내용도 말씀을 묵상하는 데 있어 적용하기로는 부적절한 것 같다. 그럼에도 이를 적어본 것은,
그들이 주리거나 목마르지 아니할 것이며
더위와 볕이 그들을 상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을 긍휼히 여기는 이가
그들을 이끌되 샘물 근원으로 인도할 것임이라
(사 49:10).
우리 생의 목마름은 샘물의 근원을 갈망하게 한다. 누구로 인해 저를 생각함이 사역이라 한다 해도 주님은 이해가 안 될 정도로 그 일에 전념하는 것에 질투하신다. 심지어 가족을 사랑하고 밀착관계로 지내는 일에 있어서도 주는 틈을 벌이신다. 그럴 때, 이게 싫어서 주와 거리를 두거나 주의 뜻을 알고 적당한 ‘불가근불가원’을 실현하든가. 아무리 가까이 한다고 해도 그 사이가 일정하게 틈이 있고, 아무리 멀어진다고 해도 그 사이가 이어져 있는 것이어서, 나는 평생을 이와 같은 관계학습에 진전이 없는 것 같다.
다시 또 누구를 새로 마주하고 대하다보면 익숙하지 못하였던 것들로부터의 멀어짐을 인식한다. 어째서 우리 안에 이와 같은 고질적인 낭패를 그대로 놓아두시는 것일까? 바울도 세 번씩이나 지신의 약함을 고하며 호소하였으나 돌아오는 답변은 오늘의 내 것과 같아서,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 12:9).” 이를 깨닫고 받아들이기까지 얼마쯤 더 수련이 되어야 하는 일일까? 연마의 과정이 지나면 좀 나아질까?
나는 누가 사역을 그만 두고 다른 일을 한다 할 때, 또는 맡은 바 그 일에서 한 발 빼고 다른 일에 먼저 전념하는 누구의 소식을 들을 때면 속상하다. 어김없이 나의 지난날을 돌아보며 그에 따른 허송세월을 통회한다. 나에게는 그 시간의 단위가 쩍쩍 벌어진 가뭄의 논밭구렁 같이 10년의 세월씩 훌렁훌렁 흩어진 것 같다. 87학번에서 97학번으로, 97학번에서 09학번으로… 그렇게 삼세 번 건너뛴 골격마다 민망하고 부끄러운 시간이 흉터처럼 남아 있으니, 그러다보니 훌쩍 인생이 다 갔다. 부디 내 곁의 나의 사랑하는 동역자들에게 나의 이 허물과 실수가 크게 경각심이 될 수만 있다면. 오늘 아침 이 말씀을 뼈아프게 되새기는 것이 마땅하겠다.
하늘과 성도들과 사도들과 선지자들아,
그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라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그에게 심판을 행하셨음이라 하더라
(계 18:20).
그때마다 더하셨던 은혜가 아니었으면 지금의 나는 언제, 어디, 저 하늘에 흩어져버린 구름과 같지 않았을까?
나의 반석이시오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
(시 19:14).
더는 그릇된 길을 떠돌지 않을 수 있도록, “또 내가 들으니 하늘로부터 다른 음성이 나서 이르되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여하지 말고 그가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계 18:4).”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주의 길을 간다. 그러할 때에,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시 19:1).
하늘도 바람도 계절도 나무도 모두 알고 있는 것을 우리만 알지 못하고 있었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언어도 없고 말씀도 없으며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의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의 말씀이 세상 끝까지 이르도다 하나님이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베푸셨도다(2-4).” 결국 스스로 옳다 하는 길로들 가는 일이겠으나,
자기 허물을
능히 깨달을 자 누구리요
나를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또 주의 종에게
고의로 죄를 짓지 말게 하사
그 죄가 나를
주장하지 못하게 하소서
그리하면 내가 정직하여
큰 죄과에서 벗어나겠나이다
나의 반석이시오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
(12-14),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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