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전봉석 2021. 9. 10. 05:03

 

보라 내가 도둑 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계 16:15

 

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뵈오리니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

시 17:15

 

 

스스로 일러 괜찮다고 하는 데는 별 수 없다. 전혀 예상치도 못한 누가 우울증으로 고생하고 있다는 말을 전해왔을 때 나는 당혹스러웠다. 누구에게는 그의 심각성을 알리며 정신과에 가서 약을 좀 받아 우선은 마음의 진정이 필요하다고 일렀다. 그러니 가만 돌아보면 온전한 사람이 없고, 스스로 온전하다 하는 이는 저의 완고함으로 기고만장한 것이어서 뭐라 한들 소용이 없다. ‘아픈 아이’와는 점심 약속을 하고 전철역에 가 앉았는데 이를 잊고 저는 퇴근하고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집으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고 하였다. 모두가 뒤죽박죽이다. 일일이 저들 생에 참견할 일은 아니지만, “개가 그 토한 것을 도로 먹는 것 같이 미련한 자는 그 미련한 것을 거듭 행하느니라(잠 26:11).” 우리의 미련함을 누가 당해낼 수 있을까?

 

당최 어쩌다 이런 것일까? 이유를 하나 꼽으라면, 우리는 모두 수치심으로 그런다. 은연중에 느끼는 수치는 모든 자아를 빨아들인다. 하루에도 수골백번을 느끼는 감정 중에 하나가 수치다. 순화하면 부끄러움이고 남을 의식하는 일이지만 스스로 떳떳하지 못한 감정이 수치다. 이는 아담으로 인해 생겨났다. 하나님의 낯을 피해 나무 그늘에 숨어 스스로 자신의 부끄러움을 감추었다.

 

나의 능욕이 종일 내 앞에 있으며

수치가 내 얼굴을 덮었으니

나를 비방하고 욕하는 소리 때문이요

나의 원수와 나의 복수자 때문이니이다

(시 44:15-16).

 

생각보다 별로인 자신을 마주할 때 수치를 느낀다. 남을 의식하게 되면서 저의 시선을 살피느라 숨기고 감추고 꾸민다. 수치의 순기능은 이로써 하나님을 찾게 한다. 엄마 품에 안기려는 아이 같이 우리로 산 자의 땅에서 주를 찾고 바라게 한다.

 

여호와여 그들의 얼굴에

수치가 가득하게 하사

그들이 주의 이름을 찾게 하소서

그들로 수치를 당하여

영원히 놀라게 하시며

낭패와 멸망을 당하게 하사

여호와라 이름하신 주만

온 세계의 지존자로 알게 하소서

(83:16-18).

 

그러나 수치의 역기능은 환상을 더하여 자신을 착각한다. 기껏 나뭇잎으로 부끄러움을 감추고 나무 그늘에 숨어서 하나님의 낯을 피할 수 있을 줄 아는 것과 같다. 누구의 소식과 누구의 고집과 누구의 엉뚱한 세계 앞에서 나는 이런저런 생각이 많았다. 모두의 공통점은 그러면서도 스스로를 괜찮다고 여기는 것이다. 이보다 끔찍한 증상은 폭력적인 공격성이다. ‘탓’을 하며 곁의 가까운 사람에게 치댄다. 물론 자신보다 약하다고 여기는 상대를 향해서다.

 

우리 수치의 정체는 그 영혼의 추함이다. 내면의 추함을 스스로 감추려니까 허세를 떨거나 역성을 내거나, 거짓 웃음으로 명랑하거나 쾌활하거나 스스로도 자신의 본 모습을 보지 못한다. 이는 낮은 자존감을 유발하고 자기애를 분열시킨다. 곧 다른 누군가에게 적절한 지지와 인정을 받지 못한 자신에 대해 무가치함을 느끼는 것이다. 결국 수치심은 자신이 지금 누구를, 무엇을 숭배하고 있는지를 알게 한다.

 

조각한 신상을 섬기며

허무한 것으로 자랑하는 자는

다 수치를 당할 것이라

(시 97:7).

 

누가 있었다. 저는 과도하게 예의바르고 친절하였다. 연애시절에도, 사랑을 할 때도, 결혼을 하고서도 늘 자신 탓을 하며 상대의 잘못을 자기 때문으로 돌렸다. 그를 위해서는 자신이 더 희생하고 헌신하고 봉사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늘 잘하려고 애썼다. 그런데 늘 번번이 상대는 저를 싫증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떠났다. 그녀는 그 모든 게 자기 탓이라고 생각했다. 들여다보니 저가 다섯 살 때 아버지가 죽었다. 임종을 앞두고 아버지는 둘러선 가족들을 하나하나 부르며 힘겨운 말로 위로하고 용서를 구하고 고마움을 표현했다. 어린 그녀는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며 아빠가 무슨 말을 할까, 먼저 눈물부터 흘리고 있었다. 그런데 저의 아버지는 아직 어린 딸아이여서 그랬을까? 그녀를 지나쳐 다음 사람, 그 다음 사람에게까지 말을 남기고는 운명하였다. 그녀의 수치심은 자신이 좀 더 잘하지 못해 죽어가는 아버지에게 존재감이 없었다고 정의한 것이다. 자라면서 그녀는 사랑받고 인정받기 위해 가진 애를 썼다. 그럼 그럴수록 상대는 금세 지치고 저의 집착으로 나가떨어졌다. 그녀의 사랑은 우상이 되었다.

 

조각한 우상을 의지하며

부어 만든 우상을 향하여

너희는 우리의 신이라

하는 자는 물리침을 받아

크게 수치를 당하리라

(사 42:17).

 

잃어버린 신뢰의 잔해가 수치다. 다시 회복하려 스스로 하나님을 만들어 섬긴다. 그 우상이 무너지면 자신도 무너진다고 여겨 열심을 다해 기도하고 봉사하고 헌신하고… 나름의 생에 전념하지만,

 

그 중의 절반은 불에 사르고

그 절반으로는 고기를 구워 먹고 배불리며

또 몸을 덥게 하여 이르기를

아하 따뜻하다 내가 불을 보았구나

하면서 그 나머지로 신상 곧

자기의 우상을 만들고

그 앞에 엎드려 경배하며

그것에게 기도하여 이르기를

너는 나의 신이니

나를 구원하라 하는도다

(사 44:16-17).

 

예상치 못한 누구의 우울증 소식에, 또는 자신의 심각성을 알지 못하고 병원에 좀 가보라는 내 말을 별로 귀담아 듣지 않으려는 누구로 인해, 하필 그 놈의 돈 때문에 막장까지 내몰려 돈돈거리며 돈벌이에 정신이 팔린 누구 때문에, 그리고 늘 ‘아픈 아이’라는 사실을 깜빡하는 사람처럼 뭐라 이르다 제풀에 지쳐… 어제는 공연히 몸도 마음도 추스르기 어려웠던 하루였다. 우리의 가치, 그 우상은 얼마나 헛되고 헛된가? 돈은 말할 것도 없고 자신을 두둔하는 품새나 이를 억척스럽게 고집하고 놓지 못하는 아집에 대해 나는 학을 뗀다. 두 손 두 발 든다. ‘학이 곡곡하고 우니 황새도 곡곡 하고 운다.’ 여기저기 곡소리가 그칠 날이 없다.

 

수치와 숭배는 들러붙은 냄비뚜껑 같다. 어찌 감추거나 숨길 수 없는, 뜨거운 데 손을 델 수 없어 난감할 따름이다. 안타까움으로 뭐라 이르는 사람도 그렇다는 소릴 들으면서도 그게 뭐 어떻다는 것인지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도, 서로가 난감할 뿐이다.

 

인생들아 어느 때까지

나의 영광을 바꾸어 욕되게 하며

헛된 일을 좋아하고

거짓을 구하려는가 (셀라)

(시 4:2).

 

하나님이 아닌 모든 것을 향한 영광은 우리로 수치스럽게 한다. 누구에게는 돈, 누구는 자신의 외모, 일, 경력, 스스로의 성취감이 숭배의 대상이지만 수치는 결국 무지로 인한 것이다.

 

우상을 만드는 자는

다 허망하도다

그들이 원하는 것들은

무익한 것이거늘

그것들의 증인들은

보지도 못하며

알지도 못하니

그러므로 수치를 당하리라

(사 44:9).

 

얼마나 무지한지 뭐라 하면 이를 또 수치로 여긴다. 말씀으로 다가가면 피하고, 주의 사랑으로 위하면 이를 못 견뎌한다. 그러면서도 사랑을 갈구하고 누가 좀 자신을 이끌어주기를 바란다. 하나부터 열까지 딱딱 정해주셨으면 좋겠어요! 나는 누구의 말에 혀를 차며, 그런다고 해서 절대 또 그 말을 듣지 않을 걸? 하고 되물었다. 수치의 단짝은 완고함이다. 희한하게도 열이면 열 다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것으로 씨름한다. 무지란 몰라서 무식한 게 아니라 안다고 여기는 것으로 다른 말은 듣지를 않는 것이다.

 

마음에 생각도 없고

지식도 없고 총명도 없으므로

내가 그것의 절반을 불 사르고

또한 그 숯불 위에서

떡도 굽고 고기도 구워 먹었거늘

내가 어찌 그 나머지로

가증한 물건을 만들겠으며

내가 어찌 그 나무 토막 앞에

굴복하리요 말하지 아니하니

그는 재를 먹고

허탄한 마음에 미혹되어

자기의 영혼을 구원하지 못하며

나의 오른손에

거짓 것이 있지 아니하냐

하지도 못하느니라

(사 44:19-20).

 

한 마디로 바보다. 그것으로 땔감을 사용하면서 그것을 숭배한다. 온갖 정성을 다해 그 앞에 절한다. 스스로의 만족으로 족하다고 하는 데는 당할 재간이 없다. 하긴 슬픔보다 수치가 수월하다. 슬픔을 견디느니 수치를 당하는 편이 낫다고 여긴다. 왜냐하면 스스로 그러려니 여기고 마는 놀라운 재주가 수치의 변모다. 부끄러워하면서도 부끄러운 줄 모르는 게 수치다. 가령 길거리에서 어떤 옷차림을 마주할 때 눈길을 어디 둬야 할지 모를 정도로 민망한데 저는 한껏 꾸민 것이라 뭐라 하면 안 된다. 시선을 돌리는 수밖에. 스스로를 그러려니 하고 여기는 것만큼 무서운 마비도 없다. 흡사 나병처럼 감각이 없다.

 

주께서 우리로 하여금

이웃에게 욕을 당하게 하시니

그들이 우리를 둘러싸고

조소하고 조롱하나이다

주께서 우리를 뭇 백성 중에

이야기 거리가 되게 하시며

민족 중에서 머리 흔듦을

당하게 하셨나이다

나의 능욕이 종일 내 앞에 있으며

수치가 내 얼굴을 덮었으니

나를 비방하고 욕하는 소리 때문이요

나의 원수와 나의 복수자 때문이니이다

(시 44:13-16).

 

그러할 때에도 정신 똑바로 차리고 주를 바랄 수 있는 마음만 있다면, 현실이 아무리 어떠하다 해도….

 

이 모든 일이 우리에게 임하였으나

우리가 주를 잊지 아니하며

주의 언약을 어기지 아니하였나이다

(17).

 

이 또한 은혜다. 어느 인생이 수치를 안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까? 처음 사람 아담 이후 모든 인류의 숙명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주를 바란다. 부르고 외쳐 주께 아뢴다.

 

주여 깨소서 어찌하여 주무시나이까

일어나시고 우리를 영원히 버리지 마소서

어찌하여 주의 얼굴을 가리시고

우리의 고난과 압제를 잊으시나이까

우리 영혼은 진토 속에 파묻히고

우리 몸은 땅에 붙었나이다

일어나 우리를 도우소서

주의 인자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구원하소서

(23-26).

 

이와 같은 담대함으로 주 앞에 나아가는 자들이 성도다. 우리로 그럴 수 있고 그리하게 하시려고 오늘도 우리 주님은 긴장하신다. 보좌에서 일어나 우리를 살피신다. 우리 곁에 두시는 너와 나의 존재의 의미다. 무엇보다 믿음을 주신 이유다.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감을 얻느니라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게 하느니라

 

자녀들아 이제 그의 안에 거하라

이는 주께서 나타내신 바 되면

그가 강림하실 때에

우리로 담대함을 얻어

그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하려 함이라

(엡 3:12, 히 10:35, 요일 2:28).

 

말씀 앞에 가만히 앉아 누구를 생각한다. 그리고 나를 돌아본다. 오늘 계시록의 말씀이 두려움으로 다가온다. “보라 내가 도둑 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계 16:15).” 언제 어느 순간에 주가 오실지, 우리가 육신을 떠나 주 앞에 나아가게 될지, 그러할 때에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다.’ 지금의 내가 어디가 왜 부끄러운지도 모르고 사는 삶에 대하여, 누구에게 권하고 손을 내밀어도 이를 수치로 여기는 데야 별 수 있겠나? 누구 일이 아니다. 저로 나를 돌아보게 하신다. 그리하여 “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뵈오리니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시 17:15).” 결국 나의 의로움이 무엇이겠나? 주의 형상으로 만족함이었다. 더는 남의 시선으로, 어떤 이의 판단으로, 무엇을 추구하는 세상과는 달리 주를 온전히 바람으로만 ‘아픈 아이’와의 엉뚱한 대화를, 서로의 관계를 주의 마음으로 이어간다. 누구의 완고한 고집에도 굴하지 않는다. 또는 어떤 이의 외면에도 수치를 느끼지 않는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히 12:2).

 

우리 또한 딛고 서야 할 길이었다. 수치의 역설은 의외로 간단하다. “또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거스르고 불리하게 하는 법조문으로 쓴 증서를 지우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골 2:13-15).” 다 이기신 싸움이다. 우리로서는 승전가를 부르며 나아갈 뿐이다. 그러할 때에 나타나는 놀라운 용기와 의연함에 대하여,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기며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뺨을 맡기며

모욕과 침 뱉음을 당하여도

내 얼굴을 가리지 아니하였느니라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므로

내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내 얼굴을 부싯돌 같이 굳게 하였으므로

내가 수치를 당하지 아니할 줄 아노라

나를 의롭다 하시는 이가

가까이 계시니

나와 다툴 자가 누구냐

나와 함께 설지어다

나의 대적이 누구냐

내게 가까이 나아올지어다

(사 50:6-8).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하고 의문을 가질 겨를도 없다. 저절로 그리 되는, 어떤 힘이 우리 안에 있는 주의 권능이다. 이에 소망으로의 자유가 우리에게는 있다.

 

여호와여 나의 영혼이

주를 우러러보나이다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의지하였사오니

나를 부끄럽지 않게 하시고

나의 원수들이 나를 이겨

개가를 부르지 못하게 하소서

 

주를 바라는 자들은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려니와

까닭 없이 속이는 자들은

수치를 당하리이다

(시 25:1-3).

 

고로,

 

나를 의롭다 하시는 이가

가까이 계시니

나와 다툴 자가 누구냐

나와 함께 설지어다

나의 대적이 누구냐

내게 가까이 나아올지어다

(사 50:8).

 

부디 나는 누가 나의 이 묵상글을 함께 읽기 바란다. 저의 마음에 들려주고 싶은 말씀의 약속이 어떠한지를 저도 나와 함께 알았으면 좋겠다. 정신과에 대한 이상한 거부감, 그 선입견이 얼마나 유치한지. 그냥 이가 썩어서 치과에 가고, 두통으로 진통제를 먹고, 위장장애로 약을 먹는 것과 다를 게 없다. 우리 마음도 곧 정신도 이처럼 약하여서 쉬 감정이 상하고 격해지기도 한다. 울분이 올라와 이성적인 판단을 흐려지게 할 수도 있다. 그럴 때 진정제를 먹고 안정제를 복용하면서 스스로를 다스리는 것이 필요하다.

 

결론은 감사뿐이다. 가장 신묘불측한 약은 감사하다. 감사는 참으로 신통하고 묘하고 추측할 수 없는 효과를 안겨준다. 기껏 몸의 연약함으로 짜증이 일다가도, 또는 어떤 어려운 마음으로 불안과 초조와 근심이 나를 짓누르다가도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고마워’ 하며 감사를 토해낼 때,

 

여호와여 주의 긍휼하심과

인자하심이 영원부터 있었사오니

주여 이것들을 기억하옵소서

 

여호와여 내 젊은 시절의

죄와 허물을 기억하지 마시고

주의 인자하심을 따라

주께서 나를 기억하시되

주의 선하심으로 하옵소서

(시 25:6-7).

 

나로 주께 아뢰게 한다. 그리하여 주의 놀라운 비밀, ‘나 같은 죄인 살리신’ 그 이유와 목적을 비로소 알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고전 1:27-29).

 

이 아침, 여느 때보다 일찍 일어나 앉아 말씀 앞에 가만히 눈물 짓고 있을 때,

 

그런즉 우리도 그의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우리가 여기에는 영구한 도성이 없으므로

장차 올 것을 찾나니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누어 주기를 잊지 말라

하나님은 이같은 제사를 기뻐하시느니라

(히 13:13-16).

 

나는 이제 무엇으로 사는가, 하는 데 따른 올곧은 길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께서 내 마음을 시험하시고 밤에 내게 오시어서 나를 감찰하셨으나 흠을 찾지 못하셨사오니 내가 결심하고 입으로 범죄하지 아니하리이다(시 17:3).” 오직 주만을 바람으로, “여호와여 이 세상에 살아 있는 동안 그들의 분깃을 받은 사람들에게서 주의 손으로 나를 구하소서 그들은 주의 재물로 배를 채우고 자녀로 만족하고 그들의 남은 산업을 그들의 어린 아이들에게 물려 주는 자니이다(14).” 다들 자신들의 수치로 치를 떨 때에 “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뵈오리니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15).”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