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전봉석 2021. 9. 22. 05:19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노아가 그와 같이 하여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

창 6:8, 22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힘을 주심이여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평강의 복을 주시리로다

시 29:11

 

 

하나님은 실패가 없으시다. ‘자기 백성에게 힘을 주신다.’ 노아가 은혜를 입었다. 세상이 아무리 어떠하다 해도, 노아는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대로 다 준행하였다. 마침 오늘 시편은 이를 노래한다. “여호와께서 홍수 때에 좌정하셨음이여 여호와께서 영원하도록 왕으로 좌정하시도다(29:10).” 우리로 주를 바라고 주께 나아갈 수 있도록 하시는 이도 하나님이시다.

 

아이가 카톡으로 잠언 몇 장 몇 절의 의미를 묻는다. 그리고 글에 쓰는 내용은 전혀 다른 것이다. 그럼에도 아이에게 그처럼 묻고자 하는 마음을 주시는 이가 하나님이신 것을 나는 확신한다. 첫 술에 배부를까. 대나무는 싹을 틔우는 데 4년이 소요된다. 더운 여름날 기를 쓰고 울며 짝짓기를 하는 매미는 7년을 어둠 속에서 기다렸다. 우리의 순종은 오랜 기다림의 과정이다. 노아가 그와 같이 하여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다. 무려 120년 동안이었다. 그럴 수 있었던 힘은 저가 받은 은혜이다. 내가 하는 게 아니다.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빌 1:6).” 결국은 주가 이루실 것이어서, 오늘 시편은 확신하는 것이다.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힘을 주심이여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평강의 복을 주시리로다(시 29:11).” 힘을 주심으로 평강의 복도 이루어진다.

 

하나님이 바다를 변하여

육지가 되게 하셨으므로

무리가 걸어서 강을 건너고

우리가 거기서 주로 말미암아

기뻐하였도다

(66:6).

 

그러므로 위대한 지도자 모세는 단단히 이르는 것이다.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출 14:13).” 오늘에 겪는 이 땅의 여러 일들을 우리가 다시 보지 않을 것이다. 저의 하나님은 어떠하셨나? 출애굽 후 1년쯤 지나 저는 고백하였다. “너희보다 먼저 가시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애굽에서 너희를 위하여 너희 목전에서 모든 일을 행하신 것 같이” 곧 저의 하나님은 늘 앞서 계셨고 먼저 행하셨다. 하면 “이제도 너희를 위하여 싸우실 것이며, 광야에서도 너희가 당하였거니와 ‘사람이 자기의 아들을 안는 것 같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걸어온 길에서 너희를 안으사 이 곳까지 이르게 하셨느니라.” 저의 하나님은 아버지와 같이 자식을 안은 전능자이셨다(신 1:30-31). 그러나 이를 믿는 일도 우리 스스로의 일이 아니다. “이 일에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믿지 아니하였도다(32).”

 

누구는 믿어지고 누구에게는 도무지 믿기지 않는 이 일에 대하여, 바울은 우리의 의가 바로 여기에 있다는 것을 증거하였다.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롬 4:20-22).” 그리 확신하고 여기는 것, 은혜란 이와 같이 불가항력적이다. 그 하나님은 늘 우리의 짧은 상상력을 능가하신다.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주께서 큰 능력과 펴신 팔로 천지를 지으셨사오니 주에게는 할 수 없는 일이 없으시니이다(렘 32:17).” 이를 믿고 온전히 기다릴 줄 아는 것이 복이고, 도무지 그리할 수 없는 것이 슬픈 일이다. 이는 우리 스스로가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예수께서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마 19:26).”

 

나는 나의 나 된 것은 물론 나 같은 이의 곁에 붙이시는 한 영혼의 이런저런 사정에 대하여도 ‘하나님이 다 하실 수 있다’는 데 소망을 둔다. 이에 대해 시편은 교훈하고 있었다.

 

그가 그의 능력으로 영원히 다스리시며

그의 눈으로 나라들을 살피시나니

거역하는 자들은 교만하지 말지어다 (셀라)

(시 66:7).

 

설령 이 세상은 잘만 돌아가고 안 믿는 자들의 성공은 끝도 없이 이어질 것 같으나, 욥의 친구 나아만 사람 소발도 알고 있었다. “악인이 이긴다는 자랑도 잠시요 경건하지 못한 자의 즐거움도 잠깐이니라(욥 20:5).” 물론 부러울 때가 있다. 나의 인생에는 저러한 복을 주시지 않을까? 하고 서운해 할 때도 있다. “나는 거의 넘어질 뻔하였고 나의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투하였음이로다(시 73:2-3).” 우리 안에 어찌 그러한 부러움이 없을 수 있겠나만, “잠시 후에는 악인이 없어지리니 네가 그 곳을 자세히 살필지라도 없으리로다(37:10).” 그러니 나의 부러움은 잠시 동안의 것에 대한 것이어서 성경의 엄한 경고의 말씀에 주목하게 된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그 이르는 날에 그들을 살라 그 뿌리와 가지를 남기지 아니할 것이로되” 저들은 결국은 엄연하듯이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공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말 4:1, 2).” 우리에게 향하신 여호와의 인자하심도 엄연하였다.

 

우리에게 향하신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크시고

여호와의 진실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할렐루야

(시 117:2).

 

이를 알게 하시려고, 시련은 오늘도 제 역할을 한다. 고난은 제 몫의 사역을 감당한다.

 

만민들아

우리 하나님을 송축하며

그의 찬양 소리를 들리게 할지어다

그는 우리 영혼을 살려 두시고

우리의 실족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는 주시로다

(시 66:8-9).

 

누구라도 그 속에 어려움을 안고 사는 것일 테니, 저가 온전하고 모자람이 없는 것 같으나 저 또한 고난 중인 것이고. 또는 늘 빈궁하여 어려움에 허덕이는 것 같은 때에도 주의 선하심을 맛보아 이를 의지하며 사는 사람도 있는 것이고. 그리하여 한 세대는 가고 또 한 세대는 오나니.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8-39).” 이 얼마나 신나고 기가 막힌 약속이신지!

 

앞서 이를 먼저 깨달아 붙들었던 베드로도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벧전 5:9).” 우리가 대적해야 할 이는 결국 우리 안의 우리 자신일 거였다. 저는 오늘도 속닥이며 나를 우울하게도 한다. 서럽게도 원통하게도 한다. 그러느라 저 또한 고단할 지경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또한 최선을 다해 감당할 뿐이어서,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를 시험하시되

우리를 단련하시기를 은을 단련함 같이 하셨으며

우리를 끌어 그물에 걸리게 하시며

어려운 짐을 우리 허리에 매어 두셨으며

사람들이 우리 머리를 타고 가게 하셨나이다

우리가 불과 물을 통과하였더니

주께서 우리를 끌어내사 풍부한 곳에 들이셨나이다

(시 66:10-12).

 

인생 어느 누가 아무렇지도 않게 살 수 있겠나? 보이는 것은 허상이고 만족하는 것은 잠시 뿐이어서, “형제들아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을 고난과 오래 참음의 본으로 삼으라(약 5:10).” 믿음으로 주를 따르는 자들은 한결 같이 알고 있었다. 주께서도 우리에게 ‘오래 참음의 본’을 보이셨다. 그런 거 보면 고난은 고난의 일을 하고 역경은 역경의 역할을 할 뿐이다. 누구는 자기 의지로 살고 누구는 주께 의뢰함으로 산다. 자기 의지로 사는 사람은 자신의 주먹을 믿고, 주를 바라며 사는 사람은 손을 펴고 하늘을 우러르며 산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고전 15:58).”

 

‘우리는 무엇으로 사는가?’ 나는 이제 초딩 6학년 아이가 그리 하려고 하는 그 마음이 기특하고 신기할 따름이다. 무슨 뜻인지 알지도 못하면서 하겠다고 묻고 또 글을 쓴다. ‘아픈 아이’는 자신이 혼곤하고 주변이 어지러울 때 성경을 필사한다. 누구는 이런 걸 보고 강박적이라 하고 누구는 병적이라 하겠으나, 차라리 저들도 병적이고 환자였으면 좋을 것을…. 우리 모두의 영광은 아직 이르지 않았다. 어느 인생도 이 땅으로 전부가 아니었다.

 

사람들이 우리 머리를 타고 가게 하셨나이다

우리가 불과 물을 통과하였더니

주께서 우리를 끌어내사 풍부한 곳에 들이셨나이다

(시 66:10).

 

아, 이 말씀이 서러움의 한 대목 같으나 이로써 주를 더욱 바라게 하시려는 은총이었으니.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후 4:17-18).” 어느 인생이 스스로 만족할 수 있을까? “그러므로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를 위한 나의 여러 환난에 대하여 낙심하지 말라 이는 너희의 영광이니라(엡 3:13).” 말씀이 입증하는 바, 환난도 주의 것이다. 우리에게 두시는 고난도 그 목적이 있었다. 욕하고 저주하라 하신 시므이의 등장도 그때를 위함이었다. 이를 다윗은 알았고 저를 스스로 보복하지 않았다. 모든 것을 주께 돌린다는 것,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히 12:11).” 반드시 오늘의 이런저런 나의 어려움이, 우리의 고단함이 평강의 열매를 맺을 것에 대하여,

 

내가 번제물을 가지고 주의 집에 들어가서

나의 서원을 주께 갚으리니

이는 내 입술이 낸 것이요 내 환난 때에

내 입이 말한 것이니이다

내가 숫양의 향기와 함께 살진 것으로

주께 번제를 드리며 수소와 염소를 드리리이다 (셀라)

(시 66:13-15).

 

어려울 때 주를 바라는 신앙이 진짜였다. 더는 주를 의지할 수 없는 시련의 때에 ‘나의 서원을 갚으리이다’ 하는 시인의 다짐은 공연한 목표가 아니다. 그리하게 하시는 이가 또한 하나님이심을, “사람이 여호와께 서원하였거나 결심하고 서약하였으면 깨뜨리지 말고 그가 입으로 말한 대로 다 이행할 것이니라(민 30:2).” 그러므로 사람을 보지 않고, 여기에는 가족도 포함이 된다. 때론 가까운 가족이 먼 이웃보다 못할 때도 있다. 예수님은 때가 되었을 때에 가족이 원수일 수 있다고 경고하셨다.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마 10:36).” 이는 참으로 끔찍한 일이고 성경적으로도 위배되며 주의 사랑으로도 감당하기 어려운 일인 것은 틀림없으나 엄밀하게 가족도 사람이라. 여기서부터 저기까지다. 그 나라에서는 우리가 모두 주를 바람이었으니, 너무 애쓸 거 없다.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께 서원하거든 갚기를 더디하지 말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반드시 그것을 네게 요구하시리니 더디면 그것이 네게 죄가 될 것이라(신 23:21).” 부디 하나님과 나 사이의 일이었다. 아니면 죄가 그 길을 막아버린다.

 

내가 나의 마음에 죄악을 품었더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

그러나 하나님이 실로 들으셨음이여

내 기도 소리에 귀를 기울이셨도다

(시 66:18-19).

 

내가 이처럼 설교원고를 중심으로 말씀을 두고 마음을 다스리고 현실을 딛고 설 수 있는 것으로 복이겠다. 나로 목사가 되게 하신 가장 큰 은혜는 말씀을 가지고 주의 성소에서 주를 바라봄이다. 추석을 보내면서 왜 이런저런 서러움과 우울함이 나를 흔들지 않았겠나? 남들이 보기엔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고, 특히 가족들이란 때로 더 잔인하여서 늘 또 그러려니 하고 여기고 대수롭지 않게 대할 때도 있는 것이어서… 누구에게 무슨 위로를 바랄까. 이를 알고부터 나는 이제 사람으로 기대하지 않는다. 예의니 뭐니 사람 사라는 관계가 그런 게 아니라고 아내는 핀잔하지만, 평소에 연락도 없고 서로 관심도 없다가 새삼 무슨 안부나 전하는 따위에 대해서는… 우리의 죄는 그리 엄청나고 기가 막히고 끔찍하고 어마어마한 게 아니다. 스스로 하려는 데 따른 노력으로 하나님을 등지는 것.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 놓았고 너희 죄가 그의 얼굴을 가리어서 너희에게서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사 59:2).” 이를 위해 하나님도 길이 참으시고 또 기다리신다.

 

때가 다 차면, “그 때에 그들이 여호와께 부르짖을지라도 응답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의 행위가 악했던 만큼 그들 앞에 얼굴을 가리시리라(미 3:4).” 이보다 더 끔찍하고 괴로운 일이 어디 또 있을까?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이 죄인의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의 말은 들으시는 줄을 우리가 아나이다(요 9:31).”

 

그러므로 나는 오늘도 같은 시간에 같은 동선을 따라 ‘병적으로’ 주를 바란다. 나에게는 의원이 필요하다. 나의 의원, 나의 구원자 되시는 하나님의 은총이 아니면 이 하루를 견디고 살 수가 없다. 때론 식구가 원수고 가까운 친구가 벽이다. 믿고 의지하였던 이가 가장 멀고 내가 딛고 서려던 땅이 흔들린다. 이에,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가 내 기도를 물리치지 아니하시고

그의 인자하심을 내게서

거두지도 아니하셨도다

(시 66:20).

 

아니하실 것이 아니라 아니하셨다. 이를 더욱 선명하게 확산하면 할수록 주를 더욱 바람이었으니,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창 6:8).” 아, 이 짧은 은혜의 명제가 내 것이다. 아무리 어떠해도, 그러나. 세상이 어떻다 해도, 그러나. 우리에게 있어 그러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노아가 그와 같이 하여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22).” 그리 행할 수 있는 힘도 주의 것이었다. 그러므로

 

너희 권능 있는 자들아

영광과 능력을

여호와께 돌리고 돌릴지어다

(시 29:1).

 

오늘 시편의 찬송은 명료하였다. 이 모든 게 다 멸하여진다 해도, “여호와께서 홍수 때에 좌정하셨음이여 여호와께서 영원하도록 왕으로 좌정하시도다(10).” 그러니 우리가 무엇을 두려워할까.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힘을 주심이여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평강의 복을 주시리로다(11).”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