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너희들아 강하고 담대하라

전봉석 2021. 9. 24. 05:23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

창 8:22

 

여호와를 바라는 너희들아 강하고 담대하라

시 31:24

 

 

생을 다하는 동안, 반복되는 심음과 거둠은 우리 안에 축적된다. 같은 날을 사는 동안 누구의 것이 누구의 것보다 나은 까닭도 그렇다. 주를 바람인지, 선생을 바람인지. 이 작고 사소한 일이 문제였다.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요 13:13).” 어느 쪽이냐의 문제는 생각보다 복잡해진다. 누구는 선생으로의 예수를 바라고 누구는 주님으로의 예수를 바란다. 물론 우리 예수님은 어느 것에도 개의치 않으신다. 스스로 존경을 요구하는 것보다 비루한 것도 없다. 우리에게 저는 주님이신지, 선생이신지 그 의미를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주라 하고 선생 정도로 여기며 사는 이가 있고 선생이라 하지만 주님으로 믿고 사는 자도 있다. 서로 같은 것 같으나 완전히 다르다.

 

제자들도 처음부터 온전히 주를 알지 못하였다. 그 결과 십자가 이후 저들은 모두 옛 생활로 돌아갔다. 그때에 부활의 주가 저들을 찾아오셨다. 아니었으면 저들에게 ‘그 시절’은 한낱 그 추억 정도로 남았을까? 나에게는 아주 오래 된 ‘글방 카페’가 있다. 아이들 글쓰기를 용이하게 하려고 만든 것인데 족히 20년은 넘은 것 같다. 지금도 사용을 하고 몇몇의 누가 글을 쓴다. 예전처럼 활성화되진 않았지만 여전히 유용하기는 하다. 거기에서 누구, 어느 아이의 글을 우연히 보다 옛날 생각을 하곤 한다. 특히 저 아이들 어릴 적에 찍은 사진을 올려둔 것을 보면 가슴이 뭉클하다. 요즘은 카톡에서 몇몇의 사진을 보게 되는데, 벌써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가정을 이룬 경우는 낯설다. 누구에게 나는 선생이었고 누구에게 나는 이제 목사이다. 보면, 글방 선생으로 대하는 아이의 경우 좋았던 시절을 운운하며 저에게 나는 추억일 뿐이다. 과거의 나에 대한 기억은 현재의 나로 이어지지 못한다. 목사로 나를 마주하려고 하면 안 믿는 저로서는 머쓱하고 어려운가보다. 뭐라 이르면 그 말에 무게에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려 든다.

 

객쩍은 소리지만, 누구는 선생이라 하고 누구는 주라 한다는 말씀에서 나는 그 의미가 전혀 다름을 생각하였다. 수많은 사람이 예수를 따랐다. 저들은 각각 나름의 볼 일이 있었다. 어쩌면 나라와 민족을 위해, 가난과 모진 압제로부터의 해방을 꿈꾸는 이들도 있었다. 누구는 이적과 표적에 매료되어 흥미와 재미로 따랐다. 또는 당장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병든 몸으로, 상처 입은 마음으로 예수 앞에 모여든 사람들도 있었다. 그야말로 천차만별이었다. 그 차이는 엄연하여서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놀랍게 여겨 예수를 떠나가니라(마 22:22).” 그렇게 서서히 떠나는 이들이 많았다. 한때는 왕으로 삼으려 하다, 한때는 낭떠러지로 밀어 죽이려 하다, 한때는 십자가에 못 박는 자리에서 저를 조롱하며 저주하기도 하였다. 이내 모두가 떠났으나 남을 사람은 남았고, 돌이켜 주를 따르게 할 사람은 다시 찾으셨다.

 

나에게 저는 선생이신가, 주님인가? 나는 오늘 말씀에서도 새삼 이와 같은 질문에 부딪치게 된다.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창 8:22).” 모두에게 더해지는 그 날이 그 날인 것 같으나 누구는 심고 누구는 거둔다. 누구는 춥고 누구는 덥다. 누구에게는 여름이고 누구에게는 겨울이며, 낮이고 밤이다. 이와 같은 개개의 날은 섣불리 단정 지을 수는 없으나 엄연한 사실 하나는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요 14:10).”

 

소소한 날들, 그러려니 하고 놓아두고 사는 시간들이 어느 훗날에 아우성칠 것이다. 여름이 지나 가을이 깊어지면서 새벽에 앉아 이제 창을 열어두고 있기가 어렵다. 이른 아침에 집을 나서서 교회로 갈 때는 쌀쌀하고 춥다가도 한낮에는 더워서 웃옷을 벗으면서도, 그저 그러려니… 계절의 변화 앞에서 아무 것도 느끼는 게 없다면! 중국의 어느 학자가 식탁머리에서 아내의 핀잔을 들었다. 자식이 자라는데 어찌 학자로서 가르치려 하는 게 없냐는 것이었다. 학자는 말없이 수저를 놓으며 ‘내가 사는 것을 보고도 배우는 게 없다면 더 무엇을 가르치겠나?’ 하고 가만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느 고사에 나온 글로 가끔씩 되새기는 내용이다.

 

예수님으로서는 저들이 선생으로든 주님으로든 어찌 부르든지 개의치 않으셨다.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요 13:13).” 그러나 그 의미는 전혀 다른 의미여서, 하긴 요즘 선생조차 퇴색되고 직접적인 어떤 기능인의 하나로 전락한 사제지간의 관계가 구슬프기도 하지만. 예수님이 후에 하신 말씀이 새롭다.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것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겠음이라(14:19).” 그 차이는 엄연하여서 선생으로의 저와 주로서의 저는 전혀 다른 존재이다. 저는 나에게 주이신가, 선생이신가?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으셨느니라(히 5:8-10).” 나의 주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그럼에도 저 또한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우셨고, 고난으로 온전하게 되셨다. 이는 모두 우리의 고난을 위함이셨다. 그렇다면 오늘의 나에게 고난이란 어떤 의미인가?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가? 때론 나의 어려움이나 고난이 그저 괴로운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은 아닐까? 늘 그렇듯 대수롭지 않은, 타성에 젖은, 그러려니 하는 신세한탄 따위로 전락하는 것은 아닐까? 그럴 때면 곁에 두시는 이의 어려움에서라도 고난의 의미를 배우게 하려 하심인데. 이로써 ‘순종하는 자에게 구원의 근원이 되시는 것’이 주님이 받으신 고난의 목적이었다. 그렇다면 나에게도 선생으로서가 아니라 주로서 저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 필요하겠다. 과연 저가 나의 주이신가? 선생이신가? 그래서 이 문제는 가벼운 게 아니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 이를 선생으로서는 어림도 없겠다. 아주 오랜만에 누가 안부를 묻고 찾아오기도 하는데, 대부분은 글방 선생으로서의 나를 기억하고서이다. 예전에 좋았던 기억을 더듬으며 추억하다 더러는 실망하고 돌아간다. 예전에 자신들이 알던 내가 아닌 것이다. 선생으로 내가 주를 안다면 저의 길 위에서 나에게 바라시는 게 부당하기도 하다. 가르치려 드는 부분이 도를 넘기도 한다. 지나치게 여겨질 때도 있다. 주로 여길 수 없을 때, 선생으로의 예수는 거기까지다. 내가 누구에게 글방 선생으로가 아니라 목사로 다가갈 때 저들이 의아해하고 부담감을 느끼는 것을 연상한다. 솔직히 그럴 때 나는 상처 받는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아무렇지도 않게 스스로를 선생으로든 주로든 저들의 여김을 모두 옳게 보셨다.

 

바울도 같은 의미를 두고 묵상하였을까? 어느 날 설교 가운데 전하였다. “우리는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고후 4:5).” 저는 선생도 주도 아닌 자신을 종으로 우리에게 내어주신 바 된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주 되심’을 강조하고 있다.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요 13:13).” 이 한 구절의 말씀에서 다른 단서 하나는 서술부의 말씀이다. ‘내가 그러하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물으셨던 것을 되새겨본다.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마 16:15).” 예수님의 관심은 오로지 ‘나’다. 이 말씀을 접하고 그 자리에 멈춰 생각을 가다듬는 ‘나’다. 그런 우리에게 물으시는 것이다. “그때에…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그러자 누구는 “세례 요한이라 하고 더러는 엘리야, 더러는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이것이 천차만별이다.

 

같은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저마다 믿는 그 대상이 서로 다른 것이다. 하면 “또 물으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예수님의 본래 관심은 이것이었다. 그때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 그런데 그와 같은 대답에 다하여, “이에 자기의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경고하시고” 주의를 더하시는 주님을 본다(막 8:27-30). 어째서 우리의 앎에 대하여 경고하시고 주의를 당부하시는 것일까? 다른 시각으로 마태의 진술을 보면,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하고 베드로의 대답을 구체화했다. 그러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하고 말씀하셨다(마 16-17).

 

곧 우리의 앎은 모두의 것으로가 아니다. 모두의 것으로는 선생으로밖에 알 길이 없다. 그러나 하늘에 계신 아버지로부터의 앎, 우리가 아는 것은 ‘나의 주’로서 <저는 그리스도이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이를 간직하고 잘 간수해야 하는 것이 진리다. 남들은 이해할 수 없고 이해시킬 수도 없다. 저들이 모르는 것은 당연하고 그리하여 헛되이 봉하는 것도 당연하다. 돌을 굴려 무덤을 막으면 될 줄 알았다. 곧 우리의 앎을 허투루 삼다가는,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딤후 4:10).” 즉 모두를 따르기 십상이다. 예수를 주로 믿는 것을 선생으로 믿는 수준에서 이 땅의 삶이 원활하고 좀 나아지는 것으로 족해한다면, 그렇게 우리도 데마와 같이 어디론가 간다. 저마다의 옳은 길을 택하여서 간다. 더는 뭐라 할 수 없는 지점이다. 의외로 곁을 가까이 하던 이가 갈피를 잡지 못하는가 싶더니 믿는 자나 안 믿는 자나 다를 바 없이 사는 것을 보면, 저에게 아무리 호소해도 소용이 없다.

 

그래서 예수님은 일러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리라(요 16:12).” 하여 감당하지 못하는 것에 대하여는 주 앞에 그대로 놓아두는 것이 현명하다. 바울도 그러하였다.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고전 12:3).” 누구에 대해, 나는 종종 몹시 서운해 하고 아쉬워하다가도 마음을 접는 것은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경계하기 때문이다.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우리는 저마다 믿음의 분량대로 사는 것이다. 어쩌겠나? 무슨 일을 같이 겪으면서 누구는 이 길로 누구는 저 길로 가는 것을 보면, 은연중에 우리 몸에 밴 몹쓸 습관이란 생각을 한다. 곧 ‘남 탓’을 직면하게 되는 것이다. 모두가 그렇다. 저마다 그럴 수밖에 없는 '탓'이 있다.

 

탓은 책임전가다. 벌어진 일에 대해 누구 때문에, 무슨 일로, 어쩔 수 없었다는 것인데, 본래 죄로 인해 가장 오래 된 우리의 습관이다. “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창 3:12).” 내 뼈 중에 뼈요, 살 중의 살이라 고백하였던 아내를 탓한다. 이 탓은 참으로 고약하게 변이되어 오늘에도 여전한데, ‘만일 ~하였더라면’ 하는 식으로 전가를 합리화한다.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요 11:21).” 벌어진 일을 두고 예수께 탓을 한다. 마르다만 그런가? “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가서 뵈옵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이르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더라(32).” 그런 걸 보면 우리가 누구 탓을 하는 것은 마치 한 몸이 된 것처럼 자연스럽다. 그러자 예수님도 저들의 용법을 그대로 사용하여,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시니(40).” 곧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우리가 무엇을 탓할 때 ‘~하였더라면’ 하는 몹쓸 전가를 역으로 예수님은 바꾸어서 ‘네가 믿으면’ 하고 판을 뒤집으신다. 실제로는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게 아니라 구원을 받음으로 믿은 것이다.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말씀을 따랐던 게 아니라 말씀을 따라 순종하였음으로 그것으로 믿음으로, 의로 여겨주신 것이다. 물론 우리는 믿음으로 주를 구주로 영접한다. 한데 이 의미는 나의 의지로가 아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서도 자신들의 의지로 예수를 선택하고 따랐던 자들이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뿔뿔이 흩어져 옛 생활로 돌아간 것을 본다. 곧 우리의 믿음은 주신 이의 것이지 나의 것이 아니다.

 

어쩌면 우리가 생을 다하는 날 동안 이를 반복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에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창 8:22).” 기어이 홍수로 모든 인류는 수장되었고 노아의 가족만 이 땅에 남았다. 우리의 믿음은 얼마나 무모한가? 때론 어처구니없는 결과 앞에 망연자실 하곤 하는지. 나름 열심을 다해 잘한다고 한 건데, 그럴 때 우리를 붙들고 놓아주지 않는 것이 ‘탓’이다. 이게 다 누구 때문이다. 무엇 때문이다. 전적인 내 잘못은 아니다. 하나님 탓이다. ‘주님이 조금만 더 관심이 있으셨더라면’ 하는 소리다. 어느 날 마르다는 주님께 항변하였다.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 예수께 나아가 이르되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시나이까 그를 명하사 나를 도와 주라 하소서(눅 10:40).” 그 말 아닌가? 주님이 그럴 게 아니라 마리아를 좀 나무라야 하지 않겠나? 자신을 좀 알아주셔야 하지 않겠나? 우리 안의 ‘탓’은 정신과적으로도 모든 부정한 감정의 영향을 미친다.

 

이에 오늘의 시편은 간단명료하다. “여호와를 바라는 너희들아 강하고 담대하라(시 31:24).” 쓸데없이 탓할 거 없단 소리로 들린다. 아니면 아닌 거고 기면 긴 거고, 누구 탓할 게 없다. 오직 우리는,

 

여호와여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나를 영원히 부끄럽게 하지 마시고

주의 공의로 나를 건지소서

(1).

 

주께 내어놓을 뿐인데, “내게 귀를 기울여 속히 건지시고 내게 견고한 바위와 구원하는 산성이 되소서(2).” 그러하실 것을 알기 때문이다. 가만히 계실 리 없다.

 

주는 나의 반석과 산성이시니

그러므로 주의 이름을 생각하셔서

나를 인도하시고 지도하소서

(3).

 

하루하루가 마치 늘 같은 날로 반복되는 것 같은데, 어느새 또 가을이 깊어가고 옷차림이 달라지듯 한해살이처럼 겨울을 준비하게 한다. 그러할 때 우리는 우리의 미진함을 어찌 감당할까? 다하지 못한 일에 대하여는 누구에게 하소연할까? 누구 탓을 한들? 저 또한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인데… 그러니 저 또한 안 되는 것을 두고 탓하고 욕하고 원망을 일삼은들? 누구의 사정을 듣다 저와 같이 하는 이의 무정함을 탓하고, 무책임함을 탓하고, 무감각함을 탓하다가도 저 또한 그럴 것을 생각한다. 저도 어쩔 수 없는 자신 탓이다. 그게 어릴 적 부모 탓이든, 비루한 형편과 사정 탓이든. 서로가 서로를 탓하다 어느새 인생의 가을이 오고 겨울에 이르러서도 탓, 탓, 기어이 모든 탓의 주체는 하나님이 된다. 그러게 왜 이놈의 세상을 만드셔서, 하는 탓을 하다 죽는다.

 

그들이 나를 위하여

비밀히 친 그물에서 빼내소서

주는 나의 산성이시니이다

(4).

 

달리 누구를 의지할 것인지. 나에게 저는 선생이신지 주님이신지, 이제는 바로 할 때이다. 하여,

 

내가 나의 영을 주의 손에 부탁하나이다

진리의 하나님 여호와여 나를 속량하셨나이다

(5).

 

고로,

 

너희 모든 성도들아

여호와를 사랑하라

여호와께서 진실한 자를 보호하시고

교만하게 행하는 자에게

엄중히 갚으시느니라

(23),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