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다 준행하였더라

전봉석 2021. 9. 23. 05:46

 

노아가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

창 7:5

 

주의 성도들아 여호와를 찬송하며 그의 거룩함을 기억하며 감사하라

시 30:4

 

 

내 안에서 우선하는 것에 대하여,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요 3:30).” 하는 것이 기준이 된다. 어떤 일을 두고 여러 갈래의 해석이 나올 수 있다. 내가 그렇지 뭐, 하는 마음이 드는 것과 네 탓이야, 하는 것과 그저 무덤덤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있는데 어느 것도 그리 바람직한 것 같지는 않다. 오늘 여기, 지금 이 일이 ‘그분을 위해’ 있고, 일어나는 것임을 훈련해야 한다. ‘범사에 그를 인정한다는 것.’ 오직 주께서 공급해주시는 기쁨으로만 가능하였다. 이를 누구보다 세례 요한은 바로 알고 있었다.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29).”

 

어느새 짙어진 가을 앞에 섰다. 불현듯 여기에 있다. 나는 어떻게 기록이 될까? 오늘 말씀은 이런 질문을 하게 한다. “노아가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창 7:5).” 어느 훗날 이와 같은 기록으로 남을 수 있을까? 돌아보면 여러 우여곡절과 말로 다 할 수 없는 사연과 별의 별 일을 겪으며 살았던 것 같으나, 다시 여름이 가고 가을이 왔다. 가까운 훗날 주 앞에 나는 어떠하였는가, 한 문장으로 정리된다면 어떤 문장일까? 오늘 시편은 이를 묵상하며 무엇으로 채워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한다.

 

주의 성도들아 여호와를 찬송하며

그의 거룩함을 기억하며 감사하라

(시 30:4).

 

우리 인생에서 주를 찬송하는 일에 대하여, 어제는 설교원고 초고를 작성하며 알았다. “온 땅이여 하나님께 즐거운 소리를 낼지어다(시 66:1).” 이것으로 이 땅에서의 사명이 무엇이고 존재의 이유가 어떠한가를 알겠다. 살았다 함은 숨이 붙어 있다는 것이다. 곧 호흡이 끊기면 더는 생명이 떠난다. 이를 성경에서는 누누이 강조하였다.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

할렐루야

(시 150:6).

 

그러나 어떤가? 그저 기분에 따라, 환경과 여건에 의해, 우리는 날마다 변덕스럽고 오락가락하며 뒤범벅이 되어 살아간다. 즐거웠다가 금세 신세한탄이 이어진다. 그때에 성경은 길을 제시한다.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너희여

그를 찬송할지어다

그를 경외할지어다

(22:23).

 

어쩌면 노아가 이 모든 일을 준행할 수 있었던 가장 확실한 근거는 저의 안에 주를 경외함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주를 경외한다는 것은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는 말씀을 준행하는 일이다. 그럼 성경은 뭐라 하시는가?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이는 마치 공식과 같고 정해진 길과 같다(잠 3:6).

 

이를 바울의 음성으로 다시 들어보면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골 3:16-17).” 이것이 성도로 사는 기본이고 믿음으로 사는 사람의 정하신 바 그 길을 의미하는 게 아닐까?

 

곧 우리가 영적인 호흡이 있어 그 영혼이 살았다고 한다면,

 

① 말씀이 우리 속에 풍성히 있다는 것이고

② 모든 지혜(생각의 중심)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는 일이다.

③ 그런 자는 늘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른다.

 

그럴 수 있는 것은,

 

④ 감사하는 마음으로다.

우리의 크고 작은 감사의 나열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다.

⑤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한다.

 

곧 허투루 사람을 만나고, 아무 일이나 돈 되는 것이면 그 일을 구상하고, 어디 직장을 구하거나 일을 찾을 때도 오직 우리는 주 예수 이름으로 한다. 사랑을 하고, 결혼을 하고, 돈을 벌고, 하루를 살 때도 이를 기반으로 한다. 이는,

 

⑥ 그를 힘입어,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는 사람들이다.

(골 3:16-17).

 

이와 같이 모든 말씀과 말씀이 연결되고 연관이 있다는 데 나는 늘 새롭다. 설교원고를 작성할 때, 이처럼 묵상글을 쓰면서, 또는 누구 일을 듣고 저의 삶을 헤아려볼 때 시편 66편 2절을 상기하게 된다.

 

그의 이름의 영광을 찬양하고

영화롭게 찬송할지어다

(시 66:2).

 

이것이 결코 아무나의 것이 아닌 것을 나이가 들수록, 주를 알면 알수록, 주를 더욱 사랑하면 할수록 뚜렷해지는 것 같다. 남 얘기 할 것 없다. 환경으로 이러니 저러니 투덜거릴 것도 없다. 요즘은 자주 드는 생각이 나 하나 바로 서는 게 급선무라. 특히 사탄의 공격은 교회로 집중되고 주의 사역을 감당하고 있는 자로부터, 주를 더욱 믿고 의뢰하고자 하는 자에게로 향한다. 선제적 공격이 가해지고 있는 느낌이다. 기껏 잘 믿고 열심히 섬기던 이가 유야무야 사는 데 그저 급급할 따름이어서, 저가 주의 사역을 맡은 자인지 어떤 자인지, 구분이 안 간다. 교회는 그 사명을 잃고 돈벌이에 혈안이 되거나 교회 사업에 주력하면서 왜들 이땅에 주의 나라를 건설하려는 것처럼 그리도 확장일로로 향하는지 모르겠다.

 

우리의 최종적인 목표는, 예레미야도 강조하는 바,

 

여호와께 노래하라

너희는 여호와를 찬양하라

가난한 자의 생명을

행악자의 손에서 구원하셨음이니라

(렘 20:13).

 

곧 오늘 내가 여기 있는 것은 주로 인함이다. 주가 이루신 일이다. 이에 대한 확신이 분명하지 못하면 삽시간에 모든 것이 뒤섞여버린다. 그러다 홀연히 데려가심을 당하기도 하고 느닷없는 일에 더는 속수무책 더는 빼도 박도 못할 지경에 봉착하기도 한다. 그 일이 있기 전에, 홍수가 나고 땅이 터져 모든 물이 사방을 뒤덮기 전에 주께서 우리에게 행하신 일을 상기해야 한다.

 

평일과 다름없는 동선으로 움직이다보면 아주 작은 움직임에도 일탈을 느끼며 새롭다. 어제는 점심을 먹고 모처럼(?) 산책을 했다. 코로나 이후 나야말로 어디 백화점이나 영화관 같은 데에 발길을 끊은 듯하다. 고작 길 건너 저 편에 있는 곳까지 아내와 딸과 같이 걷다가 돌아온 게 다이지만, 오늘의 이런저런 일은 곧 끝난다. 이를 오늘 시편에서는,

 

그의 노염은 잠깐이요

그의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깃들일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

(30:5).

 

이와 같은 소망이 우리에게 없다면 우리는 그야말로 무엇으로 살 것인가? 하여,

 

내가 형통할 때에 말하기를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하리라 하였도다

(6).

 

우리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지. 나는 일차적으로 원고를 작성하면서 놀라웠다. 곧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구원사역에는 결코 실패가 없으시다.

 

하나님이 바다를 변하여

육지가 되게 하셨으므로

무리가 걸어서 강을 건너고

우리가 거기서 주로 말미암아

기뻐하였도다

(66:6).

 

오늘 여기서 나는 종종 이와 같은 말씀에 공감한다. 내가 여기에서 기뻐한다니! 누가 알기나 할까? 나는 죽어도 목사가 안 될 거라고 다짐하며 살았다. 나이 들면서 나름의 낭만과 자유를 꿈꿀 때 실은 남들의 영혼에 대해 관심도 없었다. 그런 나를 왜 버려두지 않으셨을까? 이는 이스라엘의 출애굽 여정을 보면 확실해진다. 나로 세상으로부터의 구원을 이루신 것이다. 더는 애굽으로 돌아갈 수 없다. 속하지 못하게 하신다. 저들로 업신여김을 받지 않게 하시고 함께 멸망하게 두지 않으신다.

 

너희보다 먼저 가시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애굽에서 너희를 위하여

너희 목전에서

모든 일을 행하신 것 같이

 

하는 모세의 고백이 결코 모세만의 신앙고백으로 한정되지 않는다. 이어서 저는 말하길,

 

이제도 너희를 위하여

싸우실 것이며

광야에서도 너희가 당하였거니와

사람이 자기의 아들을 안는 것 같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걸어온 길에서

너희를 안으사

이 곳까지 이르게 하셨느니라.

(신 1:30-31).

 

누가 내게 물으면 나는 수천 가지의 예를 들어서 이와 같은 나의 경험을 자랑할 수 있다. 놀라운 사실 하나, 모세 이전에는 그 누구도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른 이가 없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그 숱한 경험 때마다 주의 도우심을 바라고 구하였던 야곱도, 요셉도 저들에게 하나님은 엄위하신 여호와 하나님이셨다. 한데 모세의 하나님은 친밀하고 의지할 이로, 그의 하나님은 아버지셨다.

 

같이 믿는 사람으로 살면서도 누구에게 하나님은 저마다 다른 것을 본다. 늘 손님처럼 친절하고 남들처럼 어색한 사람도 있다. 좋은 분이지만 친밀할 수 없고, 멀찍이서 돕고 따르는 관계의 사이도 있다. 한데.

 

그가 그의 능력으로

영원히 다스리시며

그의 눈으로 나라들을 살피시나니

거역하는 자들은

교만하지 말지어다 (셀라)

(시 66:7).

 

시편은 주를 알면 알수록 우리가 취할 바가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려준다. 우리 주 하나님이 그의 능력으로 다스리심을 몸소 깨닫지 못하고 사는 그리스도인보다 불쌍한 사람이 또 있을까? 주의 사역을 감당하면서 그저 엄하고 어렵고 궁색하기만 한 상대로 껄끄러운 사이는 아닐까? 그런 우리에게 성경은 일러,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공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말 4:2).

 

이러한 말씀 앞에 저절로 웃음 지을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런 우리에게 “만민들아 우리 하나님을 송축하며 그의 찬양 소리를 들리게 할지어다 그는 우리 영혼을 살려 두시고 우리의 실족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는 주시로다(시 66:8-9).” 하고 단언하는 말씀을 눈여겨보다 오늘 시편을 다시 되새겨보면,

 

여호와여 내가 주를 높일 것은

주께서 나를 끌어내사

내 원수로 하여금 나로 말미암아

기뻐하지 못하게 하심이니이다

(시 30:1).

 

그렇지. 우리 생의 남다른 비결을 알겠다. 먼저는 주와의 은밀한 소통이다.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부르짖으매 나를 고치셨나이다(2).” 남들은 모두 우왕좌왕 할 때,

 

여호와여 주께서 내 영혼을

스올에서 끌어내어 나를 살리사

무덤으로 내려가지

아니하게 하셨나이다

(3).

 

이와 같은 확신이 없이 무슨 성도로 산담? 사는 게 지옥인 성도는 없다. 만일 그렇다면 저는 양다리다. 한 쪽은 세상에 한쪽은 교회에 담근 발로 가랑이가 찢어질 지경이다. 이에 오늘 본문은 간단하였다.

 

주의 성도들아

여호와를 찬송하며

그의 거룩함을 기억하며

감사하라

(4).

 

나는 이와 같은 간단한 명제 앞에 생각이 많아진다. 반드시 “그의 노염은 잠깐이요 그의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깃들일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5).” 인생에 어느 누군들 홀가분한 삶이 있겠나? 다들 얽히고설켜 뒤죽박죽인 게 자신의 마음도 다르지 않으니,

 

내가 형통할 때에 말하기를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하리라 하였도다

(6).

 

아직 기회다. “여호와여 주의 은혜로 나를 산 같이 굳게 세우셨더니 주의 얼굴을 가리시매 내가 근심하였나이다(7).” 이를 예미하게 느끼며 사는 삶이 복으로,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고

여호와께 간구하기를

내가 무덤에 내려갈 때에

나의 피가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진토가 어떻게 주를 찬송하며

주의 진리를 선포하리이까

(8-9).

 

마치 주를 설득하듯 자신을 그 앞에 세운다. 그리고

 

여호와여 들으시고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여호와여 나를 돕는 자가 되소서

하였나이다

(10).

 

이 놀라운 특권으로 오늘 하루도 새로이 맞이한다. 내 곁에 두시는 이의 어쩔 수 없음을 불쌍히 여기며 주께 아룀으로 “주께서 나의 슬픔이 변하여 내게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11).” 하는 이와 같은 나의 고백이 저의 것이 되게 하시기를. 하면,

 

이는 잠잠하지 아니하고

내 영광으로 주를 찬송하게 하심이니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영원히 감사하리이다

(12),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