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926 주일
시편 66편
너희들아 다 와서 들으라
시 66:16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너희들아 다 와서 들으라 하나님이 나의 영혼을 위하여 행하신 일을 내가 선포하리로다
시 66:17 내가 나의 입으로 그에게 부르짖으며 나의 혀로 높이 찬송하였도다
시 66:18 내가 나의 마음에 죄악을 품었더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
시 66:19 그러나 하나님이 실로 들으셨음이여 내 기도 소리에 귀를 기울이셨도다
시 66:20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가 내 기도를 물리치지 아니하시고 그의 인자하심을 내게서 거두지도 아니하셨도다
들어가는 말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 살았던 므두셀라의 생애도 고작 몇 줄의 정리면 끝난다. “백팔십칠 세에 라멕을 낳았고, 라멕을 낳은 후 칠백팔십이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는 구백육십구 세를 살고 죽었더라(창 5:25-27).” 이렇게 너무 간단한 이력 앞에서 우리는 생의 허무함을 느껴야 한다. 기를 쓰고 산다고 살아서 후대에 이름을 남긴들? 저의 이름의 뜻은 하나님의 심판이었다.
본문이해
오늘 시편은 작가 미상이다. 8절에서 12절을 통해, 이사야 43장을 배경으로 연상하면, “내가 알려 주었으며 구원하였으며 보였고 너희 중에 다른 신이 없었나니 그러므로 너희는 나의 증인이요 나는 하나님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12).” 하는 구절이 2-3절 말씀의 성취인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요 네 구원자임이라 내가 애굽을 너의 속량물로, 구스와 스바를 너를 대신하여 주었노라(2-3).” 그렇게 연관지어 이사야가 활동하던 유다는 앗수르의 침공을 받아 괴로움을 겪던 시기로 히스기야의 시가 아닐까 추종해볼 뿐이다.
오늘 시편은 ‘하나님에 대한 열정과 찬송을 촉구하고 있다.’ 특히 말세의 때를 느끼면 느낄수록 감사와 찬송을 잃으면 금세 사탄은 그 틈새를 비집고 들어와 우리 영혼을 공격할 것을. 이때에 우리가 믿음으로 무장할 수 있는 것은 찬송뿐임을. 우선 오늘 본문을 간단하게 분해하면, 1연은 1-4절로 이 땅의 원수, 우리를 괴롭히는 것들을 하나님은 반드시 복종하게 하실 것임을 찬송한다. 2연으로는 5-7절로 지난시절 즉 애굽에서의 날들을 떠올리며 구원의 영광이 어떠한가를 회상한다. 3연은 8-12절, 그렇게 우리의 구원을 회복시키신 것에 대한 성도 개개인의 간증을 곧 찬양인 것을 알게 한다. 마지막 4연은 13-20절, 각 개인의 구속사적 체험과 간증을 노래한다. 여기서 2연과 3연을 묶어 본론으로 보고, 결국 구원은 개인의 일이고 그 체험은 각자의 것임을 상기할 수 있다.
1. (1연, 1-4절) 찬송은 믿는 자의 호흡이다.
“온 땅이여 하나님께 즐거운 소리를 낼지어다(1).”
우리가 살았다, 하는 것은 숨이 붙어있다는 것이다. 호흡이 끊기면 더는 생명이 떠난 것이다. 성경에서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 할렐루야(시 150:6).” 하는 말씀으로도 알 수 있듯이 믿는 자의 생명을 찬송으로 가늠할 수 있다. 한데 조금 의아한 단서가 붙는다.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너희여 그를 찬송할지어다… 그를 경외할지어다(22:23).” 여기서 두려움은 경탄의 의미다. 산 정상에 올랐을 때 저절로 나오는 탄성은 자연 앞에 자신이 얼마나 작은 존재인가를 알려준다. 그래서 지혜자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고 하는 것이다. ‘화무십일홍이고 권불십년’이라 했다. 꽃이 붉은들 십일을 못 가고, 권력을 쥔들 십년을 못 간다는 소리다. 할 때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하는 것에서 지혜자의 기본 자세는 주를 인정하는 것이었다(잠 3:6). 우리가 주를 인정한다는 것은 주를 찬송함이다. 이에 성도의 기본적인 삶의 모습은,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골 3:16-17).”
① 말씀이 우리 속에 풍성히 있다.
②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한다.
③ 늘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른다.
④ 감사하는 마음을 잃지 않는다.
⑤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한다.
⑥ 주 예수 그리스도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한다.
오늘 시편 2절에서도, “그의 이름의 영광을 찬양하고 영화롭게 찬송할지어다(시 66:2).” 이것이 우리의 목표이고 날마다 연마하는 훈련이며 어느 훗날 천국에서의 삶이다. “여호와께 노래하라 너희는 여호와를 찬양하라 가난한 자의 생명을 행악자의 손에서 구원하셨음이니라(렘 20:13).” 이것이 성경의 핵심이다.
2. (2, 3연 5-17절) 하나님의 구원사역에는 실패가 없다.
“하나님이 바다를 변하여 육지가 되게 하셨으므로 무리가 걸어서 강을 건너고 우리가 거기서 주로 말미암아 기뻐하였도다(66:6).”
이스라엘의 출애굽은 우리가 안 믿는 세상에서 돌이켜 주의 백성이 되는 구원을 함축한다. 그래서 우리는 더 이상 애굽에 속하지 않은 자들이다. 이를 같이 경험하고도 누구는 눈에 보이는 금송아지를 요구한다. 애굽에서 어찌 출애굽할 수 있었나? 이어서 바로가 잡으러 올 때 앞은 홍해로 가로막히고 양쪽은 커다란 산이 가로놓인 외통수였다. 즉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에 홍해를 육지로 변하게 하시고 걸어서 저들로 건너게 하셨다.
돌아보면 여기까지 어찌 살았나? 모든 게 은혜로써가 아니었나? 하지만 여전히 ‘탓’을 하며 ‘~하였더라면’ 하고 가정하며 투덜거리며 걷는 신자들도 허다하다. 하지만 모세에게 그 하나님은 어떤 분이셨는가? 출애굽 후 1년쯤 지나 저의 고백은 아름답기까지 하다. “너희보다 먼저 가시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애굽에서 너희를 위하여 너희 목전에서 모든 일을 행하신 것 같이” 오늘 우리도 그와 같은가? “이제도 너희를 위하여 싸우실 것이며” 하고 오늘에 당면한 모든 문제를 주께 돌린다. 그러면서 “사람이 자기의 아들을 안는 것 같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걸어온 길에서 너희를 안으사 이 곳까지 이르게 하셨느니라.” 하는 것이 모세의 고백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신앙고백이어야 한다(신 1:30-31). 모세가 누군가? 나름 잘나가던, 장래가 보장된 애굽의 2인자가 아니었던가? 그런 저를 고꾸라뜨려 주의 백성을 인도하게 하시기까지, 저의 미디안 광야 40년은 잔인하고 우울하였다. 그러나 저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부르지 못한 그 여호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른 자이다. 똑같이 믿음으로 산다고 하지만 누구는 금송아지 타령이나 하며 울며 겨자 먹기로 뒤따르는 이가 있고, 누구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자신의 아버지로 모시고 감사와 찬송으로 산다.
이에 오늘 시인은 우리에게 간곡히 외친다. “그가 그의 능력으로 영원히 다스리시며 그의 눈으로 나라들을 살피시나니 거역하는 자들은 교만하지 말지어다 (셀라)(시 66:7).” 거역하고 교만해봐야 그 인생만 고달프다. 성경은 오히려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공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말 4:2).” 그러니 참 아이러니하지 않나? 같이 믿는다고 하면서도 누구는 주를 신뢰하고 의지함으로 감사와 찬송이 넘치는데, 누구는 환경과 여건에 따라 일희일비하니! 오늘 시인은, “만민들아 우리 하나님을 송축하며 그의 찬양 소리를 들리게 할지어다 그는 우리 영혼을 살려 두시고 우리의 실족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는 주시로다(시 66:8-9).” 하면서 우리의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확실히 하고 있다. 이에,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를 시험하시되/ 우리를 단련하시기를 은을 단련함 같이 하셨으며/ 우리를 끌어 그물에 걸리게 하시며/ 어려운 짐을 우리 허리에 매어 두셨으며/ 사람들이 우리 머리를 타고 가게 하셨나이다/ 우리가 불과 물을 통과하였더니/ 주께서 우리를 끌어내사 풍부한 곳에 들이셨나이다(시 66:10-12).”
즉 우리의 고난과 역경이 우리로 주의 은혜를 더욱 확신하게 한다. 야고보 사도는 이에 대해, “형제들아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을 고난과 오래 참음의 본으로 삼으라(약 5:10).” 곧 우리보다 앞선 많은 믿음의 사람들도 오늘 우리와 같은 시련과 역경으로 오래 참았다. 바울 사도도 이에 대해,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고전 15:58).” 곧 오늘 우리의 수고가 결코 헛되지 않을 것임을 알게 한다. 일찍이 이를 잘 알고 있었던 시인은,
“내가 번제물을 가지고 주의 집에 들어가서/ 나의 서원을 주께 갚으리니 이는 내 입술이 낸 것이요/ 내 환난 때에 내 입이 말한 것이니이다/ 내가 숫양의 향기와 함께 살진 것으로/ 주께 번제를 드리며 수소와 염소를 드리리이다 (셀라)(시 66:13-15).”
살며 사랑하며 배우는 것 가운데 가장 놀라운 비밀 하나는, 주를 사랑하면 할수록 어려운 일이 많은 것 같으나 우리의 어려움으로 우리는 주의 사랑을 더욱 경험하게 된다. 이에 믿는 자들의 아이러니한 모습 하나는 환난 때에 더욱 넘치는 헌금이 드려진다는 것이다. 생각 같아서는 돈 잘 벌고 성공하면 더 잘 드릴 것 같은데… 사람이 실제 그리 생겨먹지가 않았나보다.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그들의 넘치는 기쁨과 극심한 가난이 그들의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고후 8:2).”
3. (4연, 13-20절) 우리의 간증이 주의 영광이 된다.
“내가 나의 마음에 죄악을 품었더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 그러나 하나님이 실로 들으셨음이여 내 기도 소리에 귀를 기울이셨도다(시 66:18-19).”
내년 초 대선을 앞두고 우리나라 정치가 어지럽다. 사람들의 민심도 동요된다. 뉴스를 보면 모든 의도에는 ‘너는 어느 쪽이냐?’ 하고 묻는 것 같다. 대문호 톨스토이의 질문처럼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과연 우리는 어떤 마음을 품고 사는가? 죄악을 품으면 주께서 듣지 않으신다. 내 안의 죄를 주께 아뢸 때, 나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신다. 죄악이란,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았고 너희 죄가 그의 얼굴을 가리어서 너희에게서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사 59:2).” 하나님과 나의 틈을 벌인다. 사탄은 틈을 노린다.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엡 4:27).” 저의 목표는 오로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갈라놓는 것이다.
“그 때에 그들이 여호와께 부르짖을지라도 응답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의 행위가 악했던 만큼 그들 앞에 얼굴을 가리시리라(미 3:4).” 즉 “하나님이 죄인의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의 말은 들으시는 줄을 우리가 아나이다(요 9:31).” 하면 늘 우리를 돌아보아 날마다 씻는 것처럼 날마다 신앙고백과 간증과 회개가 드려져야 한다. 하나님은 이를 영광으로 받으신다.
나오는 말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가 내 기도를 물리치지 아니하시고 그의 인자하심을 내게서 거두지도 아니하셨도다(시 66:20).”
우리가 아뢰기만 하면 주는 들으신다. 저는 우리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이다. 실은 그 어떤 것도 우리 사이를 갈라놓을 수 없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8-39).” 하면 죄악으로, 스스로 고달픈 인생을 살 뿐이다. 속된 말로 갈 데까지 가야 하는 것이라면 그보다 더 불쌍한 신자가 어디 있겠나?
성경은 간곡하다. “그러므로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를 위한 나의 여러 환난에 대하여 낙심하지 말라 이는 너희의 영광이니라(엡 3:13).” 당장의 어려움이 우리를 어쩔 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가 내 기도를 물리치지 아니하시고/ 그의 인자하심을 내게서 거두지도 아니하셨도다(20).” 그러므로 말씀은 오늘도 우리를 불러 세우신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너희들아 다 와서 들으라(1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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