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010 주일
시편 68편
승리하는 삶을 위하여
들어가는 말
오늘 시편은 다윗의 시로 대적들을 이기고 승리의 개가를 부르는 대표적인 찬송시라 하겠다. 곧 하나님의 권능과 그의 은혜에 대한 감사와 찬송이 가득하다. 다윗은 엄연히 전쟁의 시대를 살았다. 생의 대부분을 원수들에게 쫓기며 광야 생활을 하였다. 다윗에게 원수는 실제적이며 늘 위협적이다. 그저 막연한 악이나 관념적인 원수들이 아니다. 자국에서는 사울과 그의 신하들로부터 오랜 기간 쫓겨 광야로 도피생활을 해야 했고, 후에는 저의 자식들과 그 권세를 좇고 옹호하는 세력들로부터 위협을 받았다. 밖으로는 모압과 암논의 빈번한 공격과 침탈이 있었고 주변 강국인 바벨론과 앗수르의 세력으로부터도 끊임없는 견제와 공격을 받아야 했다.
그런 저가 오늘, 자신을 대신하여 원수들을 상대하시는 하나님의 권능을 찬송한다. 시를 분해하면 모두 다섯 연으로 나누어 1연은 1-6절, 악인과 의인을 다루시며 원수를 진멸하시는 하나님을 하나님을 찬송한다. 2연은 7-18절까지로, 그때가 은택을 베푸시는 하나님이 어떻게 승리로 이끄셨는가, 하는 경험적인 고백이 찬송으로 이어진다. 3연은 19-23절로 날마다 우리의 짐을 져주시는 하나님의 은총으로 승리를 확신하는 찬송이다. 4연은 24-32절로 결국은 하나님의 임재가 성소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며 모든 열방이 하나님을 경배할 것을 예언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5연은 32-35절로 영원부터 영원까지 함께 하시는 우리 하나님이 결국은 모든 전쟁에서 승리로 이끄실 것임을 주의 백성으로서 찬송한다.
1. 우리에게는 의원이 필요하다
“하나님이 일어나시니 원수들은 흩어지며 주를 미워하는 자들은 주 앞에서 도망하리이다(시 68:1).”
다들, 아프다. 온전한 사람이 없다. 이를 두 종류의 사람으로 첫째는 스스로 자신에게 의원이 필요하다고 아는 사람과 둘째로 자신은 아무렇지도 않다고 자부하는 사람이다. 이를 두고 예수님은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막 2:17).” 이 말씀의 구도는 첫째, 주님은 의사로 병든 자를 위해 오셨다는 것. 둘째, 이는 죄의 문제로 주님은 의인이 아닌 죄인을 위해 오셨다는 것. 이를 뒷받침하는 데 있어, 바울은 우리의 상태를 이렇게 진단하고 있다.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 3:10-13).” 곧 이것이 우리의 실체다.
본문으로 넘어오면 시인은 하나님께로부터 도망치는 자들이 있다고 한다. 저들은 원수다. 지난 주일에 우리가 나누었던 말씀으로 비춰 봐도 롯은 의인이나 날마다 저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음으로 그 의로운 심령이 상하였다고 하였다(벧후 2:8). 그것은 ‘무법한 자들’의 ‘음란한 행실’로 날마다 ‘고통당하였기 때문’이다(7). 오늘 우리 믿음의 사람들도 다를 게 없다. 안 믿는 사람들과 저들의 방식으로 살아가면서 알게 모르게 우리의 영혼은 상한다. 그런 우리에게 내려지는 처방은,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하시니라(눅 21:36).”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는 것이다.’ 이어서 오늘 시편을 보면, “연기가 불려 가듯이 그들을 몰아내소서 불 앞에서 밀이 녹음 같이 악인이 하나님 앞에서 망하게 하소서(시 68:2).” 우리로서는 악을 감당하기 어렵다. 하나님이 저들을 녹아내리는 초처럼 망하게 해주셔야 한다. 반드시 “악인들은 멸망하고 여호와의 원수들은 어린 양의 기름 같이 타서 연기가 되어 없어지리로다(37:20).”
그러므로 우리의 결국은 정해져있다. “의인은 기뻐하여 하나님 앞에서 뛰놀며 기뻐하고 즐거워할지어다(시 68:3).” 이는 앞으로 우리가 들어갈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서도 그렇지만 오늘을 살면서 이 비현실적인 악인들의 소동 가운데서 그러하다. 어떻게? “하나님께 노래하며 그의 이름을 찬양하라 하늘을 타고 광야에 행하시던 이를 위하여 대로를 수축하라 그의 이름은 여호와이시니 그의 앞에서 뛰놀지어다(시 68:4).” 간단하다. 첫째,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다. 둘째, 우리 인생, 광야에서 대로를 수축하라. 곧 불가능할 것 같으나 주의 자녀답게 큰 길로 수축하라는 것. 즉 잘못된 것을 바로 고치고 가는 길을 당당히 하라는 것이다. 셋째, 누가 뭐라든지, 결과가 어떠하든지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즐거워하며 기뻐 뛰논다. 그러할 때 하박국 선지자의 찬송 소리가 귓가를 맴도는 것 같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합 3:17-18).”
곧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우리 편이시다. 우리의 후원자시며 우리의 도움이 되신다. “그의 거룩한 처소에 계신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시며 과부의 재판장이시라 하나님이 고독한 자들은 가족과 함께 살게 하시며 갇힌 자들은 이끌어 내사 형통하게 하시느니라 오직 거역하는 자들의 거처는 메마른 땅이로다(시 68:5-6).” 이것이 우리 믿는 자들의 전쟁이다.
2. 우리 삶의 증거를 활용하라
“하나님이여 주의 백성 앞에서 앞서 나가사 광야에서 행진하셨을 때에 (셀라) 땅이 진동하며 하늘이 하나님 앞에서 떨어지며 저 시내 산도 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하나님 앞에서 진동하였나이다(시 68:7-8).”
믿는 자로 살면서 수시로 회상하고 간증하고 고백할 수 있는 신앙적인 산 경험이 없다면 이보다 더 각박한 신앙도 없겠다. 롯과 같이 가난한 영혼으로 주변에 휘둘리는 이유가 있다. 자신만의 확고한 신앙고백이 없으면 흔들리게 되어 있다. 성경은 증거하기를, “네 고아들을 버려도 내가 그들을 살리리라 네 과부들은 나를 의지할 것이니라(렘 49:11).” 그러므로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벧전 1:18-19).” 곧 우리가 조상에게 물려받을 것은 신앙의 소산이다. 은이나 금 같이, 얼마만큼의 부동산과 현금으로가 아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를 물려받았다.
실제 혈육 간에 여태 그런 것이 없다면, 이제라도 자신이 그 가정의 복음의 씨앗이 돼야 한다. 개인적으로 나는 부모님이 전투적으로 믿음을 사수하셔서 오늘에 이처럼 온 형제들이 주의 길을 가는 크나큰 영광과 은총을 누리고 있다. 여하튼 우리 믿는 자로서의 삶은 그 자체로 하나님의 살아계심의 증거가 돼야 하고, 이를 나타내는 데 거침이 없어야 한다. 혈육지간의 일이란 엄밀히 이 땅에서 뿐이다.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모두가 한 형제요, 자매로 우리는 모두 주의 자녀들이다. 그러므로 “너희의 구속자시요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이신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는 네게 유익하도록 가르치고 너를 마땅히 행할 길로 인도하는 네 하나님 여호와라(사 48:17).” 하시는 이와 같은 말씀을 바로 붙들고 살아야 한다. 아니면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안개 속 같은 인생을 살고 있다.
오늘 시편은 주께 고백하며 지난날을 회상한다. “하나님이여 주께서 흡족한 비를 보내사 주의 기업이 곤핍할 때에 주께서 그것을 견고하게 하셨고 주의 회중을 그 가운데에 살게 하셨나이다 하나님이여 주께서 가난한 자를 위하여 주의 은택을 준비하셨나이다(시 68:9-10).” 과연 우리는 개인적으로 이와 같은 고백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가?
나는 이를 교회로 안다. 내가 사는 가정으로 누린다. 하는 것도 없고 능력도 모자라, 누가 보기에는 비루하기 짝이 없고 한심하기 그지없으나 “주의 백성을 구원하시며 주의 산업에 복을 주시고 또 그들의 목자가 되시어 영원토록 그들을 인도하소서(시 28:9).” 이를 아뢰고 이를 이루시는 삶의 현장을 딛고 산다는 일은 매우 귀한 일이다. “이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복 주시며 이르시되 내 백성 애굽이여, 내 손으로 지은 앗수르여, 나의 기업 이스라엘이여, 복이 있을지어다 하실 것임이라(사 19:25).” 이 모든 것이 주의 것임을, 주가 다스리시고 주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것을, 그러므로 “여호와여 어찌하여 우리로 주의 길에서 떠나게 하시며 우리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사 주를 경외하지 않게 하시나이까 원하건대 주의 종들 곧 주의 기업인 지파들을 위하사 돌아오시옵소서(63:17).” 오직 주께 아뢸 뿐이다. 어려웠던 시절인데 돌아보면 모든 게 은혜였다는 고백이 신자의 회상이고, 좋은 시절을 다 보내놓고 뒤돌아보며 인생무상을 외치는 자들이 안 믿는 자들의 추억이다.
비록 하찮고 부족하나(본 시에서는 여자들로 비유가 된다) “주께서 말씀을 주시니 소식을 공포하는 여자들은 큰 무리라.” 이 놀라운 광경을 상상해보라. 오늘도 여전히 여성 차별을 두고 싸워야 하는데 하물며 그 시대에는 숫자로도 치지 않았던 존재들로부터 “여러 군대의 왕들이 도망하고 도망하니 집에 있던 여자들도 탈취물을 나누도다(시 68:11-12).” 이는 비유적으로 우리 믿는 자들의 비루함이 실상은 부유하고 남을 위로하고 더욱 넉넉한 삶으로 행복지수가 높다. 우리 믿는 자들은 저들과 결이 다르다. 아파트 한 채, 얼마의 수입, 보장된 직업이나 당장의 건강 따위로 만족함을 누리는 게 아니다. 개인적으로 자주 음미하는 바울 사도의 아름다운 진술을 들어보다.
“영광과 욕됨으로 그러했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그러했느니라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후 6:8-10).”
3. 날마다 우리의 짐을 지시는 하나님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 곧 우리의 구원이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셀라)(시 68:19).”
앞서도 말한 바, 죄의 결과로 삶은 고달프다.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창 3:19).” 이는 부자고 가난한 자고, 유명한 자고 무명한 자고, 믿는 자고 안 믿는 자고, 모든 인류는 이와 같은 파국을 산다. 다만 서로의 망각과 착각으로 서로를 부러워할 뿐이지, 다 똑같다. “참된 속담에 이르기를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하는 말이 그들에게 응하였도다(벧후 2:22).” 이게 우리 모두의 실상이다. 그러나 우리의 특권이 무언가?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1-2).”
이러한 해방을 만끽하고 사는 그리스도인이 있고 롯과 같이 상한 심령으로 꾸역꾸역 주의 나라 가는 그날까지 끌려다니느라 정신 못 차리는 성도도 있다. 누구는 유람선을 타고 삶을 누리듯 감사를 더하는데, 누구는 쪽배에 몸을 싣고 온갖 세파에 시달리며 고통스러운 항해를 계속한다. 그럼에도 우리 믿는 자들은 모두가 주의 나라, 그 영광된 항구에 정박하게 될 것이다. 이에 우리 주님은 일찍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하고 아무리 말씀하셔도 그리 못하고 자식 일에, 돈 벌이에, 자신이 건강문제로 전전긍긍하며 사는 신앙인도 있으니, “네 짐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가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원히 허락하지 아니하시리로다(시 55:22).” 하시는 말씀이 부디 저의 귀에 들리기를 기도한다.
곧 오늘 시편은, “하나님은 우리에게 구원의 하나님이시라 사망에서 벗어남은 주 여호와로 말미암거니와 그의 원수들의 머리 곧 죄를 짓고 다니는 자의 정수리는 하나님이 쳐서 깨뜨리시리로다(시 68:20-21).” 이 놀라운 현장에서 우리를 부른다. 하지만 우리의 학습된 무기력과 죄의 습성은 롯과 같아서, 다들 그러고 사는 세상방식의 논리와 이상에 우선한다. 그러니 어쩌겠나? 이내 그래야 하겠다면 그러면서 끝내 고단한 생을 다할 수밖에!
4. 은혜의 값은 은혜를 누리는 것이다
“소고 치는 처녀들 중에서 노래 부르는 자들은 앞서고 악기를 연주하는 자들은 뒤따르나이다. 이스라엘의 근원에서 나온 너희여 대회 중에 하나님 곧 주를 송축할지어다(시 68:25-26).”
다 형통할 것인데 늘 앞서는 조바심이 문제다. 과거를 놓치 못한 죄책으로 인함이다. 씻음 바 된 죄과를 두고 강박적으로 씨름하는 성도도 있다. 마치 하나님께 돈을 꾼 것처럼, 갚아야 할 은혜를 얼마라도 갚아야 하는 것으로 알고, 그것으로 주의 일에 전념하는 성도도 있다. 이는 아주 나쁜 신앙으로 하나님을 강퍅한 주인으로 만든다. 인색하고 옹졸한 신으로 둔갑시킨다. 그러니 “한 달란트 받았던 자는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마 25:24).” 이처럼 하나님을 잘못 알고 믿는 자가 수두룩하다. 그리 분위기를 조성해서 사람들을 회유하고 억압하는 교회나 목회자들도 있다. 이들은 참 끔찍하다. 그러니 보면 “나무는 각각 그 열매로 아나니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또는 찔레에서 포도를 따지 못하느니라(눅 6:44).” 교회에서는 성인군자인데 집안에서는 폭군인 자들도 있다.
오늘 시편은 간구한다. “하나님이여 우리를 위하여 행하신 것을 견고하게 하소서(시 68:28).” 그러려면 어째야 할까?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 이는 자발적이다. 좋으니까 그런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면서 그것을 일로 여기는 것은 말이 안 된다. 하나님은 그런 자들을 철저히 응징하시고 가려내실 것이다. 그리하여 “고관들은 애굽에서 나오고 구스인은 하나님을 향하여 그 손을 신속히 들리로다 땅의 왕국들아 하나님께 노래하고 주께 찬송할지어다 (셀라)(시 68:31-32).” 불가능할 거라 여겼던 일이 실제로 일어나는 것이 사랑의 현장이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에 전에 누리던 것을 복음 전하는 일 외에는 화로 여겼다(고전 9:16). 심지어 저는 그의 화려한 이력을 똥으로 여겼다.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빌 3:8).” 이는 그래야 구원 받고 천국 가기 때문이 아니다. 선행에 따라 보상으로 주어지는 은혜는 은혜가 아니라 채무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의 채권자가 아니시다.
5. 우리는 하나님의 힘과 능력으로 산다
“하나님이여 위엄을 성소에서 나타내시나이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그의 백성에게 힘과 능력을 주시나니 하나님을 찬송할지어다(시 68:35).”
우리는 그 어떤 의로도, 자신을 불사르게 내어주는 희생과 헌신으로도 그 은혜를 갚을 길 없다. 아니 갚으려고 하는 그 자체가 그릇된 신앙이다. 다만 우린 마땅히 누릴 뿐이다. 성경은 말하길, “전능자를 우리가 찾을 수 없나니 그는 권능이 지극히 크사 정의나 무한한 공의를 굽히지 아니하심이니라(욥 37:23).” 우리 스스로는 불가능하다. 이에 이 복음이 놀라운 것이다. 기독교의 복음만이 이와 같은 ‘거저 주시는 바 된 은혜’로 오히려 하나님의 힘과 능력으로 산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 11:33).”
그러니 사람들은 현실적인 관심, 뭔가 절묘한 이벤트나 어떤 기적, 표적 따위가 아니고 말씀으로는 고리타분하게 여긴다. “그 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요 6:66).” 예수님도 이를 경험하신 바 있으시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을 붙드시고 전혀 개의치 않으셨다. 곧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37).” 하나님이 보내실 자는 보내신다. 어떠하든지, 언제가 됐는지, 주 앞에 올 사람은 온다. “이에 기뻐서 배로 영접하니 배는 곧 그들이 가려던 땅에 이르렀더라(21).” 이것이 우리의 종교이고 기독교의 진수이다.
그래서 주님은 일러,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마 18:4).” 이는 자기 나름의 판단과 기준과 어떤 형편과 사정으로 결정하지 않는다. 주님은 누차 강조하시길,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그 곳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고(막 10:15).”
나오는 말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하지 아니하고 내 눈이 오만하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 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실로 내가 내 영혼으로 고요하고 평온하게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의 어머니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영혼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시 131:1-2).”
이 시편도 다윗의 시다. 젖 뗀 아이는 자기 의지가 있는 경우다. 저가 평온을 그의 어머니의 품, 우리가 아버지 하나님의 품, 그의 말씀, 그의 약속으로 누리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자는 첫째, 마음과 눈을 교만하게, 오만 데 두지 않는다. 즉 돼도 않을 것에 애쓰지 않는다. 바울은 은혜로 고백하였다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롬 12:3).” 저마다의 믿음이 다르겠으나 그 공통점은 교만하지 않고 오만하지 않는 것이다. 둘째, 우리 영혼이 평안하다. 우리에게서 영혼을 빼면 자아만 남고, 남은 자아는 동물적인 본성-죄의 기질로 살아간다. 이럴 때 우리는 우리의 평안의 출처를 오늘 본문에서 알게 된다.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 곧 우리의 구원이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셀라)(시 68:19).”
그러므로 분명한 사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요 6:37).” 우리의 지금 모습이 어떠하든지, 주는 결코 우리를 내쫓지 아니하실 것이다. 죄가 얼마나 되든지, 실패자로 낙심과 좌절에서 구르고 있다 해도, “내 영혼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 하는 고백이 우리의 것이 되기를 기도한다(시 131:2). 아멘.
'[설교원고]'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시편 70편 / 주는 나의 도움이시다 (0) | 2021.10.29 |
---|---|
시편 69편 / 백합화의 노래 (0) | 2021.10.22 |
시편 67편 / 감사와 찬송의 목적 (0) | 2021.10.01 |
시편 66편 / 너희들아 다 와서 들으라 (0) | 2021.09.24 |
시편 65편 / 그 싹에 복을 주시나이다 (0) | 2021.09.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