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003 주일
시편 67편
감사와 찬송의 목적
들어가는 말
육신을 입고 사는 동안,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우리의 괴로움은 끝이 없다. 이는 마치 조수간만의 차와 같이 밀물과 썰물이 들고 나는 것과 같다. 육신을 입고 사는 동안은 어쩔 수 없다는 소리다. 그래서 지혜자는,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 보아라 이 두 가지를 하나님이 병행하게 하사 사람이 그의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전 7:14).” 곧 우리에게도 곤고한 날이 온다. 그러할 때 야고보 사도 역시, “너희 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찬송할지니라.” 하고 명쾌하게 기도할 줄 알고 찬송할 줄 아는 사람들의 삶의 원리를 알렸다(약 5:13).
삶은 삶이다. 살아서 이내 생을 다해야 한다. 여기 근처 소래포구에 가면 만조기 때 배들이 육지 깊은 곳까지 들어와 잡은 고기를 내려놓는다. 곧이어 간조기 때는 시커먼 펄이 드러나고 미처 빠져나가지 못한 배들은 개펄에 박혀 오도 가도 못한다. 소래포구에는 ‘마누라 없이 살아도 장화 없이는 살 수 없다’는 말이 있었다. 그만큼 척박한 삶이었는데, 오늘날 이 일대는 대단위 아파트들로 가득하다. 하지만 개펄은 여전히 궁벽한 살림을 의미하듯 골마다 바다가 들고 난다. 그 곁으로 바닷물을 가둬 소금을 내리는 염전이 있었다. 다들 사는 게 참 고달프다. 오늘은 오늘대로 예전은 예전대로, 모두는 미래를 꿈꾼다. 오늘 말씀에 앞서 이와 같은 삶의 애환을 언급한 까닭은, 오늘 시편의 말씀이 우리의 그러한 삶을 위로하고 격려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도와 찬송을 할 줄 아는 성도라면 이와 같은 삶의 진리 앞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본문이해
오늘 시편의 말씀도 지난 66편의 말씀에 이어 작가 미상의 시이다. 그에 따른 역사적인 배경도 짐작하기 어렵다. 다만 6절의 말씀으로 미뤄, 절기 중에 장막절 곧 추수를 하고 감사하는 노래를 들음으로 시적배경을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다. 본문 해석은 간단하게 3연으로 하였다. 1연은 1-2절, 하나님의 선민들에 대해 오늘 시인은 복을 빈다. 2연은 3-5절, 하나님의 통치가 점점 더 확산되기를 간구한다. 마지막 3연 6-7절, 영적으로 물려받은 우리의 소산을 기원하며 축복한다. 이를 정리하면 1연에서 하나님은 빛이신 것과 2연에서 모두가 주를 찬송하게 하실 것과 3연에서 주의 날개 그늘이 복인 것을 알게 한다. 고로 우리 삶이 아무리 고되고 힘들다 하여도 주의 통치는 계속된다.
1연(1-2절), 하나님은 빛이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사 복을 주시고 그의 얼굴 빛을 우리에게 비추사 (셀라) 주의 도를 땅 위에, 주의 구원을 모든 나라에게 알리소서(시 67:1-2).”
우리 삶에는 어둠에 가려 숨겨진 것들이 많다. 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어떤 사회 사건이 터질 때마다 그 당사자들은 아무리 증거가 나와도 억울함을 호소한다. 이는 그 본성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기 때문이다. 이에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곧 그것을 가지고도 빛을 내신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이 빛은 하나님이시다(창 1:2-3).
곧 오늘 시인은 ‘주의 얼굴 빛’을 우리에게 비추시기를 간구한다. 이를 다른 성경으로 읽으면 “주의 크신 긍휼로 그들을 아주 멸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도 아니하셨사오니 주는 은혜로우시고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심이니이다(느 9:31).” 곧 주의 긍휼과 은혜가 우리 하나님의 얼굴 빛이다. 곧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애 3:22).” 고로 오늘도 우리가 산다. 빛이 비추이지 않으면 어둠은 아무리 정돈해도 어둡다. 그래서 전두환처럼 ‘왜 나만 갖고 그래!’ 하면서 억울해한다.
고로 우리 영혼에는 빛이 필요하다.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시 27:1).” 영혼은 ‘목’을 의미하는 ‘네레쉬’라는 단어다. 몸과 머리를 잇는 작은 통로가 목이다. 자아는 거기서 영혼을 뺀 상태다. 자기 의지, 자기 확신이 무섭게 사회를 잠식하면서 ‘자기 좋은 것’이 영혼을 대체하고 있다. 우리도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치도다(사 9:2).” 하여 우리는 더 이상 예전의 나를 좋았다고 말하지 않는다. 왜?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 8:12).” 예수는 곧 말씀이다. 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계신다(1:14). 그러므로 말씀 외에는 흑암의 권세가 다스린다.
가령 모 교회 어느 집사가 수백억 대의 사기행각을 벌였다. 무슨 다단계형식으로 1억을 투자하면 매월 220만원의 이자가 붙는 배당금으로 성도들을 유혹하였던 것이다. 교회도 물론 사람이 모이는 것이니, 크고 작은 사건이 벌어질 수 있으나 궁극적으로는 말씀의 문제다. 정신 나간 교인들은 사돈에 팔촌까지 팔아 투자를 하였다가 지금은 난리도 아닌 모양이다. 오늘 시편의 의미는 그렇게 실제적이다. “그의 얼굴 빛을 우리에게 비추시고, 주의 도를 땅 위에, 주의 구원을 모든 나라에게 알리소서.” 곧 우리의 영성이란 뜬구름 잡는 몽상이 아니라, 일상에서의 실제다. 자기 자아와의 치열한 싸움의 현장이 바로 영성이다. 우리 영혼에 하나님의 빛을 밝혀야 한다.
2연(3-5절), 모두가 주를 찬송하게 하신다.
“하나님이여 민족들이 주를 찬송하게 하시며 모든 민족들이 주를 찬송하게 하소서(시 67:3).”
오늘날과 같이 ‘영끌’의 시대에 자아를 존중하느라 정작 자신의 본분을 잃어버리는 성도들이 너무 많다. 우리는 누구인가?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자, 오늘 우리는 입만 열면 어떤 말을 나누고, 어디에 눈길을 주고 사는가?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 하는 사도의 결의는 그 당시에나 유효했던 것일까? 바울은 누차 자기 자아와의 싸움을 멈추지 않았다.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고전 9:16).”
왜 저라고 안락하고 편한, 자아실현을 꿈꾸지 않았겠나? 하지만 저는 이제 예전의 사울이 아니었다. 그런 그가 바울이 되어 고백하는 것을 들어보자.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빌 3:8-9).” 하여 그는 우리에게도 권한다.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왜 이처럼 강조하는 것일까?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딤후 4:2).” 이것이 곧 우리의 찬송이기 때문이다. 오늘 시인은 “온 백성은 기쁘고 즐겁게 노래할지니 주는 민족들을 공평히 심판하시며 땅 위의 나라들을 다스리실 것임이니이다 (셀라)(시 67:4).” 하는 것을 분명히 밝혀준다.
“베드로가 입을 열어 말하되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아니하시고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다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행 10:34-35).” 그렇다면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이에 오늘도, 또 하루를 연장하면서 기다리고 계신 것이다.
3연(6-7절), 주의 날개 그늘이 복이다.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하심이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사람들이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 피하나이다(시 36:7).”
세상의 악함이 우리로 고통하게 한다. 그것은 우리와 무관하지 않다. “무법한 자들의 음란한 행실로 말미암아 고통당하는 의로운 롯을 건지셨으니(벧후 2:7).” 하는 베드로 사도의 설교에서, 롯이 의인인가? 의문도 들지만 “이는 이 의인이 그들 중에 거하여 날마다 저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음으로 그 의로운 심령이 상함이라(8).” 하고 이어지는 말씀으로 이해가 된다. 즉 저를 의롭다 하심은 하나님이시지, 저의 의로써가 아니다. 추론하건대 아브라함과 함께 말씀을 좇아 하란을 떠난 것을 저의 의로 본 것이다. 이는 우리들도 다를 게 없다. 스스로 롯보다 좀 나은 삶이라 자부해서 의롭다 하심을 당연하게 여기는가?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롬 5:1).”
이때 롯을 두고 뭐라 할 자격이 우리에게는 없다. 베드로 사도의 설명처럼 롯은 ‘그들 중에 거하여/ 날마다 저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음으로/ 그 의로운 심령이 상함이라.’ 곧 여기서 세 가지는 우리에게도 예외일 수 없다. 어째서 우리는 주의 자녀들답게 충분한 행복과 자유를 누리지 못하며 살까?
첫째, 그들 중에 거하기 때문이다.
그들이란 흑암 속에 거하는 자들이다. 이에 반문하듯 믿는 자로 살려면 그럼 모두 세상을 등지고 살아야 할까? 어디 깊은 산속에라도 숨어서 살아야 할까? 그건 영성이 아니라, 경건한 위선이다. 전에 말한 것처럼 다니엘과 그 친구들처럼, 요셉과 같이, 오바댜처럼 하나님을 거역하는 흑암의 나라에서 우린 모두 믿는 자로서의 빛이 되고 소금이 돼야 한다. 아니면 순간 “내게 남자를 가까이 하지 아니한 두 딸이 있노라 청하건대 내가 그들을 너희에게로 이끌어 내리니 너희 눈에 좋을 대로 그들에게 행하고 이 사람들은 내 집에 들어왔은즉 이 사람들에게는 아무 일도 저지르지 말라(창 19:8).” 이것이 영성을 잃은 롯의 대처였다.
둘째, 날마다 저들의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음이었다.
은연중에 롯의 생활도 남다를 게 없었다. 어울리고 같이 섞여 살다보면 ‘그러려니’ 하고 따르게 돼 있다. 남들 다 그러고 산다. 그리 여기면서 더는 불법을 불법으로 느끼지 못한다. ‘화인 맞은 양심’이 되는 것이다. “자기 양심이 화인을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딤전 4:2).” 본래부터 양심이 없었던 게 아니다. 인디언 속설에 양심은 동그라미 안에 삼각형이다. 처음엔 그 끝이 뾰족하여 불법을 저지르면 찔린다. 찔리고 찔리다 나중에 뭉툭해져서 삼각형의 꼭짓점은 뭉툭해진다. 두루뭉술하게, 다 좋은 게 좋은 것으로, 화인 맞은 양심은 불에 데여 감각을 잃은 것이다.
셋째, 그 의로운 심령이 상함이라.
모든 사람이 존엄한 것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지음 받은 까닭이다. 한데 죄로 인하여 더는 죄를 죄로 여기는 기능을 상실했다. 오죽하니 바울 사도는 나이 들고 늙어서도,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 9:27).” 도대체 우린 무엇을 두려워하며 살고 있는 것일까? 오늘 시인은 말한다.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 사는 것이 복이다.
나오는 말
이제 우리의 기도다. “하나님이여 민족들이 주를 찬송하게 하시며 모든 민족으로 주를 찬송하게 하소서(시 67:5).” 주의 공평하심은, “땅이 그의 소산을 내어 주었으니, 하나님 곧 우리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시리로다(6).” 주의 긍휼하심, 은혜와 자비를 잃으면 모든 삶은 헛되다. 하지만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시리니 땅의 모든 끝이 하나님을 경외하리로다(7).” 결론은 주를 경외함으로다. 오늘 시편은 이를 강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막 16:15).” 무슨 직업으로, 어떤 사람들과 어느 조직에 속해서 살아가든지, 우리는 ‘내가 누구인지!’ 잊어서는 안 된다. 아니면 롯과 같이 부끄러운 구원을 받게 된다. 예수님은 엄히 경고하셨다. “롯의 처를 기억하라(눅 17:32).” 설마, 하는 믿음으로는 영락없다. 이에 우리의 남은 사명은, “주의 도를 땅 위에, 주의 구원을 모든 나라에게 알리소서(시 67:2).” 이를 위해 직업을 선택하고, 일을 열심히 수행하며, 주어진 하루하루를 사는 것이 영성으로의 삶이다. “주의 구원을 모든 나라에게 알리소서.” 곧 우리의 감사와 찬송의 목적은 주를 나타내는 것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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