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아가 농사를 시작하여 포도나무를 심었더니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그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지라
창 9:20-21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
시 32:1
‘술이 웬수다.’ 보면 열에 일곱 여덟은 거기에 실수가 있고 범죄가 난다. 적당하다는 거, 다들 그럴 수 있는 것처럼 자신하나 이는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다. 오늘 시편에서도 “너희는 무지한 말이나 노새 같이 되지 말지어다 그것들은 재갈과 굴레로 단속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가까이 가지 아니하리로다(시 32:9).” 말과 고집에 대해 단속이 필요함을 일깨운다. 말이란 혀로 찌르는 것으로, “그러므로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거짓을 말하지 말고(벧전 3:10).” 아니면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물리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약 1:26).”
또한 노새는 평생 들인 습관에 따라 그리 행하지 않으면 완고함이 곧 무기가 된다. 나는 노인이 되면 저절로 지긋하여 온화하고 의연할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게 일찍이 재갈과 굴레와 단속한 자의 훈련된 자세이지 저절로 되는 게 아닌 모양이었다. 가령 ‘코로나19’ 상황이 70% 이상의 백신 접종과 함께 어느 정도 잡히기는 할 것 같은데, 백신 접종을 거부하는 사람들 가운데 20%가 노인들이었고 저들의 중증 확률과 사망률이 자칫 모두의 노력에 구멍이 될 수 있다는 기사를 보았다. 언제부턴가 우리 사회는 노인층의 완고함이 사회 질서에 위협이 되고 있다. 너무 직설적인 지적이기는 하겠으나, 그러므로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롬 3:13-15).”
술 취함으로 오랜 습관과 같은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술이나 말이나 행동거지 하나하나가 단속돼야 한다. 노아의 오늘 모습은 저로 인하여 그 후손들이 오늘날까지 어떠한가를 돌아보게 된다. 어제도 누구와 통화를 하다, 의사면 뭐하나? <어린왕자>의 술주정뱅이처럼 무엇이 그리 부끄러워 술에 취하는 것인지, 알코올중독에 가깝게 혼자서도 서너 병 이상의 것을 반주로 하고 한 번 술자리에 들면 다음날 아침까지 손에 있는 잔을 놓으려 하질 않는다니. 주의 은혜가 아니고는 어찌 해결할 방법이 없는 듯하다. 그 좋은 달란트로 어찌 저의 여가는 술 취함으로 탕진하고 있는 것인지. 우리의 완고함이란 마치 저마다 마음속에 품고 사는 동굴 같이 깊고도 습하다. 어찌 말릴 방도가 없다.
예수님은 마르다와 마리아의 오라비 나사로의 무덤 앞에 서셨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이르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요 11:39).” 주님은 우리에게 무덤을 막고 있는 돌을 치우라고 하신다. 저들의 시신은 동굴 속에 두고 그 앞을 돌로 막는 장례문화였다. 한데 우리의 자세는 늘 자포자기에 가깝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앞서 우려를 금치 못하는 것이 염려와 의심이다. 이를 시인은,
내가 혹시 말하기를
흑암이 반드시 나를 덮고
나를 두른 빛은 밤이 되리라 할지라도
주에게서는 흑암이 숨기지 못하며
밤이 낮과 같이 비추이나니
주에게는 흑암과 빛이 같음이니이다
(시 139:11-12).
흑암도 빛도 모두 주의 것이다. 썩음도 온전함도, 질병도 고침도 모두 주에게서 나온다. 이에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뜻을 아옵소서
내게 무슨 악한 행위가 있나 보시고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소서
(23-24).
내 안의 굴속이 음습하다. 이미 썩었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하는 고백이 옳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주님은 바로 그 무덤, 굴을 막고 있는 돌을 굴려 치우라는 것이다. 누가 전화를 하여 추석 명절은 어떠했는지 안부를 묻고, 이번 주 정신과에 다녀온 이야기와 그 상태를 말하였다. 저가 하고 싶었던 말은 그와 같은 고백을 신랑에게 말하였고 의외로 저의 반응은 ‘나도 가야 하는데…’ 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야말로 예상치 못한 것이라, 나는 오히려 좋은 의미로 받아들였다. 스스로 인정하는 것과 그 필요를 알고 있다는 것에 ‘그나마’ 다행이었다. 자신의 상태를 적어보고 가급적이면 다음 주에라도 갔다 오게 하라고 이르기는 하였는데…….
우리는 안다. 세상이 악하다는 것도 알고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도 안다. ‘주여,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하는 것이다. 그러니 돌을 옮겨 무덤을 열라는 주의 말씀에 은근한 불신이 깔린다. 이미 죽은 것을 두고 이 무슨 일인가? 하는 저마다의 ‘노새’가 버틴다. 우선은 과거에 대한 집착이다.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마 6:14-15).” 이게 보니까 나도 그렇고, 모두의 문제는 용서하지 못하는 과거의 문제 때문이다. 응어리진 어떤, 고약하고 완악한 마음으로 더러는 집착이고 더러는 한이다. 우리나라의 문화를 한의 문화라고 하는데, 한(恨)이란 몹시 원망스럽고 억울하고 안타까운 슬픔의 응어리진 마음이다. 우리의 춤사위니 노랫가락을 들여다보면 하나같이 과거에 맺힌 분이다.
이는 고통을 잊지 못하고 굴속에 묻어둔 것이다. 흔히 슬픈 기억이라도 하는데, 그것은 우리로 뒤를 돌아보게 한다. 마치 소돔과 고모라 성을 빠져나오면서 어떤 미련이 또는 분한 마음이 있어 뒤를 돌아보아 소금기둥이 된 롯의 처와 같이 말이다. 예수님은 이를 심히 경고하셨다. “롯의 처를 기억하라(눅 17:32).” 누구의 오늘 일을 듣다 예전의 일을 글로 써보라 하면 열에 아홉은 잠시 생각하다가 포기한다. 건드릴 엄두가 나지 않는 것이다. 순간 헉, 하고 끼쳐오는 냄새가 난다. 자신도 모르게 진저리치며 덮어두려 한다. 평상시는 괜찮은 듯 시치미 떼고 산다. 하지만 이는 가라앉은 부유물과 같아서 조금만 흔들리거나 휘저으면 삽시간에 마음을 사로잡는다.
그래서 우리 안에 굴속에는 책임전가라는 아주 고약한 시신이 누워있다. 어제도 묵상하며 생각한 것이지만 바로 남을 탓하는 이유도 그 때문인 것이다. 누구 때문이고, 무엇 때문에 오늘의 이 지경이 되었다는 소리다. 스스로의 은폐다. 이를 주께서 십자가로 없이 하셨다. “우리를 거스르고 불리하게 하는 법조문으로 쓴 증서를 지우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골 2:14-15).” 형식화하고 규격화된 것이 우리들로 하여금 기계처럼 정형화한다. 주일이 됐으니 교회를 가고, 뜻도 살피지 않고 주기도문이나 사도신경을 외우고, 찬송을 하고, 설교를 듣고, 헌금을 낸다. 그리고 다시 일상으로다. 사는 모습은 안 믿는 자보다 못할 때도 말이다. 스스로 했다, 됐다고 여기는 것이다. ‘누구엄마’와 더 이상 말하기를 포기한 것은 스스로 자신은 누구보다 하나님을 믿는 자로 주를 사랑한다고 자부하였다. 뭐라 권하는 말에 듣기 싫다는 표시였다.
피해의식은 아담으로부터 전가된 모든 인류의 숙명이다. 저가 하나님 앞에서 한 번이라도 잘못했습니다, 하고 용서를 구하였으면 어땠을까? 저의 속엔 억울함이 먼저였다. 하나님이 지어준 여자 때문이었는데, 아니 결국은 그리 된 게 하나님 때문인데… 하는, 어떤 억울함은 믿는 자나 안 믿는 자나 그 마음 깊숙이 열린 무덤 같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그러니 별 수 없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 3:3).” 누구 이야기가 아니라 내 이야기다. 우리 모두의 이야기다. 그러므로 성경은 이를 안다면, 일어나 무덤 문을 옮기라고 하시는 것이다.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라(요일 3:1).” 왜 산 자로 죽은 자와 같이 빈 무덤에 갇혀 살고 있는지. 나는 이번 주에 들었던 소식들 가운데 가장 반갑고도 놀라운 사실은, 누가 저의 신랑도 자신이 정신과를 갔다 왔다는 말에 뭐라 할 줄 알고 일주일째 고심하다 새로 약을 타러 가며 말을 꺼낸 것인데 의외였으니. ‘나도 가야 하는데….’ 하는 저의 반응에 말을 꺼낸 이는 오히려 시큰둥하였지만 나는 기뻤다. 무엇보다 문제의식은 있다는 것이다. 자신이 어떠한지를 나름은 안다는 것이고, 그 상태가 심상치가 않다는 데 같은 인식을 한다는 소리다. 내 경험으로도 열에 아홉은 아주 조심스럽게 정신과를 권하고 약을 좀 먹어야 할 것 같다고 하면 돌연 화를 내거나 ‘그 정도’는 아니라고 스스로를 판단하기 일쑤다.
성경은 일러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2-3).” 우리는 누가 뭐래도 주의 자녀다. 하나님의 자녀다. 앞으로의 일이야 누가 알겠나? 분명한 것은 이 소망을 가진 자로서는 자신을 깨끗하게 돌본다. 다른 누구와의 통화에서도 (저는 요즘 오전 일찍 출근하면서 가끔 그렇게 전화를 한다.) 저의 소소한 이야기를 나는 영적으로 말해주려 하니 그게 좋지는 않은 모양이다. 추석 때 누구와 통화를 하다 내 얘기가 나왔고, 전화도 좀 하고 그래… 하였더니 저의 말이 자꾸 ‘이상한 소리’를 해서 싫다는 것이다. 싫은 것이야 그렇겠지만 굳이 그런 이야기가 아니면 우리가 이제 무슨 이야기를 나누겠나?
본래 그렇듯 게임에 빠진 사람은 게임이야기로, 연애하는 사람은 연애이야기로, 각기 자기 관심의 오늘을 말에 담아 나누기를 즐겨하는 것인데… 나는 예전에 우리가 같이 나누던 ‘그런 이야기’에는 이제 관심이 없다. 그러니 저가 싫어하는 ‘이상한 소리’를 빼고 나면 나로서는 할 말이 없고 저로서는 듣고 싶지 않은 것이다. 이게 보니까 또한 우리 안의 동굴이라! 흔히 동경이라고 하는, 어떤 부러움의 또 다른 굴이라고 할까?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해 내어 이 온 회중이 주려 죽게 하는도다(출 16:3).” 무엇에 대한 기억, 어떤 그리움은 심각한 굴절로 왜곡되었다. 이를 자신만 모른다. ‘노새’ 때문이다. ‘몸에 밴 어린아이’ 같다. ‘어른아이’다.
개인적인 나의 편견인지 모르겠으나 여전히 고가의 장난감을 모으고 이를 취미로 혹은 그 이상의 취향으로 삼고 사는 이들은 저마다 그 속에 ‘부러움’이라는 결핍이 있다. 명품이 저절로 명품이 되는 게 아니다. 사람의 이와 같은 어쩔 수 없음, 결핍을 상술로 호가를 누리는 것이다. 누구 신랑도 교역자 사례가 얼만데… 하며 신세타령은 하면서 고가의 피규어를 모아 장식장에 모시고, 또 하나는 게임에 심취하여 거금을 들여 전용 자판이나 마우스를 산다. 비싼 건 수십만 원을 호가한다는데 모르겠다, 나는. 나 역시 가난하였고 장난감에 대한 애증이 있고, 놀이에 대한 미진함이 늘 마음 한 칸을 차지하고 있기는 하지만 감사하게도 그런 미친 소비는 하지 않는다. 보도에 보니 마스크를 쓰면서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말도 안 되는 안경테가 프리미엄이라 해서 엄청난 값에 팔린다고 한다. 반은 가려진 얼굴에 자기만족의 알 없는 안경테라도 써야 하는 심리를… 이해는 한다. 우리 안의 허허로움은 이처럼 무서운 것이다. 다들 애굽에서는 잘 먹고 잘살았던 기억만 난다.
그러니 어쩐다? “말하여 이르기를 이스라엘아 들으라 너희가 오늘 너희의 대적과 싸우려고 나아왔으니 마음에 겁내지 말며 두려워하지 말며 떨지 말며 그들로 말미암아 놀라지 말라(신 20:3).” 겁내지 말고, 무덤을 막고 있는 돌을 치워야 한다. 이는 결코 주님이 치워주지 않으신다. 끝까지 ‘노새’처럼 버틴다면, 어쩌겠나? 사는 날 동안 자신의 완고함에 짓눌려 그에 끌려 다니는 신세로 살아내는 수밖에. 이래도 한 세상, 저래도 한 세상… 황혼에 이르러 후회하고 탄식한들. 친구는 통화에서 이번 추석에 벌초를 다녀오고 부모의 무덤을 살피던 이야기를 하다, 우리도 준비해야지! 하면서도 나더러 물었다. 나야 시신기증에 장기기증까지 그 외에는 모든 쓸 수 있는 것을 쓰고, 실습용으로 쓰다 알아서 폐기해도 무방하다 말하였더니 기겁을 했다. 그런 그에게 그 이후의 생을 준비하시게! 하고 누가 싫어하는 소릴 또 하게 되었다.
다들 노후 준비니 심지어 스스로의 장례 절차에 대해 준비한다는 소리에 나는 사후 준비나 하시라고 이른 것이다. 우린 너무 영생을 추상적으로 또는 관념적으로 이해하려는 경향이 있다. 오히려 죽음의 문제는 산 자들의 몫이고, 영생은 우리 믿는 자의 몫이다. “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마 25:46).” 이를 바로 안다면,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5).” 이 기본적인 진리에 충실할 필요가 있다. 아무튼 오늘은 노아가 술에 취했다. 저의 작태가 이해는 가나, 그 긴 세월의 외로움과 모진 홍수심판으로의 스트레스로 인한 잠깐의 일탈이었을까? 어쨌든 그로 인하여 저의 자손들에게 끼치는 말의 영향이 너무 크다. 세계전도를 펴고 어느 민족을 가나안 족속으로 어느 민족을 샘의 민족으로 어느 민족을 함의 후손으로 단정 짓는 일은 조심스러우며 별 의미도 없다. 모두가 다를 게 없이 똑같은 신세라.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요 3:7).” 지금 이 땅에서의 뭐냐가 그리 중요하지 않다!
“너희는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에 가득하여 그 중에서 번성하라 하셨더라(창 9:7).” 이를 끝까지 준행하고 무던하였으면 좋았을 것을.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그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지라(21).” 그러니 어쩌겠나? 이미 벌어진 일,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시 32:1).” 나는 오늘 이 한 구절의 말씀에 아멘, 한다. 고로,
너희는 무지한 말이나
노새 같이 되지 말지어다
그것들은 재갈과 굴레로
단속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가까이 가지 아니하리로다
(9).
스스로에게 적용하여보았다. 우리 이야기다. 그리하여,
마음에 간사함이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시 32:2).
부디 그러한 자로 살고자 하나, 그러려면 입을 다물고 살아도 모자랄 판인데,
내가 입을 열지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3).
내 입에 찬송도 저주도 같이 있다. 그래서 다행인 것은,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빠져서 여름 가뭄에 마름 같이 되었나이다 (셀라)(4).” 오늘의 어려움이 우리로 주 앞에 온전하게 온유하게 ‘노새’를 단속하게 한다. 이를 위해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악을 사하셨나이다 (셀라)(5).” 이보다 더 큰 은총과 지혜로운 대비가 또 어디 있겠나?
내가 네 갈 길을 가르쳐 보이고
너를 주목하여 훈계하리로다
(8).
주가 나를 그냥 두지 않으심은 “너희는 무지한 말이나 노새 같이 되지 말지어다 그것들은 재갈과 굴레로 단속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가까이 가지 아니하리로다(9).” 하여 주께서 나를 단속하심을 감사하며.
…
여호와를 신뢰하는 자에게는
인자하심이 두르리로다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마음이 정직한 너희들아
다 즐거이 외칠지어다
(10-11),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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