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셉이 바로에게 아뢰되 바로의 꿈은 하나라 하나님이 그가 하실 일을 바로에게 보이심이니이다
창 41:25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여 하나님의 일을 선포하며 그의 행하심을 깊이 생각하리로다
시 64:9
같은 일을 두고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지고 사는 세계는 전혀 다르다. 인생의 고난은 하나님이 정하신 것이다. 이를 인정하고 어찌 받아들이며 사는가, 하는 문제는 각자의 몫이다. 지혜자도 말하길,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잠 3:6).” 하나님을 인정한다는 것은 그리 된 일을 두고 씨름하는 것이 아니라, 그에 따른 하나님의 의도를 알고, 계획하심을 헤아리고, 그 뜻을 바로 사는 데 목적이 있겠다.
그의 손이 하는 일은 진실과 정의이며
그의 법도는 다 확실하니
영원무궁토록 정하신 바요
진실과 정의로 행하신 바로다
(시 111:7-8).
그러므로 오늘 시인은 일러,
의인은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그에게 피하리니
마음이 정직한 자는 다 자랑하리로다
(64:10).
우리가 어찌 해보려고 하던 모든 노력을 주께 돌리는 일, 이는 그 안에 두신 주의 놀라운 섭리를 알고 무던함이겠으니.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욥 23:10).” 그래서 그런 거였구나, 어찌 저 지경에서도 저와 같은 고백이 나올 수 있었을까, 하고. 여러 가지 일들이 한꺼번에 이해가 되는 것 같다.
같은 말을 아무리 되풀이해도 별 수 없고, 이 길이 맞나 싶을 정도로 아무런 성과도 변화도 기대할 수 없는 상태에 대하여, 오히려 이를 즐거워하는 일은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 5:3-4).” 그래서 주를 바라고 주께 더 마음을 두게 하시려는 것이다. 이를 아는 까닭은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1).” 내 안에 두신 화평으로다. 하나님이 아신다는 신뢰는 시무룩하였다가도 다시 주께 돌이킬 수 있게 한다.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2).” 이 놀라운 은혜의 말씀으로 무던히 다만 주를 바람이었다.
곁을 두고 있어도 서로 바라보는 게 다르고, 나름 공들여 애쓴다고 애쓰는데도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전혀 나아지는 게 없으나, 주가 하시고 계심은 가만히 신뢰함으로 나는 다만 내게 맡기신 자리를 지키는 것이겠다. 그 무엇도 주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문제였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마 10:37).” 더불어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질고까지도 주의 이름으로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일,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38).” 그러니 이를 어찌 감당할 수 있을까? 하고 더듬어보면 주께서 하시는 일이라,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6:33).”
먼저와 나중의 원리다. 우선과 다음의 차이겠다. 오늘은 요셉이 바로 앞에 서서 먼저 하나님의 주관하심을 인정하는 데 그 관심을 두게 된다. “요셉이 바로에게 아뢰되 바로의 꿈은 하나라 하나님이 그가 하실 일을 바로에게 보이심이니이다(창 41:25).” 그 모든 일의 주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바로께서 꿈을 두 번 겹쳐 꾸신 것은 하나님이 이 일을 정하셨음이라 하나님이 속히 행하시리니(32).” 말이 쉽지 서슬이 퍼런 이방 땅의 여러 잡신들 위의 신으로 굴림하는 바로 앞에서 하나님을 인정한다는 것, 이를 오늘 시편의 묵상으로 더듬으면 이 구절로 축약되는 것 같다.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여
하나님의 일을 선포하며
그의 행하심을 깊이 생각하리로다
(시 64:9).
내 곁에 두신 누구, 어떤 일, 무슨 상태… 이 온 우주의 공존은 오직 한 가지 이유,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나타내고 주가 행하심을 증거 하시려는 데 있었다. 모든 일이 그냥 일어나는 일은 없다. 그 일을 두고 하나님이 말씀하시려는 바,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히 4:12-13).” 이를 듣고 신뢰하여 두려워할 줄 아는 게 힘이었고 권능이었다. 누구도 이를 임의로 알 수 없는 것이어서,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의의 무기를 좌우에 가지고 영광과 욕됨으로 그러했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그러했느니라(고후 6:7-8).” 하시는 이 말씀의 근거로 오늘 우리의 됨됨이를 알 수 있었다.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8-10).
나는 그저 쩔쩔매면서도 이 길 위에 선다. M. 스캇 펙의 표제처럼, <아직 끝나지 않은 길>을 간다. 이 길이 맞나?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아무런 느낌도 변화도 없는 일이 태반이다. 이 아이와 대체 왜 이런 이야기를 반복해야 하나싶고, 어떤 일을 두고 누구와 같이 그 일을 씨름한들 뭐하겠나싶을 때, 말씀은 나를 이끄신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사는 일이 전혀 다른 사람들과 사는 일이란 여간 외롭고 고독한 게 아니다. 때론 내가 미쳤는가, 하는 생각도 든다. 그러다 또 누가 그 자식의 일로 말 못할 사연을 안고 살면서도 시치미 떼고 아무렇지 않은 듯 굴었던 것을 생각하면… 저마다 사연 없는 삶이 없고, 가슴에 한두 개 묻고 사는 어려움은 다 있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저의 돈을, 그 알량한 힘을 의지하며 자초하는 일이었으니, 뭐라 한들. 나는 누구 소식을 새로 접할 때면 저의 어쩔 수 없음을 두고 주의 이름을 부른다. ‘저들이 알지 못함이라.’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행 7:60).” 스데반 집사의 마지막 모습이 이해가 된다. 내가 하는 일이란 게 너무 미약할 뿐이어서 이처럼 궁싯거릴 가치조차 없는 일일 수도 있으나,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하게 하셨도다
(시 40:2).
이와 같은 증거를 가슴에 안고 사는 삶은 귀하다. 다른 그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는, 그 어떤 사랑도 애착도 이를 대신할 수 없는 증거를 갖고 사는 일이었다. 가령 아이를 대하다, 저의 어처구니없는 일에서 나는 또 실망하고 좌절하다가도 다시 이르고 또 권한다. 하나마나 한 소리 같아도 또 한다. ‘또’ 즉 ‘같은 일의 거듭’에서 굴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노아의 반복’이 이를 일깨운다. 주가 어찌 행하시는가, 하는 믿음으로만이 갈 수 있는 길이다. ‘같은 일의 거듭’을 무려 120년 동안 한결같이 할 수 있었다는 것은 복잡할 것 없다. 주만 신뢰하는 것. 주가 내 곁에 두신 일이고, 내게 주신 몸이고, 나에게 허락하신 형편과 사정이고, 그것이 아무리 뜻하지 못했던 일이라 해도 우리가 주를 안다는 것은,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하신 것을 받기 위함이라(히 10:36).” 그저 묵묵히, 또.
나는 어떤 의미를 벗어던진다. 그냥, 한다. ‘또’와 같이 ‘그냥’이라는 부사어는 다소 부정적이다. 그 표현이 사람을 기운 빠지게 한다. 그냥, 내게 두시는 하루와 한 사람과 한 일을 두고 그냥, 주를 신뢰함으로 또, 감당하는 것으로의 하루하루. ‘그런 모양으로 줄곧’ 여기에는 놀라운 의미도 같이 내포되어 있는데, ‘아무런 대가나 조건 또는 의미 따위가 없이’의 ‘그냥’이다. 이는 속수무책으로 무기력을 말하는 게 아니다. ‘또’와 ‘그냥’의 무의미함 속에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알고 발견하고 이를 확신하는, 오늘 요셉의 모습에서 나는 이를 묵상한다.
억울하다. 저의 삶을 한 마디로 정리하면 다른 의미가 없다. 형들의 보복으로 노예로 팔려왔다. 이런저런 생각이 왜 없었겠나? 두려움은 말할 것도 없고 앞으로의 일에 대해 왜 마음이 어렵지 않았겠나? 한데 성경은 일체 저의 고민이나 생각 따위에는 초점을 맞추지 않으셨다. 다만 저의 ‘그냥’은 주어진 환경에서 주를 신뢰함으로 그 삶을 사는 일이었다. 그것도 성실히, 마치 무슨 엄청난 업적으로 대단한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사람처럼 ‘또’ 주어진 하루의 환경에서 충일하였다. 노예살이에서도, 억울하게 옥에 갇혀서도 저는 자신의 신세를 한탄한 적이 없다. 속으로야 어떠한지 모르겠으나 사람 붙들고 한탄하지 않았고, 입 밖으로 되뇌며 곱씹지 않았다. 복수의 심정을 키우지 않았고, 그저 다만 ‘그냥’ 그 주어진 삶에 묵묵하였다. 저의 무던함은 성실함으로 인정되었고, 어디에 있든 그곳의 모든 사람들이 저를 그리 여길 수 있었다.
‘아픈 아이’를 대하면서 저를 더는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같은 일의 반복과 또 똑같은 일로 안달을 부려대는 것을 보면서, 실은 저 아이에게 ‘아픈’이라는 특별한 표현을 쓰는 게 무색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왜냐하면 다들 다를 게 없다. 아니, 더 심각하다. 어느 가정의 누가 또 속엣 얘기를 전해왔다. 저들의 사연을 구구절절 글로 옮기기도 민망하다. 한데 그 삶은 멀쩡한 듯 골프도 즐기고 적당한 재물과 수입과 날로 불어나는 자본주의 특유의 저절로 생겨나는 이익으로 저들의 영혼은 썩을 대로 썩었다. 이는 전적으로 나의 개인적인 판단이다. 다들 부러워할 형편인 줄 알았는데, 들춰보니 두 형제뿐인데 부친 돌아가시기 무섭게 서로 안 보고 살고, 가족 간에는 이 사람 저 사람 다른 살림에 애인까지 두고 희희낙락하는 꼴이었으니, 애 둘은 병들은 딸애는 연락이 끊긴지 오래고 하나는 정신과를 들락거리며 간간히 연명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불로소득이 저들 형제를 망쳤다 해도 과언은 아니겠다. 어디 삼류 드라마에서나 나올 스토리인데, 일찍이 모친은 가정을 버리고 일본으로 갔고 거기서 어찌하다 부자의 처로 살았고, 일본인 남편이 죽자 어마어마한 재산을 가지고 온 모양이다. 근근이 살 땐 나름 성실하고 우애가 있던 두 형제는 생각지도 못한 어마어마한 돈에 사이는 갈라졌고, 내가 아는 누구는 아파트를 사고, 패밀리 레스토랑 체인점을 어디에 크게 열고, 돈이 생기니까 사람도 달라져서 없던 우아함과 교양도 생겼나 싶게 꼴값을 떤다 싶더니만 고작 십년 세월이었을까? 서로 이혼까지 했다나? 남자는 어디 고시원에 딸애는 유학을 간 길에 밖으로 돌고, 아들 녀석은 온 몸에 문신을 치렁치렁 그리고 교도소며 정신과를 들락거리고 살고 있다니. 그 많던 유산? 재산은 거품처럼 사라져서 여자는 어디 식당일을 전전긍긍한다는데….
이게 누구 이야기에든 그 사연마다 하나님을 인정하는 삶과 인정하지 않는 삶의 간격은 엄청나다. 저의 처가 쪽도 생각하면 또 한도 끝도 없는 사연이 줄줄이 이어져 나오는데, 모두가 하나님 없이 사는 이들의 것이었다. 그러니 오늘 나의 하루가 그날이 그날인 것 같고, ‘그냥’, ‘또’ 늘 터무니없는 반복의 연속인 것 같으나….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가득함이니라
(합 2:14).
오늘 요셉의 이야기에서도 나는 이를 목도한다. 누구 이야기로도 이를 새겨 알게 하신다. 나의 이야기로는 오직 하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 20:31).” 그러므로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여
하나님의 일을 선포하며
그의 행하심을 깊이 생각하리로다
의인은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그에게 피하리니
마음이 정직한 자는 다 자랑하리로다
(시 64:9-10).
이에,
하나님이여 내가 근심하는 소리를 들으시고
원수의 두려움에서 나의 생명을 보존하소서
(1).
오직 주를 바람으로,
의인은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그에게 피하리니
마음이 정직한 자는 다 자랑하리로다
(10),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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