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해석은 하나님께 있지 아니하니이까

전봉석 2021. 10. 26. 05:18

 

그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꿈을 꾸었으나 이를 해석할 자가 없도다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해석은 하나님께 있지 아니하니이까 청하건대 내게 이르소서

창 40:8

 

내가 나의 침상에서 주를 기억하며 새벽에 주의 말씀을 작은 소리로 읊조릴 때에 하오리니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음이라 내가 주의 날개 그늘에서 즐겁게 부르리이다

시 63:6-7

 

 

같은 날의 연속이다. 했던 말 또 하고 했던 말 또 한다. 이를 병적이라 하여 나 몰라라 할 수가 없다. 느닷없이 춤에 또 꽂혔다. 어디 얼마고, 누가 어떻고 하는 말이 계속 이어진다. 지난번엔 헬스하는 것에 꽂혀 사람을 들들볶듯이 안달이었고, 그전엔 무슨 보드 타는 것에, 앞서는 무슨 유튜브 채널과 노래하는 일에… 그때마다 나름의 논리는 억지가 되고 안달은 주장이 되어 그것으로 곁의 사람을 지치게 한다. 이러한 게 저 병의 특징인 것을 안다. 어지간하면 들어주고 그러려니 하는데 지겨울 때도 있다. 혼자 안달하다 혼자 반성하고 혼자 들떠있다 혼자 침울해한다.

 

저의 특징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공통된 문제다. 누가 어떤 일에 시달리듯이 그 일에 매달리면 정신이 없다. 머리로는 알겠는데 몸으로는 따를 수가 없다. 가슴으로는 알겠는데 안달하는 몸을 진정시킬 수가 없다. 곁에 사람이 지치는 것은 물론 자기 자신도 그러는 자신을 주체할 수가 없다. 이를 어찌 하면 좋을까?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세상을 살며 어느 사소함에 이처럼 안절부절 못하며 사는 게 우리네 인생인가.

 

여호와여 은총을 베푸사

나를 구원하소서

여호와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

(시 40:13).

 

다윗은 급박한 상황을 두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동일하게 아뢴다.

 

하나님이여 나를 건지소서

여호와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

(70:1).

 

이런저런 사정을 듣다보면 다들 아프다. 힘들고 지쳤다. 살아가는 데 진저리가 난다. ‘속히 나를 도우소서.’ 우리로 다급한 심정이게 하는 것들에 대하여 이 또한 타성에 젖으면 소용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 늘 또 그러려니 하게 된다. 꽤 빠르게, 빨리, 하고 외치는 부사어 ‘속히’는 그만큼의 절박함이면서도 다급함이다. 문득 드는 생각이 그럴 수 있을 때가 소망이 있다. 학습된 일에 상대는 지겨울 뿐이다. 당사자는 ‘속히’ 외치지만 곁에서 보는 이는 ‘또?’ 하고 지친다. 어떤 일이 거듭하여 일어날 때 부사어 ‘또’는 반복되는 일에 넌더리가 난다. 조현의 특징이기도 하다. ‘감정이나 의지, 충동 따위가 이상으로 반응하여 나타나는 인격분열의 증상이다. 현실과의 접촉을 상실한다. 내재된 자신의 욕구에만 집중한다. 비사교적이고 공격적인 성향으로 청소년기의 분열병성이 황폐를 가져오면서 20대 전후로 발병한다. 유전적인 요인도 무시할 수 없다. 긴장형과 파괴형, 망상형으로 나뉠 수 있는데 대체로 한 덩어리처럼 엉겨있다.

 

우선은 그 가족이 지친다. 같은 일의 반복이라 또 안달이다. 어제는 누구의 그런 경향으로 저의 톡의 알림을 죽이고, 전화를 받지 않고, 답을 미루었다. 나름의 방책이라면 의도적인 외면이다. 저는 이를 무시당한 감정으로 받을 텐데, 그리 두는 것이 휘둘리는 것보다 낫다. 그래도 나를 ‘목사님’으로 어려워하니 이 또한 가능하다. 가족들이 볶이는 데는 미처 상상도 하기 어렵다. 오후께 일찍 나와 다시 대화를 시도하였다. 같은 말이 반복되고 뭐라 한들 설명이 어렵다. 그럴 때 화를 내거나 무시하는 듯한 언사를 피해야 한다. 조증인지 울증인지 점심을 먹고 같은 이야기를 하다 지쳐서 일찍 돌려보낸 뒤였다. 한 시간을 넘겨 말도 안 되는 말로 시달리다 지쳐서 우선은 얼버무리고 통화를 끊었다.

 

상대해야 하는 저의 일로 국한되지 않는다. 소위 정상이라 여기는 이들의 착시와 착각이 더 무섭다. 저들의 멀쩡함이 도리어 방책도 없다. 나는 시편 70편의 본문을 초안으로 작성하다 40편 후반부의 내용과 거의 같다는 데서 그 의미를 되새겼다. 같은 말이 오가고, 또 똑같은 일이 반복되는 데는 너나 나나 우리는 다를 게 없는 듯하다.

 

내 생명을 찾아 멸하려 하는 자는

다 수치와 낭패를 당하게 하시며

나의 해를 기뻐하는 자는

다 물러가 욕을 당하게 하소서

나를 향하여 하하 하하 하며

조소하는 자들이 자기 수치로 말미암아

놀라게 하소서

(시 40:2-3).

 

나의 영혼을 찾는 자들이

수치와 무안을 당하게 하시며

나의 상함을 기뻐하는 자들이

뒤로 물러가 수모를 당하게 하소서

아하, 아하 하는 자들이

자기 수치로 말미암아

뒤로 물러가게 하소서

(70:2).

 

같은 내용을 그대로 반복하는 것 같으나 미묘하게 다르다. 앞서 40편의 같은 내용에서는 하나님의 신명을 여호와 3회, 엘로힘(하나님) 1회, 아도나이(주, 주님)이 5회 반복되는데, 70편의 시에서는 여호와 2회, 엘로힘 3회, 아도나이 4회를 사용한다. 가령 내가 나의 아버지를 부를 때 저의 본명을 직접 부르며 그 존재감을 상기할 때와 직함을 불러 하시는 일의 성격을 나타내는 것과 친밀함으로 호칭을 달리하며 가까이할 때, 그 쓰임은 상황을 규정하고 나의 상태를 대변한다. 두 시의 시점도 다른데, 먼저 드는 의문점은 70편의 시가 어느 기념식을 위해 40편의 후반부를 인용하는 듯 보인다. 그렇다면 굳이 후반부의 ‘속히’ 도우심을 바라는 부분보다 앞서 40편 전반부의 감사와 찬송과 영광을 표현하는 부분이 '기념식'의 용도로 더 어울리지 않았을까? 이해를 위해 잠시 40편 전반부의 고백을 묵상하여 보자.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하게 하셨도다

 

새 노래 곧 우리 하나님께 올릴 찬송을

내 입에 두셨으니 많은 사람이 보고 두려워하여

여호와를 의지하리로다

 

여호와를 의지하고 교만한 자와 거짓에

치우치는 자를 돌아보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주께서 행하신 기적이 많고

우리를 향하신 주의 생각도 많아

누구도 주와 견줄 수가 없나이다

 

내가 널리 알려 말하고자 하나

너무 많아 그 수를 셀 수도 없나이다

(40:1-5).

 

만일 어떤 기념식에서 쓰기 위해 자신의 시 가운데 어느 대목을 인용하여 사용한 것이 맞는다면 이 부분이 훨씬 더 호소력 있고 감동적이지 않았을까? “누구도 주와 견줄 수가 없나이다/ 내가 널리 알려 말하고자 하나/ 너무 많아 그 수를 셀 수도 없나이다.” 하는 대목은 감미롭기까지 하다.

 

그러니까 어제 나의 하루는 ‘아픈 아이’와의 점심과 싫증나게 하는 반복적인 보챔, 느닷없이 또 춤을 배우겠다며 안달을 부려대는 통에 이를 만류하고 설득시키다 지쳤다. 또한 누구 자기 아이의 이런저런 사연에 대한 글에 마음이 오래 머물면서 그 또한 어쩔 수 없이 되풀이 되고 지연되는 마음과 그의 곤고함을 가늠하다 지쳤다. 그 와중에 설교원고 초안으로 돌아오는 주일에 전할 시편 본문 70편의 초안을 잡다 40편의 시와 중첩되는 대목에서 어딘가 닮은, 뭔가 의미를 더하시고자 하는 성령의 지도하심을 느꼈다. 그야말로 ‘사랑도 지겨울 때가 있다’는 대중가요의 한 대목처럼 좋은 것도 신물이 나고 늘 같은 날의 연속이 같은 말을 부르고 같은 생각을 쥐고 흔드는 일에 지친다. 몸은 기진하여 저녁 먹고 가정예배를 드린 후에 초저녁에 그만 잠에 곯아떨어졌다. 사랑하시는 자에게 잠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총이다.

 

그리고 다시 아침, 이른 시간에 일어나 두 편의 시를 나란히 두고 오늘 아침에 두신 새로운 내용을 묵상한다. 바로의 술 맡은 관원장과 떡 맡은 관원장의 같은 것 같으나 다른 결과의 꿈을 요셉이 해석하면서 하는 말이 인상적이다. “그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꿈을 꾸었으나 이를 해석할 자가 없도다.” 하자, 의당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해석은 하나님께 있지 아니하니이까?” 하고 마땅히 저들의 말을 듣는다. “청하건대 내게 이르소서(창 40:8).” 먼저는 나의 일과와 중첩되는 부분에서 사명감을 느낀다. 예전의 나와 지금의 나를 나누어 달라진 점을 하나만 꼽으라면, 내가 왜 저런 일에 귀를 기울이고 마음을 쓰게 되었을까?

 

나는 그리 남의 영혼에 관심을 두던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냉정하여 나는 사랑도 이기적으로 하였다. 헤어질 것 같아 먼저 이별을 통보하고, 모든 이별은 무식하고 무섭게 베어냈다. 아주 철저하게 저에 대한 모든 기억이나 연락처를 차단하여 여지를 두지 않을 정도로 말이다. 그런데 내가 병적인 누구 누구의 일과 말에 거듭 시달리듯 듣고 듣는 일에 우선이고 뭐라 말하고 또 말하는 데 게을리 할 수 없는 게 사명이 되었으니, 그렇게 돌려보내고는 마음이 어려워서 오후께 전화를 했다가 한 시간을 훌쩍 넘기는 동안 연속적으로 같은 말이 되풀이 되었고, 어쩔 수 없음에 지겨워서도 손을 흔들었다. 그런데 이를 보면서 저는 아픈 아이니까, 하고 예외로 둘 게 아닌 것을 알았다. 온전하고 나름 배운 게 많고 자기 몫의 일을 잘하는 ‘정상적인 사람’의 경우도 조금만 들춰보면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겉은 멀쩡하고 저의 허세는 오히려 위선적으로 감쪽같지만 그래서 중증이다. 그리 여겨지는 사람은 어찌할 방도도 없다. 주가 아니시면 손도 못 댈 지경이다. 자신은 멀쩡하다는데 뭐라 한들? 결국 주의 인자와 긍휼하심이 아니면 방도다 없다.

 

그러나 주여 주는 긍휼히 여기시며

은혜를 베푸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자와 진실이 풍성하신 하나님이시오니

내게로 돌이키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주의 종에게 힘을 주시고

주의 여종의 아들을 구원하소서

(시 86:15-16).

 

이를 히브리서에서는,

 

내가 그들의 불의를 긍휼히 여기고

그들의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새 언약이라 말씀하셨으매

첫 것은 낡아지게 하신 것이니 낡아지고

쇠하는 것은 없어져 가는 것이니라

(히 8:12-13).

 

곧 새 언약이라. 말씀으로밖에는 감당이 안 된다. 첫 것은 낡아지고 쇠하여야 한다. 다시 말해,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고후 4:16).

 

이에 소망을 둠으로 나는 오늘 시편의 간절함으로 주께로만 아뢴다.

 

내가 나의 침상에서

주를 기억하며

새벽에 주의 말씀을 작은 소리로

읊조릴 때에 하오리니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음이라

내가 주의 날개 그늘에서

즐겁게 부르리이다

(시 63:6-7).

 

다른 길이 없다.

 

내 생명을 찾아 멸하려 하는 자는

다 수치와 낭패를 당하게 하시며

나의 해를 기뻐하는 자는 다 물러가

욕을 당하게 하소서

(시 40:14).

 

또한,

 

주를 찾는 자는 다 주 안에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시며

주의 구원을 사랑하는 자는

항상 말하기를 여호와는 위대하시다

하게 하소서(16).

 

여기에서의 지칭은 우선 일인칭으로 ‘나’다. 단수로 쓰인 것이, 70편에 인용되면서는 ‘우리’로 복수로 쓰이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주를 찾는 모든 자들이

주로 말미암아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하시며

주의 구원을 사랑하는 자들이

항상 말하기를

하나님은 위대하시다 하게 하소서

(70:4).

 

개인적인 시를 기념식에 쓰기 위해 복수형으로 지칭을 바꾼 것이라 생각하면 쉬운데, 다시 5절에 이어지는 ‘나’로 국한하는 부분에서 걸린다.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오니

하나님이여 속히 내게 임하소서

주는 나의 도움이시오

나를 건지시는 이시오니

여호와여 지체하지 마소서

(5).

 

이는 ‘나’의 이야기가 ‘우리’의 이야기에서 벗어날 수 없고, ‘우리’의 문제는 궁극적으로 ‘나’의 문제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인 것을 짐작하게 한다. 곧 이런저런 오늘의 문제가 오늘에 일어난 게 아니라 그 부모의 일과 무관하지 않고 그 부모는 그 위 부모의 세대와 무관하지 않음으로, 우리의 오늘 이 개별적인 개체발생은 모두의 공통되고 계통적인 계체발생을 벗어날 수 없다. 나는 우리의 병적인 문제들, 죄 앞에서 궁극적으로 나의 문제가 내 자식의 문제로 이어질 것을 각오해야 한다. 나의 부모의 일이 오늘 나의 일과 무관하지 않은 것처럼, 아니 우리 안에는 그 외 무수히 많은 관계와 관계의 얽히고설킨 문제로 뒤엉겨 있다는 것을….

 

형들의 미움과 저들의 무참한 행실이 빚은 노예 생활과 그 집 보디발의 아내의 모략과 억울한 누명으로 옥살이를 하면서 오늘 새로 또 만나는 술 맡은 자와 떡 맡은 자의 운명의 갈림이 어쩌다 우연이 결코 아닌 것을 두고. 비록 서로는 금세 잊고 자기 살 궁리에 여념이 없으나,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기억하지 못하고 그를 잊었더라(창 40:23).” 그러는 중에서도 하나님은 여호와이시며 엘로힘, 나의 하나님이 되시고 또한 아도나이, 나의 주로 내 곁에서 늘 ‘나’와 ‘우리’의 경계를 허물고 계심을 두고 묵상하게 된다.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황폐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

(시 63:1).

 

나는 오늘 시편의 첫 구절에서 눈물이 핑, 돌고 가슴이 울컥, 한다. 마치 ‘다 안다’ 하시며 내 어깨에 손을 얹으시는 주의 인자하심을 몸으로 느끼는 듯하다. 하여 나는,

 

내가 나의 침상에서 주를 기억하며

새벽에 주의 말씀을

작은 소리로 읊조릴 때에 하오리니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음이라

내가 주의 날개 그늘에서 즐겁게 부르리이다

(6-7).

 

이를 살며, 사랑하며, 배우면서 주의 구원의 날까지 구원을 이루어가는 일에 대하여,

 

나의 영혼이 주를 가까이 따르니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거니와

나의 영혼을 찾아 멸하려 하는

그들은 땅 깊은 곳에 들어가며

칼의 세력에 넘겨져

승냥이의 먹이가 되리이다

(8-10).

 

현실의 냉혹함 앞에서 주를 바란다. 고로 왕 같은 제사장이요, 선지자로 나는 서서 주를 즐거워하리니,

 

왕은 하나님을 즐거워하리니

주께 맹세한 자마다 자랑할 것이나

거짓말하는 자의 입은 막히리로다

(11).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