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셉이 아우를 사랑하는 마음이 복받쳐 급히 울 곳을 찾아 안방으로 들어가서 울고 얼굴을 씻고 나와서 그 정을 억제하고 음식을 차리라 하매
창 43:30-31
사람들이 우리 머리를 타고 가게 하셨나이다 우리가 불과 물을 통과하였더니 주께서 우리를 끌어내사 풍부한 곳에 들이셨나이다
시 66:12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저마다의 사연이 있다. 이는 무거워 가슴 깊이 가라앉은 듯한데, 순간순간 수치와 오욕으로 변한다. 누구의 그와 같은 사연을 듣는 일은 젖은 솜이불을 덮고 눕는 일만 같다. 어렵게 말로 끄집어낸 것일 텐데, 나는 이를 두고 주의 이름을 부른다. “그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약 5:16).”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사는 그 속이야 오죽할까? 한데 또 그 말을 듣고 서로 알아 이고 진들, 짓누르던 짐의 무게가 좀 덜어지기는 하는 것일까? 우리는 저마다 악하고 무익할 뿐이라, “선을 행하고 전혀 죄를 범하지 아니하는 의인은 세상에 없기 때문이로다(전 7:20).” 오직 주의 은혜로만이 쉼을 얻을 수 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 11:28).
혈루증 앓는 여인이 있었다. 여자로서의 수치와 그로 인하여 함께 하지 못하는 생의 무게로 짓눌리고 있었다. 하루는 예수께서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동네를 지나가고 계셨다. 여인은 아무도 몰래 예수의 옷자락이라도 만지면 좀 나을까 하여 인파를 뚫고 사람들 사이에서 예수의 옷을 만졌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혈루증은 멈추었고 예수님은 자신에게서 능력이 나간 것을 아시고 발길을 멈추셨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게 손을 댄 자가 누구냐 하시니 다 아니라 할 때에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무리가 밀려들어 미나이다(눅 8:45).” 본인만이 아는 일이라, 그 와중에 예수님은 가던 길을 멈추시고 굳이 그 여인을 찾으신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게 손을 댄 자가 있도다 이는 내게서 능력이 나간 줄 앎이로다 하신대(46).” 이쯤 되자 여인은 더는 시치미를 뗄 수 없어 주의 앞에 엎드린다. “여자가 스스로 숨기지 못할 줄 알고 떨며 나아와 엎드리어 그 손 댄 이유와 곧 나은 것을 모든 사람 앞에서 말하니(47).” 이를 굳이 모든 사람 앞에서 말하게 하신 이유가 무얼까? 여자로서는 수치요, 아무도 모르게 하며 12년을 살아왔던 것인데… 그때에 예수님의 말씀이 그 의도를 알게 한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더라
(48).
더는 일개 여자가 아니다. 아무도 모르게 앓고 살던 고통에서 벗어났다. 그녀의 신분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딸로 인정되었다. 무엇보다 저이의 믿음이 인정되어 구원을 받았다. 그리고 ‘평안히 가라.’
나는 누구의 사연을 마음에 담고 주의 이름을 되뇌었다. 내가 안고 짊어질 수 있는 게 아니다. 본인은 또 얼마나 속을 끓이며 살아왔을까? 그러니 그 말할 수 없는 비밀을 내게 털어놓은 것이 설마 나에게 한 것이겠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하시는 주의 부르심을 묵상한다. 그때는 명절 끝날이다. 나름 풍족하고 괜찮다고 여길 만한 때이다.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요 7:37).” 먼저는 자기 목마름을 알아야 한다. 무엇이 문제이고 어떤 이유인지, 목마르지 않은 영혼으로는 생수를 바라지도 않을 터인데,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38).” 왜 그 배에서일까?
자고로 우리 배에는 온갖 더러운 것이 들어있다.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허물과 실수가 들어 있다. 이를 무마하려 남의 말을 별식처럼 즐기며 주워 먹은 것들이 그 속에 가득하다. “남의 말하기를 좋아하는 자의 말은 별식과 같아서 뱃속 깊은 데로 내려가느니라(잠 18:8).” 그것은 악취가 나고 더러워서, 입으로 나오는 것마다 자신을 더럽히는 줄을 알지 못하였다.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마 15:18).” 어떤 푸념과 남 탓은 모두 그 배에 쌓인 퇴비 같은 것이라 악취가 진동을 한다. 누구 일을 부풀리고, 헐뜯고, 험담하는 까닭도 그래서이다.
그렇듯 더러움이 가득하였는데,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넘친다니!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요 7:38).” 저의 무기력과 무감각증의 원인을 알 것 같았다. 왜 그처럼 자신을 탓하고 자기 허물로 모든 것을 돌리는지도 알겠다. 스스로를 무가치한 존재로 여기며, 남편이 아이가 함부로 막대하여도 참고 견디는 이유를 알겠다. 그러니 내 속은 덩달아 안타까웠고 시름이 깊어져 나도 모르는 탄식으로 주의 이름을 연거푸 부르게 되었다. 그러니 난들 또 이 이야기를 누구에게 할 수 있겠나?
여호와 우리 하나님이시여
주 외에 다른 주들이
우리를 관할하였사오나
우리는 주만 의지하고
주의 이름을 부르리이다
(사 26:13).
우리를 지배하고 다스려오던 주인이 너무 많다. 저들의 사랑을 받고자, 저들로부터 인정받기 위한 아이로 자라면서 그 습성은 고착되었고 이제는 일상이 되었다. 남의 무시가 당연하게 여겨진다. 남편의 부당한 처사와 요구와 막무가내의 처신이 이상하지 않다. 오히려 그러면 그럴수록 더 잘 해야 한다는 조바심만 인다. 내가 잘하면 된다는 강박이 지배하고 있다. 일찍부터 몸에 밴 습성이 오늘도 일상이 되어, '아무렇지도 않다'고 여기게 하는 것이다. 그게 왜 부당한지, 옳지 못한지, 자신에게 왜 함부로 구는데도 싫다고 말하지 못하는지, 저는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다. 그래야 하는 줄 알았고, 친정엄마는 지금도 그러고 산다! 아뿔싸!! 저의 문제가 실은 계통발생을 이어 개체발생을 되풀이 하고 있던 것이다. 의당 말 한 마디 못하고 사는 것에 대해 그게 마땅하다고 여기는 것이다.
머잖은 날에 아들 아무개가 혹은 딸애가 그러고 산다면? 누군가를 억압하고 다스리고 통제하거나, 역할이 바뀌어서 부당한 처우와 막대하는 환경에서도 그게 왜 나쁜지 인식조차 못하고 그저 당하고만 산다면? 둘 다 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아니 그게 아니면, 지금 자기처럼 살아간다면? 하고 다그치듯 나는 물었고 저는 고개를 책상에 처박으며 그 일은 끔찍한지 오금이 저리는 듯하였다. 스스로를 아끼고 존귀히 여기는 것도 주를 인정하는 것임을. 나 자신은 변변치 못한 것 같으나 그런 날 위해 주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까지 사랑하신 것임을. 만세전부터 이미 예정하시고 택정하사 하나님의 존귀한 자로 삼으시고 주의 자녀로 살게 하려 하심인데, 그런 자신을 지금처럼 막대하고 아무렇게나 여긴다면, 막대하도록 내버려두고 아무렇게나 여겨도 괜찮다고 한다면, 우리 하나님의 심정은 또 어떠하실까? 내 자식이 그런 대접을 받고 그리 자신을 함부로 굴리고 살고 있다면 부모된 자로 우리 심정은 어떠할까?
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아는 자는
주를 의지하오리니
이는 주를 찾는 자들을
버리지 아니하심이니이다
(시 9:10).
나는 모진 말 같아도 저를 다그쳐야 했고, 왜 그처럼 함부로 굴도록, 부당하게 막대하도록 내버려두는지 몰아세웠다. 그러는 동안 마음이 너무 아팠고, 그게 나의 지난날이었구나! 생각하면서 통회하였다. 부디 내게 털어놓은 저이의 말들이 빌미가 되어 주께 아뢰고 고함으로 ‘딸아, 안심하고 평안히 가라.’ 하시는 주의 음성이 저이에게도 임하시기를 바랐다.
바람이 몹시 불고 하늘은 청아한 하루였다. 나는 일찍 교회에서 나와 천천히 걸으며 저이의 말을 되뇌다 울컥, 울컥하였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자꾸자꾸 주의 이름을 되뇌는 것뿐이었다. 어느새 낙엽은 쓸려 바람에 끌려다녔고, 일찍 불어온 찬바람은 옷깃을 여미어도 살갗을 서늘하게 하였다. 내가 뭐라고 저이의 말을 다 받아내겠나. 들었다 한들 내가 또 무슨 수로 그의 사정을 해결할 수 있겠나. 다만 나는 예수의 옷자락이라. 바닥에 끌리는 더러운 옷깃이라 해도, 그러한 심정으로 내게 토로한 말들이 부디 예수님의 발걸음을 멈추게 할 것을 믿는다. 그리고 나는 다시 이 아침, 말씀 앞에 앉았다. 누구를 생각하다 서러운 마음에 주의 이름을 되뇐다. 우리의 연약함과 이 지긋지긋한 어쩔 수 없음을 두고 주께 아뢴다.
오늘 본문에서도 요셉은 말을 못하고 혼자 숨어서 운다. 그 마음을 짐작하다 우리네 인생이 눈물겹다. 사는 일이 다들 참으로 어지간하다. 이 진저리나는 날들에도 우리는 주의 은혜를 바란다. “요셉이 아우를 사랑하는 마음이 복받쳐 급히 울 곳을 찾아 안방으로 들어가서 울고 얼굴을 씻고 나와서 그 정을 억제하고 음식을 차리라 하매(창 43:30-31).” 비록 억제하고 참으며 혼자 그 모든 서러움을 이고 지고 사는 것 같은 세월이나 주께서는 반드시 가던 걸음을 멈추실 것이다. 오늘 시편은 이를 통회한다.
사람들이 우리 머리를 타고
가게 하셨나이다
우리가 불과 물을 통과하였더니
주께서 우리를 끌어내사
풍부한 곳에 들이셨나이다
(시 66:12).
가까운 날에 우리 입에서도 이와 같은 고백이 흘러나올 것이다. 비록 사람들이(사랑하는) 나의 머리를 타고 간다. 불과 물을 통과해야 하듯 하루하루가 때론 지겨울 때가 있다. 그럼에도 주께서 우리를 이끌어 풍부한 곳으로 들이실 것이다. 부디 저에게도 나에게 보이는 것이 들릴 수 있기를. 자신을 자책하지 말고, 남들과 견주어 그 서러움으로 혼자 눈물짓지 말고 오직 우리 주께 고함으로,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가 내 기도를
물리치지 아니하시고
그의 인자하심을 내게서
거두지도 아니하셨도다
(20).
이처럼 누구를 마음에 들여, 저의 사연을 듣는 일은 마치 온 우주를 짊어지는 것과 같다. 내가 알던 모든 세계를 뒤흔드는 역사다. 말하는 이나 이를 듣는 이나 우리의 입에서는 탄식이 나온다. 그러다 같이 주의 이름을 부른다.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으며 아무도 모르게,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던 그 고통을 혼자 이고 지고 살았다. 이에 주의 성령이 함께 하심으로 말하기 어려운 심정을 말로 토설하고 눈물로 애원하자, “예수께서 돌이켜 그를 보시며 이르시되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시니 여자가 그 즉시 구원을 받으니라(마 9:22).” 하시며 우리 주님은 결코 외면하지 않으신다. 모르실 리 없다. 그냥 지나치지 않으신다. 그리하여,
주께서 나의 슬픔이 변하여
내게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
(시 30:11).
우리의 만남이 단지 푸념과 넋두리로 지나지 않기를 기도하였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나는 저에게 저의 남편을 보자, 이를 두고 기도하자고 하였다. 내가 무얼 할 수 있어서가 아니다. 우리는 한 자녀라, 주의 자녀들답게 살 수 있기를.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라(고전 16:13).” 여기서 남자는 성별을 나누는 게 아니라, 강건함을 강조하기 위한 수사다. 먼저는 깨어나야 한다. 무엇이 문제이고 그게 왜 죄인가를 알아야 한다. 믿음이 온전하면 이를 분별할 수 있다. 우리에게는 주가 더하시는 분별의 은사가 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 이로써 굳게 서야 한다. 그럴 수 있게 그렇게 하시려고 주가 더하시는 날들임을 안다.
모든 게 속수무책인 것 같으나 이를 인정하는 날, 비로소 주의 이름을 부르게 될 것이다. 더욱이 우리로 주의 일을 맡기신 게 아닌가? 그렇다면 이를 감당할 수 있는 능력도 더하실 터. 나는 저의 등을 쳐주며 힘내, 하고 돌아서다 눈물이 핑 돌았다. 마음은 어려웠고 덩달아 사는 일에서 서러웠다. 요셉이 운다. 아무도 몰래 운다. 저의 서러움과 원통함을 어찌 주께서 모르실까? 오늘의 우리는 오늘로 전부가 아니다. 우리는 아직 끝난 게 아니다. 우리가 가야 할 길은 아직도 남았다. 주의 사역자로 세우심은 허투루 그리 된 일이 아니다. 하나님이 귀하게 사용하시려고 오늘의 모진 날도 허락하심일 테니, 저에게도 그리 말하였다. 장담하건대 하나님은 후회하지 않으신다. 실수하시는 분이 아니다. “그러므로 내가 편지로 너희를 근심하게 한 것을 후회하였으나 지금은 후회하지 아니함은 그 편지가 너희로 잠시만 근심하게 한 줄을 앎이라(고후 7:8).”
비록 오늘은 우리를 노엽게 하나 우리의 이 노여움이 우리로 주를 찬송하게 할 것이다.
진실로 사람의 노여움은
주를 찬송하게 될 것이요
그 남은 노여움은
주께서 금하시리이다
(시 76:10).
나는 이와 같은 말씀을 여러 번 되뇌며 저이를 생각하였고, 우리의 날들을 돌아보았고, 여전하여서 도무지 해결이 나지 않을 것 같은 문제들을 두고 주를 생각하였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역설인가? 우리의 노여움이 우리로 주를 찬송하게 할 것이라니! 만일 나의 지난날이 없었다면, 그 허물과 죄를 부끄러워하지 않았다면 이를 두고 주의 이름을 부르며 회개하지도 못했을 것이고, 그렇다면 여전히 자책하며 또는 죄책으로 인하여 슬피 울며 이를 알고 살 텐데. 주께서 나로 나의 노여움을 발판으로 저의 아픔과 서러움을 어르게 하신다. 주의 이름으로 달래며 새 힘 얻기를 위하여 기도하게 하심이었다.
난들 어쩌겠나? 내 코가 석 자고, 나 하나 건사하지 못하고 쩔쩔매는 위인인데… 나의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게 하심이었으니.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요 7:38).
부디 저의 날들도 그러할 것을. 하여 주의 종으로 사역자로 불러 세우신 것일 테니,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
할렐루야
(시 150:6).
반드시 우리가 살아서 사는 날 동안에 주를 찬송하게 하시려고,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엡 1:4-6).” 이와 같은 원대하신 역사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믿으며.
온 땅이여 하나님께
즐거운 소리를 낼지어다
그의 이름의 영광을 찬양하고
영화롭게 찬송할지어다
하나님께 아뢰기를
주의 일이 어찌 그리 엄위하신지요
주의 큰 권능으로 말미암아
주의 원수가 주께 복종할 것이며
온 땅이 주께 경배하고
주를 노래하며 주의 이름을
노래하리이다 할지어다 (셀라)
(시 66:1-4).
이에,
와서 하나님께서 행하신 것을 보라
사람의 아들들에게 행하심이 엄위하시도다
(5),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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