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주의 종으로 그 아이를 대신하여 머물러 있어 내 주의 종이 되게 하시고 그 아이는 그의 형제들과 함께 올려 보내소서
창 44:33
하나님이여 민족들이 주를 찬송하게 하시며 모든 민족으로 주를 찬송하게 하소서
시 67:5
늘 같은 날의 반복인 것 같다. 어느새 또 한 주간이 다 지나고, 일상은 일상으로 여상하였다. 그러는 동안에도 해는 지고 바람은 불어 계절은 바뀌었고, 우리의 영혼은 자라간다. 아무 일도 없이 평소와 다름없는 것 같으나 그 속에는 구구절절한 사연들이 있다. 그렇게 고요한 수면 아래로 물은 흩어지고 뒤집혀서 물고기들은 숨을 쉬고 미생물들은 자리를 바꾼다. 그래서 말하길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고 보는 게 다가 아니라고 하는 모양이다. 성경은 일러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엡 4:16).” 그렇게,
땅이 그의 소산을 내어 주었으니
하나님 곧 우리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시리로다
(시 67:6).
이와 같은 여정은 주를 찬송하게 하고 바람으로 복이 있다. 모름지기 우리는 ‘애굽’에서 나와 ‘홍해’를 건너면서부터 더는 애굽으로 돌아갈 수 없다. ‘광야’를 통과하고 ‘요단’을 건넘으로 비로소 약속의 땅 ‘가나안의 전투’는 시작된다. 나에게도 이 여정은 뚜렷하였다. 가만히 묵상하고 있으면 그때마다 나의 하나님은 어떠하셨는지 선명해진다. 이를 모세의 증언으로 대신하면 “너희보다 먼저 가시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애굽에서 너희를 위하여 너희 목전에서 모든 일을 행하신 것 같이 이제도 너희를 위하여 싸우실 것이며, 광야에서도 너희가 당하였거니와 사람이 자기의 아들을 안는 것 같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걸어온 길에서 너희를 안으사 이 곳까지 이르게 하셨느니라(신 1:30-31).” 이를 누구는 몸소 체험하여 감사로 영광을 올리고 누구는 이를 거치고도 믿지 아니한다.
나의 애굽은 막무가내였다. 겁 없이 살았고 이를 모두 실토하고 나면 내 곁에 남을 사람은 없다. 얼마나 함부로 여기며 살았는지, 홍해를 건너면서 나의 애굽과 나를 따르는 군사들은 수장되었다. 함께 죽고 못 살 것처럼 굴던 이들이 모두 떨어져나갔다. 지금도 종종 그때의 누구를 만나거나 통화를 하면 예전 같지 않다. 서로 소원하고 서먹한 것은 ‘여기와 거기’의 간격을 뜻하는 듯하다. 그렇게 나는 광야를 통과하면서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하나님의 도우심, 모세의 증거와 같이 ‘나보다 먼저 가시는 나의 하나님’을 나는 이제 확신한다. 그 ‘여호와께서 애굽에서 나를 위하여 나의 목전에서 모든 일을 행하신 것’을 되돌아본다. ‘이제도 나를 위하여 싸우시는 것을 본다.’ 그렇게 ‘광야에서도 너희가 당하였거니와 [사람이 자기의 아들을 안는 것 같이 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내가 걸어온 길에서 나를 안으사 이 곳까지 이르게 하셨다.]
새삼 이러한 사실 앞에 놀라운 것은, 가을 때문이라고 해두자. 우연히 귀에 꼽고 듣던 음악을 그 시절로 가을노래로 선정하였더니, 그리움은 무작위로 내 안을 요동치는 것이었다. 천천히 걷다, 어디 의자에 앉아 오가는 사람을 보다, 문득 누가 그리운 것도 같고… 그 시절 그러하였던 일들이 막무가내로 기억나면서…. 나는 내가 얼마나 엉터리였는지를 생각하다보면, 주의 은혜로 살았고 살아가고 있음을 실감한다. 이를 바울은,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하고 진술하고 있다(롬 5:20). 그렇게 나는 그러하였다.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21).”
곧 “또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이르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하니(행 2:40).” 그리하여 주신 이의 은혜다. 어제도 그제도 요즘은 참 걷기 좋은 계절이다. 겁이 나서 어디 멀리까지 걸어가지는 못하지만 나는 걷다가 한적한 곳에 앉아 예전으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나의 하나님은 어떠하셨는가를 생각하다 감격스러웠다. 누구의 사연도 어떤 염려나 근심도 ‘수면 위로 운행하시는 이’의 은총으로 산다. 모든 게 은혜였다는 말, 그때는 함부로 “거역하며 주께서 그들 가운데에서 행하신 기사를 기억하지 아니하고 목을 굳게 하며 패역하여 스스로 한 우두머리를 세우고 종 되었던 땅으로 돌아가고자 하였나이다. 그러나 주께서는 용서하시는 하나님이시라. 은혜로우시며 긍휼히 여기시며 더디 노하시며 인자가 풍부하시므로 그들을 버리지 아니하셨나이다(느 9:17).”
이것이 그때마다 나를 두고 하시는 말씀이지 않던가. 말씀이 살았고 운동력이 있다는 것을 나는 실감한다. “주의 크신 긍휼로 그들을 아주 멸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도 아니하셨사오니, 주는 은혜로우시고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심이니이다(31).” 나의 하나님은 늘 용서하시는 하나님이시고, 버리지도 아니하시고, 언제나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었다. 나는 이제 그것으로 누구의 말을 받는다. 어떤 사연을 마음에 두고 주의 이름을 부른다. 나의 여러 어려움이나 모자람을 주께 아뢴다. 이처럼 말씀으로 실감나게 하시는 나의 이제 남은 날들이 감사하였다. 눌렀던 가을 노래들을 지우고 다시 조용한 찬양을 귀에 꼽고 앉아 한참을 생각에 잠겨있었다. 돌아보면 모든 게 은혜라.
나는 누구에게 글을 쓰시라 권한다. 자기 이야기를 쓴다는 것은 자기 이야기 속에 하나님의 이야기를 읽는 일이다. 글은 잘 쓰고 못 쓰고 하는 게 없다. 글은 감격이다. 글 쓰는 이의 감격과 그 글을 읽고 공감하는 이의 감격이 좋은 글과 나쁜 글로 나뉠 뿐이다. 누가 용기를 내어 자기 이야기를 쓴다. 말하기 어려운 사연을 두고 그 느낌과 생각에 하나하나 언어를 입힌다. 기억은 허상처럼 떠돌다가 저의 언어로 옷 입고 정의된다. 그게 슬픔이었구나, 슬픈 아이였구나. 그게 행복이었구나, 바라던 행복이었구나. 하나하나 모습을 드러내는 저의 내면의 이야기를 조용히 나는 본다. 가만히 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말을 안 해도 좋다. 모르는 척 굴어도 서로는 기도로 이어진다. 어느 부분에서 같이 길게 숨을 내쉬며 주님- 하고 길게 호흡을 낸다.
보다 용기를 낸다면 저의 글을 어디에 낼 수 있게 같이 다듬고 응원한다. 드러난 자기 이야기는 더 이상 자신을 찌르지 못한다. 마치 옷 속에 있던 바늘처럼 모르고 찔릴 때와는 달리, 알면서는 그것으로 유용하게 바느질을 한다. 곧 나는 누구의 이야기에서 어떤 슬픔을 나의 슬픔에서, 어떤 수치와 부끄러움을 나의 면구스럽고 한심했던 것으로 이해한다. 그렇게 우리 생의 씨실과 날실이 더해지고 포개지면서 ‘아름다운 옷’으로 갈아입는 것이 아닐까? 이 모두는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이다. “여호와께서 자기 앞에 선 자들에게 명령하사 그 더러운 옷을 벗기라 하시고 또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 죄악을 제거하여 버렸으니 네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 하시기로(슥 3:4).” 그전까지 얼마나 스스로를 들들 볶는 괴로움이었던가?
“대제사장 여호수아는 여호와의 천사 앞에 섰고 사탄은 그의 오른쪽에 서서 그를 대적하는 것을 여호와께서 내게 보이시니라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여호와께서 너를 책망하노라 예루살렘을 택한 여호와께서 너를 책망하노라 이는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가 아니냐 하실 때에 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입고 천사 앞에 서 있는지라(1-3).”
사탄은 우리를 수시로 고자질한다. 우리의 더럽혀진 옷을 보며 정죄하고 자책하게 한다. 이를 탄핵하듯 하나님 앞에 드러내어 책망하고 꾸짖는다. 실은 나의 모습이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 같이 더럽다. 한데 하나님은 우리를 정죄하는 사탄을 오히려 책망하신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보혈로 깨끗하여진 아름다운 옷으로 갈아입히신다. 더는 나의 지난날이 부끄러움이나 후회의 순간으로 자책하게 하지 못한다. 스스로도 정죄하지 못하게 하신다.
보라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리니
나를 정죄할 자 누구냐
보라 그들은 다 옷과 같이 해어지며
좀이 그들을 먹으리라
(사 50:9).
오히려 나를 공격하던 것들이 좀 먹은 옷과 같이 해어질 것이다. 누가 항상 버릇처럼 자기 탓을 하였다. 상대가 부당하였고, 저의 처사는 온당하지 못하였는데도 그것이 자기 때문이라고 자책하는 것이다. 일찍이 더 어릴 때부터 저의 내면에는 그와 같은 괴롭힘이 늘 자리 잡고 있었다. 자기 때문에 엄마가 아빠한테 욕을 듣고, 손찌검을 당하고, 쫓겨나기까지 했다고 여긴다. 그러면서도 아빠의 억지스러운 화가 또한 자신 때문이라는 자책이 늘 떠나지 않았다. 그래서 더 열심히 공부하거나 칭찬 받는 아이로 살았는데 그럼 그럴수록 모두는 아파하고 힘들어한다고 여겼던 것이다. 그러니 우리 안에 여전히 참소하는 자의 거침없는 공격이 가혹하기만 하다. 이제 나는 나의 허물로 죽었던 나를 살리신 이로 말미암아 저를 위로한다.
곧 “내가 또 들으니 하늘에 큰 음성이 있어 이르되 이제 우리 하나님의 구원과 능력과 나라와 또 그의 그리스도의 권세가 나타났으니 우리 형제들을 참소하던 자 곧 우리 하나님 앞에서 밤낮 참소하던 자가 쫓겨났고 또 우리 형제들이 어린 양의 피와 자기들이 증언하는 말씀으로써 그를 이겼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들의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계 12:10-11).” 이를 서로 알게 하시려고, 오늘 우리의 만남을 허락하시는 것이다. 나는 이제 저가 저의 글로 주께 고하고, 이를 또한 더는 부끄러워하지 않으며 오히려 주의 은혜의 세마포로 어찌 감싸주셨는가를 증거 하는 삶이되기를 응원한다.
참 이상하지? 지나간 날이 그리움처럼 사무쳐 마음을 적시는가했더니, 그것은 고스란히 나를 부끄럽게 하며 참소하는 자의 목소리로 여겨졌다. 한데 그럼 그럴수록 주의 은혜가 내게 얼마나 크고 위대하셨는가를 역설하였고, 나의 연약함으로 누구를 위로하고 저의 동일한 수치를 덮어주며 주의 아름다운 옷으로 갈아입혀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었으니. “너는 이것들을 명하고 가르치라. 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 오직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있어서 믿는 자에게 본이 되어, 내가 이를 때까지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전념하라(딤전 4:11-13).” 우리가 주의 은혜를 받고 그의 인자하심에서 거한다는 것은 이처럼 그저 여상한 일이 아니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일상은 없다. 우리의 평범함은 그 자체로도 주의 은혜를 증거 한다.
오늘 본문에서도 하나님은 요셉을 통하여 저들의 죄상을 스스로 구술하게 하신다. 그 고백하는 시간을 통해 자신들의 구구절절한 사연을 마주하게 하시는 것이다. 하여 “이제 주의 종으로 그 아이를 대신하여 머물러 있어 내 주의 종이 되게 하시고 그 아이는 그의 형제들과 함께 올려 보내소서(창 44:33).” 전에는 죽이던 자가 이제는 자신의 죽음으로 그 값을 대신하려는 데까지 이른 것이다. 전에는 수치요 부끄러움으로 자신을 정죄하고 찌르던 것들이 이제는 누구를 위로하고 주의 살아계심을 나타내는 실제의 예가 되었다. 곧 우리의 부끄러움과 치욕은 그대로인데 더는 것으로 찔리기보다 주의 인자와 진리로 씨실과 날실로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옷을 짜게 하신다. 나는 기꺼이 저의 글을 두 번 세 번 연거푸 읽으며 그 마음을 헤아려 주께 함께 아뢴다. ‘아픈 아이’에게 전화를 넣어 시시콜콜 별다른 이야기도 아닌 것을 두 번 세 번 설명하고 주의를 준다.
우리가 이처럼 누구의, 상한 심령의 누구에게 친구가 된다는 일은 주가 내게 행하신 일의 연속이다. 이를 위하여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신 것이요, 그의 기뻐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엡 1:9-10).” 말씀이 말씀으로만 있지 않고 나의 일상이 되고 여상하여 또 하루가 지나간 것 같으나 이 모두는 주께 상달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지혜자는 권하였던 것이다.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끝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는 이것을 그의 마음에 둘지어다(전 7:2).” 다들 좋고 즐거운 것을 추구하는 이때에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슬픈 자의 마음에게 이끄시는 것이었으니, “슬픔이 웃음보다 나음은 얼굴에 근심하는 것이 마음에 유익하기 때문이니라(3).” 무엇이 유익한가?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 자유인들이면서도 바벨론에 끌려온 포로 생활과 같다. 그러니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시 137:1).” 한데 그것으로 끝이겠나? 결코 그렇지 않음은,
우리가 이방 땅에서
어찌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까
예루살렘아 내가 너를 잊을진대
내 오른손이 그의 재주를 잊을지로다
내가 예루살렘을 기억하지 아니하거나
내가 가장 즐거워하는 것보다
더 즐거워하지 아니할진대
내 혀가 내 입천장에 붙을지로다
(4-6).
현실은 암울하고 그리하여 안 믿는 가정에서 또는 사랑하는 자를 의지하며 살아야 하는 것이겠으나, 내가 여호와의 노래를 못 부르고, 그 손의 재주를 잃어 연주하지 못하고, 내 혀가 입천장에 붙은 것 같을지라도,
하나님이여 민족들이
주를 찬송하게 하시며
모든 민족으로
주를 찬송하게 하소서
(67:5)
이것이 우리의 결말이다. 우리 믿는 자의 모든 결말은 하나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시리니
땅의 모든 끝이 하나님을 경외하리로다
(7).
그리하시려고 애굽에서 이끌어내셨고, 홍해를 건너 광야를 지나면서 몸에 밴 어린아이의 속성을 제하고, 가나안을 정복하게 하심이었다.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이다. 이를 알고 차지하는 자의 것이다.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마 11:12).” 하여 어느 농부는 자신의 가진 모든 소유를 팔아 ‘그 보물’이 묻힌 땅을 산다. 더는 이 땅에 보물을 쌓아두지 않는다.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하느니라(6:19).” 그리할 수 있도록, 반드시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사 복을 주시고
그의 얼굴 빛을 우리에게 비추사 (셀라)
주의 도를 땅 위에,
주의 구원을 모든 나라에게 알리소서
(시 67:1-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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