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나를 어려서부터 교훈하셨으므로

전봉석 2021. 11. 3. 05:19

 

그의 아버지가 허락하지 아니하며 이르되 나도 안다 내 아들아 나도 안다 그도 한 족속이 되며 그도 크게 되려니와 그의 아우가 그보다 큰 자가 되고 그의 자손이 여러 민족을 이루리라 하고 그 날에 그들에게 축복하여 이르되 이스라엘이 너로 말미암아 축복하기를 하나님이 네게 에브라임 같고 므낫세 같게 하시리라 하며 에브라임을 므낫세보다 앞세웠더라

창 48:19-20

 

하나님이여 나를 어려서부터 교훈하셨으므로 내가 지금까지 주의 기이한 일들을 전하였나이다

시 71:17

 

 

때론 우리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이 다르다. 나의 계획은 이러한데 하나님은 저렇게 일이 되게 하실 때, 우리는 그 현상에 얽매이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모든 현상은 지나가나 하나님의 뜻은 바로 선다. 이는 주를 신뢰하는 수밖에 없는데 오늘 시편은,

 

하나님이여 나를 어려서부터 교훈하셨으므로

내가 지금까지 주의 기이한 일들을 전하였나이다

(시 71:17).

 

어릴 때부터의 일을 더듬어 글로 쓰는 까닭은 그때부터 주의 역사하심이 생생하였다는 것을 이제는 인정하기 때문이다. 이를 인정하기까지 참으로 긴 시간을 보내온 것 같다. 그저 우연으로 여기며 또는 신세한탄으로 이어지던 것들이 도리어 주를 찬송하게 하는 근거가 되었다. 주의 기이한 일들로 말이다.

 

하나님이여 주의 의가 또한

지극히 높으시니이다 하나님이여

주께서 큰 일을 행하셨사오니

누가 주와 같으리이까

(19).

 

하는 시인의 고백이 나의 것이 되었다는 데서 하나님의 무한책임을 느낀다. 나는 잊었고 외면하여 나 몰라라 하고 살았던 날들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함께 계셨다. 심지어 내가 방황하며 죄악 중에 있을 때에도 하나님은 나의 곁을 떠나신 적이 없다. 어떻게 죄가 있는 곳에 은혜가 더할 수 있었을까?

 

어제 아침에 누구는 물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단절을 의미하며 이를 체험하셨다고 하는데 이게 무슨 의미인가? 하나님 앞에는 그 어떤 죄도 용납이 안 된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이 되어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리셨다. 이는 하나님과의 단절을 의미한다.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을 포기하실 때, “제구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마 27:46).” 이와 같은 절규는 함께 하시던 성령 하나님이 떠나시면서 절규하는 외침이다. 그로 인하여 성소에 가로놓인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졌다(51). 이는 이제 죄인 된 우리가 누구라도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다.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롬 5:20-21).” 곧 우리의 놀라운 역설은 자신이 죄인임을 알면 알수록 주의 은혜가 누구보다 크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때론 우리의 이해로는 설명하기가 너무 어렵다. 어째서 에브라임을 므낫네보다 앞세우고 있는지, 태어나기도 전에 에서는 버림을 당하고 야곱을 귀하다 하셨는지…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롬 4:20-22).”

 

곧 우리가 우리의 처한 현상을 다 알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일일이 바로잡고 고쳐 의로 이루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주께서 이루어가고 계심을, 이를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였다. “이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하지 못할 사실로 말미암아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난처를 찾은 우리에게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히 6:18).” 곧 우리의 믿음은 소망을 붙든 것이고 소망을 이룸은 연단으로 연마되었다. 연단은 인내함으로 얻어지는 것으로 인내는 어려운 환난, 현상으로 비롯되었다. 그래서도 우리에게는 현상에 너무 좌지우지 되지 않는 게 중요하다. 하면 우리를 마지막 때에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이를 오늘 시편으로 되새기면,

 

우리에게 여러 가지

심한 고난을 보이신 주께서

우리를 다시 살리시며

땅 깊은 곳에서

다시 이끌어 올리시리이다

나를 더욱 창대하게 하시고

돌이키사 나를 위로하소서

(시 71:20-21).

 

곧 오늘의 이런저런 현상은 우리로 주 앞에 무릎 꿇게 한다. 우리 힘으로 어떻게 해결해보려 하는 동안에는 결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아이의 분리불안을 호소하던 아이엄마가 실은 그 불안을 겪고 있었고, 남의 호의를 자신의 권리로 아는 이가 실은 고마운 줄 모르는 것과 같다. 아이를 보면 그 부모가 보이고 그의 가정사가 대충 그려지는 것과 같이 우리가 보고 듣는 게 전부는 아니다. 그 너머의 세계,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 2:9-11).” 이를 알게 하시려고 기타 여러 어려운 현상을 동원하시기도 하였다.

 

실제 주를 온전히 믿으려 하는 자가 어려움을 겪는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딤후 3:12).” 안이하고 무력하여 하나님을 등지고 살 때는 이것을 알지 못한다. 고로 오늘 우리가 겪는 어려움은 다 이유가 있다. 그렇다고 자신의 잘못의 결과로만은 아니다. 즉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롬 8:17).” 내가 주의 자녀인가 하는 증명은 그로 인하여 고난도 겪는가 하는 데서 확인할 수 있다. 자주 느끼지만 우리는 이 땅에 사는 동안 ‘바벨론 강가에서 울었다.’

 

나의 유리함을 주께서 계수하셨사오니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

이것이 주의 책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나이까

(시 56:8).

 

그러나 주께서는 반드시,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126:5).

 

이를 약속하셨다. 어차피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 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히 9:27-28).” 이것이 십자가로 인한 하나님의 의지다. 더는 죄로 인한 우리의 멸망은 없다. 믿는 자로 산다는 일은 이와 같은 놀라운 현상이 가리어져 있으나 숨겨진 바는 아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고전 15:20).” 그것으로 설교는 이어져서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롬 8:18).” 하는 말씀의 증거를 얻는다. 그래서 시인은 노래하기를,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또 비파로

주를 찬양하며 주의 성실을 찬양하리이다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주여

내가 수금으로 주를 찬양하리이다

내가 주를 찬양할 때에

나의 입술이 기뻐 외치며

주께서 속량하신 내 영혼이

즐거워하리이다

(시 71:22-23).

 

뜻 모를 즐거움이 우리 안에는 있다. 웃을 일이 아닌데 웃고 즐거워할 수 있는 것이 우리의 권세다. 이것은 주의 의를 알기 때문이다.

 

나의 혀도 종일토록

주의 의를 작은 소리로 읊조리오리니

나를 모해하려 하던 자들이

수치와 무안을 당함이니이다

(24).

 

결국 우리의 결국은 승리뿐이다. 아무리 용쓰며 산들, “싸울 날을 위하여 마병을 예비하거니와 이김은 여호와께 있느니라(잠 21:31).” 이것을 아는 자들만이 주의 자녀라 할 수 있는데, 그에 따른 점검은 간단하다. 1) 죄짐에 눌려 신음하는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하는 탄식이 저절로 나오고는 하는지(롬 7:24). 그로 인하여 절규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25).” 2) 죄과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한탄하는가? “무릇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잎사귀 같이 시들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 같이 우리를 몰아가나이다(사 64:6).” 곧 스스로 자신의 의를 기억하고 이를 가지고 사는 삶은 헛되다. 오른 손이 한 일을 왼 손이 몰라야 한다.

 

3) 구원을 위해 어찌할까, 하고 궁리하며 살아보았나? “선생들이여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행 16:30-31).” 4) 믿음을 지켜가기에 노력하는가?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 사투 없이 바른 교정은 없고, 만족함도 없다. 5) 얼마나 죄를 경계하는가?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살전 5:22).” 결국 이 간단한 다섯 가지 죄에 대한 자신의 경계만으로도 오늘의 신앙을 점검할 수 있다.

 

고난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욥의 증언이다.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욥 23:10).” 이를 바울의 음성으로 다시 들어보면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 5:3-4).” 곧 우리에게 주어진 날들에서 우리가 주를 의식하며 산다는 것은 두려워할 줄도 안다는 것이다. “만군의 여호와 그를 너희가 거룩하다 하고 그를 너희가 두려워하며 무서워할 자로 삼으라 그가 성소가 되시리라(사 8:13).”

 

오늘 날 우리의 허약한 영혼은 기독교의 희락주의로 앞서 기쁨과 즐거움만을 강조하기 때문이겠다. 교회 이름이 행복한교회도 있다. 그 의미는 알겠는데, 아직 우리의 잔치는 시작된 게 아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 말이 불같지 아니하냐? 바위를 쳐서 부스러뜨리는 방망이 같지 아니하냐! (렘 23:29).” 이에 따른 불편함이 우리 안에 있는 것은 당연하다.

 

오전에 누가 어떤 일로 질문을 하여 나는 그리 일러주었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마 10:34).” 말씀의 경고를 중히 들어야 그 기쁨의 소망도 바른 것이다. 나는 젊을 때 낚시를 참 즐겨 다녔다. 그때는 그래도 몸이 며칠씩 견뎌주곤 하였으니까, 나는 지금도 낚시가 주는 교훈이 우리의 신앙과 흡사 닮은 데가 많다는 것을 안다. 오늘은 뭔가 좋은 결과가 있을 것 같다. 채비를 갖추고 새벽 일찍 또는 전날 오후 출발하는 길이 즐겁다. 그러나 늘 느끼는 일이지만 낚시는 결국 오랜 ‘기다림의 맛’이다. 누구는 ‘손맛’을 운운하고 누구는 또 ‘찌맛’을 내세우는데 나는 그것들보다 막막한 기다림의 맛이 일품이었다. 낚시를 던져두고 가만히 찌를 응시하고 있을 때의 긴장감. 그것과 달리 오만가지 생각이 스쳐가고 생각은 서로 뒤엉겨 돌아서면 잊히기 일쑤지만. 이를 다음의 말씀으로 연관 지으면 어떨까?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결국 기다림이 내게 들려주는 소식은 그 자체로 이미 충분하였다는 것이다. 결국 둘이 아닌 하나의 결론으로,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 6:24).” 내가 주를 바라고 주를 섬긴다는 일도 이와 같다.

 

아이가 전날에 이어 어제에도 왔다. 뜬금없이 일주일 앞으로 다가온 내 생일을 미리 축하하며 선물을 사주겠다고 하였다. 못 이기는 척 같이 백화점으로 갔다가 나는 지하 홈플러스로 갔고, 아이는 그게 못마땅한지 다시 백화점으로 끌고 올라갔다. 근데 점점 그렇게 필요한 게 없다. 모자를 사주겠다는데 모자도 있고, 녀석이 고르는 것마다 비싼 거라 싫다고 하고, 겨울옷을 사주겠다는데 있는 것으로도 충분하여서 새삼 그 돈을 주고 사고 싶은 게 없었다. 그러다 핸드폰도 넣고 다닐 작은 가방을 볼까 했더니 것도 기본이 몇 만원씩이라… 결국 실랑이를 벌이다 ‘목사님한테 가장 맞는?!’ 조그만 가방을 사긴 했는데 그 값이 오만 원이었다. 것도 다음 주부터 행사라 20%할인이 적용되는데 녀석이 하도 목사님, 목사님 하며 설레발을 치는 바람에, 점원이 교인인가? 슬그머니 다가와 다음 주에나 있을 행사 가격에 직원가를 적용해 몇프로를 더 할인한 것이라며 5만원이었다.

 

애한테 이걸 받아도 되나 싶으면서도 그 덕에 점심은 내가 샀는데 그 값이 그 값이라, 이래저래 뻔한 형편에 사정이 곤란하게 되긴 하였으나 아이의 마음이라 어찌 끝까지 거절할 수가 없었다. 아내는 애한테 무슨 그리 큰 걸 받았냐며 핀잔인데, 아마도 녀석이 다 뜯어내지 않고 그대로 새것으로 들고 왔으면 도로 가서 돈으로 바꿔오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러니 내가 갚을 수 없는 것들이라, 나는 또 슬그머니 주의 이름 뒤로 숨었다. 언제부턴가 물욕, 성욕, 명예욕, 성취욕 따위들이 잦아들어 이것이 나이 때문인지 그리스도의 장성하신 믿음의 분량으로의 나아감인지 알 수는 없지만… 나는 그래서 날로 날로 늙어가는 게 나쁘지 않다. 그리하여 나의 걸음도 견고하여 진다면,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하게 하셨도다

(시 40:2).

 

이를 아주 가끔,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 13:12).” 이 땅에서는 이 만큼이면 족하였다. 이것으로 많은 믿음의 선친들도 소망으로 나아갔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히 11:39-40).” 오늘 이스라엘 야곱의 축복과 시인의 찬송이 나로 하여금 주를 더욱 의뢰하게 한다. 결론은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하신 것을 받기 위함이라(히 10:36).” 이에,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약 1:4).

 

말씀이 우리에게 주시는 결과지였다.

 

새 노래로 여호와께 찬송하라

그는 기이한 일을 행하사

그의 오른손과 거룩한 팔로

자기를 위하여 구원을 베푸셨음이로다

여호와께서 그의 구원을 알게 하시며

그의 공의를 뭇 나라의 목전에서

명백히 나타내셨도다

(시 98:1-2),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