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주께서 내 오른손을 붙드셨나이다

전봉석 2021. 11. 5. 05:20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

창 50:20-21

 

내가 이같이 우매 무지함으로 주 앞에 짐승이오나 내가 항상 주와 함께 하니 주께서 내 오른손을 붙드셨나이다

시 73:22-23

 

 

주가 나를 붙드실 때 나의 모든 슬픔은 승화한다.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된다는 것, 곧 승화란 ‘더 높은 상태’로 변화한다는 것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나는 설명할 수 없다. 그러나 오늘 요셉의 진술과 시인의 탄식이 이를 알게 한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창 50:20).” 하나님께로 이 모든 것을 돌리는 것, 그것이 비록 슬픔과 서러움이라 할지라도 이것으로 주를 찬송하게 하신다.

 

진실로 사람의 노여움은

주를 찬송하게 될 것이요

그 남은 노여움은

주께서 금하시리이다

(시 76:10).

 

우리 안에 노여움이 없이 사는 사람이 어디 있겠나? 아무리 귀히 여기며 사랑한다 해도 그 안에서 저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고 받기도 하는 것인데. 스스로를 존귀히 여기지 못하면 남을 귀히 삼을 수 없다. 사랑하지 않으면 사랑을 받을 줄도 모른다. 문제는 문제를 문제로만 여기는 것인데 더 큰 문제는 그것이 문제인 것조차 깨닫지 못하는 것이겠다. 누구와의 대화에서 그리 말해주었다. 우리의 무지함은 곧 죄로 연결이 된다.

 

어리석은 자도 알지 못하며

무지한 자도 이를 깨닫지 못하나이다

악인들은 풀 같이 자라고

악을 행하는 자들은 다 흥왕할지라도

영원히 멸망하리이다

(시 92:6-7).

 

무엇을 바로 알지 못할 때일까?

 

여호와여 주께서 행하신 일이

어찌 그리 크신지요

주의 생각이 매우 깊으시니이다

(5).

 

곧 주가 나를 향하신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이다. 이를 어리석은 자나 무지한 자는 알지 못하는데, 당장 그저 몸이 원하는대로 사는 자의 삶이란 그런 것이어서,

 

그가 영원히 살아서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인가

그러나 그는 지혜 있는 자도 죽고

어리석고 무지한 자도 함께 망하며

그들의 재물은 남에게

남겨 두고 떠나는 것을 보게 되리로다

(49:9-10).

 

이와 같은 허무함에 대하여 오늘 시인은 깊은 성찰을 통해 깨닫게 된다. 저도 처음에는 미끄러질 뻔하고 넘어질 뻔하였으니,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투하였음이로다(73:3).” 남들은 다들 잘만 사는 것 같은데 왜 나는 이 모양인가, 하는 서러움이 우리로 고통 중에 빠뜨린다. 다들 들춰보면 누구 하나, 어느 집구석 하나 온전한 곳이 없다. 어찌 그러고 사나 싶어 안타까울 따름인데 이와 같은 시험을 흐르는 물로 비유하여 거절하지 말라 이르기도 하신다. “이 백성이 천천히 흐르는 실로아 물을 버리고 르신과 르말리야의 아들을 기뻐하느니라(사 8:6).” 오늘의 고통은 그 원인이 뚜렷하여서 “그러므로 주 내가 흉용하고 창일한 큰 하수 곧 앗수르 왕과 그의 모든 위력으로 그들을 뒤덮을 것이라 그 모든 골짜기에 차고 모든 언덕에 넘쳐흘러 유다에 들어와서 가득하여 목에까지 미치리라 임마누엘이여 그가 펴는 날개가 네 땅에 가득하리라 하셨느니라(7-8).”

 

곧 우리를 주께로 이끄시는 데 있어 여러 방법이 동원되는 게 사실이고 그 가운데 가장 보편적인 것이 어려움이다. 그러므로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언덕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아니한 곳이 평탄하게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 이는 여호와의 입이 말씀하셨느니라(40:4-5).” 우리로 보게 하시고 말하게 하심은 그 때문이다. 곧 우리를 저마다의 자리로 부르시고 이끄신 데는,

 

말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외치라 대답하되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 하니

이르되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의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이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하라

(6-8).

 

이를 위하여 우리를 부르셨다. 나는 저들이 특히 사역자들임을 강조하면서 좀 더 두려움으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주를 사랑함은 자신을 사랑함이고, 자신을 사랑함은 주의 사랑을 온전히 전하여 알게 하려 하심인데….

 

아름다운 소식을 시온에 전하는 자여

너는 높은 산에 오르라

아름다운 소식을 예루살렘에 전하는 자여

너는 힘써 소리를 높이라

두려워하지 말고 소리를 높여

유다의 성읍들에게 이르기를

너희의 하나님을 보라 하라

(9).

 

단지 오늘의 이런저런 문제로 그 문제를 해결하는 데만 급급할 게 아닌 이유였다. 우리가 누굴 바꿀 수 없다. 돌이켜 그 마음에 주의 살아계심을 알게 하고 믿게 할 수도 없다. 하나님은 우리로 강제하지 않으신다. 다만 모든 환경이 주는 교훈이라, 하나님은 결코 미리 말하지 않으신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말에 대답하지 않으신다 하여 어찌 하나님과 논쟁하겠느냐(욥 33:13).” 우리가 저의 뜻을 다 안다면, 이해하고 납득했다면 오히려 그 무한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제한하는 것이 아니겠나? 오늘에 당면한 현실이 어째서 그러한지, 하나님이 어찌 그러실 수 있는지, 이를 붙들고 씨름할 게 아니었다. 문제는 문제일 뿐 정답은 따로 있었다. 그래서 나는 누구의 일에 또한 나의 일에 ‘왜?’라는 질문을 피한다. ‘왜’에 대한 답을 구하려다 보니, 정작 그 목적은 사라지기 마련이다.

 

예수님은 말씀하시길 우리로 온전하라 하신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 5:48).” 이 일이 가당키나 하겠나? 우리가 어찌 온전할 수 있겠으며 심지어 하나님 아버지의 온전하심 같이 우리가 어찌 온전할 수가 있겠나? ‘온전’이란 헬라어로 ‘텔리오스’이고, 텔리오스의 형용사형은 ‘텔로스’로 목표, 목적, 끝을 뜻한다. 그러니까 직유법 ‘~같이, 처럼’의 의미로 하나님처럼 되라는 것인데, 아버지의 온전하심 ‘같이’ 우리로도 그리 온전하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이를 두고 ‘나 같은 게 어찌 그럴 수 있겠나?’ 하고 겸손을 떨지만 실은 ‘하나님처럼’을 하나님이 되라는 의미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더 많다. 누가 감히 하나님처럼 살 수 있겠나? 하지만 저마다 이미 자신을 하나님으로 두고 스스로 하나님이 되어 산다. 그렇게 사랑을 하고 사랑을 요구한다!

 

누구와의 대화에서 이런저런 상황이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데 대해 무거운 마음이 들었다. 안타까움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지, 나는 망설이던 끝에 저의 신랑에게 문자를 넣어 한 번 볼 수 있겠나? 하고 물었다. 이에 응하고 거절하는 것은 내 몫이 아님으로, 나는 성령께서 하시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손을 털듯 그리 질러버리고 말았다! 행여 만난다고 한들? 저와 마주하고 앉는다고 한들? 내가 뭘 할 수 있겠나? 갑자기 마음이 답답해지고 어려워서 숨을 쉬기도 어려웠다. 그렇게 걷고 또 걸으며 크게 동네를 한 바퀴 돌고나서야 마음은 조금 진정이 되었고, 금세라도 비가 내릴 듯 하늘이 잔뜩 내려앉아 있었다. 하나님의 뜻은 바람 같이 어렵다. 종잡을 수 없다.

 

그가 또 하늘을 드리우시고 강림하시니

그의 발 아래는 어두캄캄하도다

그룹을 타고 다니심이여

바람 날개를 타고 높이 솟아오르셨도다

(시 18:9-10).

 

나는 알 수 없고, 할 수 없는데 나로 하여금 이와 같은 마음으로 짓누르시는 걸 보면 주께서 행하실 것을 안다. 다만 나는 누구의 일에 마음을 얹고 주가 행하심을 바라보는 증인이다. 저의 일을 어찌 속단하겠으며 뭐라 판단할 수 있겠나?

 

버러지 같은 너 야곱아,

너희 이스라엘 사람들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내가 너를 도울 것이라

네 구속자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이니라

보라 내가 너를 이가 날카로운

새 타작기로 삼으리니

네가 산들을 쳐서 부스러기를 만들 것이며

작은 산들을 겨 같이 만들 것이라

네가 그들을 까부른즉 바람이

그들을 날리겠고 회오리바람이

그들을 흩어 버릴 것이로되

너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겠고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로 말미암아

자랑하리라(사 41:14-16).

 

발걸음은 무거웠고 마음은 스산하였다. 불어대는 바람으로 낙엽들은 흩어져 휘날렸고 생각은 저들끼리 들락거리는지 하나로 이어지지 못하였다. 천천히 옮기는 나의 걸음은 느렸고 느린 만큼 오랜 시선을 거두지 못하였다. ‘아픈 아이’를 오라 해서 같이 점심이라도 먹을까 하다 그만두었다. 나의 보폭은 여기서 저기 정도, 할 수 있는 정도로 충분하였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10).

 

하시는 말씀 앞에서 눈물이 핑, 돌기도 하였다. 때로는 내 곁에 계시지 않은 것 같을 때, 그 두려움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천하의 엘리야도 고작 이사벨에게 쫓겨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가서 한 로뎀 나무 아래에 앉아서 자기가 죽기를 원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나는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하고(왕상 19:4).” 이것이 우리의 실상이지 않던가? 우리가 뭘 어찌 한들 대체 뭐가 좀 더 나아지기나 하겠나? 실의에 빠진 엘리야도 “로뎀 나무 아래에 누워 자더니 천사가 그를 어루만지며 그에게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하는지라(5).” 죽고자 청하며 의기소침하고 있을 때, 주가 어루만지신다. 그리고 힘을 내도록 다독이시며 먹이신다.

 

돌아보면 나야말로 쓸모없는 부지깽이 같은 존재인 것을, “그에게 이르기를 너는 삼가며 조용하라 르신과 아람과 르말리야의 아들이 심히 노할지라도 이들은 연기 나는 두 부지깽이 그루터기에 불과하니 두려워하지 말며 낙심하지 말라(사 7:4).” 실은 내가 두려워하던 것이 나 자신이었던 것이다. 누구를 사랑한다고 하는 것은 그만큼 사랑받기를 원하였던 것이고, 없으면 못살 줄 알았던 것이 실제로는 다 부질없는 것들이어서… 그럼에도 오늘 이처럼, 어떻게 하면 주를 만날까 하여 나무에라도 올라갔을 뿐인데, “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사 쳐다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눅 19:5).” 주가 찾아오시고 주가 이루어 가실 일이었다.

 

지난주에 누구의 말을 듣고 마음이 너무 어려워, 이 궁리 저 궁리하다 결국은 저가 아니라 저의 남편을 만나야 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을 하고는 스스로도 소스라치게 놀란 것이다. 내가 왜? 나 같은 게 뭘 어쩌겠다고? 하는 마음이 짓누르기 시작하고, 왜 자꾸 이런 마음을 더하시는가 싶어 떨쳐내려 하다 나름의 문자를 먼저 보낸 것이다. 주가 어찌 행하실 지 다음 행보는 알 수 없으나, 나 같은 것을 들어 이처럼 사용하시는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을 터. 내가 어찌 하나님처럼 온전하여질 수 있겠나? 흉내라도 내듯, 시늉이라도 하듯, 내가 할 수 있는 ‘거기까지’로 목표를 삼는 것이다. 세상 ‘누구처럼’이 아니라, 직접 ‘하나님처럼’으로는 그 정도로도 온전하였다. ‘텔로스’ 그래, 거기까지다. 내가 할 수 있는 정도로 충분하였다.

 

나는 걷다가 울컥, 어디 앉았다가 또 울컥, 속상한 것도 같고 너무 무능하고 한심스러운 것도 같고 그래서 더 시무룩하게 교회로 돌아왔는데, 소파에 잠시 눕자마자 혼곤한 잠에 빠지게 하셨다. 그리고 일어나 앉았을 때 문득 드는 생각이 어떠한 시험도, 역경도, 고통도, 괴로움도 우리를 이길 수 없다는 것!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 10:13).” 다만 말씀이 이르시는 말씀은,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12).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야 주를 바라게 하심이고, 주저하고 망설이며 뭉개고자 하는 마음으로는 주의 뜻을 더욱 헤아려 알게 하려 하심이겠으니. 주는 이미 다 아신다. 누구보다 나의 연약함을 말이다. 저는 하나님이시면서도 나를 위해 이를 당하셨다.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히 2:18).” 그러므로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시고 이해하신다. 나의 모자람과 연약함을 주가 더 잘 아시면서, 오늘의 이런저런 마음의 짐을 얹게 하심은,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골 2:17).” 주가 다 이루심을 알게 하려 하심이었다. 그러니 오늘 시인의 고백과 같이,

 

내 마음이 산란하며

내 양심이 찔렸나이다

(시 73:21).

 

아, 그러니 어쩌면 좋을까….

 

내가 이같이 우매 무지함으로

주 앞에 짐승이오나

내가 항상 주와 함께 하니 주께서

내 오른손을 붙드셨나이다

(22-23).

 

오직 주와 함께 하게 하시려고, 나로 연약함에 두시고 안정제를 삼키면서 누구의 말을 듣다 지레 가슴이 답답하여 숨을 쉴 수 없을 것 같을 때,

 

주의 교훈으로 나를 인도하시고

후에는 영광으로 나를 영접하시리니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 밖에

내가 사모할 이 없나이다

내 육체와 마음은 쇠약하나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오

영원한 분깃이시라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적을 전파하리이다

(24-26, 28).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