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들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라 이와 같이 그들의 아버지가 그들에게 말하고 그들에게 축복하였으니 곧 그들 각 사람의 분량대로 축복하였더라
창 49:28
홀로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는 여호와 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찬송하며 그 영화로운 이름을 영원히 찬송할지어다 온 땅에 그의 영광이 충만할지어다 아멘 아멘
시 72:18-19
내 곁의 한 영혼이다. 야곱이 죽음을 앞두고 저들 하나하나를 위해 복을 빌고, 경고를 하고, 그 특징을 살펴 두루 축복하고 눈을 감았다. “이들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라 이와 같이 그들의 아버지가 그들에게 말하고 그들에게 축복하였으니 곧 그들 각 사람의 분량대로 축복하였더라(창 49:28).” 한 생을 다 하는 동안 우리는 매순간 내 곁의 한 영혼을 사랑할 따름이다. 이에 각 사람의 분량대로이다. 믿음도 같아서 나는 종종 나의 나 됨에 대하여 할 수 있는 바를 행할 뿐이다. 곧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롬 12:3).”
우리를 어지럽히는 것은 항시 ‘그 이상의 생각’ 때문이다. 상대적으로 남들과 견주어 자신을 두고 생각할 때 감사보다는 원망이 앞서기 마련이다. 본래 우리가 믿음으로 산다하면 그 안에 두려움도 같이 자라가는 것이 우리의 숙명이다. 마치 누구를 사랑할 때 저의 사랑을 받지 못할까봐 두려워하는 것과 같다. 열망에는 잃을 수 있다는 실망도 같이 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우리의 속성을 아심으로,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막 5:36).” 주님은 이르시는 것이다. 두려움이 주는 유익은 크다. 두려워할 줄 모를 때 열심도 성실도 정직도 흐지부지하기 때문이다. 주를 사랑하면 할수록 주의 사랑을 받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같이 내재되는 것이다. 자신을 알면 알수록,
또 내가 말하기를
이는 나의 잘못이라
지존자의 오른손의 해
곧 여호와의 일들을 기억하며
주께서 옛적에 행하신
기이한 일을 기억하리이다
(시 77:10-11).
그와 같은 의심, 두려움이 나로 엄습할 때 우리에게 유익한 것이 하나님이 내게 행하신 기이한 일들을 기억하는 것이다. 호세아는 이를 “그들은 사자처럼 소리를 내시는 여호와를 따를 것이라 여호와께서 소리를 내시면 자손들이 서쪽에서부터 떨며 오되 그들은 애굽에서부터 새 같이, 앗수르에서부터 비둘기 같이 떨며 오리니 내가 그들을 그들의 집에 머물게 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호 11:10-11).” 곧 우리 안의 두려움이 우리로 주 앞에 나아오게 한다. 이는 경외함으로 “사자가 부르짖은즉 누가 두려워하지 아니하겠느냐 주 여호와께서 말씀하신즉 누가 예언하지 아니하겠느냐(암 3:8).”
가령 나도 모르는 누구의 이야기를 들었다. 저는 얼마 전 딸애의 아이를 잃었다. 두 부부가 아이를 돌보다 갑작스런 증상으로 병원에 달려갔으나 살릴 수 없었다. 저들 딸은 조현으로 어찌하다 아이를 임신하였고 약을 먹으며 근근이 아이를 돌보고 자신의 생을 꾸려갔던 모양인데, 이내 정신병동에 실려가 고통당하다 다시 사회로 나온 지 며칠 되지 않아 스스로 목숨을 끓었다. 졸지에 손자와 딸애를 잃고 망연자실해 하면서도 이를 주관하시는 이가 하나님이신 것을 알지 못하는지, 저들 부부는 믿지 않는 이들이었다. 나와는 상관없는 소식이었으나 내내 마음을 어지럽힌 까닭은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어찌 사랑을 할 수 있겠나? 하는 것이다. 하다못해 연인이 서로 사랑할 때도 사랑하면 할수록 그 사랑을 잃지 않을까 두려워하는 게 마땅한 것일 텐데.
우리가 주를 바라며 무서워 떠는 것은 당연하다. 이는 되레 복이다. 두려워할 줄 알아야 두려워하지 말라 하시는 말씀에 귀를 기울일 수 있다. 사랑을 할 때 사랑을 잃을까 조심하는 일과 같다.
겁내는 자들에게 이르기를
굳세어라,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너희 하나님이 오사
보복하시며 갚아 주실 것이라
하나님이 오사
너희를 구하시리라 하라
(사 35:4).
당장의 돈벌이로 두려워할 줄 알고, 건강이 조금 이상해도 두려워할 줄 알면서 이 모두를 다스리시는 이를 의식하지 못하고 산다는 일은 참으로 미련한 일이다. 모처럼 친구와 통화할 때 나는 번번이 점검하듯 교회는 잘 다니는지, 가족들의 신앙은 어떠한지, 그러는 본인은 믿음 안에서 어찌 지내는지… 목사가 되고 난 뒤 나의 관심이란 그런 것인데, 저는 시큰둥하니 그런 덴 관심이 없고 정치 이야기나 어디 아파트 시세나 누구, 남의 이야기로 시시덕거리는 데 정신이 팔린다. 그러다 보니 예전에 그렇게 죽고 못 살던 사이가 술 한 잔 건네고, 시답잖은 놀이에 같이 하지 못하면 서로의 사이는 점점 소원해지는 것이다. 가끔은 그렇게 가까이 지내던 사이의 누가 그리운데 막상 연락을 한들 더는 다른 이야기로 금세 시큰둥해지곤 하는 것이다. 곧 우리 안에 두신 두려움이 신앙을 바로 하게 하는 밑거름이 된다.
에돔에서 오는 이 누구며
붉은 옷을 입고
보스라에서 오는 이 누구냐
그의 화려한 의복 큰 능력으로
걷는 이가 누구냐
그는 나이니 공의를 말하는 이요
구원하는 능력을 가진 이니라
(63:1).
우리의 이 모든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이를 두려워할 줄 모르는 자는 그의 믿음도 별 볼일 없다. 우리 안에는 늘 주가 나를 받아주실까? 나 같은 죄인을 용서하실까? 행여 나를 멀리하지 않으실까? 하는 두려움이 동시에 같이 가야 하는 것이다.
내 상처가 썩어 악취가 나오니
내가 우매한 까닭이로소이다
내가 아프고 심히 구부러졌으며
종일토록 슬픔 중에 다니나이다
내 허리에 열기가 가득하고
내 살에 성한 곳이 없나이다
내가 피곤하고 심히 상하였으매
마음이 불안하여 신음하나이다
(시 38:5-8).
이를 보면 스스로 상태를 바로 아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준다. 당장 그 외모를 꾸미는 데는 정신이 팔려 분에 넘치는 옷과 장식으로 자신을 꾸미면서 그 영혼의 상태에는 전혀 관심도 없는… 그저 믿는다고 하면서도 안 믿는 자와 다를 게 없이 우연으로, 그저 그럴 수 있는 일로 치부하며 사는 삶에 대하여 스스로를 돌아보아야 한다. “내 상처가 썩어 악취가 나오니 내가 우매한 까닭이로소이다.” 그 영혼이 악취를 내는데도 이를 알지 못하고 “내가 아프고 심히 구부러졌으며 종일토록 슬픔 중에 다니나이다.” 하는 시인의 진술을 그저 육신의 일로만 여겨 대수롭지 않게 받는다면 그 말씀이 무슨 상관이겠나? “내가 피곤하고 심히 상하였으매 마음이 불안하여 신음하나이다.” 이와 같은 신호를 보낼 때 모든 하던 일을 멈추고 주 앞에 고하여 주의 도우심을 구할 수 있는 것이 축복이었으니,
주여 나의 모든 소원이
주 앞에 있사오며
나의 탄식이 주 앞에
감추이지 아니하나이다
(9).
나는 종종 누구라고 직접적으로 말할 수는 없으나 어떤 이의 슬픔을, 그의 분에 넘치는 역경을 누구에게 말한다. 서로 알고 이를 위해 기도를 같이 당부한다. 서로 기도의 조력자가 있다는 것은 만만대군을 거느리는 응원과도 같다. 그러할 때 말씀은 엄연히 보장하셨다.
내가 내 손을 들어
너희 조상들에게 주기로 맹세한 땅
곧 이스라엘 땅으로
너희를 인도하여 들일 때에
너희는 내가 여호와인 줄 알고,
거기에서 너희의 길과
스스로 더럽힌 모든 행위를 기억하고
이미 행한 모든 악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미워하리라.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너희의 악한 길과
더러운 행위대로 하지 아니하고
내 이름을 위하여 행한 후에야
내가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리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겔 20:42-44).
만일 내가 행한 대로 나로 갚으신다면 나는 이미 죽어 마땅하였다. 이처럼 두려워할 줄 모를 땐 주의 뜻을 바로 알기가 어려웠고, 자기 좋을 대로 이해하고 받아들여 그 지식을 섞어서 혼용하며 살았다. 돌아보면 내 곁에는 안 믿는 자들도 많았고 특히 타종교를 가진 사람들도 있었다. 나는 저들과 어울리며 전혀 불편함이 없었다. 그저 그럴 수 있지, 하고 이를 마치 서로 존중하는 것으로 순화하여 그러려니 하고 받아낸 것이다. 한데 지금 와 생각하면 이보다 더 끔찍한 세속화는 없었고, 이를 이 땅에서는 문화라고 말하며 하나님의 권위보다 사람의 자유의지를 더욱 귀히 여기고 있었다.
그런 우리에게 성경은 누누이 강조하신다. 자신에게는 의원이 필요한 환자임을 알아야 한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막 2:17).” 자신이 환자이고, 죄인인 것을 알면 알수록 주의 도우심과 주님만이 나의 구주가 되신다는 사실 앞에 승복할 수가 있다. 그러기까지 누구에게는 말로 옮기기 힘든 삶의 역경이 쉴 새 없이 주어지기도 하는데 저는 이로 더욱 완고하여지기만 하니. 상대적으로 바울 사도의 고백이 어찌 그러했나, 이해가 된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 1:15).”
누구를 대할 때 저의 자부심 때문에 나는 할 말을 접어둔다. 뭐라 한들 이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은 분명하다. 저들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자신도 다 안다는 것이다. 뭐라 하면 자신도 이미 안다. 그렇다는 데는 뭐라 더 이를 말이 없어지는 것이다. 또는 늘 자신의 이력을 내세운다. 내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하는 자부심의 하나로 스스로에 대한 자긍하는 마음이 누구보다 자신을 스스로 존귀히 여긴다. 마지막으로 그럼에도 뭐라 이른다면 졸지에 사이는 껄끄러워지고 이를 매우 자존심 상해한다. 어른아이 같이 늘 자신을 인정받기 원하고 자신이 하는 일이 우선은 옳다고 여긴다.
하지만 우리의 특징, 곧 주를 사랑하면 할수록 우리들은 넘치는 은혜에 대해 과분하다고 여기는 것이다. 나 같은 게 뭐라고, 하는 마음이 들면서 주의 은혜를 갚을 길 없어 마냥 송구하기만 하다. 가령 당대의 부호로 나름은 권세가 있었던 아비가일은 몇몇 떠도는 소년들에 불과한 다윗과 그의 일행을 알아보았다. 다윗이 저의 겸손과 지략을 보고 아내로 삼으려 하자, “아비가일이 일어나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고 이르되 내 주의 여종은 내 주의 전령들의 발 씻길 종이니이다 하고 아비가일이 급히 일어나서 나귀를 타고 그를 뒤따르는 처녀 다섯과 함께 다윗의 전령들을 따라가서 다윗의 아내가 되니라(삼상 25:41-42).” 이와 같은 겸손이 우리에게 필요하다. 소위 자기 주제를 바로 아는 것만큼 훌륭한 지혜도 없을 것이다. 조금 있는 재물과 나름의 경력을 두고 자존심을 내세운다면 모든 게 다 허사다. 상대적으로 저의 남편 나발이 죽기 전에 얼마나 교만했던가? “나발이 다윗의 사환들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다윗은 누구며 이새의 아들은 누구냐 요즈음에 각기 주인에게서 억지로 떠나는 종이 많도다(10).”
미처 알아보지 못하는 것, 이보다 더 불쌍한 미련함도 없는 것이다. 설마가 사람 잡는다는 말, 우리는 얼마나 빈번하게 함부로 판단하고 결정하고 자신이 옳다고 여기며 살고 있는지. 딸과 손자를 앞세우고도 주 앞에 돌이킬 마음이 전혀 없으니 이 또한 희한한 일이기는 하다. 주가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가?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이 일이 그 날에 남은 백성의 눈에는 기이하려니와 내 눈에야 어찌 기이하겠느냐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슥 8:6).” 오늘 우리에게 벌어지고 있는 일련의 모든 사태와 상황과 현상이 그 주관하시는 이의 섭리 가운데 있음을 안다면,
여호와여 주는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으셨사오니
그들의 마음을 준비하시며
귀를 기울여 들으시고
고아와 압제 당하는 자를 위하여
심판하사 세상에 속한 자가
다시는 위협하지 못하게 하시리이다
(시 10:17-18).
오늘 말씀을 두루 살피면서 드는 생각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겸손과 정직이었다. 그는 누구이신가?
홀로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는
여호와 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찬송하며 그 영화로운 이름을
영원히 찬송할지어다
온 땅에 그의 영광이 충만할지어다
아멘 아멘(시 72:18-19).
이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야곱은 눈을 감기 전에 자신의 자식들을 불러 모아 그 하나하나의 성정과 앞날을 살펴 축복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나는 새삼 주 앞에 겸손을 바란다. 저는 누구신가?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며 빈궁한 자를 거름더미에서 올리사 귀족들과 함께 앉게 하시며 영광의 자리를 차지하게 하시는도다 땅의 기둥들은 여호와의 것이라 여호와께서 세계를 그것들 위에 세우셨도다(삼상 2:8).” 고로 오늘 나의 이 과분한 은혜와 맡기신 사명을 두고 주의 이름을 부르며,
가난한 자를 먼지 더미에서 일으키시며
궁핍한 자를 거름 더미에서 들어 세워
지도자들 곧 그의 백성의 지도자들과 함께 세우시며
또 임신하지 못하던 여자를 집에 살게 하사
자녀들을 즐겁게 하는 어머니가 되게 하시는도다
할렐루야(시 113:7-9).
단 하루,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다시 또 누군가를 내 곁에 두실 때 주의 이름으로, 주의 사랑으로, 주의 권능으로 저를 마주하고 대하며 주의 살아계심을 나타낼 수 있기를.
그가 가난한 백성의 억울함을 풀어 주며
궁핍한 자의 자손을 구원하며
압박하는 자를 꺾으리로다
그들이 해가 있을 동안에도 주를 두려워하며
달이 있을 동안에도 대대로 그리하리로다
(시 72:4-5), 아멘.
'[묵상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낮도 주의 것이요 밤도 주의 것이라 (0) | 2021.11.06 |
---|---|
주께서 내 오른손을 붙드셨나이다 (0) | 2021.11.05 |
나를 어려서부터 교훈하셨으므로 (0) | 2021.11.03 |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0) | 2021.11.02 |
여호와를 더욱 기쁘시게 (0) | 2021.11.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