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을 돌보셨고 하나님이 그들을 기억하셨더라
출 2:25
오직 재판장이신 하나님이 이를 낮추시고 저를 높이시느니라
시 75:7
특별히 주의 종으로 부르시는 데는 그 이야기가 마치 다음 이야기에 의해 받쳐지고 돋우어지는 듯 자연스럽다. 그를 둘러 싼 환경이 아무리 번잡하고 어지럽다 해도 ‘이를 낮추시고 저를 높이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다.’ 그 선명한 일의 진행이 우리로 구원을 이루시게 하는 하나님의 의지를 보여주는 것 같다. 물론 오늘 본문에서도 읽히지만 생략된 고충과 슬픔이 어찌 만만찮은 것을 모르겠나? 그럼에도 이야기의 진행 과정을 설명하듯이 하나님의 의지는 뚜렷하게 전달이 된다. 궁극적으로 저들의 구원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을 돌보셨고 하나님이 그들을 기억하셨더라(출 2:25).” 그 과정이 간략하여 오히려 뜻이 분명해진다.
훗날에 예수님이 증거하신 내용으로, “모세를 믿었더라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라(요 5:46).” 저의 일생과 앞으로 그로 인한 일의 진행과 저에게 주신 율법을 통해 하나님의 뜻이 선다. 앞서 예수님의 말씀을 되새기게 된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하고 단언하신 후에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39, 40).” 정작 그 의미를 바로 알지 못함에 대해 규탄하신다.
오늘 우리의 모습도 믿는다고 믿으면서 정작 주의 뜻과는 거리가 있다. 부르심에 이끌려 여기까지 왔으면서 여전히 머뭇거리거나 주저하기 일쑤인데, 모세를 보면서도 문득 느끼는 것이지만 주의 부르심은 기이하기만 하시다. 하나님이 일을 행하시는 데 있어 보란 듯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신다. 가령 주 앞에 나아와야 하는 사람일 경우, 저가 창녀이면 어떻고 중풍병자로 몸져누워 꼼짝 모하는 사람이면 어떻겠나? 그 짓을 하다 현장에서 잡혀 사람들에게 끌려오게라도 하신다!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8:10).” 마치 모르시는 일처럼, 그러나 모든 일을 주관하시면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11).”
중풍병자는 더욱 가관이다.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데리고 오거늘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마 9:2).” 곧 주께 나아오게 하실 이는 어떤 경우에라도, 어떤 상황이라 해도 기어이, 기필코, 결단코 부르시고 오게 하시며 그 죄를 용서하신다! 이는 스스로 하신 말씀에 대한 철저한 실천이신데 동시에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요 6:37).” 여기서 ‘결코’는 어떤 경우에도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에 대한 강조를 나타내는 부사어다. 즉 ‘마음먹은 대로 반드시’ 이루시겠다고 하는 분명하고 확실한 의지다. ‘아니다, 없다, 못한다’ 하는 부정적인 의미들을 <결코> 용납하지 않는 ‘어떤 경우에도 절대로’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시국이 어떠하다 해도 그 가운데서 모세를 살리셨고, 키우셨고, 부르셨다. 저를 이끄시는데 있어 그 이야기의 흐름은 마치 억지스러운 스토리 같지만 그럴 수밖에 없는, 매우 자연스러운 진행을 보여준다. 마찬가지로 창녀였으나 주의 부르심은 극적이었고, 중풍병자였으나 저를 주 앞에 이끄시고 죄사하시는 데는 거침이 없으시다. 곧 우리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하시는 데 있어 불가능한 일은 없다. 구제불능인 경우라도 그게 문제가 될 게 없다. 나는 누구를 생각하다, 어떤 이의 이야기에서 더는 가망이 없을 것 같은, 그런 생각이 들다가도 그럼에도 이루시는 하나님을 나를 봐도 알 것 같다. 그리고 이제 가만히,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을 목격하는 증인이 되게 하셨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이제는 나도, 내가? 내가 이와 같은 결연한 의지와 실행을 누구보다 신뢰한다! 나의 허술하고 엉터리 같은 삶에서도 하나님이 어찌 부르시고 이끄시고 오늘에까지 두셨는가를 잘 알기 때문에 이제는 빼도 박도 못하고 확실히 안다. 예수님은 일구이언하시는 분이 아니다. 그러실 수가 없다. ‘결코 내쫓지 않으신다.’는 약속은 예수님도 스스로 이를 어쩌지 못하심을 의미하는데, 이는 ‘아버지께서 주신 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 드는 의심은 모두 불신앙이다. 나 같은 게 무슨! 하는 마음은 물론 저런 사람이 어찌? 하는 판단 또한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는 일이다. 곧 자신을 쓸모없는 존재로 버림당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자체가 불신앙이다. ‘나 같은 게 무슨…’ 하는 말은 그래서 더는 겸손이 아니다. 분명한 의심이고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겠다는 소리다. 곧 예수님을 의심하는 일이다. 이를 다 알고 우리 주님은 말씀하셨다.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요 6:39).
이와 같은 말씀 앞에서 안도하며 긴 한숨을 몰아쉬기도 한다. 내가 보기에는 쓸모없는데, 보잘것없고 하등에 가치도 없는데 그런 나를 오늘에까지 이르게 하신 여정은 가히 모세의 이야기와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탄탄하다. 그때는 미처 알지 못하여 우연으로 여길 때도 있고, 어쩌다 소 뒷걸음에 쥐 잡은 격으로 여겨져 대수롭지 않은 듯 관심도 없었지만… 하나님은 이를 이미 창세전에 계획하시고 예정하신 일이다! 그러므로 나 자신에 대한 회의나 갈등은 물론 누구에 대한 이야기에서 우리는 감히 함부로 뭐라 속단해서는 안 된다.
어제는 토요일에 오는 아이 수업을 끝내고 모처럼 아내와 같이 영화관에를 갔다. 같이 늘 그런 시간을 갖고 싶어 하는데 매주 토요일 일이 있었고, 내가 그러지를 못해서도 그랬고, 그래서도 결국 그러자고 한 것이다. 요즘 인기 있다는 무슨 영화를 미리 예매하고 나는 거의 병적으로 서둘러서, 내가 먼저 천천히 걸어서 영화관 근처 가까운 공원에 가 앉아 있었다. 어차피 아내는 아들 점심을 챙겨주고 와야 해서, 발랄한 아이처럼 곧이어 따라왔다. 평소 아내가 좋아하는 중국집에서 우동을 먹고, 우리는 극장 안 맨 구석진 곳에 앉았다. 무슨 마블시리즈라는데, 본래 그런 내용을 싫어하기도 하지만 나는 곧 잠이 들어 한 시간쯤 잤나? 자다 깨서 슬그머니 나 먼저 나와버렸다. 거의 세 시간짜리 영화를 참고 볼 엄두도 나질 않았고, 그런 나를 그러려니 하고 아내는 아랑곳하지 않고 재미나게 영화를 다 보고 왔다. 조금 웃기긴 한데, 가끔은 그런 우리 부부가 서로 만나 주의 일을 한답시고 옥신각신할 때면 한심하고 우습기도 한다.
누가 이럴 줄 알았나? 가끔은 삐거덕거리고 서로의 관점은 달라도,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하신다. 가령 이번에 고등학교에 올라가면서 공부방을 그만두는 아이가 있는데 저 애가 무슨 이유인지 글방으로 오게 되었다. 학원으로 운영하며 돈을 받는 게 아니어서, 우리 아이들의 형편상 글짓기니 논술이니 하는 것을 배우려고 따로 학원을 다닐 수 있는 형편들이 안 된다. 단지 그것 때문은 아니고, 저 아이의 조부는 평생 목회를 하셨고 그 부모는 뭘 하며 사는지는 모르겠는데, 좌우지간 그리 되었다고 하니. 것도 조의 동생과 현재 공부방에 다니는 중딩 두 남자가 같이 오겠다는데… 나는 마다하고 말고 할 권한이 이제는 없다. 하나님이 그리 행하시는 일임을 직감한다. 그러다 그만두든 함께 예배를 드리며 함께 하게 될지도, 나는 모른다. 그저 나는 ‘에라, 모르겠다.’ 하는 심정으로 한다. 그건 이제 내가 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또한 주께서 다음 이야기를 어찌 이어가실지 궁금하기도 하고.
가끔은 나의 일상도 쩔쩔매기 일쑤인데, 이런 내게 맡기시는 일이라면 주께서 어련히 감당할 수 있는 수준으로 하지 않으시겠나? 더는 내가 주춤거릴 일이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심이라(히 7:25).” 주가 날 위해 간구하신다. 엄밀히는 주의 일을 위해 간구하신다. 그러니 하겠다고 되고 안 하겠다고 안 되는 일도 아니었다. 결국 하게 하실 일이면 하게 하실 것이고, 하지 말아야 할 일이면 하지 못하게 하실 것인데, 돌아보면 내 이야기 전반이 전부 그러했다. 어쩌자고 나 같은 걸? 하고 생각하다 사람들 손에 붙들려온 창녀를 생각하였다. 자기 힘으로 운신도 못하는 중풍병자는 또 어떻고? 그러니 와야 할 사람은 기어이 오게 돼 있고, 해야 할 일은 틀림없이 하게 하실 것이다. 아주 지붕을 뜯어서라도!
하나님은 기어이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7).” 요한은 계속 가정을 들어 만일, 만일 하면서 저의 행하심을 증거하고 있다.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8-10).
싫든 좋든, 우리가 믿든 안 믿든, 나의 환경이나 처지가 어떻든지 하나님은 하나님의 계획을 실행하신다. 그러니 끝내 그 뜻을 저해하고 거역하고 멀리하고 부정하면 할수록 그 처지는 자기만 개고생이라! 하나님 없이 산다는 게 얼마나 개꼴 나는 일인지, 살아보면 안다!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그게 나였고, 나의 그때를 나는 개만도 못한 시절이었다고 기억한다. 하지만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엡 2:12-13).” 다른 사람 뭐라 할 것 없다. 내가 나의 증거다. 나는 나의 기이하고 희한할 이야기에서 하나님의 이야기를 듣는다. 뿐만 아니라, 구제불능으로 더는 어쩔 수 없다고 여기는 창녀, 중풍병자도 어떻게든지 주께 나아오게 하신다.
아내는 왜 곧 그만둘 아이를 나에게 연결하는 것일까? 그 애 하나로도 벅찰 것 같은데 네 아이나 같이 오게 했담? 하고 속이 불편하다가도 그 또한 아내가 한 일이겠나? 그리 행하시는 이의 일일 텐데, 주가 하시고자 하는 일을 누가 말리겠나? 주께서 알아서 하시라, 맡기고 태평할밖에. 이것이 평안이었다. 이는 내게 오게 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날 보고 나 때문에 오는 것도 아니었다. 내가 가라 한다고 갈 것도 아니고 오라 한다고 올 것도 아닌 다음에야, 주가 하신 일을 두고 속 시끄러울 것 없다. 그래서도 나에게 오늘 시편 아삽의 심경은 충분히 공감이 된다.
하나님이여 우리가
주께 감사하고 감사함은
주의 이름이 가까움이라
사람들이 주의 기이한 일들을
전파하나이다
(시 75:1).
누가 물으면 얼마든지 나의 부끄러운 과거(?)도 까발릴 수 있다, 이제는. 더는 그게 창피하고 수치스러운 게 아니라, 그것으로 하나님이 어찌 선하신가를 들려줄 수만 있다면 말이다. 그런 쓰레기 같은 시절로 이처럼 주의 이름을 가까이 하게 하셨으니, 나는 말할 것 같으면 복에 복을 받은 자이다. 이와 같은, 주의 그 기이하신 이야기를,
주의 말씀이
내가 정한 기약이 이르면
내가 바르게 심판하리니
땅의 기둥은 내가 세웠거니와
땅과 그 모든 주민이
소멸되리라 하시도다 (셀라)
(2-3).
그렇게 이 모든 일에는 다 때가 있었고, 오늘의 이 상황도 다 때가 찾으매 주가 이루시는 일이겠으니,
내가 오만한 자들에게
오만하게 행하지 말라 하며
악인들에게 뿔을 들지 말라 하였노니
너희 뿔을 높이 들지 말며
교만한 목으로 말하지 말지어다
(4-5).
내가 우쭐하여 다시 또 교만하여질까봐 '남이 가지지 못한 것을 갖게 하셨으니' 주의 일을 합네, 하고 스스로 자부하지 못하도록!
무릇 높이는 일이 동쪽에서나
서쪽에서 말미암지 아니하며
남쪽에서도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재판장이신 하나님이
이를 낮추시고
저를 높이시느니라
(6-7).
모든 게 다 그러하다. 그때는 몰랐는데, 이제는 확실하다. 더는 가망이 없다싶은데 일으켜 세워 주의 일을 감당하게 하시는 것이어서, 그만큼 내 안에 썩은 것이 가득하였다는 것을 보게 하신다. 이를 알지 못할 땐 나의 의로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나로 땅의 모든 악인들과 같이 더는 이 섞은 잔을 마시지 못하게 하시려고,
여호와의 손에 잔이 있어
술 거품이 일어나는도다
속에 섞은 것이 가득한 그 잔을
하나님이 쏟아 내시나니
실로 그 찌꺼기까지도
땅의 모든 악인이 기울여 마시리로다
(8).
이를 알면 알수록… 주가 행하시는 뜻은 선명하여진다. 그리하여
나는 야곱의 하나님을
영원히 선포하며 찬양하며
또 악인들의 뿔을 다 베고
의인의 뿔은 높이 들리로다
(9-10),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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