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사람의 노여움은 주를 찬송하게 될 것이요

전봉석 2021. 11. 8. 05:25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출 3:14

 

진실로 사람의 노여움은 주를 찬송하게 될 것이요 그 남은 노여움은 주께서 금하시리이다

시 76:10

 

 

주의 부르심은 강렬하다. 저의 이름은 ‘스스로 있는 자’이시다. 이를 알게 하시려 모세는 애굽의 왕관을 버렸다. 롯은 소돔성을 버렸고, 아브라함은 고향땅 일가친척을 버렸으며, 룻은 자신의 고국과 부모를 떠났다. 베드로는 생계유지인 그물을 버렸고, 마태는 세관업무 곧 좋은 일자리를 잃었다. 바울은 자신의 의를 버렸고, 초대교회의 수많은 마술사들은 오만권이 넘는 책을 버렸다… 저들이 버리고 등진 것을 잃은 것은 부르심에 합한 삶의 결과로 이루어졌다.

 

문득 오늘 말씀을 읽다 그럼 나는 주의 부르심에 합한 삶을 위하여 무엇을 버렸나? 생각하게 된다. 모세의 시간은 그렇게 40년이 흐르는 동안 무력하였던 것 같은데 비로소 저를 부르신 데 따른 목적을 밝히신다. 곧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분명히 보고, … 부르짖음을 듣고, 그 근심을 알고, 내가 내려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데려가려 하노라(7-8).” 주의 생각은 항상 앞서고 계획적이며 치밀하시다. “이제 가라.” 하신다(9). 일러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에게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10).”

 

이는 여전하여 오늘 우리를 부르시는 데 따른 이유이기도 하다. 저마다의 그 부르심의 동기는 제각각이어서 어떤 이는 임박한 진노를 피해,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세례 베푸는 데로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마 3:7).” 어떤 이는 죽게 되어,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눅 15:17).” 어떤 이는 구원의 염려로, “베드로가 사람을 다 내보내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돌이켜 시체를 향하여 이르되 다비다야 일어나라 하니 그가 눈을 떠 베드로를 보고 일어나 앉는지라(행 9:30).” 또는 영적으로 병듦을 알고,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막 2:17).” 텅 빈 상태로,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는 빈 손으로 보내셨도다(눅 1:53).” 또는 상심하여서, 주께로 온다.

 

상심한 자들을 고치시며

그들의 상처를 싸매시는도다

(시 147:3).

 

말씀 앞에 앉아 말씀을 찾아가며 그 의미를 되새기는 일은 놀랍다. 주가 행하심은 허상이나 어떤 낭만으로가 아니다. 일상이고 지극히 실제여서 ‘주 없이 살 수 없다’는 고백은 나의 삶을 주께로 이끄는 동인이 된다. 그리하여 우린 무엇을 발견하였나?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사 53:1-3).

 

온전히 주를 바란다는 것은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 5:48).” 여기서 온전함은 우리의 완벽한 삶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온전하다’는 형용사는 헬라어로 ‘텔리오스’, 명사형은 ‘텔로스’로 ‘목표, 목적, 그 끝’을 의미한다. 우리가 사는 목적은 하나다. 하나님처럼 되는 것. 예수를 닮아가는 것. 그 끝을 향하여 앞서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자신의 전부랄 수 있는 것을 버렸다. 각각의 동기는 서로 다를 수 있으나 그 목표는 하나여서, 베드로는 영생의 말씀 곧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였다.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요 6:68).” 곧 그 말씀은 우리의 생명의 산돌이다.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께 나아가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벧전 2:4-5).”

 

비록 고운 모양도 풍채도,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다 해도. 즉 이 땅을 사는 데 있어 오히려 손해가 되고 잃는 게 더 많은 것 같으나 우리는 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이 말씀의 의미를 알고 그 뜻을 헤아려 주를 바라고 섬길 수 있는 것이 지혜이고 복이었다. 저마다의 사는 과정은 다르다 해도 우리의 가는 길의 끝은 같아서,

 

주는 약탈한 산에서

영화로우시며 존귀하시도다

(시 76:4).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잃기 싫어하는 것들을 약탈하시듯 빼앗아 그 실체를 알게 하신다. 때론 우리의 가는 길이 막연하여 말도 안 되는 것 같고, 그리하여 “모세가 하나님께 아뢰되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이르기를 너희의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면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출 3:13).” 어떤 회의가 또 갈등이 우리로 주저하게 하기 일쑤지만,

 

진실로 사람의 노여움은

주를 찬송하게 될 것이요

그 남은 노여움은

주께서 금하시리이다

(시 76:10).

 

나는 요즘 이 말씀 한 구절을 음미할 때마다 내 안에 감추고 있는 어떤 노여움, 남들에게 차마 말로 할 수 없는 서러움이나 가슴에 응어리진 여러 상처와 고통을 가지고서 오히려 주를 더욱 바라게 된다는 것. 그것으로 남을 위로 하고 주의 긍휼하심을 이해하게도 된다. 그래서 바울은 이를 알면 알수록 자신의 연약함을 사랑한다고 고백하였겠다.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내가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

(고후 11:30).

 

어찌 그것이 자랑이 될 수 있겠나? 이를 감추고 안 그런 척, 시치미 떼고 허세로 위장하여 스스로를 속이고 사는 세상에서,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12:9).

 

약한 것들에 대하여 오히려 자랑을 한다니! 곧 우리의 노여움이 우리로 주를 찬송하는 데 필요한 원동력이 되었다. 저마다의 이유는 달라도 이를 들춰보면, 그리하여 주께로 나오게 하려 하심이었다. 가만히 나의 날을 돌아보며 그때를 생각할 때면 어찌 그러고 살았나싶을 정도로 치가 떨릴 때도 있다. 한데 이는 나에게 부탁하시고자 하는 뜻이 있었기 때문이다.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청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5:19-20).

 

바울 사도의 놀라운 진술은 이를 되새길수록 그 의미는 분명해진다. 오늘, 모세가 떨기나무에 불이 붙은 것을 보고 그 앞에 선다.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로 놀라워할 겨를도 없이 하나님과 독대하여 말한다. “여호와께서 그가 보려고 돌이켜 오는 것을 보신지라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이르시되 모세야 모세야 하시매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출 3:4).” 이때에 먼저 주께서 바라시는 것은, “하나님이 이르시되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5).” 곧 내가 의지하던 것, 이것으로 살고 이것을 의지하며 살았을… 마태의 세관업무와 “예수께서 그 곳을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마 9:9).” 베드로와 안드레의 생계유지를 위한 그물을 버려두게 하시는 것.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그들이 곧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마 4:19-20).”

 

실은 이보다 더 어려운 게 있을까? 부르심을 받은 자로 항상 주저하게 되는 까닭은 당장의 자식 일과 자신의 일과를 버려둘 수 없어서, 또는 앞으로의 막막한 생활에 주저하여 대책 없는 선택보다 확실한 보장을 먼저 붙들려 하는 것이 인지상정일 텐데. 그럼에도 믿음으로 따른 자의 보상은 확실하여서 저의 충만하심으로 우리를 채우시는 것이었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롬 5:6).” 이를 앎으로,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8).

 

그럼 우리의 다음 행보는 무엇이겠나? 바울의 진술은 이어진다.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9-10).

 

곧 우리가 믿고 구원 받아 천국에 가는 것으로 만족할 일이 아니었다. 이를 확신하면 할수록 천국의 시민권자로서의 삶을 갖추어가야 한다. 날마다의 삶이 자라가고 성장하여서,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갈 5:22-23).

 

이와 같은 가치를 알면 알수록 이를 금할 수 있는 어떤 것도 없다. 당장의 유익도, 그리 죽고 못 살 것 같던 나의 가장 소중하였던 것들도 모두 ‘배설물처럼’ 여긴다는 저의 고백은 괜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빌 3:7-9).” 내게 유익하던 것을 해로 여긴다는 것은 더욱 더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으로 자라가기 위한 것이니,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갈 5:24).

 

이와 같은 삶의 증거로 나의 날들 가운데서 실제 한다. 내가 누구를 생각함이 비록 사소하고 보잘것없는 것이겠으나 바로 그와 같은 즐거움으로 주의 이름을 부르게 되는 것은 아닐까? 황동규 시인의 <즐거운 편지>를 떠올릴 때면, 저가 예수를 믿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우리 안에 그와 같은 사랑은 주를 바라는 데 필요한 최소불가결한 것이었다. 없어서는 안 될, 누구나 다 그 속에 하나님을 아는 마음은 있는데 그 마음에 하나님을 싫어하는 것에 대하여는,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롬 1:28).” 그로 인해 벌어지는 우리의 악함과 그 감정은 오늘 우리를 점점 더 상실한 괴물로 만들어가고 있지 않던가?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29-31).”

 

오늘 아침에는 겨울을 재촉하며 강하게 바람이 불고 있다. 바람 사이로 빗방울이 듣기도 하고 낙엽들은 힘없이 떨어져 사정없이 쓸려가는 소리가 들린다. 11층 베란다에서 내려다보는 세상은 때때로 기괴하다. 아파트 숲을 이루고 사는 데도 저 한 칸의 값으로 자신들의 생의 가치를 매김하고 행불행을 안고 사는 일이었으니, 사는 게 참 다들 고단하다. 이에 우리의 위로와 격려는 무엇으로 얻을 것인가? 비로소 모세를 그리 굴리신 데 따른 목적을 주가 이르신다. “이제 가라 이스라엘 자손의 부르짖음이 내게 달하고 애굽 사람이 그들을 괴롭히는 학대도 내가 보았으니,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에게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출 3:9-10).” 그럴 때 우리의 어쩌면 당연한 반응은, “모세가 하나님께 아뢰되 내가 누구이기에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 하는 의구심을 갖는 것이다(11).

 

우리 안에 진리가 충만하심이 아니면 이처럼 주저하고 어렵기만 하다. 하여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곧 주가 나와 함께 하심이 아니면 나는 무엇으로 순종할 수 있겠나? 모세의 주저함에서 나는 늘 동질감을 느낀다. 오늘도 그 마음은 여전하여서 누구를 대하고 마주할 때면 ‘내가 누구이기에’ 하는 반문과 회의가 나의 목줄을 끌어당기는 것 같다. 이때에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그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출 3:12).”

 

하나님이 반드시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은 실제의 삶으로 경험해봐야 비로소 더욱 든든해지는 법,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더는 다른 길이 없다는 말씀이 때론 답답하고 숨이 막히다가도 그래서 참 다행이란 안도의 한숨을 내쉬게도 된다. 개인적으로 나는 ‘주의 이름을 위하여’ 나를 의의 길로 인도하신다는 것과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는 이 외통수 같은 말씀이 참 큰 위로가 된다. 나의 어떤 행적과 성과로가 아니어서, 내가 어찌 다른 길을 찾아야 하지 않아도 돼서…. 오늘 시편의 말씀을 나는 그리 읽고 되새기며 되뇐다.

 

진실로 사람의 노여움은

주를 찬송하게 될 것이요

그 남은 노여움은

주께서 금하시리이다

(시 76:10).

 

그러므로,

 

너희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께 서원하고 갚으라

사방에 있는 모든 사람도

마땅히 경외할 이에게

예물을 드릴지로다

(11).

 

나의 보잘것없는 삶이 예물로 드려져서 주의 영광이 되고 기쁨이 되고 주를 영화롭게 하는 데 실오라기의 불씨라도 될 수만 있다면,

 

주의 의는 영원한 의요

주의 율법은 진리로소이다

환난과 우환이 내게 미쳤으나

주의 계명은

나의 즐거움이니이다

(시 119:142-143),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