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세가 여호와께 돌아와서 아뢰되 주여 어찌하여 이 백성이 학대를 당하게 하셨나이까 어찌하여 나를 보내셨나이까
출 5:22
그들이 광야에서 그에게 반항하며 사막에서 그를 슬프시게 함이 몇 번인가
시 78:40
그때 만약 주의 긍휼하심이 아니었다면 어땠을까? 하고 되짚어 아찔할 때가 있다. 그때마다 감정에 사로잡혀 몸이 원하고 마음이 하고자 하는 대로 살던 때에…
오직 하나님은 긍휼하시므로
죄악을 덮어 주시어
멸망시키지 아니하시고
그의 진노를 여러 번 돌이키시며
그의 모든 분을
다 쏟아 내지 아니하셨으니
그들은 육체이며
가고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바람임을 기억하셨음이라
(시 78:38-39).
우리 인생의 허망함을 아시는 주님은 우리에게 감정을 두어 이것으로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알게 하신다. 감정은 나의 내면과 바깥 세계를 연결한다. 그래서 부딪치고 싶지 않은 나 자신과 마주서게 한다. 그것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감정은 나로 하여금 진실을 향해 나아가도록 이끈다.
오늘 본문에서 모세가 하나님 앞에 정색을 하고 아뢴다. “모세가 여호와께 돌아와서 아뢰되 주여 어찌하여 이 백성이 학대를 당하게 하셨나이까 어찌하여 나를 보내셨나이까(출 5:22).” 기껏 가라, 하셔서 애굽 왕 바로 앞에 세우시고는 오히려 더 심한 경우를 마주하게 하셨으니 저의 감정이 상할 법도 하다. 그럴 때 우리가 바라고 느끼던 현실이 얼마나 허상인가를 돌아보게 된다. 천국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모든 게 온전하지 못하고 선하지 않은 것을 알게 된다.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롬 8:22-23).”
세상에서 겪는 여러 어려움으로 우리는 탄식을 배운다. 본래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바라셨던 우리 자신이 아닌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것도 성별에 따라 조금 차이가 있는데 남자는 슬픔보다 분노를 여자는 분노보다 두렵고 외로움을 먼저 느낀다. 이에 오늘 시편은 우리에게 정당한 사유와 탄식을 가르친다.
그들이 광야에서 그에게 반항하며
사막에서 그를 슬프시게 함이 몇 번인가
그가 자기 백성은 양 같이 인도하여 내시고
광야에서 양 떼 같이 지도하셨도다
(시 78:40, 52).
우리가 감정에 의해 동요한다는 것은 그만큼 하나님을 바로 신뢰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다. 자기 힘으로 어찌 해보려고 하는 것으로 감정은 이런 자신의 허물을 폭로한다. 욱, 하고 올라오는 어떤 느낌으로… 갑자기 끝도 없이 밀려 내려가는 것 같은 기분으로… 이게 다 누구 때문이고, 나만 그런 것 같은 슬픈… 감정은 쉴 새 없이 자신의 존재가 어느 정도인가를 알리며 아우성친다. 그런 감정을 느낀다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이를 계속 지니고 살아야 한다는 게 문제다. 누구 앞에서 자주 자기 이야기를 하는 경우나, 어떤 일을 두고 서러움이 일거나, 눈물이 먼저 터져 나오곤 하는 경우 들은 모두 그만큼 하나님 앞에 자신을 다 드러내고 살지 못한다는 증거다. 이를 사람에게 보이고, 사람들의 이야기에 호응하면서도 하나님은 뒷전에 모신 셈이다. 그렇게 우리는 우리 자신의 감정을 통해 하나님과 어떤 관계로, 어떤 국면을 맞이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감정은 좋고 나쁜 게 없다. 다만 이를 가지고 다른 사람에게 투영하고 전가하여 그 감정을 폭발시키는 것이 문제다. 그래서 누구는 자신의 삶을 두고 범퍼카를 타고 있는 것 같다고 했다. 그러려고 그런 게 아닌데 툭, 하면 시비가 붙는다. 별 것도 아닌 일에 화부터 난다. 짜증이 올라오고 억울하기도 하다. 자신의 감정만 그러는가 했더니 실은 자신으로 인해 가족이 또는 곁의 모든 사람들과 자주 부딪친다. 연거푸 들이받히고 들이받으며 서로를 탓한다.
시편을 묵상할 때면 모든 감정이 고스란히 토로된 것을 본다. 시편의 모든 감정은 우리의 실상, 민낯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이는 하나님이 의도적으로 그리하심을 알려준다. 왜냐하면
그들로 그들의 소망을 하나님께 두며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잊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계명을 지켜서
그들의 조상들 곧 완고하고 패역하여
그들의 마음이 정직하지 못하며
그 심령이 하나님께 충성하지 아니하는
세대와 같이 되지 아니하게 하려 하심이로다
(시 78:7-8).
곧,
그들은 육체이며
가고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바람임을 기억하셨음이라
(39).
스스로에게 환멸을 느껴야 한다. 자신을 자부하는 것들로부터 벗겨져야 한다. 그와 같은 헛된 망상이 우리로 얼마나 하나님을 멀리하고 더디 믿게 하는지를 알아야 한다. 그러니까 가장 심각한 문제는 곧 자기 자신임을 말이다. 누가 누구를 탓하겠나? 어쩌면 우리 인류는 에덴에서 쫓겨나면서부터 우리 안에 반발이 생겨나서 에덴으로 돌아가고 싶은 욕구는 공격적이고 파괴적인 감정으로 나타나고, 그래봐야 소용없다는 현실은 우리로 하여금 도피를 종용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 땅으로 헤매며 곤고하며
굶주릴 것이라 그가 굶주릴 때에
격분하여 자기의 왕과
자기의 하나님을 저주할 것이며
위를 쳐다보거나 땅을 굽어보아도
환난과 흑암과 고통의 흑암뿐이리니
그들이 심한 흑암 가운데로
쫓겨 들어가리라
(사 8:21-22).
이것이 우리의 숙명이고 모든 인류의 결과가 되었다. 다들 괜찮은 척, 저마다 자기 이야기는 아닌 듯 굴지만 그와 같은 외면이 오히려 더 그의 영혼을 병들게 하고 있었다. 마치 모든 암과 같이 아무도 모르게 자리 잡고 아무도 손쓸 수 없을 때까지 잠식한다. 그렇게 누가 또 암에 걸려 항암을 받고 투병중이란 소식과 함께 저가 그동안 남모르게 지고 살았던 그 가족의 사연을 전해 들으며… 아, 우리의 어쩔 수 없음 앞에 치를 떤다.
성경이 들려주는 저들의 광야는 인생의 축약이다. 우리 현실을 그대로 반영한다.
그들이 그들의 탐욕대로 음식을 구하여
그들의 심중에 하나님을 시험하였으며
그뿐 아니라 하나님을 대적하여 말하기를
하나님이 광야에서 식탁을 베푸실 수 있으랴
(시 78:18-19).
우리의 의심과 회의와 또 갈등이 어디 한두 번인가? 그때마다 우리의 반감은 우리의 본성을 고스란히 무너뜨리곤 한다.
보라 그가 반석을 쳐서 물을 내시니
시내가 넘쳤으나 그가 능히 떡도 주시며
자기 백성을 위하여
고기도 예비하시랴 하였도다
(20).
이 지긋지긋한 의심은 언제까지 되풀이 될 것이며, 끝도 없는 감정의 소동은 언제까지일까?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듣고 노하셨으며
야곱에게 불 같이 노하셨고
또한 이스라엘에게 진노가 불타 올랐으니
이는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며
그의 구원을 의지하지 아니한 때문이로다
(21-22).
결국은 별 수 없는 일일까? 반항하는 마음이 일면 더 끔찍한 현실이 오기 전까지는 멈출 줄을 모른다. 그렇게 주저하거나 더욱 완고해지거나 하나님과의 관계는 와해되고 자신만이 전부인 것처럼 늘 그 안에 억울함이 가득하다. 그럴 때 시편은 오히려 우리들로 하여금 고통 속으로 초대한다.
내가 탄식함으로 피곤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
내 눈이 근심으로 말미암아 쇠하며
내 모든 대적으로 말미암아
어두워졌나이다
(시 6:6-7).
주 앞에 토로하지 않는 모든 감정은 고스란히 자신의 현실에 반영하고 산다. 자식들이 고생이고 곁에 있는 사람이 영락없이 이를 당한다. 하나님과 씨름하지 않는 감정은 특히 가까운 사람들을 중심으로 퍼붓게 돼 있다. 그럴 때 시편은 한 지혜를 일깨우는데, 인생의 괴로움을 영적으로 풀려고 하지 말라는 것이다. 인생은 어차피 변덕스럽고 모순된 것이어서 격렬했던 감정이 언제 그랬냐는 듯 고요한가했더니 더 큰 쓰나미로 덮쳐오기 일쑤다. 그럴 때 애써 타협하거나 변명하려하기보다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고통 속에서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만이 살 길이다.
주께서 내가 아는 자를
내게서 멀리 떠나게 하시고
나를 그들에게 가증한 것이 되게 하셨사오니
나는 갇혀서 나갈 수 없게 되었나이다
곤란으로 말미암아 내 눈이 쇠하였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매일 주를 부르며
주를 향하여 나의 두 손을 들었나이다
(시 88:8-9).
그 실상을 알면 알수록 아뢰어야 할 내용은 달라진다.
주께서 죽은 자에게
기이한 일을 보이시겠나이까
유령들이 일어나 주를 찬송하리이까 (셀라)
주의 인자하심을 무덤에서,
주의 성실하심을 멸망 중에서
선포할 수 있으리이까
(10-11).
하나님을 반박하고 반문하여 역공을 취하는 데도 하나님은 이를 우리에게 허용하신다. 그렇게 해서,
여호와여 오직 내가
주께 부르짖었사오니
아침에 나의 기도가
주의 앞에 이르리이다
여호와여 어찌하여
나의 영혼을 버리시며
어찌하여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시나이까
(13-14).
순식간에 나의 영혼은 순한 양 같이 주 앞에 엎드려 주의 어루만지심을 바란다. 이처럼 역설적이게도 나의 감정을 하나님께 토해내고 나의 눈물을 하나님께 퍼부어대는 것은 주어진 현실의 비극에 그대로 안주하지 않게 하시는 하나님의 친밀한 인도하심을 경험하게 한다. 그러니 사람 붙들고 감정을 토로할 것 없다. 내가 정신과 약은 먹어도 저들과의 상담을 그리 신뢰하지 않는 까닭은 저들 또한 저들 자신의 감정을 주체할 수 없는 위인들이라. 한껏 토해내듯 내 이야기를 하고 눈물까지 흘리며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한들? 현실은 절대 바뀌지 않는다. 차돌멩이를 아무리 물에 담가두어도 절대로 그 속에 물이 스며들지 않는 것과 같다. 겉은 흥건하게 젖은 것 같으나 속은 여전히 메말라있다.
나는 누구의 말에 같이 울고 같이 호응하지만 끝은 꼭 기도로 마무리하기를 선호한다. 이제는 아이와 만나 공부를 할 때도 어색해하고 그 마음이 불편하다 해도 기도부터 하고 시작한다. 저들이 알기를 바라는 게 있는데, 나한테 떠들어봐야 소용없다. 나는 저들보다 더 쪼다 같고 빙충맞다. 찌질하기는 말할 것도 없고 누구보다 감추고 있는 죄악과 허물이 한 바가지다. 그런 내가 고상을 떨며 뭐라 위로를 하고 권면을 한다 한들? 그런 게 다 개소리다. 그러게, ‘개가 더 훌륭하다.’ 이게 또 희한한 것은 기껏 속엣 얘길 늘어지게 털고는 머잖아 아니한만 못한 사이가 되는 경우를 여러 번 경험했다. 그때는 내가 내 경험으로 비춰 어찌할 수 있을 것처럼 굴었던 때이다.
시편은 오히려 그러느니 하나님을 의심하고 하나님과 다투고 하나님과 담판을 지라고 권한다. 시편은 그래서 모든 감정에서 투명하다. 할 말 못할 말이 없다. 저는 나의 하나님이시지 않던가? 나를 지으시고 오늘에 두시고 이루고자 하는 목적을 갖고 계신, 만유의 주가 아니시던가? 그런 걸 사람에게는 별의 별 소릴 다하면서 하나님 앞에서는 무심하면 뭘 어쩌자는 것인지. 그래서 나는 앞서 저의 기도를 유도하거나 내가 나서서 기도를 한다. 싫어하고 어색해하는 게 영력해도 어쩔 수 없다. 왜냐하면 저가 모르는 나의 실체를 나는 잘 알고 있고, 그런 나를 한없이 용서하시고 용납하시는 이가 하나님이신 것을 나는 또 알고 있기 때문이다. 웃기는 건, 서로 친하다고 여기는 친구와의 대화에서 기도로 먼저 시작하기가 더 어렵다! 그런들 우리가 어디로 피할 수 있겠나?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시 139:2).
이를 숨기고 살 줄 알았지? 한데,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7).
이를 하루 속히 알면 알수록 그 속은 편하다. 들끓는 감정을 잠재울 수는 없어도 그것으로 쓸려 내려가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9-10).
이 놀라운 은총 앞에서 나는 자주 무장해제한다. 도로 긴장감에 휩싸이고 금세 두려움으로 헉헉거리다, 인데놀정20과 저나팜0.25를 삼켜야 하지만 나의 안정감은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가는 그날까지 묘연할 수도 있다. 내가 어디로 가든지, 어디로 숨는다 해도 하나님이 거기에 먼저 계심을! 그리하여 모세는 절규하듯 주께 아뢴다. “모세가 여호와께 돌아와서 아뢰되 주여 어찌하여 이 백성이 학대를 당하게 하셨나이까 어찌하여 나를 보내셨나이까(출 5:22).”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어는 하나님과의 씨름이다. 이는 결국 하나님의 친밀하신 의도로 고도의 전술에 의한 우리 영혼을 다루심이다.
그들로 그들의 소망을
하나님께 두며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잊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계명을 지켜서,
그들의 조상들 곧 완고하고
패역하여 그들의 마음이 정직하지 못하며
그 심령이 하나님께 충성하지 아니하는
세대와 같이 되지 아니하게
하려 하심이로다
(시 78:7-8).
이를 위해 하나님은 참고 또 참고 또 참고 기다리신다. 그렇게,
오직 하나님은 긍휼하시므로
죄악을 덮어 주시어
멸망시키지 아니하시고 그의 진노를
여러 번 돌이키시며 그의 모든 분을
다 쏟아 내지 아니하셨으니
그들은 육체이며 가고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바람임을
기억하셨음이라
(38-39).
우리의 어쩔 수 없음을 누구보다 하나님은 더 잘 알고 계시었다. 하여,
그들이 광야에서 그에게 반항하며
사막에서 그를 슬프시게 함이 몇 번인가
(40).
그럼에도,
그가 자기 백성은
양 같이 인도하여 내시고
광야에서 양 떼 같이
지도하셨도다
이에 그가 그들을
자기 마음의 완전함으로 기르고
그의 손의 능숙함으로
그들을 지도하였도다
(52, 7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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