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주의 생각이 매우 깊으시니이다

전봉석 2021. 11. 24. 04:49

 

내가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

출 19:4

 

여호와여 주께서 행하신 일이 어찌 그리 크신지요 주의 생각이 매우 깊으시니이다

시 92:5

 

 

절박함은 주관적이다. 곁에서 이를 다 알 수는 없다. 그런가보다 하는데, 그렇게 절실하지도 않다. 말을 전할 때, 감정은 이완되고 확장하여 멋대로 부풀려지기 마련이다. 누구와의 대화에서 ‘아직 살만하구나!’ 하는, 다소 냉소적인 느낌이 들었다. 죽을 것 같아 내 마음을 졸이게 하더니, 와중에도 하나님의 사랑을 논박하자고 든다. 그럼 ‘아직 멀었다!’ 싶어지는 것이다. 하다못해 난치병을 앓는 이에게 더 큰 문제는 민간요법이다. 그만큼 의지적으로 살고자함인데, 하물며 영혼의 문제에 대해서는 느긋하기만 하다.

 

나는 저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어찌 설명해야 할까? 궁리하다 예를 들어 말하였다. 우리가 아는 모든 사람들과 같이 엄청난 대자연 앞에 섰다 하자. 가령 나이가라폭포 앞에 섰다 했을 때, 그 웅장함과 어마어마한 풍광에 모두가 압도되어 탄성을 지르며 놀라워하고 어떤 두려움마저 든다. 한데 그 와중에 누군 주머니에 넣어온 막대사탕을 까서 먹느라 정신이 팔리고, 누군 손에 쥔 핸드폰 게임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면… 어처구니없는 비유지만 그야말로 어처구니없는 행동들이 아닐 수 없다! 저는 그 상황을 머리로 그려보는지 가만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고 교회도 나름 열심히 다닌다고 하면서 정작 자신의 생활에서는 그다지 와 닿지가 않는 하나님의 위대하심에 대하여, 하나님은 하나님이 무시되고 외면당하는 것을 싫어하신다. 이때에 하나님은 우릴 공격하신다. 이를 시인은 지진 같다고 비유한다.

 

주께서 땅을 진동시키사

갈라지게 하셨사오니

그 틈을 기우소서

땅이 흔들림이니이다

(시 60:2).

 

이는,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를 버려

흩으셨고 분노하셨사오나

지금은 우리를 회복시키소서

(1).

 

결국 그의 어마어마하심 앞에서 다른 데 한눈을 팔다니. 호세아는 그 두렵고 떨림을 맹수와 같다고 비유한다.

 

그러므로 내가 그들에게 사자 같고

길 가에서 기다리는 표범 같으니라

내가 새끼 잃은 곰 같이

그들을 만나 그의 염통 꺼풀을 찢고

거기서 암사자 같이 그들을 삼키리라

들짐승이 그들을 찢으리라

(호 13:7-8).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지나? 이는 기어이,

 

내가 광야 마른 땅에서 너를 알았거늘

그들이 먹여 준 대로 배가 불렀고

배가 부르니 그들의 마음이 교만하여

이로 말미암아 나를 잊었느니라

(5-6).

 

그만큼 알아듣게 말하고 알 수 있도록 함께 하시고 역사하시는데도 이를 소홀히 여기는 것이다. 나이아가라폭포 그 대자연 앞에서 고작 막대사탕을 까서 입에 물려고 거기에 정신이 팔리는 꼴이었으니… 주식에서 얼마를 손해보다 손을 빼고 요즘은 코인에 투자를 한다며 한참을 내게 설명하였다. 나는 무슨 소린지, 채굴이 뭐고 얼마의 이문을 남겼다는 소린지. 결국은 서로의 관심의 문제이고, 이는 가치의 값어치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니 뭐라 말로 하여 어떻게 저의 영혼을 돌이킬 수 있을까? 나는 속으로 주의 이름만 애타게 불렀다.

 

결국은 고통뿐인가! 나 혼자의 생각이다. 저들의 말과 말 사이에서 그 한가로움에 대하여, 하나님은 너무 멀고 당장의 자기 손실과 이득이 더 큰 법이었으니, 하나님은 우리가 주를 무시할 때 이를 몹시 싫어하신다.

 

내 백성아 들을지어다

내가 말하리라

이스라엘아 내가 네게 증언하리라

나는 하나님 곧 네 하나님이로다

 

내가 가령 주려도

네게 이르지 아니할 것은

세계와 거기에 충만한 것이

내 것임이로다

내가 수소의 고기를 먹으며

염소의 피를 마시겠느냐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지존하신 이에게 네 서원을 갚으며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시 50:7, 12-15).

 

나 자신도 결국은 고꾸라지고 넘어져서야 주의 이름을 부른 것처럼… 우리의 자아가 또는 자기 의지가 얼마나 고집스럽고 두려운 것인지를 새삼 느꼈다. 누구와의 대화에서 어떤 문제로 씨름하고 있는 것을 듣다못해, 제발 네 앞에 놓인 저 웅대하고 장엄한 폭포를 좀 봐! 하고 소리치고 싶었다. 말로는 어찌할 수 없는 것인가? 나는 속으로 주께 아뢰기를, 그럴 거면 뭐 하러 저를 만나게 하십니까? 하고 되묻기도 하였다. 이에,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시 51:17).

 

그럴 마음이 아직은 없는가? 덜 아픈가? 얼마나 더 치를 떨어야 정신을 차릴까? 나만 속으로 애태우다 만 것 같다. 하나님의 소원은 무엇인가? “내가 에브라임에게는 사자 같고 유다 족속에게는 젊은 사자 같으니 바로 내가 움켜갈지라 내가 탈취하여 갈지라도 건져낼 자가 없으리라(호 5:14).” 정령 우리는 갈 데까지 가야 할 모양이다. 그리하여 “에브라임은 마치 길들인 암소 같아서 곡식 밟기를 좋아하나 내가 그의 아름다운 목에 멍에를 메우고 에브라임 위에 사람을 태우리니 유다가 밭을 갈고 야곱이 흙덩이를 깨뜨리리라(10:11).” 우리의 모난 삶의 행태는 길들여지기 어렵다. 고쳐서 쓸 수 없다. 버려야 한다.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요 3:7).” 차라리 좀 더 가난하고 아파라. 더는 스스로 옴짝달싹 운신도 못할 처지에 놓여라. 별 수 있겠나? 살만한 게 죄다. 그게 왜 나빠? 하는 게 죄다.

 

스스로를 옳다하는 이상 어떤 말로도 씨알이 먹히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어쩌겠나?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갈 6:7).” 저의 관심이 곧 그 정도여서 아무리 뭐라 해도 소용이 없는 것이다.

 

내가 저 깃발을 보며

나팔 소리 듣기를 어느 때까지 할꼬

내 백성은 나를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요 지각이 없는

미련한 자식이라

악을 행하기에는 지각이 있으나

선을 행하기에는 무지하도다

(렘 4:21-22).

 

결국은 알지 못하여 그게 왜 중요한지 분간도 못하는 아이 같았다. 하도 답답하여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마 13:44).” 결국은 저마다의 가치 기준의 문제다. 이제 곧 은퇴할 나이라, 언제 일자리를 잃을까, 전전긍긍하면서도 정작은 그 삶의 끝을 두고는 안이하다. 그 너머 영생의 문제에는 더더욱 관심이 없다. 와 닿지가 않는 것이다. 누구는 그 가치를 알아보고는 자신의 모든 소유를 팔아 그 보화를 사는데, 누구는 저가 왜 그러는지 알 길이 없다. 보다 못해…

 

보라 내가 네게 말하노니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에

네 치마를 걷어 올려

네 얼굴에 이르게 하고

네 벌거벗은 것을

나라들에게 보이며

네 부끄러운 곳을

뭇 민족에게 보일 것이요

내가 또 가증하고 더러운 것들을

네 위에 던져 능욕하여

너를 구경 거리가 되게 하리니

그 때에 너를 보는 자가

다 네게서 도망하며 이르기를

니느웨가 황폐하였도다

누가 그것을 위하여 애곡하며

내가 어디서 너를

위로할 자를 구하리요 하리라

(나 3:5-7).

 

하나님은 우리로 수치와 부끄러움에 두신다. 그러니 그 심정이 또 오죽하실까? 마치 부모가 자식의 수모를 보며 이를 악, 무는 것처럼 답답해하듯 하나님은 하나님 스스로의 조롱도 감수하신다.

 

나를 보는 자는

다 나를 비웃으며

입술을 비쭉거리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되

그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 걸,

그를 기뻐하시니

건지실 걸 하나이다

(시 22:7-8).

 

나는 친구에게 믿는다고 믿으나 더디 믿는 이유에 대하여 너무 많은 세상 염려를 꼽았다. 앞으로 어찌 살까를 두고 염려하기보다 오늘까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총을 묵상해보라 일렀다. 같은 나이에 저는 부모에게 물려받은 건물로 건물주로 산다. 5층 건물로 보잘것없다고는 하나 또한 두 아들 사지육신 멀쩡하여 제 앞가림 잘하고 사는 것을 두고도 별로 감흥이 없다. 결국 감사를 모를 때 염려는 엄습한다. 가진 것보다 가지지 못한 것을 두고 투덜거린다. 그럼에도 하나님이 저를 사랑하심으로 저의 곁에 계시는데, 어찌 너만 모르냐? 하고 나는 답답해하였다.

 

“이에 총독의 군병들이 예수를 데리고 관정 안으로 들어가서 온 군대를 그에게로 모으고 그의 옷을 벗기고 홍포를 입히며 가시관을 엮어 그 머리에 씌우고 갈대를 그 오른손에 들리고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희롱하여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며 그에게 침 뱉고 갈대를 빼앗아 그의 머리를 치더라(마 27:27-30).” 이런 수모를 겪으면서까지 우리를 사랑하시고 참고 또 기다리시는 주님을 나는 어찌 저로 알게 할 수 있을까? 우리가 함께 했던 긴 세월 동안 우리가 서로를 겪으며 아는 만큼, 그러니 그 고집을 누가 꺾을 수 있겠나?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벧전 2:23-25).” 우리의 복됨에 대하여, 주의 인자하심과 긍휼하심에 대하여, 차라리 남모르는 사람이면 더 쉽게 설명하고 이를 알게 할 수 있겠는데… 나는 오래된 친구 앞에서 저의 태평함에 조바심마저 들었다. 그럼에도 인천까지 오게 하셔서, 우리로 이와 같은 말로 대화를 나누게 하셨다! 그야말로 이런 날이 올 줄이야 누가 알았겠나? 저와 같이 커피숍을 나오면서 혼잣말처럼 그리 말하고 헤어졌다.

 

무던히 기다리고 또 기도할밖에. 그래도 나름 ‘다니엘기도’ 집회에도 참석하고, 뒤늦게 ‘아내를 기쁘게 하려고’ 성경공부도 같이 한다고 하는데… 주께서 참고 기다리심인데, 나야말로 묵묵할 수밖에. 그래, 이것만으로도 기적이다! 저의 완고함을 내가 일찍이 잘 아는데, 이게 어딘가? 하고 위안을 삼았다. 부디 주의 긍휼하심이 함께 하시기를. “내가 나의 맹렬한 진노를 나타내지 아니하며 내가 다시는 에브라임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이요 사람이 아님이라 네 가운데 있는 거룩한 이니 진노함으로 네게 임하지 아니하리라(호 11:9).” 그뿐 아니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오늘 본문에서 나는 하나님의 우려와 사랑을 본다. “내가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출 19:4).” 하여 주가 임하실 때에 행여 우리의 호기심이나 호기로움으로 저주를 당할까 하여,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백성에게로 가서 오늘과 내일 그들을 성결하게 하며 그들에게 옷을 빨게 하고 준비하게 하여 셋째 날을 기다리게 하라 이는 셋째 날에 나 여호와가 온 백성의 목전에서 시내 산에 강림할 것임이니 너는 백성을 위하여 주위에 경계를 정하고 이르기를 너희는 삼가 산에 오르거나 그 경계를 침범하지 말지니 산을 침범하는 자는 반드시 죽임을 당할 것이라(10-12).” 우리의 어리석음이 대체 어디까지일까?

 

여호와여 주께서 행하신 일이

어찌 그리 크신지요

주의 생각이 매우 깊으시니이다

(시 92:5).

 

주 앞에 나는 두려워할 수 있음을 감사하였다. 친구에게도 말하길, 내 인생에 지금이 제일 좋다! 하고 자부하였다. 한 시간 이상 앉아 있기도 힘들어 허리를 뒤틀고, 같이 있는 서너 시간이 고역일 정도로 나의 겉사람은 낡았으나…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고후 4:16).” 친구에게 이 말을 들려주자 저는 처음 듣는 말인지 고개를 갸우뚱하였다. 내친김에 늙는 연습을 해라, 혼자 있는 준비를 해라, 죽음을 맞이할 채비를 해라, 곧 우리에게도 이르리니 누구나 그때가 오면 ‘이를 어찌 할꼬?’ 당혹스러워하기 마련이지만….

 

의인은 종려나무 같이 번성하며

레바논의 백향목 같이 성장하리로다

이는 여호와의 집에 심겼음이여

우리 하나님의 뜰 안에서 번성하리로다

(시 92:12-13).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