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님이 임하심은 너희를 시험하고 너희로 경외하여 범죄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출 20:20
여호와께서 다스리시니 스스로 권위를 입으셨도다 여호와께서 능력의 옷을 입으시며 띠를 띠셨으므로 세계도 견고히 서서 흔들리지 아니하는도다
시 93:1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보거나, 설교 영상을 보거나 누구를 만나거나 할 때에 맞춤하니 딱, 그 시점의 어떤 시의적절함을 느끼곤 한다. 무작위로 책을 읽고 어떤 영상을 보고 누구를 마주하게 되는 일 같은데 그 모든 상황을 주관하고 통치하시는 이의 손길을 느낄 수 있다. 우연을 가장하고 다가오는 하나님의 섭리다.
가령 전날에 친구와 나누었던 이야기와 그때의 설명이 미진하였다하는 생각으로 아쉬움이 있었다. 그런데 오후에 문득 유튜브를 열고 옥한흠 목사의 설교 영상을 보는데, 이는 예비하신 것이라. 우리의 인생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에 대하여 고린도후서 5장 8-10절 말씀을 본문으로 하고 있었다. 이를 공유하여 친구에게 보내주고 나의 감동이 저에게도 전달되기를 바랐다. 살면서 다들 더 오래 더 누리며 살고 싶어 하는데, 바울은 의외의 진술을 하였다.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고후 5:8).” 모두가 잘 살고자 할 때, 우리는 잘 죽고자 하여 산다. 이는 죽음 너머의 일을 알기 때문이다.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10).”
순간 소름이 돋았던 것은 전날에 나누었던 어떤 이야기 때문이다. 이 땅에서의 노후나 퇴임 후의 삶을 준비하느라 애쓰는 시간이 있는데 하물며 영생을 두고 우리는 어떠한가, 하는 내용이었다. 싫든 좋든 우리는 모두 죽고 난 뒤에 주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된다. 이는 우리가 알든 모르든, 인정하든 부인하든 누구라도 예외일 수 없다. 하고 그 앞에 서서 일생의 삶을 두고 주께 고하여야 하는데… 믿는 우리는 염려하지 않을 것은 우리의 삶을 변호하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대언자로 계신다.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요일 2:1).” 앞서 사탄은 우리를 정죄하고 주 앞에 우리의 허물과 실수를 낱낱이 고한다. “대제사장 여호수아는 여호와의 천사 앞에 섰고 사탄은 그의 오른쪽에 서서 그를 대적하는 것을 여호와께서 내게 보이시니라(슥 3:1).”
이때에 우리의 더러움을 두고 주께 고발하는 사탄을 오히려 책망하시고,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여호와께서 너를 책망하노라 예루살렘을 택한 여호와께서 너를 책망하노라 이는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가 아니냐 하실 때에 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입고 천사 앞에 서 있는지라(2-3).” 우리로 아름다운 옷으로 갈아입혀 주신다. “여호와께서 자기 앞에 선 자들에게 명령하사 그 더러운 옷을 벗기라 하시고 또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 죄악을 제거하여 버렸으니 네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 하시기로 내가 말하되 정결한 관을 그의 머리에 씌우소서 하매 곧 정결한 관을 그 머리에 씌우며 옷을 입히고 여호와의 천사는 곁에 섰더라(4-5).” 이와 같은 사실을 앞서 알고 주를 온전히 믿고 의뢰하는 것으로 우리는 주를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산다. “그런즉 우리는 몸으로 있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노라(고후 5:9).”
이와 같은 현상, 어떤 꼬였던 매듭이 풀리는 듯한 느낌을 자주 경험한다. 고개를 갸우뚱하였던 것에 대하여,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 13:12).” 더욱 선명하게 온전하게 알 게 하시는 것이다.
하루는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물었다. “어떤 사람이 여짜오되 주여 구원을 받는 자가 적으니이까?” 그때에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이 대화는 우리로 오늘을 어찌 살아야 하는지를 알게 한다(눅 13:23-24). ‘좁은 문’이란 누구나 원하고 바라는 ‘너른 문’과는 대조적이다. 누구나 이 땅에서 잘되고 형통하기를 바라여 교회를 다니고, 종교를 하나씩은 갖고 산다. 전날에 친구가 하였던 말과 그의 질문이 유사하였다. 우리나라만 해도 믿는다는 사람이 많고 저마다의 바람을 들고 교회를 다닌다. ‘여짜오되 구원 받는 자가 적으니이까?’ 왜 저는 많을지를 묻지 않고 적을지를 두고 물었을까?
마태는 이를 회고하며 예수님의 말씀을 기록하였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마 7:13-14).” 보면 큰 교회들은 그 교인들을 다 수용할 수가 없어 몇 부로 나누어 예배를 드리는데도 그 시간마다 사람들이 꽉꽉 찬다. 친구가 다니는 모 교회도 한국에서 내로라하는 교회로 함께 본당에서 예배를 드리지 못할 경우 화면으로 그 시간을 대신할 정도이다. 하면 질문은 ‘천국에 들어갈 자가 많다’는 쪽으로 물었어야 하는데…. 이를 주님은 대답에서 바로 잡으시며, 천국에 들어갈 자가 의외로 적을 것임을 말씀하고 계신다.
전날에 이런 대화가 오갔고, 그때에 미진하였던 설명이나 이해가 맞춤하니 설교 영상으로 다시 접할 수 있게 하신 것이다. 나는 여기에서 ‘행동하시는 하나님’을 본다. 나로 바로 알게 하심으로 전하여지는 말씀 또한 바르고 온전하기를 원하신다. 이러한 사고와 삶을 하나님은 기뻐하신다. 곧 우리가 주로 주를 더욱 바로 알고자 하고 그 뜻에 따라 살고자 하는 것으로 말이다. 주가 행하심은 여호와께서 하나님이심을 우리로 알게 하기 위해서이다. 이에 “우리가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로 말미암아 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위로는 하늘에서도 아래로는 땅에서도 하나님이시니라(수 2:11).”
오늘 아침, 본문에서도 하나님은 어떤 분이고 무엇을 원하시는지를 십계명을 통해 알게 하신다. 이에 우리는 두려워하고 떤다. 그때에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님이 임하심은 너희를 시험하고 너희로 경외하여 범죄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출 20:20).” 내가 이제 누구를 대함은 주를 더욱 알게 하고 그의 깊으신 뜻을 온전히 전하여주는 일이다. 이에 나에게 두시는 일련의 사태와 상황은 모두 주의 살아계심을 알게 하는 교재다. 천수만수를 누릴 것처럼, 그 권력이 막강하였던 이가 허망하게 죽었다. 죽어서도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고 욕을 먹는다. 그 삶의 허망함을 두고, 우리가 그토록 애쓰고 수고하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한다.
“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넘기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 목을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체를 오늘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 알게 하겠고,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삼상 17:46-47).” 누구의 어떤 인생의 이야기든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알게 한다. “여호와여 내게 응답하옵소서 내게 응답하옵소서 이 백성에게 주 여호와는 하나님이신 것과 주는 그들의 마음을 되돌이키심을 알게 하옵소서 하매 이에 여호와의 불이 내려서 번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을 태우고 또 도랑의 물을 핥은지라(왕상 18:37-38).” 곧 하나님은 하나님 되심을 우리로 알게 하신다.
이를 두고 누구는 저렇다 하고 누구는 이렇다 하나, “그 때에 하나님의 사람이 이스라엘 왕에게 나아와 말하여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에 아람 사람이 말하기를 여호와는 산의 신이요 골짜기의 신은 아니라 하는도다 그러므로 내가 이 큰 군대를 다 네 손에 넘기리니 너희는 내가 여호와인 줄을 알리라 하셨나이다 하니라(20:28).” 다시 말해 우리로 여호와가 하나님이심을 알게 하려 하시려고, 오늘 날의 전염병과 자연재해와 사람과 사람 사이의 모든 일을 목도하게 하신다. 이에
그의 영광을 백성들 가운데에,
그의 기이한 행적을
만민 가운데에 선포할지어다
여호와는 위대하시니
지극히 찬양할 것이요 모든
신들보다 경외할 것임이여
만국의 모든 신들은 우상들이지만
여호와께서는 하늘을 지으셨음이로다
(시 96:3-5).
하나님을 바로 알자. 우리에게 더하신 사명이다. “아름다운 소식을 시온에 전하는 자여 너는 높은 산에 오르라 아름다운 소식을 예루살렘에 전하는 자여 너는 힘써 소리를 높이라 두려워하지 말고 소리를 높여 유다의 성읍들에게 이르기를 너희의 하나님을 보라 하라(사 40:9).” 주가 우리를 다스리시니 이를 삶에서 바로 알 때 정작 우리가 사는 동안 무엇을 준비하고 대비해야 하는가를 안다. 그렇지 않으면, “네가 나를 거슬러 분노함과 네 오만함이 내 귀에 들렸으므로 내가 갈고리로 네 코를 꿰며 재갈을 네 입에 물려 너를 오던 길로 돌아가게 하리라 하셨나이다(37:29).” 나는 누구의 죽음을 접하며 저의 한 생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이제 저가 처한 상황을 묵상하다 두려운 마음마저 들었다. 더는 돌이킬 수 없는 영원한 시간 가운데서 저는 지금 어떤 처지에 놓여 있을까?
내 백성아 내 말을 들으라
이스라엘아 내 도를 따르라
그리하면 내가 속히
그들의 원수를 누르고
내 손을 돌려 그들의 대적들을 치리니
여호와를 미워하는 자는
그에게 복종하는 체할지라도
그들의 시대는 영원히 계속되리라
(시 81:13-15).
단지 이 땅에서의 일로 전부가 아닌 것을. 아주 일부에 지나지 않는 오늘을 두고도 그처럼 아등바등 산다고 사는 것인데, 하물며 우리에게 주어질 영생을 어찌 감당하려 하는 것일까? 전날에 친구와의 대화에서 주로 강조하였던 내용이고, 나로 하여금 오늘 주 앞에 바로 서게 하는 이유였다. 하나님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얼마든지 마음을 바꾸신다. “내가 나의 맹렬한 진노를 나타내지 아니하며 내가 다시는 에브라임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이요 사람이 아님이라 네 가운데 있는 거룩한 이니 진노함으로 네게 임하지 아니하리라(호 11:9).” 이 또한 우리가 살았을 때, 돌이킬 수 있는 때에 주 앞에 아뢰어 고할 수 있는 것이다. 더는 그럴 수 없는 누구의 죽음 앞에서 사죄 한 마디 없이 허망하게 생을 다한 저를 오히려 안타깝게 여긴다.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면 그 인격이 자라나서 변화되고 그리스도의 장성하신 분량에까지 이르러야 한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엡 4:13).” 우리가 그럴 수 있는 것은 우리 안에 성령이 함께 하심이다. 저는 우리의 연약함을 아신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 8:26).” 그러니 오늘 나의 삶은 얼마나 복된가? 나의 연약함을 아심으로 성령께서 친히 함께 하시고, 죽어서는 나의 허물과 좌악 됨으로 멸망에 이르지 않도록 그리스도께서 대언자로 나를 변호하시니 말이다.
좋아 보인다! 하는 친구의 말을 나는 그리 듣고 흡족하였다. 현실적으로 뭐 그리 좋을 게 뭐 있겠나 싶지만, 이미 충분하였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이란, “주께 합당하게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 그의 영광의 힘을 따라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시며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게 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골 1:10-12).” 내가 자신 있게 그럴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그러하도록 내가 아는 하나님은 오늘도 행하신다. 일하시는 것이다. 우연처럼 접한 설교 영상에서 또는 들고 있던 책에서, 누구의 말과 어떤 이의 생을 접하면서 하나님이 하나님이신 것을 바로 알게 하신다.
그리하여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 4:24).” 이와 같은 말씀 앞에 어떤 조바심도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러고 싶은데 늘 모자라고 연약하기만 한 나를 두고 주의 이름을 더한다. 할 때 내 곁에 두시는 이를 주의 이름으로 대하게 하시고,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알려주게 하신다. 이를 위해서도 나의 눈을 여시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받아 삶 가운데서 간증이 되게 하신다. 친구의 말 중에 가장 마음을 아프게 했던 것은, 자신은 그다지 하나님의 은총을 느낀 바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서둘러 또 여기까지 온 김에 누구를 만나 어떤 일, 돈 벌 궁리를 하려 한다며 떠나는 뒷모습이었다. 부디 주의 살아계심이 저 또한 내가 보는 것을 저도 알게 하시기를.
여호와께서 다스리시니
스스로 권위를 입으셨도다
여호와께서 능력의 옷을 입으시며
띠를 띠셨으므로
세계도 견고히 서서
흔들리지 아니하는도다
(시 93:1).
나의 나를 주관하시는 이에게 감사한다. 이런저런 어려움과 힘든 상황이 늘 나를 위협하듯 달려들지만 이제 나의 남은 생을 두고,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갈 1:10).” 그러므로
높이 계신 여호와의 능력은
많은 물 소리와
바다의 큰 파도보다 크니이다
여호와여 주의 증거들이
매우 확실하고
거룩함이 주의 집에 합당하니
여호와는 영원무궁하시리이다
(시 93:4-5).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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