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사람의 생각이 허무함을 아시느니라

전봉석 2021. 11. 26. 05:05

 

네가 백성 앞에 세울 법규는 이러하니라

출 21:1

 

여호와께서는 사람의 생각이 허무함을 아시느니라

시 94:11

 

 

사람의 소행으로는 그를 다 알 수 없다. 평소 아무리 저를 잘 안다 해도 닥쳐보면 언제 어떻게 변할지, 서로는 불신하고 반목한다. 당장은 협력구조를 유지한다 해도 돌아서기 무섭게 어찌 달라질지 알 수 없는 게 사람이다. 오늘 우리 사회를 봐도 알 수 있다. 있는 말 없는 말이 난무하고, 어제의 동지가 오늘의 적이 되어 서로에게 총구를 겨눈다. 막말을 일삼고 자기변명에 어떤 값도 치른다.

 

이에 오늘 말씀은 “네가 백성 앞에 세울 법규는 이러하니라(출 21:1).” 하시며 일일이 그 소소한 일들까지 일러 어찌 해야 하는지를 알려주신다. 시간이 되면 아이를 오게 해서 점심이라도 같이 먹고, 한두 시간이라도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다 돌려보내는 것도 그 때문이다. 어제도 누가 오는 날이라, 아이는 퇴근하고 일찍 집으로 갔다. 아니나 다를까 오후께 전화를 했더니 폐인처럼 늘어져 ‘피곤하다’는 핑계를 대며 잠을 청하고 있었다. 목사님, 그럼 뭘 할까요? 하고 묻는데 전에 같으면 성가실 일이 이제는 그러려니 하고 이거 했으면 저거 하고, 저거 다 하면 이거 해… 하고 맞장구치듯 말해둔다.

 

이러는 게 하나님의 심부름이라 생각한다. 우리는 사는 동안 누군가에게 그러한 역할을 해야 한다. “모든 천사들은 섬기는 영으로서 구원 받을 상속자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이 아니냐(히 1:14).” 그것이 때론 마음에 울림이나 어떤 형이상학적인 일로 여겨질 때도 있지만, 서로에게 실질적이고 사소한 역할이기도 하다. 누가 전화를 하여 다급하게 ‘자소서’를 문의하였다. 어디 고등학교를 진학하는데 필요하다고 엄마가 대신 전화를 한 것인데, 일단은 다른 곳을 좀 더 알아보라 일렀다. 다음 달 18일까지면 아직 시간 여유가 있다면 있고 없다면 없는 일이다. 그리 한 발 물러선 것은 그 일이 내게 두시려는 일인가, 아닌가, 주께 묻는 시간이 필요해서였다. 밥벌이로 일을 하지 않으면서는 그런 여유도 생긴다. 다급히 찾는 이들의 속내는 저들이 아무리 상냥하다 해도 그 속은 정직하지 못한 것을 이제는 안다. 그래서도 우리는 ‘구원 받을 상속자들을 위해서’ 무슨 일이든 주의 일을 하듯 해야 한다.

 

여호와께서는 사람의

생각이 허무함을 아시느니라

(시 94:11).

 

우리의 속내는 다 어떤 꿍꿍이가 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오늘 시인은 자신을 돌아보아 주께 고하는 것이다.

 

여호와여 나의 발이

미끄러진다고 말할 때에

주의 인자하심이

나를 붙드셨사오며

내 속에 근심이 많을 때에

주의 위안이

내 영혼을 즐겁게 하시나이다

(18-19).

 

마치 아이가 목사님, 이제 뭘 할까요? 하고 묻는 것을 두고 나의 행할 바를 또한 알게 되는 것과 같다. 나이가 스물다섯씩이나 돼서! 하고 저를 내버려둘 문제가 아니다. 일러 어린아이 하나를 대하듯이 저를 섬기는 일이라,

 

백성 중의 어리석은 자들아

너희는 생각하라

무지한 자들아

너희가 언제나 지혜로울까

귀를 지으신 이가 듣지 아니하시랴

눈을 만드신 이가 보지 아니하시랴

뭇 백성을 징벌하시는 이 곧

지식으로 사람을 교훈하시는 이가

징벌하지 아니하시랴

(7-10).

 

스스로 괜찮다고 여기는 정도가 죄다. 담배 한 대 피우는 게 왜 나빠? 술 한 잔 하는 게 죄야? 할 때에 그러한 생각이 곧 죄다! 하고 엊그제 친구에게도 말해주었다. 전에는 몰랐으나,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롬 14:6).” 성경이 우리에게 일러주시는 말씀은 그리 복잡한 것이 아니다. 다만 복잡하고 어렵다고 여겨지는 이유는 자꾸 자기 생각이 끼어들어서이다. 그저 우리는,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8).” 그러니 술 담배 따위를 두고 죄냐, 죄가 아니냐 하고 씨름하는 것 자체가 죄다. 이를 오늘 시인은 한 마디로 정의하여,

 

여호와께서는 사람의 생각이

허무함을 아시느니라

(시 94:11).

 

하여,

 

여호와여 나의 발이

미끄러진다고 말할 때에

주의 인자하심이

나를 붙드셨사오며

내 속에 근심이 많을 때에

주의 위안이

내 영혼을 즐겁게 하시나이다

(18-19).

 

하는 실제적인 삶이 드려지는 삶이다. 내가 알아서, 자신의 자유의지를 운운하는 그 자체로 이미 저의 속내가 어떠한가를 알 수 있겠다. 이를 바로 알지 못함으로 “삼 천사가 예루살렘을 향하여 그의 손을 들어 멸하려 하더니 여호와께서 이 재앙 내리심을 뉘우치사 백성을 멸하는 천사에게 이르시되 족하다 이제는 네 손을 거두라 하시니 여호와의 사자가 여부스 사람 아라우나의 타작 마당 곁에 있는지라(삼하 24:16).” 역병을 내려 치리하시고 다스리시는 것이다. 오늘의 이 현실, 전염병이 창궐하고 많은 피해가 우리 삶을 다스리는 데는 하나님의 살아계심이 실천되는 결과다. 이를 그저 ‘어쩌다 생긴 일’ 정도로 여기고 그리 치부할 때 그것이 죄다.

 

그러게, 무엇이 죄고 무엇이 죄가 아니겠나? 우리 자체가 이미 죗덩어리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그런 가운데 무엇이 죄고 무엇이 죄가 아닌지를 스스로 판단하여 옳고 그름을 나누려 하는 그 자체가 죄다. 나는 친구에게 설명할 때 단호하였고, 그리하여 우리 삶은 항상 주를 바람인데,

 

여호와여 주로부터 징벌을 받으며

주의 법으로

교훈하심을 받는 자가 복이 있나니

이런 사람에게는

환난의 날을 피하게 하사

악인을 위하여 구덩이를 팔 때까지

평안을 주시리이다

(시 94:12-13).

 

곧 우리가 얼마나 의식적으로 주를 바라고 섬기는가 하는 일은 어떤 때에 어쩌다 휩쓸려서 그리하는 정도로가 아니다. 특히 큰 교회를 다니는 친구는 같이들 손을 높이 들고 통성으로 기도를 한다거나 찬양을 목청껏 부르며, 떼창을 한다는 데서 ‘어떤 뜨거움’을 느끼면서도 그 느낌에 대해 회의도 갖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영국에 유명한 설교자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찬양도 멜로디를 주의하고, 기도도 자기감정에 휩쓸리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곧 우리는 어울려 어영부영 그러고도 그것으로 카타르시스를 느끼고, 이를 어떤 체험(?) 은혜로 받을 때가 있다. 이를 경계하는 까닭은 우리의 소행이 어떤 경우에도 스스로들 온전할 수 없기 때문이겠다.

 

어쩜 이렇게 하나님이 그 사소한 일까지 일일이 다 개입하시는가? 싶을 정도로 오늘 본문은 의아하기도 하다. “종을 사면 그는 여섯 해 동안 섬길 것이요 일곱째 해에는 몸값을 물지 않고 나가 자유인이 될 것이며(출 21:2).” 하는 부분에서부터 “사람을 쳐죽인 자는 반드시 죽일 것이나 만일 사람이 고의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 나 하나님이 사람을 그의 손에 넘긴 것이면 내가 그를 위하여 한 곳을 정하리니 그 사람이 그리로 도망할 것이며(12-13).” 하는 부분에까지… 하나님은 일일이 일러 우리가 행할 일을 두고 친히 개입하시고 간섭하시고 명령하셨다. 이는 하나님의 성품이다. 유야무야 없었던 일로 할 수 없는 것이 우리의 소행이고, 그 가운데 죄의 본질이다. 시인은 이러한 우리의 본질을 알기 때문에 주께 호소한다.

 

여호와여 악인이 언제까지,

악인이 언제까지 개가를 부르리이까

그들이 마구 지껄이며

오만하게 떠들며

죄악을 행하는 자들이 다 자만하나이다

(시 94:3-4).

 

이에 따른 예외가 있을 수 없어 내남없이 모두는 같다. 이를 알면서 나는 아이의 성가신 물음에 일일이 답을 해준다. 누군가의 다급한 요구에는 일부러 시간을 두어 주의 뜻을 살핀다. 성경적인 세계관의 제 일 번지는 ‘하나님은 선하시다’는 것이다. 이에 천사들을 두어 수종들게 하고 하나님의 사람들을 돕게 하셨다.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골 1:16-17).”

 

즉 내가 자유로울 수 있는 가장 좋은 여건은 주를 인정하며 주의 주권 아래에서 사는 일이다.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 영광에 동참하는 일이다. 이를 친구는 이해할 수 없었고, 아니 이해하기를 싫어하였다. 이는 마치 재물이 많아 이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르라 하실 때 고민하고 돌아가는 어느 청년의 뒷모습과 같다. 그런 이들이 자유의지를 운운하고 자신의 판단에 대해 완고하다. 오늘 날 선거 판도를 가만히 지켜보고 있으면 누구를 선대위원장으로 모시네, 누구의 장례에 가네 마네, 누가 인격적으로 어떠네, 서로들 남 얘기 하듯 말한다. 삿대질을 하고 남을 욕하고 비방하는 일이 아무리 정치판이고 사회 돌아가는 동력이라 해도 참 그 수준이 낯 뜨거울 때가 많다. 들어보면 다들 무슨 박사학위에 어디 교수에 나름들 저명한 인사로 그렇듯 말질들을 하고 산다. 그러니 그것이 요즘은 또 돈이 되는 세상이나 개나 소나 개인방송을 열어 언론을 운운하고 국민의 알권리를 내세우며 할 소리 못할 소리를 가리지 않으니, 말의 오염이 어느 때보다 심각하다.

 

그러한 사회를 두고 하나님은 비웃으신다.

 

하늘에 계신 이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그들을 비웃으시리로다

(시 2:4).

 

사탄의 전략이 빤하기 때문이다.

 

악인이 의인 치기를 꾀하고

그를 향하여 그의 이를 가는도다

그러나 주께서 그를 비웃으시리니

그의 날이 다가옴을 보심이로다

(37:12-13).

 

이를 가만히 묵상하고 자신을 주 앞에 세울 때, 너는 어느 쪽이냐고 묻는 세상에서 덩달아 부화뇌동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C. S. 루이스의 책 <스크루테이프의 편지>에서 사탄 삼촌인 스크루테이프가 조카 사탄 웜우드에게 ‘당분간 우리의 정체를 숨기기만 하면 돼!’ 하고 전략적으로, 사람의 의지 곧 우리 마음에 잠재된 힘-자기 의를 내세우려는 것으로 대체하는 전략을 사용한다. 하물며 교회를 열심히 다니는 친구와의 대화에서도 번번이 막히고 저지당하는 느낌이 들었던 것도 ‘그게 왜 나빠?’ 하는 저의 태도 때문이었다. 그때마다 성경을 일러 말씀을 기준으로 할 때, ‘이론과 실제는 다르다’ 사람 사는 원론적인 문제를 들어 자신을 변호하듯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하도 답답하여 그게 나쁜 게 아니라, 그게 왜 나빠? 하는 게 나쁘다고 일러주었다. 병든 이가 병 낫고자 예수 앞에 나오는 게 왜 나쁘겠나? 가난하고 소외된 이가 자신을 존중하고 거침없이 자신들과 어울려주시는 이를 좇고 저를 왕으로 세우려는 게 왜 나쁘겠나? 한데 그 마음의 본심이 문제라!

 

누가 아이와 둘이서만 어디 여행을 갔다. 그런 시간이 왜 나쁘겠나? 한데 가만히 들어보면 ‘아빠한테서 도망치기’ 내지는 ‘신랑에게 억눌렸던 자신에게 숨통을 좀 틔워주기’ 정도로 그 여행을 정의할 수 있겠다. 본인도 인정하듯이 그렇게 가서는 특별히 하는 게 없다. 늘어져 쉬고, 아이는 아이대로 저는 저대로 ‘억압하는 대상으로부터의 떨어져 있기’가 그 목적인 것인데… 나는 요즘 자주 생각하는 게 있다면 ‘그게 왜 나빠?’ 하는 것이 죄라는 것이다. 저들이 예수 앞에 나온 게 단지 병 고침이 목적이고 그것이 전부였다면… 가난으로 억압 받고 권세 잡은 자들로부터 벗어나 잠시 얻는 위로와 위안으로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전부라면… 심지어는 천국에 가는 것이 목적으로 그래서 주를 믿는 일이라면… 그것이 죄다. 우상숭배란 목석을 깎아 그 앞에 머리를 조아리는 것만이 아니다. 자기 스스로 ‘그게 왜 나빠?’ 하고 여기는 순간 그 자체로 이미 하나님을 대신하는 것으로 우리의 선행도 그 어떤 의로움도 모두가 죄다.

 

죄란 ‘나 외에 다른 신’을 두는 것으로 하나님은 규정하셨다. 거기에서 파생되어 ‘자기를 위하여 우상을 만드는 일’과 그래놓고는 그게 왜 나빠? 하며 ‘주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일’과 정작 주의 날을 함부로 여기는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지 못하는 일’에 이르기까지. 이로 인하여 우리 삶에 드러나는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 일, 살인하고 도둑질하고 남의 것을 탐하고 거짓 증언하는 일 등. 우리 일상의 소소하고 사소한 것들이 모두 실제로는 ‘하나님 외의 다른 신’이다. 자식 일이, 남편 사랑하는 일이… 이웃을 돕고 섬기는 일이, 자기 일에 충실한 일이… 나라를 구하고 인류공영에 이바지하는 일이… 그게 왜 나빠? 할 때 이미 그 일은 나쁨을 넘어서 죄가 된다. 곧 스스로의 판단이 죄다.

 

우리의 존재의 이유는,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엡 1:12).” 그러므로 단도직입적으로 이 외의 모든 일은 죄다 죄다. 우리는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5-6).” 한 마디로, ‘그 기쁘신 뜻때로’ 지음을 받은 존재다. 스스로의 존재 가치를 운운하는 일 자체가 왜 나빠? 하는 수준 그 이상의 죄가 되는 이유다.

 

아이가 오지 않는 날이면 문득 카톡을 하여 뭘 하고 있는지, 전화를 걸어 일일이 지금은 어떠한지, 저를 대하는 일이 하나님의 심부름이다. 내게 맡기신 일이다. 나는 누구에게 그런 여행이면 오히려 아이에게도 본인에게도 해가 될 텐데… 하고 우려하는 마음을 드러냈다. 이를 얼마쯤 알아듣기는 하였나? 모르겠으나… 하나님은 그럼에서 선하시고 긍휼하시다. 오늘도 불기둥과 구름기둥 같이 천사들을 내게 보내 나를 섬기게 하신다. 성령이 내주하심이란 이를 알고 저들과 함께 주를 바람이었다. 이에,

 

여호와여 나의 발이

미끄러진다고 말할 때에

주의 인자하심이

나를 붙드셨사오며

내 속에 근심이 많을 때에

주의 위안이

내 영혼을 즐겁게 하시나이다

(시 94:18-19).

 

이를 살며 사랑하며 누리고 사는 하루하루가 복이었다. 하여,

 

백성 중의 어리석은 자들아

너희는 생각하라

무지한 자들아

너희가 언제나 지혜로울까

(8).

 

우리는 생각하고 또 묵상하기를 이는 호흡과 같아서 ‘범사에 주를 인정하는 것’으로,

 

귀를 지으신 이가

듣지 아니하시랴

눈을 만드신 이가

보지 아니하시랴

(9).

 

주가 다 아시는 것을.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롬 8:17).” 그러므로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30).” 하실 것이 아니라, 하신 일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어린아이 적의 일을 버리지 못하고 사는 삶에 대하여…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3:23-24).” 곧 나의 본래는 그러하지만.

 

여호와께서는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시며

자기의 소유를

외면하지 아니하시리로다

(시 94:14).

 

이를 붙들고,

 

여호와께서 내게

도움이 되지 아니하셨더면

내 영혼이 벌써

침묵 속에 잠겼으리로다

(17).

 

비록 현실은,

 

그들이 모여

의인의 영혼을 치려 하며

무죄한 자를 정죄하여

피를 흘리려 하나

여호와는 나의 요새이시오

나의 하나님은

내가 피할 반석이시라

(21-22).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