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감사함으로 그의 문에 들어가며

전봉석 2021. 12. 2. 05:09

 

아론과 그의 아들들로 회막 안 증거궤 앞 휘장 밖에서 저녁부터 아침까지 항상 여호와 앞에 그 등불을 보살피게 하라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대대로 지킬 규례이니라

출 27:21

 

감사함으로 그의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의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의 이름을 송축할지어다

시 100:4

 

 

이쪽과 저쪽, 이것과 저것의 구분은 명확하다. 믿는 자로 믿지 않는 자와 구분이 안 되고, 신앙을 가지고 사는 사람과 신앙이 없는 사람이 구별이 안 된다면 이는 엄연한 경계가 허물어진 것이다. 이를 오늘 본문에서 살피면 “동쪽을 향하여 뜰 동쪽의 너비도 쉰 규빗이 될지며(출 27:13).” 곧 ‘어느 장소’ 그 구별된 곳은 모든 사람이 드나들고 일컫는 삼라만상을 통틀어 말하는 게 아니다. 반드시 ‘문 이쪽과 문 저쪽’이 있고, 이를 위하여 포장을 치되 그 규모가 있어 ‘포장이 열다섯 규빗’이고, 이를 받치는 ‘기둥이 셋이요 받침이 셋’이다(14-15). 이는 엄격한 구획이고 정확한 설정이다. ‘어쩌다 여기’ 따위로가 아니다.

 

또한 “아론과 그의 아들들로 회막 안 증거궤 앞 휘장 밖에서 저녁부터 아침까지 항상 여호와 앞에 그 등불을 보살피게 하라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대대로 지킬 규례이니라(출 27:21).” 즉 ‘아론과 그의 아들들’로 불리는 거룩하게 구별된 자들로의 삶이 있다. 그 하루의 목적과 이유가 분명하다. 아무나 되는 대로 이를 수행하는 정도의 가벼운 일처리가 아니다. 곧 이 제단은 ‘죄를 고하고 사함을 받는 장소’다. “제단은 널판으로 속이 비게 만들되 산에서 네게 보인 대로 그들이 만들게 하라(8).” 곧 발판을 두고 언제나 청결하게 하였다. 죄로 인한 결과로 불태워져 죽어 마땅한 우리 자신의 죄를 짐승에게 전가하여 나로 대신하게 하는 과정이었다. 이는 매우 엄격하면서도 규칙 있고 꾸준한 일이다.

 

우리의 사명은 “저녁부터 아침까지 항상 여호와 앞에 그 등불을 보살피게 하라.” 이 등불은 꺼지지 않도록 해야 하고 이를 전담하여 수행하는 자들이 바로 우리들인 것이다. “너는 삼가 이 산에서 네게 보인 양식대로 할지니라(25:40).” 이를 예수님이 우리를 가리켜 하신 말씀으로 되새기면, 먼저는 마음의 일이다.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하신 우리 주님은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둠이 얼마나 더하겠느냐.” 하시며 밝음과 어둠을 구분하셨다(마 6:22, 23-24). 즉 봐야 할 걸 보고 보지 말아야 할 것에는 눈을 감아야 한다. 이를 구분하여 마음을 지켜야 한다.

 

나아가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5:14-15).” 하시며 우리의 역할과 그 사명을 지시하셨다. 전에도 묵상하였던 것처럼 동네를 밝혀 불을 켠 자의 삶이란 볼꼴 못 볼꼴을 다 보게 된다. 단순히 어두운 길을 밝혀 사람들로 그리로 지나게도 하지만 술주정뱅이에 어둠을 틈타 담을 넘거나 죄를 저지르는 경우도 보게 된다. 어둠 속에 덮여 있을 땐 구분이 안 되는 것이 드러남으로 밝음의 감사와 영광도 있겠으나 어둠의 음습한 경우도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 그럴 때 이 빛의 사명이란,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16).”

 

오늘 본문에서 등불을 밝히는 자들로 제단을 섬기며 지키는 일에 대하여,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두고 되새길 게 많은 듯하다. 때론 우리의 이해와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상황들을 두고, 우리의 반응은 ‘어렵다’는 것이다. “제자 중 여럿이 듣고 말하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한 대(요 6:60).” 어쩌면 어려움을 느끼는 것이 당연하겠다. 그때에 우리 주님은 먼저 물으신다. “예수께서 스스로 제자들이 이 말씀에 대하여 수군거리는 줄 아시고 이르시되 이 말이 너희에게 걸림이 되느냐(61).” 우리끼리 수군거리고 판단하고 뭐라 비난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이것으로 “너희에게 걸림이 되느냐?” 하고 물으시는 것은 그와 같은 걸림으로 포기하고 되돌아가는 경우들도 있기 때문이다.

 

솔직히 보면 삶은 그리 단순하지 않고 인생은 결코 합리적이지 않다. 저마다의 불만과 난처함을 가지고 사는 것이다. 그럴 때 스스로의 만족을 도모하는 이가 있고, 이를 주께 아룀으로 주의 섭리를 신뢰하는 이도 있다. 그럴 때 욥과 같이 말도 안 되는, 억울하고 분한 상황에서도 주를 신뢰하는 능력은 놀라울 따름이다.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희망이 없노라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아뢰리라(욥 13:15).” 곧 그가 나를 부당하게 죽이신다 해도 나는 그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신뢰한다는 소리다. 믿음이란 이처럼 굳건하고 신앙이란 이처럼 확실히 구별된다. 막연하여서 두루두루 좋은 게 좋은 것으로 여겨지는 게 아니다. 분명한 ‘이쪽과 저쪽’이 있고, 들고나는 문이 분명하다. 성소에는 문이 하나인데 동쪽으로 난 문이었다. 그리고 그곳, 제단에서의 일은 엄연하고 뚜렷하였다.

 

왜 이런 일이 내게… 하는 마음으로는 감당이 안 되는 길이다. 누가 이럴 줄 알았나? 하고 서로들 한탄하는 소릴 듣곤 하는데, 저는 결혼만 하면 모든 게 나을 줄 알았다. 지긋지긋한 집구석에서 벗어날 줄 알았고, 자신을 위해주는 사람을 사랑함으로 저에게서 위로와 평안을 얻을 거라 여겼다. 한데 곰을 피하다 범을 만난 격으로 발버둥 치면 칠수록 거기가 늪이라. 내 곁의 누구누구의 이야기는 마치 서로가 같은 이야기를 소재로 하고 있는 것처럼 결국 이혼들을 했고 하나 같이 혼자 자식을 키우며 아등바등 산다. 그러면서 누구는 돈 때문에, 누구는 아이의 질병으로, 또 누구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친정일로 하루가 멀다 하고 골병이 든다. 저들 모두 10년 전 혹은 10대 20대에 꿈꾸고 바랐던 삶과는 너무 동떨어진 곳에 버려진 듯 낙망할 따름이다. 누구 말마따나 죽지 못해 산다.

 

이 모든 이야기를 축약하고 있는 게 욥이다. 훗날 저의 고백은 참으로 놀랍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욥 42:5).” 똑같은 어려움과 역경의 삶이었다고는 하나, 누구는 이쪽에서 밝음을 보고 누구는 저쪽에서 어두움을 본다. 나는 어느 쪽인가, 하는 묻는다면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이시니라(약 5:11).” 말씀으로 그 답을 찾는다. 내 생각이나 내 판단이 어떠했던가, 하는 것은 지난 세월로 족하다.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시 119:71).

 

하는 시인의 고백이 어찌 그럴 수 있었겠나? 묵상해보면,

 

여호와여 내 기도를 들으시고

나의 부르짖음을 주께 상달하게 하소서

(102:1).

 

주께 아룀으로였다. 사람 붙들고 씨름할 게 아니라는 소리다. 어떤 기대나 희망을 걸고 세상을 낙천적으로 산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도 아니다. 우리로 고난당함을 허용하시는 까닭은 주께서 나의 옷깃을 끌어당기는 일이다. 이쪽이야! 하고 자신을 보게 하시려는 것을 우리는 한사코 자신의 유익을 구하며 오늘을 모면하는 데 급급해한다. 이는 참된 위로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늘이여 노래하라

땅이여 기뻐하라

산들이여 즐거이 노래하라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위로하셨은즉 그의 고난당한 자를

긍휼히 여기실 것임이라

(사 49:13).

 

성경의 일관된 증언이 같다. 누구의 표현처럼 ‘먹구름 뒤로 은빛 햇살이 빛난다.’ 그러므로 주님이 부르시는 것이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한데 이 소리가 귀에 들어오지를 않는다. 누가 말했다. 아니면 죽을 것 같았어요, 더는 살 수가 없어서 뒤쳐나가듯 결혼을 했던 것인데… 누가 이렇게 될 줄 알았나요? 하는 저의 말은 이상하다싶을 정도로 모두가 공통적이다. 안 그렇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의 삶이란 것도, 그래서 누구는 허영으로 누구는 맹목적인 사랑으로 자신을 환각 속에 살게 하는 경우들 같다. 그러면서 스스로는 괜찮다고 하면서 뭐가 문제인지조차 분간하지를 못한다. 두 경우 가운데 그래도 하나가 더 낫다고 하면 전자이다. 고난 중에 있는 것이 복이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29-30).” 이와 같은 주의 음성을 어디에서 들을 수 있을까? 자기만족에 겨워서는 들릴 리 없고 들어야 할 이유도 없다. 그리로 듣고 좇는 사람들이 한심하게 여겨질 정도이다. 그러면서 자신이 정작 자신이 쥐고 있는 것이 ‘물 먹은 갈대 지팡이’라는 사실은 모른다. 여기에서 믿음의 사람들은 다른 것이다.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롬 4:18).” 이 문장의 무게를 안다는 것은 오늘의 고난을 감당하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겠다.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란다는 것,

 

하나님이여 일어나

주의 원통함을 푸시고

우매한 자가 종일

주를 비방하는 것을 기억하소서

주의 대적들의 소리를 잊지 마소서

일어나 주께 항거하는 자의

떠드는 소리가

항상 주께 상달되나이다

(시 74:22-23).

 

나의 한 주간을 삼등분하면 다음 주일 설교원고 초안을 가지고 이리 궁굴리고 저리 궁굴리며 씨름한다. 처음엔 막연하였던 주의 말씀이 서서히 선명한 빛을 띠며 들린다. 그야말로 눈으로 보던 것을 소리로 듣고 소리로만 듣던 것을 눈으로 확인한다. 그러는 동안 이 사람 저 사람의 이런저런 사연이나 어떤 일에 마음이 뒤섞이고, 무작위로 읽는 책이 서로 같은 목소리로 목청을 돋우는 것을 느낀다. 그러는 동안 나는 이처럼, 쓴다. 무엇을 어떻게 왜 쓰는지도 모르면서 새벽 일찍 일어나 앉아 말씀을 끌어당기면 정작 끌려가는 것은 나의 흐트러진 마음이었다. 이를 무작정 쓰고 읽고, 서둘러 교회로 올라가 다시 읽으면서 고친다. 그러는 동안 날이 밝고 하루가 시작된다. 어느새 일주일이 중반을 넘어서면서 나는 글을 구성을 갖춰 맥락을 잡고 설교원고를 작성한다.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가 뚜렷해지고 누구를 또는 누가 떠오르거나 생각나면서, 질거나 꼬들꼬들하게, 굽거나 삶아서… 그러려고 그러는 게 아닌데, 그리 이끄시는 이의 강권하심을 본다.

 

나의 한 주간은 단조롭고 나의 한 날은 늘 같은 동선을 따른다. 어제는 누가 모처럼 들러 잠시 인사를 건네다, 늘 똑같으시네요? 하는 말에 머쓱하였다. 어떤 의도의 말인지 보다, 이를 나의 일로 여기는 사명으로까지 아는 데서 스스로가 놀란다. 아이가 와서 같이 점심을 먹는 날이었는데, 깜빡 했는지 마음이 내키지 않았는지 임의로 약속을 미루는 바람에 내려가 김밥을 사다 먹었다. 이제는 그런 일에 별로 개의치 않고 그러려니 하고 넘겨야 한다. 곧 이 일을 감당하려면 자주 느끼는 것이지만 나도 나를 너무 어렵게 여겨서는 안 된다. 하물며 누구를 대하는 일에 있어서는 나의 기대가 앞서면 반드시 실망이 오고, 어떤 계획을 가지면 곧이어 밀려드는 난감함이 크다. 주께서 하시라! 나의 요즘 배포다. 그리 마음을 먹는다.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성소를 지키고 제단을 관리하는 일도 그러하지 않았을까?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살며 근신하고 깨어 있다는 말이 역으로는 그런 의미가 아닐까? 대선이 어떻고, 누구를 지지하고, 어떤 일에 투자하고, 어디서 수익을 내고 하는 따위의 세상 논리에서 한 걸음 물러서지 않으면 누구라고 이 길을 가겠나? 남들 하는 대로,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따라… 그러면서 주의 길을 간다? 이는 그야말로 어불성설이다. 말이 안 된다는 소리다. 누구보다 실수투성이였던 베드로는 후에 이를 기반으로 강조하고 또 증거하였다.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다 주실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벧전 1:13).” 그렇지 않으면 어찌 되는지, 저는 끝장까지 갈 뻔하였다. 그래서 잘 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4:7).” 아니면 자칫 한 방에 훅, 간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5:8).”

 

그렇게 데마는 세상으로 갔다. 열심을 다해 주를 쫓고자 했던 수많은 이들이 어렵다, 하고 떠나갔다. 우리는 결국 이해하고 믿는 게 아니다. 믿으니까 이해하는 것이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요 6:47-48).” 이를 어찌 말로다, 우리의 상식으로 이해하고 이해시켜 누구를 이끌 수 있을까? 어림없는 소리다. 결국은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 이와 같은 말씀 앞에서 간담이 서늘해져야 한다. 나는 괜찮다고 여기는 한 돌이킬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갈 데까지 가야지! 오늘 시편은 이에 따른 우리의 가장 기본적인 자세를 일깨운다.

 

감사함으로 그의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의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의 이름을 송축할지어다

(시 100:4).

 

감사를 잃으면 어찌할 방도가 없다. 그런 상황에서 어찌 감사가 나올 수 있겠나? 싶은 때에도,

 

여호와는 선하시니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고

그의 성실하심이

대대에 이르리로다

(5).

 

하시는 이 놀라운, 왜 이와 같은 찬송이 귀에 들어오고 믿어지고 감격스러운지 나는 알 수 없다. 다만,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너희는 알지어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이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

(3).

 

이 분명한 사실 앞에…

 

감사함으로 그의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의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의 이름을 송축할지어다

여호와는 선하시니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고

그의 성실하심이

대대에 이르리로다

(4-5),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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