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네게 보인 양식대로 할지니라

전봉석 2021. 11. 30. 04:56

 

너는 삼가 이 산에서 네게 보인 양식대로 할지니라

출 25:40

 

온 땅이여 여호와께 즐거이 소리칠지어다 소리 내어 즐겁게 노래하며 찬송할지어다

시 98:4

 

 

내가 임의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주의 성소를 짓는 데 따른 규율과 원칙이 있어 오늘 본문이 다루듯 우리는 우리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고전 15:44).” 마치 아무리 그 내용이 좋아도 형식이 옳지 않으면 소용이 없고, 그릇이 있어야 그 담을 것도 의미가 있는 것과 같다. 이에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롬 8:11).” 곧 나의 영을 살리신 이가 나의 죽을 몸도 살리신다. 그 이유를 오늘 본문에서 읽는다. 이를 두고 나의 나 됨이 결코 허투루 이루어질 수 없음을 발견하게 된다. 하여 “너는 삼가 이 산에서 네게 보인 양식대로 할지니라(출 25:40).” 하시는 말씀 앞에 자세를 고쳐 앉는다.

 

실은 요 며칠 어떤 우울감이 나를 쥐고 있는 듯하다. 모든 것을 훌훌 털어버리고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심정이기도 하다. 그런데 느닷없기는 아이가 출근하고 한 시간도 안 돼 연락이 왔다. 공장에 재고가 없어 일이 없다며 일찍 퇴근을 하였다는 것이다. 이제 열 시도 안 됐는데, 집으로 가라 할까 하다가 교회로 오게 하였다. 솔직히 너무 성가시고 귀찮은 마음이 들었다. 무슨 말끝마다 아이는 유난히 연관도 없는 말을 더했다. 아이는 성경을 쓰고 나는 책을 보았다. 뭐라도 해야 하나, 하는 마음이 조급하게 굴었다. 지난 주일부터 틱 증상을 보였다. 스스로도 스트레스 때문이라는데, 무엇 때문인지 묻고 답을 듣는 게 어려웠다. 말은 맥락이 없고 뭔 소리를 하는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어떻게 두어 시간이 흐르고 같이 나가 점심을 먹였다. 그리고 달달한 커피를 한 잔씩 들고 산책을 좀 하려는데 바람이 차고 어수선하였다. 아이를 보내고 어떤 슬픔이 밀려들었다. 서로가 어쩔 수 없는 것을 두고 나는 괜한 씨름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교회로 돌아오자 아들의 차가운 표정이 또한 가슴을 서늘하게 하였다. 시험 날짜가 다가올수록 서로는 어려웠다. 요즘 같으면 나야말로 어디 멀리 도망치고 싶은 심정이다.

 

나는 말하기를 만일 내게

비둘기 같이 날개가 있다면

날아가서 편히 쉬리로다

내가 멀리 날아가서

광야에 머무르리로다 (셀라)

(시 55:6-7).

 

그러니 벗어날 수도 없는 공간 내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느낌이다. 그럴 땐 ‘닥치고 해야 할 일을 한다.’ 언제부턴가 나를 다루는 방식이 되었다. 월요일 이 시간에는… 돌아오는 주일의 설교 본문을 찾아 주석을 살피고, 그 내용을 뒷받침할 수 있는 인용 성경구절을 작성한다. 정해진 시간에 해야 할 일을 따라 몸을 거기에 둠으로써 잡생각을 밀어낸다. 우울감은 우울감대로 내버려둔다. 아이에 대한 성가심이나 아내나 아들에 대한 불만도 그대로 둔다. 생겨나는 마음을 일일이 상대하다보면 해야 할 것을 못한다. 그건 그것대로 그러려니 하고, 나는 때로 나를 무시한다. 이는 모두 내 안에 쌓인 죄, 어떤 서러움이나 불만, 짜증과 원망 따위들의 농간인 것을 안다.

 

그럴 때 하나님도 우리를 놓아두신다. 시편 74편을 준비하다 첫 구절에서 그런 의미를 파악한다.

 

하나님이여 주께서

어찌하여 우리를 영원히 버리시나이까

어찌하여 주께서 기르시는 양을 향하여

진노의 연기를 뿜으시나이까

(1).

 

때론 그렇게 놓아두는 것으로 죄가 죄로 그 역할을 하게 두신다. 의당 죄는 사망이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롬 6:23).” 사망과 은사가 대비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은사는 절대적인 권위 즉 ‘카리스마’라 하여 하나님의 은총을 뜻한다. 그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고전 12:4-11).” 죄는 죽음이고 은사는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다. 곧 내 안의 모든 죄가 사함을 받았으나 그 몸을 입고 사는 동안이라, 죄의 농간은 여전한 것이다. 이를 능가할 수 있는 것이 은혜이고 은혜는 ‘카리스’라 하여 우리로 견고하게 하려는 고정이다. “생명과 은혜를 내게 주시고 나를 보살피심으로 내 영을 지키셨나이다(욥 10:12).” 곧 징계가 우리로 하나님께 고정시킨다.

 

내 안에 이는 어떤 슬픔에 대하여 스스로 개의치 않으려는 것은 결국은 다 욕심 때문인 것을 알기 때문이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 1:15).” 이는 마치 공식과 같아서 아무리 아니라 해도 들여다보면 똑같다. 그러니 내 안에 어떤 우울감이 나를 흔들 때 그걸 그냥 그러려니 하고 놓아두는 것은 그럼에도 ‘해야 할 일’을 함으로이다. 흔히들 ‘하고 싶은 걸 해’ 하고 권하고는 하는데 이는 옳지 않다. 저가 그러는 것, 그것이 슬픔이든 노여움이든 어떤 감정이든 ‘욕심’이 잉태한 까닭이다. 욕심이란 분수에 넘치는 무엇을 탐하는 것으로, 성경은 일러 이를 두고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이라 하였다.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롬 12:3).”

 

내게 주신 은혜로 족한 것이다. 족한 것을 알지 못할 때 “거머리에게는 두 딸이 있어 다오 다오 하느니라(잠 30:15).” 그렇듯 족한 줄 알지 못하는 것이 “스올과 아이 배지 못하는 태와 물로 채울 수 없는 땅과 족하다 하지 아니하는 불이니라(16).” 결국은 스스로를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일이어서, 나는 언제부턴가 그러는 나를 나 스스로가 내버려두는 연습을 한다. 아니면 어디로 훌쩍, 떠난다거나 충동적으로 무엇을 저지르기 일쑤인데 그런들 결과는 다를 게 없었다. 이를 위해서도 ‘하고 싶은 걸 해’ 하는 것보다 그럼에도 ‘할 수 있는 걸 해’ 하는 권면이 옳고, 더 나은 것은 ‘해야 할 것을 해’ 하는 것이다. 그것을 알면서부터 나는 규칙적으로 정해진 시간을 따른다. 그것의 유익은 ‘이제 뭐 하지?’, ‘어떻게 하지?’ 하는 갈등을 줄여주었다. 하던 걸 하면 되니까 말이다.

 

이게 가만히 보면, 몸의 작당은 끝도 없다. 육신을 입고 사는 동안 몸의 지배를 당하지 않을 수는 없는 일이지만 어떤 날은 이렇고 어떤 날은 저런 것을 두고 그럴 때마다 널뛰듯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를 다스릴 수 있는 게 카리스마다. 어떤 권위를 말함인데 실은 하나님의 은총을 뜻하는 은사를 말한다. 오늘 내게 두신 은사를 나는 말씀을 준비하고 묵상하는 일이라 여긴다. 하다못해 공사판에서도 저마다의 기술을 가지고 누구는 목수로, 누구는 미장이로, 누구는 전선을 다루며 그 역할을 다하는데… 우리가 주의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은 ‘사도’ 곧 ‘아포스톨로스’라 하여 보내심을 받은 자란 의미이다. 바울은 이를,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10).” 이를 알고는 사울에서 ‘작은’이란 의미로 바울이라 이름하였다.

 

우리를 택정하셨다는 것, 저는 그래서 스스로의 본분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롬 1:1).” 하고 자신을 정의하는데, 택정이란 ‘~으로부터 경계를 그어 나누었다’는 의미다. 엄격히 구별한 것이다. 그게 언제부터냐 하면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즉 내가 이 땅에 태어나기도 전에 “그의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계시다는 사실과 “그의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 이유와 목적이 있어서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을 때에” 오늘 이처럼 말씀으로 나를 주장하시는 일일 텐데, 이를 두고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주의 뜻으로 삼는 것이 사역자이다(갈 1:15-16). 이는 내가 목사가 되었으니 나만 그렇다는 게 아니라, 모든 은사가 그렇다는 것이다. 누구는 집사로 권사로 말씀 전하는 자로… 어찌 부르셨든지!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부르심을 받은 자라는 데 초점을 두면, 하고 싶은 일? 또는 할 수 있는 일? 그 이상으로 해야 할 일이 우리에게는 우선하는 것이다. 이를 알면서 제일 먼저 버려두어야 할 것이 다름 아닌 나 자신이라는 것을 알았다. 최소한 나는 변덕이 심하고 감정이 죽 끓듯 하여 어떤 날은 이렇고 어떤 날은 저렇다. 그걸 일일이 맞추려 하면서 허비한 세월이 너무 길다. 엉뚱한 곳을 기웃거리고, 괜한 일에 마음이 붙들려 씨름하기도 숱하게 했다. 아이 일로 마음을 쓰다 그만두는 것도, 어떤 일로 마음 상해 공연히 어려워하다가도 이 부질없음을 두고 나는 더 이상 나로 이끌려 다닐 수는 없다. 나란 본디 욕심이 잉태한 죄의 결과를 감당해야 했다.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내버려둬야지 일일이 상대하다가는 나 자신에게서 못 벗어난다.

 

이를 알았을 때 요셉의 아름다운 경지에 이르는 게 아닐까?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창 45:5).” 나는 이 구절의 말씀을 음미할 때마다 저가 겪었을 숱한 서러움과 원망과 그 어둠의 시간을 생각하다 지친다. 내 안의 어떤 슬픔과 외로움과 말할 수 없는 것들을 두고 숨이 턱, 막힌다. 그러니 그걸로 씨름하고 살았다면 가차 없이 보복을 감행했을 텐데… 이 모든 게 ‘하나님의 뜻’이었다는 사실을 저는 평생 연마하고 수련한 것이다. 이 어찌 하루아침에 깨달은 진리이겠나? 그래서들 고난이 스승이라 말하는가보다.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히 12:11).”

 

공연한 마음으로 산란했던지 평소보다 일찍 일어나 앉아 이처럼 말씀 앞에 앉았을 때, 이와 같은 말씀으로 주와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에 복이다. 곧 있어 또 우울이 또는 슬픔이 나로 사로잡을 것이라 해도, 그러려니 놓아두는 것. 어쩌겠나? 하나님이 아니시면 이를 회복할 수 있는 능력이 나에게는 없는 것을. 오히려 이제는 그러한 나의 연약함을 사랑한다.

 

영구히 파멸된 곳을 향하여

주의 발을 옮겨 놓으소서

원수가 성소에서

모든 악을 행하였나이다

(시 74:3).

 

나의 상태를 아뢰는 대목이다. 구제불능으로 더는 가망이 없는 나인데도 나를 부르시고 맡기시는 사명을 두고,

 

네 생명을 파멸에서 속량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하게 하사

네 청춘을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

(시 103:4-5).

 

아직 살아서 이와 같은 기력을 가지고 주의 일을 감당할 수 있다는 데 은택이 있다. 일찍 버려져 어디 쓸모없는 곳에서 잊힐 것이었는데, 주의 인자와 긍휼하심에는 아무런 조건도 없으셨다. 죽어 마땅하고 죽은 줄만 알았던 것을 오늘에 이처럼 쓸모 있는 것으로 여기는 일인데,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를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겔 37:5).” 아무도 모른다 해도 나는 안다. 내가 어떤 인간이고 그 욕심이 어떠하였는지. 그럼에도 “너희 위에 힘줄을 두고 살을 입히고 가죽으로 덮고 너희 속에 생기를 넣으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또 내가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리라 하셨다 하라(6).” 나로 다시 살려 주의 일을 맡기시는 것이었다.

 

어디가 아프고 몸이 어려워 마음은 또 저 혼자 쓸려 신음하기 일쑤인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난데없이 오전에 일찍 아이가 오질 않나, 저의 이런저런 상태에 덩달아 신경을 쓰다 짜증이 일기도 하였지만… 그 또한 그러든가 어쩌든가, 내가 한 가지 붙든 것이 있다면 하고 싶은 것도 할 수 있는 것도 아닌 해야 할 것을 하는 일에 나를 붙들어두는 것이다. 억지로라도, 꾸역꾸역 나는 평소 월요일처럼 설교원고 초안을 작성하였고 이를 위해 주석을 뒤적거리며, 공부하기 싫은 아이처럼 툴툴거리면서도 할 걸 하게 하였다. 이를 두고 감히 ‘하나님의 통치’라고 해도 된다면,

 

주의 대적이

주의 회중 가운데에서 떠들며

자기들의 깃발을 세워

표적으로 삼았으니

그들은 마치 도끼를 들어

삼림을 베는 사람 같으니이다

(시 74:4-5).

 

내 안의 나의 원수가 나를 두고 떠들어댄다. 속이 시끄러워 살 수가 없다. 시름시름 앓듯 나에게 끌려가다가는 저는 도끼를 든 자처럼 나를 베 버리려 할 것이다. 그게 남이 아닌 내 안의 감정이고 어떤 상태이다. 날씨 탓인지, 기분 탓인지, 누구 탓을 한들 그게 어쨌든 내 안의 일이라, 나는 나로 힘들 때가 있다. 그러니 어쩔 것인가? 아이에게도 이 말을 해주고 싶었는데 뭔 소릴 하는지 엉뚱한 대답만 돌아오고, 아내나 내 가까운 사람에게 이를 알려주고 싶은데 저마다 자신들의 관심으로 들은 체도 않으니. 때론 홀로 걷는 길이다.

 

바울이 그 부르심에 가족이나 가까운 이와 의논하지 않았다는 말은 부르신 이 곧 하나님만 의뢰하였다는 것이겠다. 그리고 오늘은 내게 이른다.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골 2:7).” 그 안이란 말을 나는 말씀으로 이해한다. 개떡 같이 설교도 못하고 누구 하나 변변하게 주의 길로 바로 인도하지도 못하는 주제이나 말씀이 그러하라고 부르셨다니,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벧전 5:9).” 안 하면 어쩔 것인가? 늘어져 신세한탄도 하루 이틀이지, 결국 우리의 길은 끝나지 않았고 그 끝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기다리고 있다.

 

주께서 어찌하여 주의 손

곧 주의 오른손을 거두시나이까

주의 품에서 손을 빼내시어

그들을 멸하소서

(시 74:11).

 

내 안의 저는 어떤 상대인가? ‘도끼를 들어 삼림을 베는 사람’익다. ‘도끼와 철퇴로 성소의 모든 조각품을 쳐서 부수’는 사람이다. ‘주의 성소를 불사르며 주의 이름이 계신 곳을 더럽’힐 사람이다. ‘마음속으로 이르기를 이 땅에 있는 하나님의 모든 회당을 불살랐’다고 할 사람이다. 즉 스스로 뭐라도 된 양 거들먹거리다 변덕에 겨워 하루가 멀다 하고 이랬다저랬다 하기 일쑤인, 나의 표적은 나다. 나의 원수가 내 안에 있다. 이를 두고 주께 호소한다.

 

하나님이여 대적이

언제까지 비방하겠으며

원수가 주의 이름을

영원히 능욕하리이까

(10).

 

이를 알 때 정신이 바짝 든다. 누구를 원망하고 무엇을 탓할 게 아니다. 나 곧 “그가 어둠을 일으키시기 전, 너희 발이 어두운 산에 거치기 전, 너희 바라는 빛이 사망의 그늘로 변하여 침침한 어둠이 되게 하시기 전에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 영광을 돌리라(렘 13:16).” 그것이 무엇일까 하였더니, 가만히 노아와 같이 무던하면 되었다. 아무런 조짐도 없고 사람들은 잘만 떵떵거리며 살아가는데 혼자 방주를 짓는 이 뻘짓을 두고 묵묵하기란! 모세가 마치 돼도 않을 말씀을 따라 애굽 왕 바로 앞에 서는 일처럼 무모하고 하나마나 한 불평불만의 백성들을 이끌고 광야를 걷는 것과 같은 일일 테니, 그저 무던하기를.

 

나의 책망을 듣고 돌이키라

보라 내가 나의 영을

너희에게 부어 주며

내 말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잠 1:23).

 

때론 이런저런 마음의 어려움이, 몸의 시달림이 궁극적으로는 나로 하여금 주를 찬송하게 하려 하심인 것을. 오늘 아침, 시편은 노래하고 있다.

 

온 땅이여 여호와께

즐거이 소리칠지어다

소리 내어 즐겁게

노래하며 찬송할지어다

(시 98:4).

 

 

그가 땅을 심판하러 임하실 것임이로다

그가 의로 세계를 판단하시며

공평으로 그의 백성을 심판하시리로다

(9).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