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또 순금으로 패를 만들어 도장을 새기는 법으로 그 위에 새기되 ‘여호와께 성결’이라 하고 그 패를 청색 끈으로 관 위에 매되 곧 관 전면에 있게 하라
출 28:36-37
내 눈이 이 땅의 충성된 자를 살펴 나와 함께 살게 하리니 완전한 길에 행하는 자가 나를 따르리로다
시 101:6
누구에게 무엇을 받을 때 ‘주의 이름으로’ 축복한다. 오늘에 이르러는 우리 모두가 ‘아론’이다. 곧 구별된 제사장이다. 이때의 흉패에 ‘여호와께 성결’이라 썼다. 가슴은 심장이 있는 곳으로, 생명과 죽음을 동시에 가리킨다. 우림은 빛을 둠밈은 완전함을 의미한다. 이를 흉패 안에 두고, 겉옷에는 금방울과 석류를 번갈아 달아 소리가 나서 살아있음을 증명하게 한다. “아론이 입고 여호와를 섬기러 성소에 들어갈 때와 성소에서 나올 때에 그 소리가 들릴 것이라 그리하면 그가 죽지 아니하리라(출 28:35). 곧 복음을 전하고 알리는 데 있어 우리 안의 우림과 둠밈은 이를 판단한다.
우리는 “아론이 성소에 들어갈 때에는 이스라엘 아들들의 이름을 기록한 이 판결 흉패를 가슴에 붙여 여호와 앞에 영원한 기념을 삼을 것이니라(출 28:29).” 곧 우리 가슴에 새길 열두 지파, 하나님의 자녀의 이름은 오늘 내 곁에 두신 한 영혼 한 영혼을 두고 주께 아룀과 고함을 게을리 하지 않는 것이고, “너는 우림과 둠밈을 판결 흉패 안에 넣어 아론이 여호와 앞에 들어갈 때에 그의 가슴에 붙이게 하라 아론은 여호와 앞에서 이스라엘 자손의 흉패를 항상 그의 가슴에 붙일지니라(30).” 모든 말과 행실에 있어 불협화음이 나지 않도록 석류를 방울 사이에 두어 방울끼리 부딪치는 것을 삼가 조심하여 한다. 곧 우리가 살아서 움직일 때에 나는 소리가 요란하지 않도록 “그 옷 가장자리로 돌아가며 한 금 방울, 한 석류, 한 금 방울, 한 석류가 있게 하라(34).” 방울과 방울 사이에 석류를 두었다. 석류는 평화와 안식, 풍요를 상징한다.
곧 내가 누구를 생각함은 ‘주의 이름으로’ 주께서 나를 그 가슴에 새기신 것과 같다. 이는 십자가의 평화와 안식으로 복음을 풍성하게 알게 하려 하심이다. 이에 말씀은 꾸짖어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하느냐(롬 2:4).” 하는 의미로 이어진다. 오늘의 우리는 모두 ‘아론’들이며 주의 복음을 맡은 ‘금방울 소리’들이다. 이를 행하는 데 있어 주의 인자하심이 그 사이에서 불협화음을 막아주시고 ‘하나님께 성결’한 삶으로 인도하신다.
주의 이름으로 받고 주의 이름으로 저를 아룀이 오늘의 ‘우림과 둠밈’이 아니겠나? 누가 내게 월급의 얼마를 떼어 보낸다. 건강을 살펴 몸에 좋은 영양제를 보내오기도 한다. 어제는 아이가 월급을 탔다며 점심을 사겠다고 하여 나름 감사히 받았다. 이 모든 베풂과 그 쓰임이 실은 모두 ‘하나님께 성결’로 드려지는 일이다. 교회를 이어가는 데 있어 이것들이 모여 임대료를 내고, 누구 대접을 하고, 나의 처신을 한다. 비록 몸은 떨어져 있어도 이로써 우리는 방울소리를 낸다.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 기록된 것과 같이(막 1:3).” 모두의 이런저런 손길이 그러하다. “그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자라 일렀으되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가 오실 길을 곧게 하라 하였느니라(마 3:3).”
어제는 또 하나 신기한 경험은 곧 아이의 생일이라 녀석은 은근히 어디 제품의 모자를 선물하겠다는 둥 갖고 싶다는 둥 하며 언질을 주었다. 검색을 해보니 5만원은 족히 넘는 것이라 선뜻 엄두가 나지 않았는데, 가끔씩 산책을 하는 길에 ‘아름다운 가게’가 있어 구제품이기는 하나 누군가의 기부로 때론 소위 명품을 저렴하게 구할 수가 있다. 점심시간이 되어 아이가 올 때쯤 먼저 나가 문득 여기를 둘러보는데 마침 그 모자가 나와 있던 것이다. 비록 색이 좀 바래 마음이 쓰였지만 두툼하니 겨울모자로 좋을 것 같아 녀석이 안 쓰면 내가 쓸 마음으로 5천원에 구입을 했다. 나는 이런 사소한 우연에서 하나님의 배려를 느낀다. 녀석은 고맙게 받아주었고 나는 그렇게 또 방울 소리를 내었다. 생활이 곧 복음을 전하여 알리는 소리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풍성하여 방울 소리가 서로 부딪쳐 불협화음이 나지 않게 하신다. 이에 “너는 무릇 마음에 지혜 있는 모든 자 곧 내가 지혜로운 영으로 채운 자들에게 말하여 아론의 옷을 지어 그를 거룩하게 하여 내게 제사장 직분을 행하게 하라(출 28:3).”
우리가 모두 주의 복음을 맡은 자로 사는 제사장의 직분을 수행하는 데 있어 나에게 채우시는 손길과 내가 더하여 쓰이는 손길이 서로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하심이다. 일상이 곧 복음의 증거란 내색을 하고 생색을 내며 의무감으로 이를 감당하는 시대가 아니다. 이제는 나는 빈주머니로도 충만하여 늘 누가 물으면 딱히 필요한 게 없을 정도로 모두 가졌다. 예전엔 거의 병적으로 누구를 만나고 무슨 일을 하는 데 있어 하다못해 빚으로라도 지갑을 채우고 다녀야 했지만 이제는 “여행을 위하여 배낭이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이는 일꾼이 자기의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함이라(마 10:10).” 이를 여실히 체험하며 산다. 지난주에는 친구가 다녀갔는데 점심을 먹고 온 터라, 밖으로 나가 커피를 한 잔 하게 되었다. 그런데 한사코 ‘좋은 데’를 찾고 거기서도 ‘비싼 것’으로 사려고 하는 저의 마음을 그대로 받았다. 결국은 어지간한 밥값 이상으로 커피 두 잔에 무슨 조각 케이크에 과자에 해서, 평소 같으면 됐다고 했을 텐데 나는 기꺼운 마음으로 저가 계산하는 뒤로 물러서 있었다.
단지 나를 대접하고 위하고자 하는 것이겠나? 그 안에 주를 섬기는 마음으로라는 것을 안다. 누구는 이사를 가며 컵을 또는 전자레인지를 주고 갔다. 그대로 새것인데, 오며 가며 인사하는 정도의 사이에도 저들의 손길을 통해 주가 채우심인 것을 이제는 안다. 그러니 언제부턴가는 섣불리 마다하지도 않고 누구에게 나서서 달라고 하지도 않는다. 아무튼 우스운 일이겠으나 어제 아이에게 줄 수 있었던 모자는 나름 또 신기한 일이기는 하였다. 그렇게 일상이 온통 복음의 소리로 울린다. 우리 영혼이 살아 있음을 말이다. 누구는 벌써 십년이 넘게 매월 적지 않은 돈을 보내온다. 모두가 주를 섬김으로 나를 대하고, 나는 또 아이를 대하는 일이겠으니… 때론 저이가 왜 나한테 이처럼 친절한가? 하는 의문이 들다가도 그도 알지 못하는 사이 ‘금방울 소리’가 울려 복음을 알린다.
그러므로 “아론이 성소에 들어갈 때에는 이스라엘 아들들의 이름을 기록한 이 판결 흉패를 가슴에 붙여 여호와 앞에 영원한 기념을 삼을 것이니라(출 28:29).” 주님의 가슴에 나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듯이 나는 또 누구의 이름을 되뇌어 가슴에 붙인다. 이 또한 다 때가 있고, 할 수 있을 정도여서 가끔은 누가 예전만 못한 때는, 저로 잊히게 할 의무도 있음을 상기한다. 즉 내가 그렇게 왕래가 잦고 많은 사람을 마주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는 바람과 같아서 오는가 하여 세차게 품을 파고들다가 언제 또 스치기도 하는 것이어서. 이것도 전에 같으면 억지로라도 인연을 이어가려 애를 썼지만 이제는 오고 가는 것에 연연하지 않는 것도 그래서다. 어디서 어느 교회를 섬기고 어떻게 사는지 더는 몰라도, 여전히 성령께서 함께 하심으로 저마다의 일상은 방울과 방울 사이에 석류를 달아 그 소리가 조화롭게 하실 것을 믿는다. 그러다 또 스치듯 마주치기도 하고 머물기도 하면서… 영원한 안식에 들어 우리 모두가 주의 이름으로 한 자리에 모일 날이 오겠지. 그때에는 말로만 듣던 아론도 모세도 한 자리에서 서로 반가움을 나눌 테고.
“아론이 입고 여호와를 섬기러 성소에 들어갈 때와 성소에서 나올 때에 그 소리가 들릴 것이라 그리하면 그가 죽지 아니하리라(35).” 오늘을 사는 우리의 소리는 다채로운 것 같으나 한 가지다. 저마다의 소리는 ‘여호와께 성결’이라 하고 그 패를 청색 끈으로 관 위에 매었다. 그럼 그렇지, 하고 서로가 서로를 알아본다. “곧 관 전면에 있게 하라.” 이에 오늘의 시편은 적절하게 울리는 방울 소리 같다.
내가 인자와 정의를 노래하겠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 찬양하리이다
내가 완전한 길을 주목하오리니
주께서 어느 때나 내게 임하시겠나이까
내가 완전한 마음으로
내 집 안에서 행하리이다
(시 101:1-2).
우리로 오늘을 살게 하신 이 터전에서 내 마음이 완전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 성결’로다. 이를 삼가 마음에 새겨,
나는 비천한 것을 내 눈 앞에 두지 아니할 것이요
배교자들의 행위를 내가 미워하오리니
나는 그 어느 것도 붙들지 아니하리이다
(3).
하여 바울도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 9:27).” 설마 저가 구원의 교리를 몰라서 뒤늦게 버림을 받을까 두려워했을까? 그런 소리가 아니라, 자신이 전하였던 복음에서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다. 말과 행실이 같고 생각과 그 일상이 하나가 된다는 것은 자신을 알면 알수록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하는’ 연마의 삶도 필요한 것이다. 오늘 같은 날, 알람이 울리고 있는데 갈등한다. 오늘은 좀 더 잘까, 하는 생각은 악착같이 들러붙는 눈꺼풀 같다. 몸을 일으켜 평소처럼 책상에 나와 앉는 일, 어제는 유난히 찌뿌듯한 몸 탓에 설교원고 정리를 다음 날로 미룰까 하면서도 허리를 곧게 펴고 ‘해야 할 일’을 ‘할 수 있는 정도’에 앞세우는 것. 일상이란 때로 가혹하나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그들은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25).” 바울의 증거가 어떤 의미인지 알겠다.
‘이것을 내가 내 마음에 담아두었다’는 것, 이는 때로 참혹하고 난처한 일이기도 하여,
내 고초와 재난 곧
쑥과 담즙을 기억하소서
내 마음이 그것을 기억하고
내가 낙심이 되오나
이것을 내가
내 마음에 담아 두었더니
그것이 오히려
나의 소망이 되었사옴은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애 3:19-22).
어제는 이를 노트 한편에 옮겨 적고 다시 되새기며 그 의미의 생생함으로 나의 날들과 누구의 날들을 두고 생각하였다. 생각하여 생각하기를 주께 아뢰고 또 고함으로였다. 내가 받는 오늘의 이 모든 인자하심을 무엇으로 갚을까? 누구의 어떤 마음 씀을 나는 갚을 길이 없어 주의 이름을 부른다. 나 대신 주의 풍성하신 손길이 저의 주머니에 채우실 석류이다. 때론 슬픔의 노래로 “내 고초와 재난 곧 쑥과 담즙을 기억하소서.” 하는 호소이나 “내 마음이 그것을 기억하고 내가 낙심이 되오나…” 이 땅을 살면서 사는 동안 어찌 아니 낙심이 없을 수야 있겠나만 “이것을 내가 내 마음에 담아 두었더니” 하는 데서 한참을 머문다. 생각이 머무는 순간 숱한 누가 또 누가 떠오른다. 저마다의 사연도 기억에 난다. 내 코가 석 자라, 나의 고초와 재난도 쑥과 담즙처럼 견디기 어렵게 쓰다. 그렇게 오래 입에 머금고 있었더니, “그것이 오히려 나의 소망이 되었사옴은” 나는 종종 나의 사소함에서 주의 인자하심과 풍성하신 배려를 느낀다.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이를 어찌 누구에게 알려 함께 같은 고백으로 주 앞에 마주하고 설까? 결국 세상이 아무리 어떠하다 해도,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여전히 오늘에도 ‘아론’은 살아서 그 직분을 감당한다. 아이는 새로운 업무에 적응하느라 요 며칠 스트레스를 받는 모양이다. 재고가 없어 며칠 일찍 퇴근을 하더니, 그럴 때면 녀석은 ‘다나까’를 쓰며 구어체가 아닌 문어체로 경어를 쓴다. 무슨 일 있니? 하고 물어도 아이는 바짝 얼은 표정으로 긴장을 하고 앉아 있었다. 딱 그때 모자와 장갑을 내밀며, 선물이야! 하고 줄 수 있었던 기쁨.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시도다
(시 19:8).
이를 일일이 말로다 설명하기란 너무 헐렁하고 사소하여 별 얘기도 아닌 것일 테지만, 우리는 그 사소한 일상으로 주의 살아계심을 소리를 낸다. 별 것도 아닌 것으로 주께 감사하고, 마음을 쓰고 거기에 두고 있는 마음으로 주의 이름을 부른다. 흔히 ‘아픈 아이’ 또는 ‘아픈 사람들’이 모여 일하는 곳이겠지만, 비록 형편이 안 되고 가난한 사람들이지만 저들은 ‘아름다운 가게’에서 방울 소리를 낸다. 주의 살아계심은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 11:24).” 하실 때에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으니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시니 그 때에 내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였더니(사 6:8).” 그리하여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9).” 여기에서 울리는 방울 소리와 방울과 방울 사이의 석류의 풍요로움으로 하는 것이다. 다만 내가 할 수 있는, 그러나 내가 해야 하는 주의 맡기신 일을 두고 묵상한다.
내 눈이 이 땅의 충성된 자를 살펴
나와 함께 살게 하리니
완전한 길에 행하는 자가
나를 따르리로다
(시 101: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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